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구/역사
1. 개요
인천광역시 산하 자치구 중 역사 문서가 최초로 생성되었으며, 특별시/광역시 통틀어서 자치구 역사 문서로서는 두 번째다.
이 문서는 현재의 부평구 지역을 위주로 작성되어있지만, 과거 부평 지역이었던 계양구 및 부천시 전 지역, 서구 일부, 서울특별시 강서구 일부, 구로구 일부까지 아울러서 서술한다. 엄밀히 부평도호부를 계승한 지방자치단체는 현존하지 않는다. 과거 부천군은 부평군을 폐지한 후 인천부의 개항장 외 잔여지역과 통합하여 신설한 행정구역이고, 부평구라는 명칭도 1995년에 붙여진 것으로 부평도호부를 온전히 계승한 행정구역은 소멸된 셈이다. 다만, '부평'이란 명칭을 계승하고 북구 자체도 옛 부평 지역을 아우르는 데다 북구의 법적 후신은 부평구이며 경인선 개통 이후 줄곧 부평 지역의 중심지로 존재했기 때문에, 현재의 부평구가 가장 '부평'의 정통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부평의 중심지가 지금의 '''계양구''' 계산동 일대였긴 하지만...
2. 원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위서 동이전 기록에 후삼한의 78개 소국이 등재된 내용 중 마한 지배하에 우휴모탁국이라는 소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병도는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으로 추정한다.
부평지역은 고구려 시기 장수왕의 한강 유역 점령으로, '''주부토'''군(主夫土郡)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 때 '''장제'''군(長堤郡)'으로 불렸다. 주부토와 장제는 고대어인 '줄보뚝'을 한자로 각각 음차 및 훈차한 것으로, '줄보뚝'은 과거 한강이 범람하여 김포·부평평야 일대가 자주 침수되자 이를 막기 위해 긴 둑을 쌓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에 불렸던 지명인 '주부토'와 '장제'는 부평구 일대를 관통하는 길의 이름으로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다.
3. 고려
태조 23년(940년) 고려는 지방제도를 고쳐 경주를 대도독부로 하고 전국의 지명을 주, 부, 군, 현으로 변경함에 따라 장제군을 '''수주'''(樹州. 지금의 인천 계양구, 부평구, 경기 부천시 일대)로 승격시켰다.
수주라는 이름은 개국공신 이희목이 수소나무 우거진 수소마을(선주지동)의 호족이므로 수주로 했고 이곳에 수주읍(행정구역 읍을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시기에는 황어향(지금의 인천 계양구와 서구(검단제외)의 각 북부), 부원향(지금의 경기 고양시 덕양구 및 서울 마포구 각 일부), 석천향(지금의 경기 파주시 교하 지역), 김포현(경기 김포시 시내), 동성현(경기 김포시 하성면), 분진현(경기 김포시 통진읍, 월곶면), 수안현(경기 김포시 대곶면), '''소성현'''(지금의 인천광역시 원인천 지역 및 경기 시흥시 북부. 지금의 인천광역시의 뿌리가 되는 그 원인천(미추홀) 맞다. 그만큼 부평은 역사적으로도 인천보다 '''큰''' 고을이었다.), 공암현(지금의 서울 강서구, 양천구 일대), 금주현 (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경기 광명시 일대. 여기에는 조선시대 한성부로 넘어간 여의도도 포함된다.), 안산군(경기 안산시, 시흥시 남부 일대) 등 아주 넓은 지역을 속현으로 두어 관할한다. 그 중 황어향과 함께 아예 수주에 병합되었던 공암현은 나중에 양천현으로 분리된다. 한강 이북의 지역이 포함된 이유는 당시 육운이 잘 발달하지 않아 한강이 교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의종 때 1150년, '''안남'''(安南)도호부', 이때에 온수골(지금의 계양구 계산동)로 청사를 이전한다. 안남도호부가 전주에서 옮겨와 수도인 개경 방비의 요충지로서 위상이 더 높아졌다. 당시 부평지역을 관할하던 안남도호부는 주현으로서, 6개의 속현을 거느렸는데, 그 속현 중에 금주현(조선 시대 금천/시흥현: 현 서울 영등포 권역 + 경기 광명시 일대), 공암현(조선 시대 양천현: 현 서울 양천구, 강서구 일대) 등이 있었다. 고려 고종 때(1215년) '계양도호부(桂陽道護府)'로 불렸으며 충렬왕 34년(1308년) 때 '''길주'''(吉州)목'이 되었다. 충렬왕은 평소 수렵을 좋아해서 길주에 국영으로 매 사육장을 설치했다고 한다. 죽을 때는 길주에 장사지내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고 하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충선왕 때(1310년) 부평부가 되었다. '''부평이라는 이름은 현재 상위 행정구역명인 인천보다도 오래되었다.'''
고종 6년(1219) 이규보가 좌사간 지제고의 높은 벼슬에서 계양부사로 좌천되어 부임하였다. 재임 1년 2개월에 가는 곳 마다 수많은 즉흥시를 읊어 이것이 훗날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그 시문의 내용으로 그 당시 고장의 실상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부평이란 이름이 황금벌판 곡창지대라서 생겼다고 하나 이는 잘못 생각한 것으로 부평이 비옥하게 된 것은 1925년 부평수리조합이 생겨 관배수와 수해방비를 한 이후부터의 일이고 그 이전까지는 굴포천은 한강의 지류로 조수물이 역류하여 드나들어 수해상습지로, 갈대 우거진 풀이 무성한 쓸모없는 벌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까지도 그랬던 것을 바탕으로 이를 추리해본다면 부평이란 부(富)의 뜻은 부자 부 외에 후(厚)와 같으며 대(大)와 뜻을 같이하고 평은(平)은 평야란 뜻이므로 큰 벌판(大野)을 의미하여 지은 땅이름일 것으로 본다.
'주부토', '장제', '안남', '길주' 등의 명칭은 현재 부평구, 계양구 및 부천시 등의 도로명 및 학교명 등으로 남아 있다.
현 계양구 선주지동 → 오류동 → 계산동 → 부평구 부평동 순으로 중심지가 이동했다. 지금은 '''거의 농촌'''인 선주지동, 오류동은 과거엔 '''아주 큰 읍락'''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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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부 지도
1314년(충숙왕 원년)에 양광도에 편제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경기우도에 편제되었다.
4. 조선
본래 '부평부'였으나 조선 들어서 태종 때 '부평도호부'로 불렸다. 조선 건국 당시에 수도 후보지 중 하나였으나 수도로 지정되지는 못했다. 부평에 있는 '원통이고개'의 이름 유래도 이와 관련 있다는 설이 전해진다.
세종 때 온천발견(지금의 서울 구로구 온수동 일대)을 보고 하지 않았다며 다시 부평현으로 2단계 강등시켰다가 8년 후 다시 '부평도호부'로 복구된다. 자세한 내용은 온수역 항목 참조. 그 뒤 부평 지역은 조선조 때 격하와 승격의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당시 부평도호부는 현 부평초등학교 자리(계양구 계산동)의 부평도호부 청사(현재는 도호부 청사의 일부만 남아있음)를 중심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인천도호부 지역이었던 십정동 제외), '''계양구, 서구'''(1995년에 인천으로 편입된 검단 일대 제외), '''부천시 전역'''(인천도호부 지역이었던 계수동, 옥길동 제외), '''서울 구로구 안양천 서쪽 지역'''이라는 넓은 지역을 아울렀다. 조선 시대 당시 진관체계(일종의 군사편제 체제)는 부평을 중심으로 인천(!), 김포, 통진, 시흥(금천), 안산 등을 예하로 두었다. 다시 말해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행정구역 서열상 부평이 인천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얘기다. '''즉, 경기 서부권의 전통적인 웅부(雄府, 오늘날의 '대도시'와 비슷한 의미다.)가 부평이었던 셈.''' 하지만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부평도호부가 부평군으로 강등되었고 인천도호부도 동시에 인천군으로 강등되었지만 관찰부(도청)가 설치되어 원래의 인천도호부 지역인 인천군(지금의 원인천, 시흥시 북부)을 비롯하여 부평군, 시흥군(지금의 서울 영등포, 경기 광명시), 김포군, 통진군, 양천군(지금의 서울 강서구, 양천구), 과천군, 안산군(지금의 안산시, 시흥시 남부) 등을 거느리는 거대한 행정구역인 '''인천부'''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1년 후인 1896년 재개편때에는 부평군으로 남은 부평과 대조적으로 인천군이 아닌 인천부로 환원되었음과 동시에 계속 부평군으로 남게 되어 개항 이후로는 인천과 부평 간의 서열 관계가 뒤집혔다. 개항 이후 인천은 읍치(邑治, 관아 소재지)를 관교동에서 제물포로 옮긴 후로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하게 되어 역으로 1940년 인천부 확장으로 부평을 잡아먹게 된다. 사실 부평만 억울할 일은 아니다. 같은 시기에 수원유수부도 수원군으로 강등당하고 인천부 산하에 편입되어버렸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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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무학대사가 한양 이전에 도읍으로 삼으려 했던 곳이기도 하며, 조선 왕조 시기 부평을 방문한 왕은 정조 뿐이다.
부평도호부의 진산(鎭山)은 계양산이었다.
4.1. 구한말 당시 부평군 산하 행정구역
이상 두 면이 1914년 통합되어 부천군 서곶면이 되었다.
- 당산면 : 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귤현동, 상야동, 하야동, 평동, 동양동
- 동면 : 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병방동, 임학동, 박촌동, 방축동, 용종동
- 황어면 : 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오류동, 목상동, 다남동, 둑실동, 노오지동, 이화동, 선주지동, 갈현동
이상 세 면이 1914년 통합되어 부천군 계양면이 되었다. 계양면의 북부 지역은 수주에 병합되기 이전의 황어현 영역에 해당한다.
- 군내면 : 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작전동 일부
- 동소정면 : 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개동, 일신동, 구산동, 부평동
- 마장면 : 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 청천동, 계양구 효성동
- 서면 : 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갈산동, 삼산동, 계양구 작전동 일부, 서운동
이상 네 면이 1914년 통합되어 부천군 부내면이 되었다.
- 상오정면 : 지금의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 오정동, 약대동, 삼정동, 내동
- 하오정면 : 지금의 경기도 부천시 작동, 여월동, 원종동, 고강동
- 주화곶면 : 지금의 경기도 부천시 대장동, 서울특별시 강서구 오곡동, 오쇠동
이상 세 면이 1914년 통합되어 부천군 오정면이 되었다.
- 석천면 : 지금의 경기도 부천시 상동, 중동, 심곡동, 송내동
- 옥산면 : 지금의 경기도 부천시 소사동, 역곡동, 원미동, 춘의동, 범박동, 괴안동,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 수탄면 : 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동, 궁동, 고척동, 온수동, 천왕동, 오류동
이상 세 면이 1914년 통합되어 부천군 계남면이 되었다.
4.2. 만일 부평이 조선의 새 수도로 낙점되었다면?
부평은 한양(서울 종로), 무악(지금의 서울 신촌 일대로 행정구역 상으로는 한양(남경)에 속하긴 했다.), 계룡(계룡대 자리)과 함께 조선의 새 수도 후보지 중 하나였다.
수도로 지정된 부평은 한양(현재 서울 강북)에 비해 풍수나 치수에 문제가 있었겠지만, 근대화 이후에는 드넓은 평지를 바탕으로 보다 체계적인 도시계획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수도 부평시의 행정구역도 인천(지금의 인천 중구, 동구, 미추홀구, 남동구, 연수구, 경기 시흥시 북부), 양천(지금의 서울 강서구, 양천구), 시흥(지금의 서울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관악구, 동작구 일부, 경기 광명시, 안양시 만안구 일부) 지역을 병합하는 형태로 대폭 확장하는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기권의 광역자치단체는 지금의 인천(자치구 지역), 부평, 부천, 시흥 일부, 광명, 서울 강서, 영등포 지역(즉, 가장 넓은 의미의 경기 서부권)을 차지한 수도 '''서울특별시'''(부평부 → 경성부 → 서울특별자유시 → 서울특별시의 과정을 거쳐 '부평'이라는 명칭은 지금의 '한양'처럼 서울의 옛 이름으로 남았을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또는 '''부평특별시''')와 한양시(지금의 서울 강북)[6] 을 중심으로 한 '''경기북도''', 수원시를 중심으로 한 '''경기남도'''로 짜여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양시는 아마도 성저십리 일대에서 더 확장되긴 어려웠을 것이고, 중랑천 동쪽 지역은 아마 서울보다는 양주(도봉구&노원구&중랑구&광진구)와 한 동네일 것이다. 또한 지금의 서울 강남은 그저 경기남도 소재 베드타운에 불과할 것이다. 아마 서초구는 동작구 동북부, 과천시, 안양시 대부분, 군포시와 함께 경기남도 과천시가 될 것이고 강남구, 송파구는 경기남도 성남시(혹은 '언주시')와 한 동네일 것이며 강동구는 하남시와 한 동네일 것이다. 아무튼, 이런 가정 역사 하에 경기권의 광역행정구역 문제가 지금에 비해 깔끔하게 정리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오리알이 돼버릴 원인천 지역은 독자적인 도시로 존속하기 보다는 행정의 편의성 확충 + 생활권 + 수도의 자족기능 확대 등의 이유로 이미 오래 전에 부평에 흡수됐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에 따라 수도가 바로 바닷가에 접했다는 점을 살려서 산업 구조 역시 해양 산업 중심으로 형성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도 해양 산업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다만 현실 역사에서 인천이 인천직할시로 떨어져나갔듯이 가상의 역사에서 한양이나 수원 중에 한양직할시 혹은 수원직할시라는 식으로 둘 중 하나가 떨어져나갔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5. 일제강점기
1914년 이후 인천광역시의 행정구역은 현재의 중구, 동구만이 인천이었고[7] 나머지 지역은 경기도 강화군, 황해도 해주군(연평도), 황해도 장연군(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경기도 부천군으로 편성돼있다가, 1930년대 부평에 일제의 조병창인 미쓰비시 공장이 들어서면서 부평이 '''1940년 인천에 편입된다.'''
부군면 통폐합 때의 초안은 부평과 양천, 인천과 안산의 통합으로 되어있었다. 아마도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현재의 김포국제공항은 명칭이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부평이 훨씬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양천이 부평에 흡수되는 식이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양천이 부평의 일부였던 적이 있었기도 하고... 양천과 부평 사이는 사실상 평지와 동산들이 경계를 이루고 있어 현재까지도 동일한 행정구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처럼 서울특별시 산하가 되거나 혹은 경기도 부평시 양천구 등...
1914년부터 1940년까지의 역사는 부천시/역사, 그 이후는 인천광역시/역사 참조.
한때 일제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서구(검단 제외)/부평구/계양구, 경기도 부천시(계수동, 옥길동 제외),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구로구/금천구/관악구(남현동 제외)/영등포구(대림동)/동작구(신대방동), 경기도 광명시(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소하동 북부)에 상당하는 부평, 시흥, 양천 지역을 통째로 경성부로 편입할 계획도 있었다. 이는 1963년 서울 대확장 직후에 서울시가 추가 확장을 염두에 두고 일부 경기도 지역(광명시 북부, 고양시 덕양구 일부, 과천시)을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시킨 것과 비슷한 맥락. 하지만, 이 계획은 1940년 경성부 편입 대신 인천부 2차 확장이 단행됨에 따라 사실상 백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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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천 편입 이후 역사
미쓰비시 공장 입주 및 1940년 인천 편입 이후 부평의 경제력은 상승했으며 징용을 피하고자 많은 사람이 부평의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8] 하지만 해방 후 일제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부평은 망했어요 상태로 빠진다. 노동자들과 일부 자본가들이 부평의 공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나 미군정의 소극적인 대처는 이를 실패로 돌아가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 한국전쟁마저 터지자 부평구의 산업은 최악의 상태가 돼버린다.
서울 수복 이후에는 서울 강북이 군사적으로 전방에 있는 문제 때문에 기존의 사대문안 지역을 역사적 상징으로 남겨두고 아예 수도 서울을 부평, 부천, 시흥, 영등포 일대로 이전하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이 경제적으로 빈곤국이었던 한계 때문에 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게 만일 감행되었더라면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때 무산된 부평의 서울 편입이라는 꿈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블로그글과 서울특별시/역사의 해당 문단을 참조할 것.
전후 미군기지의 도움으로 인구도 늘어나고 서비스업도 늘어나긴 했지만, 인천시 내에서 가장 못 사는 동네라는 타이틀은 여전했다.
이를 역전해 준 것이 바로 1970년대 부평산업단지 조성, 이는 부평의 공업을 급속도로 발전시켜준다. 이후 자동차 산업이 들어서게 되면서 부평의 경제는 더 큰 폭으로 발달한다.[9] 이후 공업의 발전으로 인해 상업 역시 발전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크고 아름다운 부평역 지하상가....
공장 하나 때문에 군 단위 하나가 없어지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공장은 지금의 부평역 뒤쪽 일대와 부평공원, 대우자동차 공장용지 전부가 들어가고, 현 부평구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공장 하나가 행정구역 하나만 한 크기가 되니 그냥 합쳐버린 것.
지금의 부평2동 일대를 삼릉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수도 있는데, 미쓰비시를 한자로 쓰면 三菱이고, 이를 한글로 독음하면 삼릉이다. 미쓰비시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집중 거주하던 곳이라 삼릉이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이 공장 용지의 일부분을 미군과 한국군이 보급기지로 사용하다, 2007년 마지막 남은 군부대가 이전하면서 부평공원으로 환원되었다. 참고로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의 동수역이 하마터면 삼릉역으로 불릴 뻔한 흑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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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부평출장소와 서곶출장소를 통합하여 북구가 되었다. 1988년 1월 구의 서부지역을 서구로 분구시킨 뒤, 1989년 김포군 계양면(현재의 계양구 계양1·2·3동 지역. 1973년 이전에는 부천군 계양면이었다가,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김포군으로 넘어왔다.[10] )을 편입해왔다.
부평의 이름을 되살리는 차원에서 1995년 3월 '''북구에서 부평구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와 동시에 경인고속도로를 경계로 북부 지역을 계양구로 분구시킨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담으로, 이후 공교롭게도 남구 역시 2018년 7월에 미추홀구로 변경하였다.
외환위기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우자동차가 부도나자 그 인근 상권이 마비되다시피한 적이 있었다. 여전히 한국GM은 인천광역시 세수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7. 관련 문서
[1] 십정동은 인천도호부 관할이었고 행정구역 이동이 잦아 예외.[2] 지금의 서구(검단 제외), 부평구, 계양구, 부천시 일대 및 서울 구로구 중 안양천 서쪽 영역에 해당.[3] 부천군 소사읍이 1973년에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처치 곤란해진 계양면을 인접한 김포군으로 이관하였다.[4] 바로 위의 내용에서 보듯 경인고속도로를 기준으로 하여 남쪽을 부평구로, 북쪽을 계양구로 분구하였다.[5] 북구를 부평구로 개칭하고 계양구를 분구시키는 절차가 동시에 처리되었다.[6] 경기도 or 경기북도 한양시가 경기 북부의 중심 도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에 지금의 의정부시, 남양주시, 동두천시는 양주에서 분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7] 조선시대에는 주안, 구월, 간석 등 부평이 아닌 현 인천 남부와 시흥 북부도 인천부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 소속이 되었다.[8] 당시 부평의 공장에서 일하면 징용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평사편찬위원회의 '부평사' 참조.[9] 대표적인 회사가 현재 들어와 있는 한국GM이다.[10] 같은 시기에 오정면도 김포군으로 넘어갔으나, 2년 후인 1975년에 부천시로 재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