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르-나이세 선

 

Oder-Neiße-Grenze (독일어)
Granica na Odrze i Nysie Łużyckiej (폴란드어)
Oder-Neisse Line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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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파란색이 오데르 강이며 연한 파란색이 나이세 강, 정확하게는 라우지처 나이세 강이다.[1] 이 두 강을 연결한 선을 따라 국경이 형성됐기 때문에 오데르-나이세 선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1. 개요
2. 형성
3. 결과
3.1. 기타 계획
4. 이후
5. 도시 분할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새로이 형성된 독일폴란드 사이의 국경선. 폴란드어로는 오드라(Odra)-니사 우지츠카(Nysa Łużycka) 선이라 불린다.
동프로이센슐레지엔, 포메른 등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독일 영토는 종전 후 폴란드와 소련에게 분할 할양되었다.

2. 형성


오데르-나이세 강 이동의 영토는 피아스트 왕조 이래 폴란드 왕국의 영토였다. 하지만 1138년 폴란드가 분열시대로 들어가면서 포모제, 실롱스크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잃어갔다. 12세기 말 포모제는 그리핀 가문의 지배 하 포메라니아 공국이 되면서 독일화되었고, 실롱스크 공국은 보헤미아의 속국이 되었다가 1335년 결국 합병되면서 이 지역들은 보헤미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거쳐 17~18세기 사이 모두 프로이센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1795년 마지막 폴란드 분할을 통해 이 지역의 영토를 추가로 확보했다.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뒤 런던에 수립된 폴란드 망명 정부에서는 종전 후 독일과의 국경선 재설정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다. 폴란드 망명 정부 측이 원했던 영토는 동프로이센단치히, 상부 실레시아, 라우엔부르크(Lauenburg in Pommern. 현 폴란드 렝보르크·Lębork)를 위시로 한 동포메른 일부 등이었다. 동프로이센과 단치히는 전쟁의 결정적 계기가 된 폴란드 회랑 문제를 일으킨 원인으로 영토 분쟁의 단초를 없애버리겠다는 의도이고, 상부 실레시아는 독일화되었던 하부 실레시아와 달리 폴란드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므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하며, 동포메른 일부는 해안선이 짧은 폴란드가 바다로 나갈 출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망명 정부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은 정말 눈물나게 미미한 것이었고, 실제로 이 국경선의 형성을 주도한 것은 이오시프 스탈린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런데 정작 스탈린은 폴란드 망명 정부가 동프로이센, 실레시아, 단치히 등을 합병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폴란드 침공을 통해 삥 뜯은 구 폴란드 동부 영토(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폴란드가 얻은 벨라루스 서부와 우크라이나 서부)를 돌려주기 싫었던 스탈린은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41년 10월 '동프로이센을 슬라브인들의 품에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덧붙여서 독일의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게 넘겨주면 당연히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충돌이 생길 것이니 이 충돌을 이용해서 외교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계산도 다분히 깔려 있었다. 같은 해 12월 처칠의 특사로 파견된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 역시 스탈린과의 만남에서 스탈린이 제안한 새로운 국경선에 얼추 동의하면서 서서히 오데르-나이세 선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후 한동안 전쟁이 격화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국경 문제는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승기를 잡은 1943년 무렵부터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은 폴란드의 국경을 오데르 강 근처까지 서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독일을 견제할 강한 폴란드를 원했던 처칠과 루즈벨트 역시 이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전쟁이 사실상 연합국의 승리로 굳어진 후 1945년 2월에 개최된 얄타 회담에서 연합군은 다시 한 번 폴란드의 국경선 문제를 놓고 논의를 전개한다. 이 시기는 서서히 냉전의 기미가 보이던 시기였고 소련이 동유럽에 세력을 뻗치고 폴란드가 공산화하여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가는 것이 명백해지자 공산 폴란드에 지나치게 영토를 줄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서방은 종전 후 유럽에서 최대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과 치열한 머리싸움을 벌인다.
이로 인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을 둘러싸고도 충돌이 빚어진다. 대표적인 충돌 사항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슈테틴을 누구의 영토로 할 것이냐, 다른 하나는 콧부스를 위시로 한 라우지츠 일대의 나이세 강 서안까지도 폴란드에게 넘겨줄 것이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슈테틴은 전통적으로 베를린의 외항이었기 때문에 이를 폴란드에게 넘기면 독일의 반발이 격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이세 강 서안 지역은 서슬라브 계통의 소르브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다. 당초 미국과 영국은 오데르-나이세 선이긴 한데 동쪽에 있는 글라처 나이세 강(Glatzer Neiße. 폴란드어로는 니사 크워즈카 강(Nysa Kłodzka))을 새 국경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소련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주도 브레슬라우를 비롯한 하 슐레지엔의 절반은 독일이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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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연합군은 오데르 - 보브르 강(Oder-Bober-Line)[2] 으로 하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스탈린은 거부했고, 최종적으로 오데르 - 나이세 선으로 결정된다.
오데르 - 나이세 라인 동부지방에 살던 독일인들이 싹 다 소련군을 피해 서쪽으로 피난갔다는 것은 소련의 프로파간다다. 종전 직후에도 최소한 수백만명의 독일인들이 여전히 이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결국 소련은 끝까지 남아있던 독일인들을 모두 추방했다.

3. 결과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고 결국 최종적인 합의는 1945년 8월의 포츠담 회담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포츠담 회담을 통해 양국의 국경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됐고, 연합국 사이의 합의에 따라 전후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이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으로 정해짐에 따라서 이 국경선 외부에 위치했던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동프로이센, 서프로이센, 포메른, 실레시아 영토가 고스란히 폴란드소련,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어갔다. 양 측의 인구를 이동시키는 움직임을 거쳐 오데르-나이세 선 동부에다가 오데르-나이세 선보다 더 서부에 위치한 슈테틴까지도 공식적으로 폴란드에게 할양되었다.[3] 폴란드 영토로 새로이 편입될 구 독일 영토에 거주하던 독일계 주민들은 이미 전쟁 말기에 피난을 떠난 사람을 합쳐 거의 8백만 명에 육박했다. 또한 독일 내에서도 나치에 의해 강제로 노예노동을 하러 끌려온 폴란드인들이 꽤나 많았다. 그 때까지 남아있던 독일계 주민들을 선 서쪽으로 이주시키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강제 집단 이주로 기록된다. 또한 구 폴란드 영토에서 추방된 폴란드인을 신 폴란드 영토로 이주시켜 채웠다.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프로이센 북쪽 영토들은 러시아에게 병합됐다.
더 나아가서 스탈린은 동프로이센 전체나 동프로이센 북부 3분의 2를 소련이 차지하는 안까지 고려했다가 폴란드에게 동프로이센 남부 3분의 2를 할양했다. 그렇지만 주도인 쾨니히스베르크나 부동항인 필라우 등 지정학적 요충지는 모두 소련이 차지했고, 폴란드는 오데르-나이세 선과 동프로이센 남부를 할양받음으로써 커즌 선 동쪽의 영토를 벌충하고 동프로이센 남부라는 곡창지대 확보로 만족해야 했다.
독일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사이의 국경선이 짧아지면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독일의 재침공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세 나라가 모두 유럽연합 회원국이 된 지금에야 별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동서독 통일 당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에는 이 이유가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3.1. 기타 계획


최종 확정된 국경은 원안보다는 영토 변화가 적었다고 한다.위키백과 콧부스 등지를 비롯해 현 독일 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서슬라브계 소수민족인 소르브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폴란드 영토에 포함시키자는 제안이 나온 적도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엘베 강을 독일-폴란드 간 국경으로 삼는 것까지도 고려했다고 한다. 실제로 엘베 강이 독일-폴란드 간 국경이 되었다면 독일의 영토는 동방식민운동 이전으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데르강 반대편에서는 네덜란드벨기에도 (프랑스가 자르를 합병하려 했던것처럼) 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서부 지역 등 상당수 영토를 합병하려 하였고, 특히 당시 네덜란드 국왕이었던 빌헬미나 여왕이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으나, 미국이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이는 난민 문제 때문이었다..https://en.m.wikipedia.org/wiki/Dutch_annexation_of_German_territory_after_the_Second_World_War 이를 제창자의 이름을 따서 Bakker-Schut Plan이라 부른다. 이 방안에 따르면 동프리슬란트 일대와 뮌스터, 오스나브뤼크, 올덴부르크, 아헨, 쾰른까지 모조리 네덜란드로 넘어가게 된다. 다만 이러한 합병은 무산되었으나 1949년에 네덜란드는 독일의 엘텐 마을을 무력 점령하였으며 14년 뒤인 1963년에야 반환하였다. 그리고 구글에 the Greater Netherland 등 대 네덜란드를 뜻하는 말을 검색하면 독일 서부가 합병된 형태의 네덜란드 지도를 볼 수도 있긴하다.
http://www.renfusa.com/2012/06/dismemberment-of-germany-part-1.html
또한 영토할양 이외에도 '''여러가지 독일분할 계획이 고려되었다.''' 다만 이들은 모두 미국이 도저히 들어줄수 없었다. 만약 독일을 영원히 약소국가, 2류국가, 농업국가로 만들어 버린다면 소련을 견제하기 어려워져서 당장 냉전을 준비하는데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데다가, 베르사유 조약 이후로 히틀러가 등장했던것 처럼 제2, 제3의 히틀러가 나오는 환경이 조성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모겐소 계획(Morgenthau Plan) : 상슐레지엔, 동프로이센을 폴란드와 소련에, 자르는 프랑스에 할양하고 서독일은 국제지역이 되며 마인강 이북의 북독일, 마인강 이남 바이에른의 남독일 2국 남북 분단 및 독일을 전격 농업국가로 만들려는 방안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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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분? 절대 안돼![4]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에 대해서 거의 노이로제에 걸려있던 폴란드 입장에서야 당연히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폴란드에서는 '''인과응보'''라는 반응이 절대다수였으며, 또한 르부프를 비롯해 소련에게 상실한 동부 영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보는 시각도 우세했다. 물론 당시 폴란드가 소련에 뺏긴 땅을 그대로 인정하고 싶어한 건 당연히 아니지만, 소련은 결코 땅을 돌려줄 생각도 없었고 폴란드가 저항할 수도 없었다. 폴란드인들은 이 국경선에 의거해 추방된 독일인들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냉담했다. 독일인들의 추방에 동조하는 폴란드인들도 존재하였던 반면에 소수지만 어떤 폴란드인들은 독일인들을 폴란드인인 것처럼 숨겨주는 등 도와줬다고 한다.[5]
반면 독일인들은 새로 정해진 국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폴란드 영토로 넘어간 땅에서 살던 독일인들은 추방과정에서 폴란드인들의 학대로 인해 수십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고향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다.
전승국들의 경우 이 국경선에 대한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이 국경선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소련은 당연히 대찬성. 소련은 아예 '독일이 통일하고 싶으면 이 국경선부터 인정해라.'라고 못을 박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두고 독일과 오랫동안 대립하였던 프랑스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게 해를 당했던 전 유럽 국가들 역시 전반적으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냉전 초기에야 미국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부했지만 제4공화국 정부가 무너지고 들어선 샤를 드 골 대통령의 제5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 1959년 오데르-나이세 선을 승인해버려 서독과 외교적으로 마찰을 빚었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엔 오데르-나이세 선을 수정할 '최종협상'을 한동안 주장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고 냉전도 진정되면서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였다. 특히나 영국의 경우 공산주의 국가로 거듭난 폴란드에게 너무 많은 영토를 떼 준 것을 후회하는 목소리가 보수당 내부에서 컸다.[6]
독일에서는 전후 분단된 동서독 모두 당연히 이 국경선을 승인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동독은 정권 수립 후 얼마 안 되어 스탈린의 무지막지한 압박으로 결국 1950년 이 국경선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서독에서는 강경 반공주의로 유명했던 초대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기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사민당도 오데르-나이세 선을 부정했다. 동독 지역은 물론이고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영토 또한 대놓고 미수복 지역 취급하였다. 독일 사회과부도에 나타난 인구밀도, 교통망 등 (1965년경)
20여 년이 지나 빌리 브란트가 집권한 후 1970년 동방 정책의 일환으로 폴란드와 외교노선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오데르-나이세 선을 국경으로 승인하게 된다. 이로 인해 브란트는 하마터면 의회에서 불신임될 뻔했으나 아슬아슬하게(2표 차)로 불신임을 면했다.
하지만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였던 헬무트 콜이 집권한 이후에도 독일은 동방 정책을 지속해 나갔으며, 1990년 통일 과정에서 옛 영토를 영구히 포기할 것을 선언하여 통일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7] 이에 따라 옛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였던 기본법 23조의 조항을 폐기하면서 오데르-나이세 선은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으로 완전히 고착되었다.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 지역에서 추방된 실향민들은 거의 1,500만에 가까운 수였으며 '추방민 연합회(Bund der Vertriebenen)'[8]라는 이익단체를 조직해 1970년대까지 서독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독일의 옛 영토수복을 언급하지 않으며, 현재의 국경선을 지지한다.# 대신 동구권 지역 독일 문화유산의 보존 및 복원, 실향민 1세대 노인들에 대한 생활 지원 등에 주력하고 있다.[9]
한편 스탈린은 1952년 미영프 3개국 정부에게 여러차례 서한을 보내 독일의 중립화 재통일안을 제안했으나 여기에는 오데르-나이세 선 승인이 조건으로 있었고 미영프 3개국과 당시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이를 거절했다.

5. 도시 분할


오데르 강이나 나이세 강변을 끼고 발전한 독일 도시들은 서안과 동안이 분할되어 동안은 폴란드로 넘어갔다. 물론 지금은 두 나라 모두 솅겐조약에 가입되어 있어 왕래가 자유롭다.
  • 괴를리츠: 서안은 독일령 괴를리츠, 동안은 폴란드령 즈고젤레츠
  • 구벤 : 서안은 독일령 구벤, 동안은 폴란드령 구빈
  •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 서안은 독일령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 동안인 담보르슈타트 지역은 폴란드령 스우비체
  • 퀴스트린: 서안은 독일령 퀴스트리너포를란트(Küstriner Vorland), 동안은 폴란드령 코스트신나트오드롱(Kostrzyn nad Odrą)
  • 무스카우 공원: 나이세 강을 끼고 양쪽에 조성된 공원으로 프로이센 공작 헤르만 폰 퓌클러무스카우가 조성하였다. 서안은 독일령 무스카우 공원, 동안은 폴란드령 무자코프스키 공원으로 나뉘었다.

[1] 나이세 강이라는 이름은 글라처 나이세 강을 비롯, 오데르 강의 지류 여러 곳에 붙어 있다.[2] 폴란드어 Bóbr, 독일어 - 보버(Bober)[3] 동프로이센 및 서프로이센 일부 지역을 소련이 칼리닌그라드 주로 떼가고, 폴란드의 쓸만한 항구가 그단스크밖에 없어서 떼어줬다고 한다.[4] 당시 서독 거리에 붙어있던 전단지.[5] https://en.wikipedia.org/wiki/Flight_and_expulsion_of_Germans_(1944%E2%80%931950)[6] 물론 폴란드 제3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폴란드에게 많은 영토를 떼 준 것이 영국 보수당 내에서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기도 했다. 현재는 오히려 러시아의 극우민족주의자들이 "우리가 소련 시절에 폴란드에게 너무 많은 영토를 떼 줬다!" 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애초에 냉전 이전에도 폴란드는 러시아의 숙적이었기 때문이다.[7] 사실 헬무트 콜도 원래는 실향민들을 의식하여 다시 옛 영토를 찾아야 된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 무력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고 발언했으나, 전세계에 걸쳐 뭇매를 맞자 깨깽하며 결국 정식으로 포기하였다.[8] 한국에서는 '독일 실향민 연합'으로 알려져 있으며, 단체의 총재인 베른트 파브리티우스 박사가 2019년 2월 한국에 방문하여 연설하였다.#[9]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 치하에 있던 지금의 폴란드(러시아 제국령이었던 지역 한정)와 발트 3국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점령당했을 때 폴란드나 발트 3국에서 러시아 본토로 도망친 러시아인 실향민의 후손들, 소련 해체 이후 발트 3국을 떠나 러시아 본토로 돌아간 러시아인들 또한 폴란드와 발트 3국에 남아있는 러시아 문화유산의 보존 및 복원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