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진(기업인)

 

[image]
'''이름'''
'''서정진'''(徐廷珍)
'''출생'''
1957년 10월 23일 (67세), 충청북도 청주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키'''
182cm
'''형제'''
동생 서정수[1]
'''배우자'''
박경옥[2]
'''자녀'''
장남 서진석[3], 차남 서준석[4]
'''거주지'''
인천광역시 연수구
'''학력'''
제물포고등학교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산업공학과 학사
건국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충북대학교 명예 약학 박사
'''현직'''
셀트리온 회장
셀트리온제약 대표이사회장
'''수상'''
2012년 매경이코노미 선정 올해의 CEO
2010년 존경받는 기업인 최우수상
2012년 대통령 표창
2009년 제46회 무역의날 금탑산업훈장
2006년 국무총리 표창
'''재산'''
'''123억 달러 (한화 약 14조 7680억 원)'''[5][6]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상세
3. 학력
4. 경력
5. 이야깃거리
6. 주가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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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셀트리온의 회장 겸 셀트리온제약 회장이다.

2. 상세


1957년 10월23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북지방산림청 산림공무원 출신이었으며 일가친척 거의 대부분이 현 세종시 일대에 거주해왔다.
건국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삼성전기에 입사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생산성본부로 자리를 옮겨 대우자동차를 컨설팅하다 김우중 전 회장의 눈에 들어 대우자동차 기획재무 고문으로 일했다. 이 때가 불과 34세의 젊은 나이로 이 나이대 청년으로선 상상조차 힘든 파격적 대우로 스카웃되었다. 김우중 회장이 그만큼 그를 눈여겨 보고 신뢰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때 대우그룹이 다들 알다시피 부도났다. 김우중 전 회장은 1999년 중국 산동성 옌타이 공장 착공식 참가를 마지막으로 잠적했고[7] 잘 나가던 대우자동차는 워크아웃을 신청했으며 결국 직장을 잃었다. 이 때인 1999년에서 2002년 사이가 서정진 회장이 가장 힘들 때였다. 이 때쯤 똑같은 신세가 된 동료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하루아침에 잘 나가는 대기업 임원에서 백수로 전락했고 결국 서울 강남구의 한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얻어 차기 사업에 대한 담론을 벌였다. IT 부터 해서 별의별 얘기가 다 나오는 와중에[8] 이 중 그때까지 미개척지 오브 미개척지인 바이오산업이 유망하다는 판단에 따라 대우자동차 출신 동료 10여 명과 함께 넥솔을 창업했다. 넥솔은 셀트리온의 전신이다.
이후 2002년 미국 벡스젠사와 제휴를 맺으며 사업을 본 궤도에 올리기 시작했으며 2004년 쯤이면 모든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마침내 인천광역시 송도국제도시에 셀트리온 1공장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사업은 점차 번창, 2007년 쯤 되면 완전히 모양새를 갖춤은 물론 인맥도 꽤 많이 얻게 되며 2009년 이후에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벤쳐기업 선두주자로 거듭난다.
결과적으로 1999년에서 2002년까지 계속되던 힘든 시간을 이겨낸 덕에 20년 남짓한 시간에 셀트리온을 바이오시밀러[9]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키웠다.
2020년 12월 31일, 한국나이로 65세가 될 때 은퇴하겠다는 공약을 지켜, 셀트리온 회장직에서 사임하고 퇴사하기로 했다. 셀트리온 직원들과 출입기자, 주주들한테 이메일로 보낸 고별사에서 "언제나 은퇴를 생각해왔다"며, "원격의료 스타트업에서 새출발하겠다.", "셀트리온은 후배들이 알아서 잘 경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3. 학력


청주시 소재 청주중학교를 입학하였다가 가족들이 모두 서울로 상경하면서 전학을 갔다. 당시 산림청 소속 충북지방삼림청 공무원이었던 부친이 퇴직한 후 서울 은평구 구파발역 인근의 기자촌에 정착하며 상경하여 졸지에 아는 사람도 없던 서울로 가게 된다. 이후 인천광역시 소재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박남춘 현 인천광역시장과 제고 21기 동기이자 친구사이다. 또한 유정복 전 인천광역시장의 1년 후배다.
건국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정청래 국회의원과 학과 선후배 관계이다. 건국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뒤, 충북대학교에서 명예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4. 경력


1983년 삼성전기 입사
1985년 한국생산성본부로 자리를 옮겨 기업 컨설팅 관련 업무를 맡았다.
1991년 34살의 나이에 대우자동차 기획재무 고문으로 발탁돼 임원에 올랐다. 
1992년 한국품질경영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1998년 IMF 구제금융사태가 닥치면서 다니던 직장을 잃었다.
1999년 넥솔을 창업했다. 넥솔은 2009년 이름이 셀트리온홀딩스로 변경된다.
2000년 셀트리온지에스씨를 설립했고 이 회사를 통해 한스킨을 인수했다. 이후 한스킨을 '셀트리온스킨큐어'로 이름을 바꾸고 셀트리온지에스씨와 합병했다. 
2002년 셀트리온을 설립해 회장에 올랐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자회사 셀트리온제약의 대표이사를 맡았다.
2009년 셀트리온헬스케어를 설립했다.
2012년 드림E&M을 설립한 뒤 2017년에 셀트리온 엔터테인먼트로 이름을 변경했다. 
2015년 셀트리온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5. 이야깃거리


자수성가형 자산가다. 집이 아주아주 가난했다. 애초 충청북도 산림공무원 집안이 1960년대 당시에 뻔했다. 서울 상경 후 대학에 진학해서는 밤에는 택시운전을 하고 낮에는 대학교 학과공부를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서울 상경 후 현재 구파발역 인근인 은평구 진관내동 기자촌에 식구들이 정착한 후 아버지는 작은 연탄가게를 했다고 한다.
초창기 사업 때 신뢰도가 0에 가까운 만큼 돈 구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하필 시국이 시국(...)인 IMF 이후인지라 자금조달 자체가 어려웠다. 이 때 결국 명동 사채 시장에서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돈을 빌린적이 있고 삶이 힘들어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게 다 서회장의 가장 힘든 시기인 1999년에서 2002년 3년 사이의 일들이었다. 그리고 미국이고 독일, 스위스일본이고 홍콩이고 어디든 날아가서 아무 사람이나 만나고 싶다며 들이대고 만나고 다니고 하기도 했다. 당연히 99%는 퇴짜맞았다. 미국에서는 맨날 같은 컵에 싸구려 커피를 리필하자 점원이 '''살 것 같지도 않아서''' 새 컵으로 갈아줬다고도 한다. 워낙 거지꼴로 다니던 동양인 남자라 그들 눈엔 희한하게 보였을 것이다.
셀트리온 엔터테인먼트로 연예계에도 진출을 시도했으나 이쪽 안목은 영 아닌거 같다. 자전차왕 엄복동 제작에 셀트리온 엔터테인먼트의 130억 투자를 결정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영화는 예상대로 대실패했다. 아무래도 엔터테인먼트 분야는 원래 전문분야도 아니고 사람들 하는 말만 듣고 하는데다 안목이 영 없어보인다.하지만 서정진은 이 영화는 돈벌려고 만든게 아니라고 나중에 밥이나 한끼 먹자고 했다고 한다.사실 재벌들이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곳에 문어발 뻗었다 장렬하게 대실패하는 경우는 흔하니 이상한 건 아니다. 당장 그 삼성도 삼성자동차로 자동차에 손대었으나 결국 르노에 팔아넘겨 르노삼성이 되었으며 도널드 트럼프 현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 스테이크라는 레스토랑 체인을 냈으나 결국 말아먹었다.
대한민국 재벌 아니랄까봐 기업의 요직에 자기 남동생, 아내, 아들들을 앉히는 등 족벌 경영을 척척 진행중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셀트리온 주가가 급상승하면서,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선정한 한국 갑부 순위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에 이어 2위로 올라섰다. # 거기에 항체치료제가 가시화되면서 기대를 모으고도 있다. 이후 1위였던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면서 1위에 등극했다.


6. 주가조작


자사주로 받은 대출의 반대매매를 막기 위해 주가조작을 한 혐의로 벌금 3억원을 받은 바 있다.#

[1] 셀트리온제약 대표이사(사장)[2] 셀트리온복지재단 이사장[3] 셀트리온 수석부사장 (서울대학교 동물자원학과 학사,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박사)[4] 셀트리온 이사[5] 2020. 06. 26. / 포브스 기준.[6] 세계 부자 순위 135위. 또한 이건희 회장이 별세하며 한국 '''1위''' 부자가 되었다.[7] 이때부터 김우중 전 회장은 기나긴 도피행각을 시작했으며 베트남, 말레이시아동남아시아 일대와 프랑스, 폴란드 등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그 때 노조에서 '''김우중 체포조'''를 구성해 그를 찾아다니기도 했고 실제로도 인터폴에 적색수배자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나중에 기나긴 도피를 마치고 자진귀국했다.[8] 항간에서는 중국집 등 음식점을 차리라는 권유도 있었다고 한다.[9] 바이오의약품의 복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