백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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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장, 제4·10대 국무총리.
'''김종필과 더불어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국무총리(첫 취임 당시 만 44세)''' 중 한 명이다. 또한 5선 의원에 국회의장을 두 차례나 지냈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일제와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오가며 영혼 없는 관료로서만 연명하였다. 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예가 그의 의원 당선 이력이다. 5선 의원의 경력 가운데, 초선에서 재보궐로 당선되어 고작 20일 재임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당 전국구와 유신정우회로 사실상 무투표 당선되었다.
2. 일생
2.1.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1908년 황해도(현 북한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등학교, 일본 도쿄상과대학(히토쓰바시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의 직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논란이 있다.
2.2. 미군정
1945년 광복과 함께 조선은행 이사가 되었다.
2.3.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권 때인 1952년 국무총리로 등용되어 1954년까지 재직하였다.
국무총리에서 해임된 뒤 자유당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야인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4.19 혁명 후에 실시된 1961년 4월 24일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최하영의 반민주행위자 지정에 따른 국회의원직 상실)에 경기도 이천군(현 이천시)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대한민국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정치활동금지법에 묶여 또다시 야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1967년 박정희 정권의 민주공화당 총재상담역으로 기용되었다. 곧이어 그해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됨으로써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70년 12월 국무총리로 발탁되어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재임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소속의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고,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는 1979년 3월과 달리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때 별 잡음이 없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함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유신정우회 의장 겸 정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당선되고 국회의장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민당에서 강경 노선을 걷던 김영삼이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의 꼭두각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국회의장이 되는 건 막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계보에 있던 국회의원들을 이끌고 국회의장 선출을 보이콧하였다. 이것이 '''백두진 파동'''. 결국 백두진은 일단 당선은 되었으나, 반쪽짜리 국회의장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은 뒤, 그해 12월 국회의장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1987년 신민주공화당이 창당에 참여하여 상임고문을 맡았다.
1993년 9월 5일 오전 10시 10분에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