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역사

 






1. 벨기에를 지칭했던 명칭
2. 벨기에 지역의 시작
3. 합스부르크 네덜란드~프랑스 지배기
4. 벨기에 혁명~벨기에 왕국의 성립
5. 현대 벨기에의 성립


1. 벨기에를 지칭했던 명칭


네덜란드 지역 중 벨기에가 있던 지역을 부르던 명칭은 남네덜란드(프랑스어: Pays-Bas méridionaux, Pays-Bas du Sud, 네덜란드어: Zuidelijke Nederlanden), 가톨릭 네덜란드(Pays-Bas catholiques), 벨기에 네덜란드(Pays-Bas belgiques)라고 불렀고 라틴어로는 Belgium Regium 혹은 Belgica Regia라고 불렀다.[1]

2. 벨기에 지역의 시작


기원전 58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저지대 지역에 거주하던 켈트족의 일파인 벨가이족을 정벌했다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 벨가이족이 가장 용맹하다고 기록했지만 벨가이족을 정벌하는 데 유난히 애를 먹은 걸 변명하려고 적은 걸 수도 있다(...) 이때 카이사르와 맞서 싸웠다고 기록된 벨가이 족장 암비오릭스는 나중에 벨기에가 성립되자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브뤼셀에 그의 이름을 따온 동상과 호텔이 세워졌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중세 시대에는 여러 게르만족 부족 국가들이 난립하다가 최종적으로 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고 나서 저지대 지역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인 브라반트 공국(브뤼셀 백국), 림부르크 공국, 룩셈부르크 공국, 플란데런 백국 등의 여러 국가들이 등장하였으며 저지대 지역은 교통의 요지로 사람이 많이 드나들어 상업 발달에 적합한 위치였기 때문에 저지대 지역은 서유럽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부유한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과거부터 유럽에서 부유한 지역들 중 하나[2]여서 많은 국가들이 노렸기 때문에 다른 국가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냈다.

3. 합스부르크 네덜란드~프랑스 지배기


15세기 초 이 지역에 위치했던 플란데런 백국, 브라반트 공국, 에노 백국 등을 부르고뉴 공작[3]이 하나하나 반강제로 상속받으면서 북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네덜란드 지역이 부르고뉴국의 통치하로 들어갔다. 1477년 부르고뉴 공작이던 용담공 사를이 남자 계승자를 남기지 못하고 전사하자 부르고뉴와 저지대의 병합을 노리던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부르고뉴를 침공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샤를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 여공작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면서 저지대부르고뉴와 함께 합스부르크 네덜란드가 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마리와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미남왕 필리프는 유화적인 통치를 하여 대체로 주민들에게 지지를 얻었다.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막시밀리안 1세와 필리프를 거쳐 카를 5세가 물려받게 되었다. 이후 카를 5세는 네덜란드 북부까지 완전히 차지하여 베네룩스 저지대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고, 저지대 지역을 17개 주로 개편한다. 카를 5세는 플란데런헨트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저지대를 고향으로 여겼고 어느정도 애착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전쟁을 수행했던 카를 5세에 의해 점차 과중한 과세에 시달리게 되자 결국 플랑드르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카를 5세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게다가 네덜란드에 칼뱅파 개신교가 확산되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만년에 네덜란드의 개신교도들을 크게 탄압했다.
1556년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와 함께 저지대 17개 주를 물려주게 된다. 카를 5세 시절에는 그래도 스페인과 동등한 합스부르크 세습령 중 하나의 대우를 받았으나[4]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골수 가톨릭 신자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을 본국으로 여기고 네덜란드에는 총독을 파견하여 식민지처럼 강압적인 통치를 했다. 특히 저지대의 칼뱅파 개신교도들을 억압하려 들면서 합스부르크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사실 펠리페 2세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아버지 카를 5세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그렇게 인식했듯, 저지대 사람들은 카를 5세가 밉든 곱든 간에 어쨌든 그래도 고향 출신의 군주로 여겼지만, 펠리페 2세는 완전한 스페인 사람인 외국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반감이 훨씬 심했다. 사실 카를 5세에 대한 감정도 그의 만년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반감으로 변해 버렸다.
결국 1568년 스페인의 폭정에 대항해 네덜란드어권의 북부 7개 주[5]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80년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남부 10개 주는 반란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6] 그러나 1579년 같은 네덜란드어권의 플란데런[7], 안트베르펀, 브라반트의 3개 주가 추가로 반란에 동참해 기존에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어권의 7개 주와 함께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어권의 나머지 7개 주가 스페인에 협력하는 아라스 동맹을 결성하면서 또다시 분열되었다. 반란에 추가로 동참한 3개 주는 저지대 17개 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는데 플란데런안트베르펜은 부유한 저지대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으므로 경제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으며[8], 브라반트는 당시 스페인령 저지대 지역의 의 행정 중심지가 브라반트의 중심 도시 브뤼셀에 위치했던 탓에 정치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스페인에 잔류한 프랑스어권 7개 주와 인접해 있어서 공략이 가장 쉬웠기 때문에 이 3개 주는 스페인 진압군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다.
스페인군 사령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활약으로 1585년 안트베르펀이 함락당하면서 결국 3개 주는 다시 굴복하였다. 이것으로 가톨릭의 남부 10개 주(벨기에)와 개신교의 북부 7개 주(네덜란드)가 결정적으로 나뉘게 되었다. 3개 주의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받았으나 대부분 개종을 거부하고 북부 네덜란드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3개주는 가톨릭 다수 지역이 되었으나 원래 거주하고 있던 칼뱅파 개신교도들이 대거 북부로 빠져나가면서 산업의 중심지가 북부 네덜란드로 이동하였으며 벨기에 지역은 인구가 급감하고 산업이 쇠퇴하고 말았다. 과거에는 벨기에 지역이 네덜란드 지역에 비해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지만 전쟁을 끝낸 1609년에는 벨기에 지역의 인구는 1,600,000명이고 네덜란드 지역의 인구는 1,500,000명으로 거의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북부 7개 주가 네덜란드로 독립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지만 남부 10개 주는 계속해서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14년에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의 네덜란드를 오스트리아에 본거지를 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 가져갔는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령이 되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불리게 되었다. 벨기에 지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에 저항했다.
1789년 프랑스 왕국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에 호응하여 1790년에 벨기에 합중국을 세우게 된다. 비록 벨기에 합중국은 1년을 채 못 가고 다시 진압당하지만 벨기에라는 이름을 가진 첫 독립 국가로 벨기에의 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나중에는 프랑스 혁명군에게 공격을 받아 프랑스의 영토가 되기도 했다.

4. 벨기에 혁명~벨기에 왕국의 성립


이후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열린 빈 회의에서 벨기에를 네덜란드에 편입시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200년 이상 따로 살았기 때문에 가톨릭이 다수였던 벨기에 지역은 개신교를 신봉하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1830년 7월 혁명 이후 벨기에 지역은 네덜란드를 상대로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1815년에 연합 왕국이 형성될 시기에는 벨기에의 인구는 많이 증가해서 3,400,000명이었지만 네덜란드의 인구는 2,400,000명이었기 때문에 벨기에가 네덜란드보다 인구는 많았지만 주도 세력은 벨기에보다 네덜란드였던 것도 문제였다. 결국 벨기에는 네덜란드와는 영구적으로 분리되었고 1831년 런던 회의에서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의 강대국들로부터 독립과 중립화를 확약받았다.[9] 벨기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드를 레오폴드 1세로 국왕에 추대한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부유한 동네들 중 하나[10]였던 탓에 강대국 사이에 이리저리 넘겨지며 지내던 안습한 생활이 많았으나 분리된 이후 식민지 개척을 해서 1885년부터는 자국보다 80배나 더 큰 콩고를 식민지로 가졌던 식민 국가가 되었다. 비록 벨기에 본토가 워낙 좁아서 80배라 해봤자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식민제국에 비하면 크지는 않았지만, 개인의 영토로 치면 엄청난 영토였는데, 이는 콩고 땅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였기 때문이다.
콩고 땅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였기 때문에 개인의 영토로는 엄청났다. 레오폴드 2세는 식민지를 갖기 위한 군사력을 가질 수 없었지만, 당시 열강 간의 긴장관계의 틈을 노리는 동시에 리빙스턴, 스탠리의 탐험을 지원하는 책략을 통해 콩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콩고(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 지역의 수백명의 부족장들로부터 일일이 서명(?)등을 받아 '콩고 자유국'이라는 이름 하에 벨기에 식민지를 만든 것.
하지만 가혹한 레오폴드 2세 식의 식민지 경영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거나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고무다이아몬드, 야자유를 생산하기 위해 원주민을 혹사했는데, 할당량을 못 채운 이는 한쪽 팔이 잘려나가고 한 번 더 못 채우면 바로 사형. 그리고 남은 할당량을 다른 사람에게 이양...이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상아 채취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래서 현지의 관리들은 열심히 일하는 증거로 잘린 팔이 가득한 바구니를 내세우고는 했다. 이 때문에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 전체의 주민들이 살해당하기도 했으며, 할당량을 위해 주민들끼리 돌을 들고 서로 싸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가혹한 통치로 인해 사망한 콩고인들은 정확히 알기 힘들지만 많으면 수십만 명은 넘어섰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이렇게 바득바득 모은 당시 왕의 개인 재산은 10억달러 가량. 그 자신은 한 번도 콩고에 방문한 적이 없었고, 그 재산 덕에 브뤼셀 등의 주요 도시에 수많은 공공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니 당연히 초반에는 벨기에 내에서 좋았다. 그래도 나중에는 그가 물려준 안좋은 습관들 때문에 좋게 보지는 않는 사람도 많아졌다.
약혐주의
이러한 가혹한 통치는 제국주의가 하나의 대세였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비난을 받을 정도였으며[12] 결국 벨기에 의회가 콩고 식민지를 레오폴드 2세에게서 빼앗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국토 대부분이 점령당하고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다. 벨기에 학살은 독일군에 의해 자행된 1차대전 최대의 학살 중 하나다. 한편 레오폴드 2세 사후 즉위한 조카 알베르 1세는 박학다식하고 결단력 있는 애국자였던지라 실추된 이미지를 꽤 회복했다[13]. 1913년 전쟁 직전 벨기에의 인구는 7,700,000명으로 훨씬 많은 인구를 상대해야 했지만 열심히 싸웠던 벨기에였고, 도리어 그 때문에 민간인 학살에 최전방으로 노출되었다.
전간기에는 전쟁 교훈을 살려 에반-에마엘 요새를 건설하는 등 대비를 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또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전 국토가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레오폴드 3세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다시 이미지는 급 추락[14]. 1949년 벨기에의 인구는 8,600,000명으로 그래도 어느 정도는 유지했다. 결국 나치 패망 이후 국민투표에서 57%의 밋밋한 찬성을 얻어 왕가가 돌아오긴 했지만 레오폴드 3세는 나치를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지고 퇴위했다.

5. 현대 벨기에의 성립


2차 세계대전 후 전쟁에 더이상 휘말리는 일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영구중립을 포기하면서 나토에 가입하고 적극적으로 국제기구를 유치한다. 경제적으로는 마셜플랜에 힘입어 2차 세계대전 이후로부터 석유파동 이전까지 성장세를 유지했고, 이후로도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제약 등의 첨단산업과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에 성공해 고소득 국가라는 지위를 유지했다.
[1] 북부 지역은 라틴어로 Belgica Foederata 혹은 Belgium Foederatum이라고 불렀다.[2] 영국에서 양털을 들여와서 플란데런(플랑드르)에서 레이스, 천으로 가공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유럽 최대의 의류산업복합단지가 있는 셈이다.[3] 이 무렵에 잔 다르크를 붙잡아 팔아넘긴 걸로 알려진 귀족이 바로 이 부르고뉴 공국을 따르는 룩셈부르크 백작이다. 사실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실의 혈통이 있긴 하지만 영토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 등으로 프랑스 왕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거의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름만 부르고뉴였지 공작은 부르고뉴 등 프랑스내 영토보다는 플란데런 등 저지대 지방에 머무는 걸 좋아했다. 프랑스계 귀족이긴 하지만 잔 다르크를 붙잡아 팔아넘겼다고 그리 놀랄 일이 아닌 셈.[4] 일단 카를 5세 본인이 저지대를 고향으로 여겨 종종 네덜란드에서 거주하기도 했으며, 마리 브르고뉴의 딸이자 카를 5세의 고모인 Margaretha van Oostenrijk가 카를 5세를 대리해서 네덜란드를 통치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대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5]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겔러, 프리슬란트, 오버레이설, 흐로닝언.[6] 여기에 대해서는 저지대 북부가 개신교 다수 지역이여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네덜란드의 개신교화는 독립 이후의 '결과'이지 독립의 '원인'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네덜란드는 가톨릭 다수 지역이었으며 저지대에서 개신교 다수 지역은 지금의 벨기에 북부인 플란데런 지방이었다. 이 부분은 네덜란드/역사 참조.[7] 지금의 플란데런 지방의 오스트플란데런/베스트플란데런 주. 지금은 역사적 지역으로서의 플란데런을 포함한 네덜란드어권 5개 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바뀌었다.[8] 16세기 당시 안트베르펀의 주도 안트베르펜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수입은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식민지에서 올라오는 수입과 동일한 수치였다. 안트베르펀이란 도시 딱 하나만 해도 이 수치인데 플란데런과 안트베르펀 주 전체는 말할 필요도 없다.[9] 이를 본 조선 말의 지식인들이 내놓았던 주장이 '한반도 중립화론'이다.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유길준은 벨기에를 언급했다. ''우리의 지리적 위치는 벨기에와 같고, 중국에 조공하던 것은 터키에 조공하던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의 중립은 유럽 열강들이 러시아를 막기 위함이고, 벨기에의 중립은 유럽 열강들이 자국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이 아시아의 중립국이 된다면 러시아를 방어할 수도,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보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10] 영국에서 양털을 수입하면 플란데런에서 레이스, 천으로 가공했다.[11] 수백만이라는 말도 있으나 당시 콩고의 전체 인구도 수백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다.[12] 레오폴드 2세를 싫어하던 독일 제국빌헬름 2세는 신나서 열심히 비난했다. 하지만 빌헬름 2세 본인도 식민지였던 나미비아탄자니아에서 독일군에게 식민지 흑인 학살, 무력 토벌을 지시한 사람으로 역시나 남 욕할 처지가 못 되는 제국주의의 화신.[13] 1차대전 당시 국가의 황폐화를 각오하고 독일군에 맞서 싸워 진격 속도를 지연시키고 국토의 일부를 끝까지 사수한 점 덕분에 벨기에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큰 존경을 받는다. 정작 최후는 등산하다 추락사... [14] 전황이 워낙 불리했으므로 항복을 충분히 고려할만한 상황이었으나, 연합국과 제대로 된 협의나 통보가 없었고, 심지어 자국 정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총사령관 자격으로 항복 선언을 했다는데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