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미에

 

1. 일본의 인명
2. 17세기 일본에서 쓰인 천주교 박해 도구
2.1. 의미 확장
2.2. 미디어
2.3. 같이보기


1. 일본의 인명


주로 여자 이름. 한자 표기는 文恵, 史惠, 史絵, 章枝 등등등.

2. 17세기 일본에서 쓰인 천주교 박해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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踏み絵
에도 막부가 일본의 가톨릭 교인들을 색출하고 그들을 탄압하기 위해 사용했던 목판이나 금속판. 이름은 '''밟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후미에를 밟는 행위를 '에부미', 번역하면 '그림 밟기'라고 한다.
1629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시대 때 도입했었다. 최초로 시행한 이 중 하나인 나가사키 부교 타케나카 시게요시는 타케나카 한베에의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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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방법은 예수 또는 성모 마리아 모습을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을 바닥에 놓고 사람들을 불러서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 성상은 대체로 금속으로 만들었고 나중엔 물량이 부족해지자 천이나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가운데 IHS[1]를 그려(쉽게 말해 성체의 모습) 만들기도 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이 차마 밟지 못하거나 밟기 직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거나 조용히 통회의 기도를 올리는 순간 바로 잡아갔다. 심지어 아기들이나 병이 들어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은 후미에를 발에 갖다대는 식으로 행했다. 당사자의 자백에 달린 문제이니 만큼 별 효과가 없어 보이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의외로 시행했을 당시 신자들에게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해서 이로 인해 잡히고 고문을 당하고 순교한 신자 수가 어마어마했다. 이는 성상이나 성화 등 종교적 상징물을 훼손하는 행위를 엄금하고 배교하는 표시로 어떤 외적인 불경한 행위를 강제하는 것에 순응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는 가톨릭 교리의 영향 때문이다.
사실 가톨릭 뿐만이 아니라 (후술할 네덜란드 무역상 같은 교리 차이로 인한 특수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어느 종교라도 배교하는 행위로 자기 종교 상징물을 모욕하라는 식의 행위는 모두가 저항하거나 극도로 꺼려하는 게 당연하다. 당장 '''불자들이나 무슬림들에게 강제배교 표시로 불상이나 쿠란에 침을 뱉고 밟으라고 강압'''한다면 이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속출할 것이다.
다만 불교는 조금 다른게, 셈족 계통인 일신교와는 달리 불교는 교리 상 부처를 신으로 추앙하지 않는다. 불성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부처(석가모니)는 신이 아닌 스승이란 개념으로 존경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물론 스승의 사진을 밟는 것 역시 꺼림칙한 일이겠지만... 심지어 선종 불교 같은 경우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불상도 땔감으로 쓰고 부처도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는데 이는 당연히 문자 그대로 살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부처를 타자화하고 신격화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 불자들 중에서는 특히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을 중심으로 천지신명, 삼신 할머니 등과 함께 관세음보살과 석가모니를 신 비슷한 기복 대상으로 삼는 분이 적지 않은데, 실은 불교 교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이며 이는 오랜 역사를 거치며 기존부터 존재하던 한국의 민간 토속신앙과 혼합된 한국 불교 특성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물론 막부도 다 죽이는 건 꺼림칙했는지 '배교만 하면 살려 주겠다'고 회유도 해봤지만 대부분이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를 선택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조선에서도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일반 천주교 신도들에게는 '따로 증명할 필요도 없이 배교하겠다고 말만 하면 죽이지 않고 즉시 풀어주겠다'라고 권고하였다.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하기 전인 정조 때도 '비록 거짓으로라도 입으로 배교하겠다고 하면 그것으로 10년의 공부(신앙)가 햇빛에 녹아버린 얼음과 같다'[2]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즉 배교 선언만으로도 충분히 효과가 있음을 주장한 것.[3]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경우도 "배교하면 요직으로 등용하겠다"는 등 온갖 우대를 약속받았지만, 끝끝내 거부하여 결국 순교했다. 심지어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온 프랑스인 신부들에게는 "배교도 필요 없고 조용히 지내거나 단순히 조선을 떠나면 살려 주겠다"고 했는데도 모두 거부하고 순교했다.
참고로 에도 막부는 '''유럽 출신 천주교 성직자들도 배교하기 or 순교하기의 선택지만 허용되었고, 귀국은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성직자가 배교한 예시로는 크리스토방 페레이라(Cristóvão Ferreira)나 주세페 키아라(Giuseppe Chiara) 같은 경우가 있었으며, 이들은 배교후 일본이름을 쓰고 일본인으로 전향하여 카쿠레키리시탄의 색출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소수의 배교자들의 경우, 남만서사(南蛮誓詞)라는 서약서를 제출[4]시키고 불교로 강제 개종시켰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다 방법이 생긴다. 신자들이 좀 줄었을 때 막부는 길거리가 아닌 각 마을별로 에부미를 실행했는데 보통 정초에 했다. 에부미 날짜가 마을로 공지되면 신자들은 에부미 전날에 발을 최대한 깨끗이 씻고, 또 최대한 성상의 얼굴을 피해 밟으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발을 씻어 그 물을 통회하는 뜻으로 '''다 마시고'''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당시 극심한 박해와 탄압으로 사제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고해성사를 볼 수 없었던 만큼 신자들 나름의 방법이었으리라. 이후 1854년 쿠로후네 사건으로 일본이 개방하게 되면서 없어졌으나 암묵적인 압박은 이어지다가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유교 문화권에서 조상 제사는 민속 관습일 뿐 가톨릭 교리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라는 칙서를 발표하면서 가톨릭 압박은 조금 줄어들었다. 참고로 이 시기 가톨릭을 탄압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국가신토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에야 일본에서 가톨릭은 정부의 압박과 압력에서 완전히 해방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들은 에도 막부기독교 선교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미에를 하는 행위에 협조했다. 애초에 네덜란드인들은 칼뱅개신교 신자들이었는데 칼뱅파 교회는 가톨릭 성상도 우상숭배로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1566년 성상파괴 소동이 터지는 등 16세기에 본국에 있던 성상들을 파괴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5] 성상을 밟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일본을 자주 왕래하는 동인도 회사 직원들은 종교와는 별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의외로 에도 막부도 무리하게 불교나 신토를 네덜란드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2.1. 의미 확장


현재는 권력 기관이 개인의 사상을 조사하거나, 또는 그 수단이나 어떠한 결정 사항을 몰래 반대한 사람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 등을 후미에라고 부르기도 한다.
종교 상징을 밟아 모욕을 준다는 발상은 종교 박해 경험이 있는 나라라면 흔히들 떠올리기 때문인지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이 종북주의 논란과 관련해 "십자가를 밟게 해서 천주교 신자를 가려낸 것처럼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일은 적도 있었다.

2.2. 미디어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가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에부미를 하고 배교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에부미를 하지 않아야 하는지 갈등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소설의 핵심 부분이다. 이를 원작으로 한 마틴 스콜세지감독의 사일런스(영화)에도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일본의 성인(聖人) 만화 세인트☆영멘예수는 울면서 성화나 십자가를 밟으라고 하면 냉큼 밟으라고 한다. 아예 자기를 밟아도 화내지 않을 거라고도 한다(!)[6] 사실 천계에 있을 때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가 '저는 밟지 않았습니다'라며 후미에를 선물했는데 예수가 자신의 그림인 줄 모르고 현관 매트로 써서 시로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하도 많은 사람의 발이 닿아서 그런지 형체가 뭉개져 예수 보다는 클리오네 같았던 데다가 이름부터가 '밟는 그림'이라서 착각했다고...(...)
사무라이 참프루에서도 에부미 장면이 등장한다. 사실 이 작품에서 천주교 박해라는 주제는 상당히 큰 스포일러와 연결되어 있다.

Before we took Shipping, I was often asked by some of the Crew, whether I had performed the Ceremony above-mentioned: I evaded the Question by general Answers, that I had satisfied the Emperor and Court in all Particulars. However, a malicious Rogue of a Skipper went to an Officer, and pointing to me, told him, I had not yet '''trampled on the crucifix:''' But the other, who had received Instructions to let me pass, gave the Rascal twenty strokes on the Shoulders with a Bamboo, after which I was no more troubled with such Questions.

우리가 배에 타기 전에 나는 몇몇 선원들로부터 앞서 언급한 의식을 행하였는지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하여 황제와 법정이 특히 만족했던 평범한 답으로 회피했다. 그러나 한 사악한 도적놈같은 선장이 한 군관에게 가서 나를 가리키면서 내가 아직 '''십자가를 밟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를 보내주라는 지시를 받은 다른 군관이 그 악당의 어깨를 대나무로 20대 쳤다. 그 후 나는 그러한 질문을 받지 않았다.

'''걸리버 여행기 3권 11장, "러낵을 떠나 일본으로, 그 후 네덜란드 배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그 뒤 영국으로" 1892년대 판'''

걸리버 여행기 3권에서 걸리버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네덜란드인 행세를 했다.[7] 이 때 이 에부미를 할 것을 강요받았는데 얼렁뚱땅 대화로 퉁쳤다. 걸리버는 자신은 무역을 위해서 온게 아니라 난파된 뒤 구조되어서 러낵을 통해 일본에 오게 된 것이므로 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국왕은 걸리버가 러낵 왕의 친서를 가져온 인물이므로 이 일을 비밀에 부치는 조건 아래 특별히 허락했다고 나온다.
원피스에서 신 어인 해적단어인섬의 주민들 중에서 자신들의 사상에 반대하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오토히메의 사진을 밟고 지나가라고 시키고 밟지 않으면 처단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사진을 밟지 않으면 죽을 판인지라 오토히메라면 그런 짓을 해도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사진을 밟고 지나갔다. 사진을 밟고 지나간 뒤에 오열한 주민들도 있었으며 도저히 사진을 못 밟겠다고 하다가 신 어인 해적단의 칼에 맞아 쓰러진 주민들도 있었다.

2.3. 같이보기



[1] 그리스 문자로 '예수'를 뜻하는 ΙΗΣΟΥΣ의 첫 세 글자를 라틴 문자로 표기한 약자. 당연히 '예수'를 뜻하지만, 그리스어를 뜸하게 쓰기 시작한 중세부터는 라틴어 문장 Iesus Hominum Salvator(인류의 구원자 예수)의 이니셜이라는 말이 붙어버려서 IHS가 정작 그리스어로 '예수'의 머릿글자라는 걸 아는 사람이 적다.[2]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기사[3]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도 막부의 관리로 기리시탄 탄압의 선봉으로 그려지는 이노우에 지쿠고노카미(실존인물로 본명은 이노우에 마사시게(井上正重, 1585~1661)#의 경우 '''본인도 배교한 기리시탄이었던 탓에''' 기리시탄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는 "'''무턱대고 잡아서 고문하고 죽이면서 신앙을 버리고 개종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오히려 기리시탄들의 반발과 투쟁심만 더욱 불러일으킬 뿐인 하책(下策)'''"이라며 기리시탄에 대한 폭압적인 무단책보다는 정신적인 압박을 더욱 중시했으며, 그리고 '''일반 신자들에 대한 개종보다는 선교사로 온 신부들을 개종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면 귀 뒤쪽을 살짝 찢어서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서 피가 한 방울씩 찔끔찔끔 떨어지게 해놓은 다음, 결국 괴로워하던 기리시탄이 무의식적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한 마디만 중얼거려도 배교한 것으로 간주하고 풀어주는 식이었다. 소설 침묵에서도 감옥에 갇혀서 옆방에서 들려오는 (고문 당하는 중인) 기리시탄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괴로워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당신이 배교하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저 기리시탄 세 사람을 지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데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싶으냐? 왜 그렇게 사람이 이기적이냐?'''"라며 분개하는 옥졸들의 원망 소리는 덤이다. 사실 종교 문제로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한국의 경우도 무단통치 시절보다 문화통치 시절에 더 많은 변절자가 등장했다.[4] 해석하면 남만(南蛮)=서양의 종교를 다시는 믿지 않겠다는 서사(誓詞)=맹세문이다. 서사는 황국신민서사의 그 서사랑 동일하다.[5] 공화국으로 독립한 뒤에는 아예 전국에 있는 교회 성상들을 모두 철거해버렸다.[6]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관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해도 교리상으로는 큰 죄여야 하는 것이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비로우시니 신성모독 좀 해도 쿨하게 용서하고 넘어가실 것" 식으로 교리를 규정한다면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소위 '자기 기준으로 어쩔 수 없는 이유'라는 식으로 합리화하며 타종교 혼합주의나 외부에 의해 강제된 박해성 신성모독에 너도나도 동참하게 되어 십계명을 어기게 되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즉, 예수가 죽고 그의 뜻을 보존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예수가 실제로 관대하고 말고와 상관 없이 그런 관대함을 핑계로 교리를 어기게 둘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해당 창작물에서처럼 예수 본인이 여전히 실재한다면 죄가 되고 말고는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며, 후미에같이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일 경우라면 용서해주거나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7] 당연하지만 네덜란드인 아니면 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