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양

 



1. 개요
2. 역사
3. 매체에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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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체자: 襄阳
  • 번체자: 襄陽 (양양) / 襄樊 (양번)
  • 영어: Xiangyang / Siangyang (샹양) / Siangfan / Xiangfan (샹판)
중국 중부 후베이성의 지급시. 한자도 襄陽으로 한국의 양양군과 같다. 2010년까지 샹판(襄樊:양번)으로 부르다가 2010년 12월에 샹양(襄陽:양양)으로 바뀌었다. 시가지는 한수 강(漢水)의 남, 북 양안에 형성되어 있으며 인구는 570만 명으로, 호북성에서 성도인 우한(武漢)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시가지 동북쪽 끝에는 샹양 공항이 있다. 샹양은 우항에서 시안시(西安)로 가는 도로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서 옛부터 각광받았다. 그외에 북쪽 100km에 위치한 난양, 남쪽 100km의 징먼, 더 가면 나오는 이창 등이 주변 도시이다.
삼국지, 남송 시대의 우주 방어 도시로 유명하다. 양양 고성과 강 건너의 번성은 도시의 유서깊은 역사를 상징한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유표에 의탁할 시에 머문 신야는 난양 관할이며 샹양 시내에서 북으로 40km 올라가면 나온다. 삼국지 덕후라면 이창 (이릉) ㅡ 샹양 (양양) ㅡ 신예 (신야) ㅡ 난양 (남양) ㅡ 쉬창 (허창) 순으로 둘러보는 것도 좋다. 3박 4일 정도로 잡고 가면 좋다.

2. 역사


교통의 중심지로 초(楚)나라가 전국시대에 이르러 영성(강릉)에서 천도한 이래 2천년 가까이 호북성 일대의 중심지였다.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13주 중 하나인 형주의 주도(이전에는 무릉군 한수현)로 삼국지 독자에는 친숙한 도시다. 하지만 이후 삼국시대 말 주도가 강릉이 되면서 형주성 = 강릉성이 되었고.. 이하는 형주 문서 참조.
여하간, 양양은 육조시대 이래 남쪽 한족 왕조들의 군사적 요충지인 형주 '''가운데서도 군사적 요충지였다.''' 특히 장강-회하 유역 사이에서 북방민족을 방어했던 남송 시대에 양양은 침략하는 입장에선 심히 곤란한 성이었는데, 성곽은 튼튼하며 주변엔 깊은 해자가 파여져 있어서 기마대가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후세의 양양공방전과 달리 1235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입에는 양양성은 1236년 3월에 쉽게 함락당했다.(...) 이때 몽골군의 기세는 대단해서 1235년 10월 사천성의 핵심지역인 성도가 몽골군에게 장악당했고, 양양성도 함락, 1237년에 이르자 몽골군은 동쪽으로는 황주까지 이르게 된다.
어쨌거나 송나라의 명장 맹공이 다시 양양을 회복하고 방어선을 튼튼히 다져서, 당시 금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최강이었던 원나라 군세도 여기서 막혀 남송 공략에 애를 먹었지만 결국 이슬람 기술자를 초빙하여 개발한 회회포[1]를 이용하여 6년을 포위한 끝에 결국 함락시킬 수 있었다.[2] 그리고 이 양양 공방전의 패배는 남송의 멸망으로 직결되었다. 해당글 중반부에 양양 공방전에 대해 잘 나와있다. 양양 공방전 관련 참고글 2
원나라, 명나라 시절에는 시대의 흐름에 의해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능력이 사라지면서,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하여 일종의 '''내부 변방지대''' 화 했다. 이 결과 치안이 혼란하고 도적이 번성하는 골치아픈 지역으로 변모된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청나라때는 주변 지역인 호북성이 곡창지대가 되었던만큼 다시 경제가 회복되면서 다시 번성, 지금도 호북성에서는 상당히 큰 도시며, 1949년에 강 건너 옆 도시인 번성과 합쳐져서 양번시(襄樊市)가 되었다가 2010년 상양시(襄阳市)로 명칭이 바뀌었다. 관우조인, 서황, 우금, 방덕, 만총, 조엄 등의 형주 공방전이 번성과 이곳에서 일어났다.

3. 매체에서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형주를 대표하는 부동의 대도시로 등장한다.특히 양양을 점령하면 양양 이북(신야, 상용 방면)과 이남(강릉, 강하 방면)의 공격을 양양에서 모두 막을 수 있어 전략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하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전한의 수도 장안과 후한의 수도 낙양, 조조대의 수도 허창과 업, 오의 수도 건업, 촉의 수도 성도, 형주의 중심 양양은 시리즈 대대로 유력한 대도시 멤버들이다. 강릉의 경우 대도시가 많은 버전에선 대도시로 나오지만, 대도시가 적은 버전에선 중도시 정도로 나온다.

3.2.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김용사조영웅전신조협려에서도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곽정황용 부부가 몽골에서 남하하여 도화도에 머물다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땅이며, 곽부, 곽양, 곽파로 3남매가 태어나 자란 뜻깊은 곳. 곽정은 실존인물인 절도사 여문덕을 도와 이곳에서 몽골의 남하를 30여년에 걸쳐 방어해냈으나, 결국 쿠빌라이 칸 시절 양양성이 함락되면서 곽양을 제외한 일가가 순사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여문덕을 너무 푸대접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인데, 소설에서 여문덕은 소심한 탐관오리 같은 인물로 묘사되나, 실제 정사에서는 곽정 패밀리가 한 업적 모두가 여문덕과 동생 여문환의 업적이다. 여문환이 정사와는 정반대로 묘사 된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결국 원나라에 항복, 양양성이 함락된것이 치명타가 되어서 남송이 망한 것 때문에 폄하한 것 같은데... 솔직히 아무 지원없이 4년간을 버티다가 모두 굶어죽을 상황이 되자 백성들을 위해 항복한건데 취급이 너무 심하다. 다만 작가인 김용은 사서에는 여문덕의 승리로 기록되어있다고 직접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김용이 만들어놓은 소인배 여문덕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중국 내에서도 김용소설 팬픽으로 여문덕이 원전보다 더한 찌질이로 나오는 팬픽이 많다.[3]
몽골답지 않게 양양 주변지역을 중국 배 5000척과 이슬람인 기술자들과 사천 등지에서 노획한 무기 및 그곳에서 잡아온 중국인 보조병들까지 끌고와서 그냥 요새화를 시켜버리고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행동을 한 것이 크다. 당시 남송 정부는 범문호가 지휘하는 10만의 병력을 지원하기도 하고 수천 단위의 병력을 양양성과 연결 시키기 위한 과정중에서 잃는 등 노력을 했으나 요새화를 한 몽골군에게 격퇴당했다.
물론 여씨 형제도 사람이었는지라 실수가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나마 여문환은 덜 까이는 편이고 동정론도 많은 반면에, 여문덕은 하자가 많은편이었다. 일단 역사적으로 여문덕이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는 점은 사실이며, 당시엔 '석숭이 다 뭐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부정축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간신 가사도에게 빌붙어서 친인척들을 요직에 앉혔다는 비판도 있고,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원나라의 뇌물을 받아먹고 양양성 근처에 시장을 건설하도록 허락했는데... 시장은 페이크였고, 사실은 양양을 공략하기 위한 요새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중간에 '우리 상인들이랑 짐을 지켜야 하니 성벽도 쌓게 허락해 주시죠'라고 원나라 측에서 제시했는데, 그걸 허락해 버린 것이다.[4] 당시 여문환이 편지를 보내서야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리고 이존효에 필적한다는 명장 유정의 투항도 따지고보면 여문덕과 연관이 있는데, 여문덕이 조세웅과 유정을 싫어해서 트집잡아 조세웅을 죽였기 때문에 유정이 불안함을 느껴서 투항을 마음먹었다는 내용이 사료에서 분명 나온다.[5]


[1] 트레뷰셋과 비슷한 계열의 투석기이다.[2] 덕분에 딴 이름이 무려 '''양양포'''이다. 회회포는 프랑스포를 의미하는 불랑기포처럼 굳이 직역하면 이슬람포라고나 할까...[3] 대표적인 작품이 색정무협으로 알려진 황용양양비사. 여기서는 무려 여문덕과 그의 아들 여겸이 나란히 황용과 쓰리썸을 한다.[4] 請還以玉帶饋之, 求置榷場於襄陽城外. 蒙古從之. 至鄂, 請於文德. 文德許之. 蒙古使曰: 南人無信, 安豐等處榷場, 每為盜所掠, 願築土牆以護貨物. 文德不許. 或謂文德曰: 榷場成我之利, 且可因以通好. 文德為請於朝, 開榷場於樊城外, 築土牆於鹿門山, 外通互市, 內築堡壁. 蒙古又築堡於白鶴, 由是敵有所守, 以遏南北之援. 時出兵哨掠襄樊城外, 兵威益熾. 文德弟文煥知為蒙古所賣, 以書諫止. 文德始悟然, 事已無及. 惟自咎爾.[5] 大將呂文德忌二人, 捃世雄罪逼以死. 整懼禍及己. 遂叛歸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