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경쟁
1. 개요
Space Race / Космическая гонка
'''우주 경쟁'''은 20세기 중후반부터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시작된 우주 개발 및 진출을 위한 국가간 경쟁을 말한다. 달 탐사에 한정해서 말할때는 'Moon Race'라고 하기도 한다.
국가간 자존심 경쟁이 불러온 인류 역사상 과학과 기술이 가장 단기간에 가장 급격한 성장을 이룬 시기이며, 국가 주도로 우주 진출을 목표로 하여 여러 과학 기술들을 개발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미국의 민간 기업들이 우주로 나서고 있어 민간 차원에서의 우주 경쟁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며, 이미 달 여행, 화성 여행, 소행성 채굴 등의 계획을 발표하는 회사들이 여럿 존재한다.
2. 미국-소련의 우주 경쟁
1957년 10월 4일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로 시작된 미국과 소련이 벌인 우주 경쟁으로 최초의 우주 경쟁이다. 과학적, 상업적 목적 없이 순전히 경쟁심에서 실시된, 어떻게 보면 터무니 없는 액수의 돈파티[3] 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인류사 최고의 과학 기술 발전을 실현시킨 시기이기도 했다.
후대에 돌이켜보면, 이견의 여지는 있겠으나 냉전이 남긴 그나마 긍정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던 험악한 20세기에서 이룩해낸 가장 멋진 업적을 꼽으라면 역사가들은 대개 우주 경쟁 시절을 으뜸으로 친다.
최초의 우주 개발인 만큼 가시적 성과가 컸고, 기본적으로 우주선 발사에 중점을 두었다. 모든 것이 최초였기에 상대보다 앞서야 했던 긴장감이 팽팽했던 시기였다.
2.1. 시작
처음에는 아무도 우주 경쟁에 목맬 생각이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초강대국의 자리, 그것도 압도적인 1위에 올라섰고 과학 기술에 있어서 일류에 도달했다. 과학·기술에서 미국에 대적할만한 국가군인 서유럽은 전후 복구에 매달리는데도 바빠서 우주 개발에 나설 형편이 못 되었다. 소련 역시 2차 대전에서 독일과의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있었고, 비록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소련이 라이벌 구도가 되긴 했지만 미국은 소련을 나라가 크고 군사력이 좀 강해서 대치할 뿐 기술적으로는 한 수 아래로 판단하고 있었다. 냉전이 시작될 무렵인 1947년에도 경제규모는 미국의 1/4에 불과했다. 이렇게 미국은 여유가 넘치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우주 개발에 나섰는데, 군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분산되는 등 체계적이지 않고 국가적 역량이 집중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해안경비대도 로켓 개발에 나섰다.[4]
수천만 명이 사망하고 유럽 영토 대부분이 잿더미가 된 소련은 전후 복구에 한창이었고 한동안 우주 개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일 이유도, 여력도 없었다. 그러다가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서기장에 오른 후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첨예해지는 냉전 속에서 미국보다 경제력이 크게 뒤졌던 소련은 당시 전력의 핵심인 공군력이나 해군력에 있어서 미국에 크게 뒤쳐졌다. 물론 소련 육군은 나름대로 강력했지만 소련과 미국 사이에는 바다가 있으므로 아무리 육군이 강해도 미국을 직접 위협할 수단이 부족했다. 즉 만에 하나 싸우기라도 한다면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뿐,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이래서는 미국에 대한 전쟁억지력을 갖기 힘들었다.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는데 크게 이바지한 군부 실세들은 흐루쇼프가 재래식 무기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도록 종용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재래식 무기로 미국에 맞짱을 뜬다는 것은 답이 안 나오는 문제였다. 이렇게 소련 수뇌부의 고민이 깊어지던 차에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대륙간 탄도 미사일로 사용할 수 있는 로켓인 R-7을 만들어내었던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이 발사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관심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평소 자신의 꿈이던 인공위성 발사를 진언했고, 당시에 미국이 장거리 발사체 분야에서 뒤쳐진 것을 기회로 흐루쇼프도 선전의 목적으로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를 승인한다.
스푸트니크의 발사 성공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미국은 서둘러 자국 위성 발사에 나섰으나, 뱅가드의 실패로 망신을 당한 후 익스플로러의 발사 성공으로 간신히 우주 경쟁에 합류하게 되었다. 일단 소련에게 기선을 빼앗긴 미국은 NASA를 설립하고 국가적 역량을 기울여서 베르너 폰 브라운을 중심으로 우주 개발에 나서게 된다.
2.2. 경쟁의 이유, 배경
미국과 소련이 당대 최강국이자 최고의 과학 기술을 보유하기는 했지만 우주는 완전히 낯선 곳이었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당연히 지식적인 면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상당한 한계가 있었고, 들어가는 자금과 자원은 '''인류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힘을 지닌 양대 국가인 미국과 소련조차 등골이 휘는, 다른 나라는 엄두도 못낼 수준으로 필요했고, 그럼에도 정작 가시적인 이익은 들어가는 비용을 감안하면 없는것이나 다름없었다. 인류의 운명까지 위협해 가면서 으르렁거리던 이 시기에 이렇게 국가적 경쟁에 나선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2.2.1. 초강대국간의 위신 대결
세계를 양분하는 두 강대국은 항상 서로에 대해 경쟁심을 불태웠고, 정치, 경제, 기술, 문화, 오락, 스포츠[5] 등의 모든 분야에서 자존심을 걸고 대결했다. 하지만 핵무기를 쓰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무력 충돌은 못했지만, '''좋은 경쟁거리가 생기기만 하면 서로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그런 와중에 이런 명분이 생긴 것이다.
미국 정부나 군부는 소련이 대륙간 탄도 미사일로 바로 자국을 타격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미국의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그런 안보상 위협보다 '우리가 졌다'는 패배감이 더 실감나는 문제였다. 아직 19세기적 사고관이 남아있던 시기에, 최초의 경쟁에서 밀리고 전인미답의 영역을 개척하는데 선두를 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국가적 사기가 떨어지기에는 충분했다.[6] 냉전시대라곤 해도 첨단 산업 기술을 가진 미국에 비해 소련은 단순히 군사력과 나라 규모가 큰 국가란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런 소련 따위에 경쟁에서 밀린 미국은 상처입은 자존심을 어떻게든 회복해야 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우주개발에서 소련보다 앞서가야만 했다.
소련 입장에서도 우주 개발의 선두주자이자 우주 시대를 연 국가로서, 다른 곳도 아니고 냉전으로 한창 으르렁거리는 미국에게 밀릴 수는 없었다. 소련의 모체인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변방이었고 다소 후진국으로 비추어졌지만,[7] 최초로 우주에 발을 내디뎠다는 점은 그걸 한번에 만회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우주 개발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알리는 프로파간다로 사용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주개발 분야에서 후발주자에게, 그것도 미국에게 밀리기라도 한다면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국가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자체의 자부심에 상처를 큰 상처를 입을 것이었다. 따라서 소련 역시 이 자존심을 건 전장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고, 우주개발에서 미국에 뒤쳐지면 안 되었다.
이 점은 미국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인류의 달착륙을 목표로 하는 아폴로 계획을 발표하자 NASA 지원자가 늘었던 것에서도 나타난다. 국가적 자긍심을 드높이기 위해 자국민을 결집시키는데도 충분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아폴로 계획이 진행되면서 미국에는 우주와 관련된 문화 코드나 밈들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예를 들면 그냥 흘러간 올드 팝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를 재즈 곡 Fly me to the Moon이 뒤늦게 인기를 끈 것도 이를 반영한다.
2.2.2. 국가 안보와 군비 경쟁
소련의 로켓은 애당초 대륙간 탄도 미사일로 개발된 것이었고, R-7 로켓의 개발로 소련은 핵무기를 미국 본토에 투사할 수단을 획득하게 되었다.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여, 자신들이 인공위성 대신에 핵무기를 실어 미국으로 배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증한 셈이다. 실제로 흐루쇼프는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전에도 "우리는 수소폭탄을 실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갖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되기 전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the profound shock of realizing that it might be possible for another nation to achieve technological superiority over this great country of ours.
'''다른 나라가, 위대한 우리 나라보다 기술적 우위를 가질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그것을 인식한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당연히 충격에 빠졌다. 기존에는 소련이 미국과 그 동맹국에 본토를 둘러싸인데다 미국에 비해 항공전력이 한참 뒤쳐져서 미국의 정찰기가 돌아다녀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소련도 직접 미국의 본토에 선빵을, 그것도 핵선빵을 때릴 부위를 골라서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본적 핵전력이나 동맹 전력까지 합치면 미국이 우세했지만, 소련이 원한다면 때리고 싶은 미국 도시를 맘대로 때릴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우세를 가볍게 상쇄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어떻게든 소련의 핵미사일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는데, 알다시피 대기권 밖에서 떨어져내리는 미사일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막기 어렵다. 소련의 핵미사일을 막을 수 없다면, 미국 역시 소련과 같은 수준의, 더 나아가 소련을 능가하는 핵무기 투발수단을 가져야 했다.
2.2.3. 체제 선전
냉전 끝에 핵전쟁으로 인류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대륙간 탄도 미사일 경쟁은 미소 양국의 국민 뿐만이 아니라 그 동맹국들에게도 대단한 불안감을 주는 일이었다. 장기적이고 확고한 동맹국 뿐만 아니라 상대편의 동맹국이나 제3세계 국가들, 심지어 자국민들에게도 공포감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미사일 경쟁은 좋은 선전거리가 아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같은 사태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자국을 포함한 세계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일당독재 국가인 소련 입장에서도 냉전을 심화시켜 국제적 긴장을 높이는 건 좋은 일이 아니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은 직접적으로 맞붙어 대결하는 걸 철저하게 피했다. 그 결과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소련의 개입 위협 때문에 직접 북베트남으로 치고 올라가지 못했고, 소련도 미국의 존재 때문에 너무 나서서 행동할 수 없었다. 6.25 전쟁 때는 북한이 혼자 미쳐 날뛴 것이라 미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세계전쟁으로 번질까봐, 소련에서 파병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주고받는 러시아어를 감지하고도 무시했으며 소련 역시 미국 눈치를 봐서, 중국마냥 대놓고 북한을 지원하진 않고 제한적으로만 참여했다.
반면 우주 경쟁은 대리전이나 선전전의 소재로 적절했다. 똑같은 발사체라도[8] '''핵무기를 싣고 날아가는 미사일'''과 '''인공위성을 싣고 날아가는 우주선'''은 느낌부터가 다르다. 전자는 엄청난 돈을 퍼부어서 만들어 놓고도 당장 쓸 일도 없는데다 돈 값을 했다가는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무기. 후자는 인류의 우주 진출이라는 장밋빛 미래와 신세계의 개척이라는 개척주의, 그리고 인류 전체의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을 담은 우주 발사체. 이 중에서 좋은 선전거리가 되는 쪽은 후자였다.
실제로 소련은 유리 가가린을 여러 공산권 국가에 순방시키면서 체제선전을 했고,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라는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를 배출했으며 우주 정거장을 건설한 뒤에는 공산권 국가들에서 우주 비행사를 배출시켜주는 식으로 우주 개발을 철저하게 홍보용으로 써먹었다. 이래서 베트남에서 한국보다 먼저 우주비행사를 배출했다. 최초의 흑인 우주비행사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니라 소유즈로 우주에 나간 아프리카계 쿠바인(Arnaldo Tamayo Méndez)이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NASA가 우주와 관련된 자료를 항상 카피레프트로 공개하고 있고,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하는 과학 실험에 일반인들을 참여시키는 이벤트를 하기도 한다. 다만 NASA와 별도로 미합중국 공군 우주사령부에서 군사적 목적의 우주개발을 병행했다.
2.3. 인공위성 발사 경쟁, 소련의 기선제압
스푸트니크 쇼크라는 말로 대표되는 일련의 과정들이다.
소련이 1957년 10월 4일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면서 우주 시대를 열었고, 동시에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반면 미국이 같은 해 12월 6일에 발사한 뱅가드 로켓은 발사대도 못떠나고 폭발해버렸고, 이 장면은 TV를 통해 전세계로 생중계되었다. 스푸트니크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미국은 뱅가드로 인해 상처가 벌어질대로 벌어진다. 간신히 주노 1호로 발사는 성공시켰지만 스푸트니크에 비하면 미국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는 크기도 작았고,[9] 무엇보다 그 때 이미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 발사 한달여 만에 최초로 생명체인 라이카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를 올려보냈기 때문에 체면치레라고 할 것도 못 되었다.
미국은 패배를 만회하고 반격을 하기 위해서 우주 개발 및 발사체에 관련된 업무를 모아서 NASA를 설립하고 교육정책을 진보주의적 교육에서 본질주의적 교육으로 바꾸는 등의 재정비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국가적 역량을 기울인 대결에 나선다.
미국이 중요한 우주선을 발사시킬 때 소련이 직전에 기습적으로 선수치는 수법은 이미 스푸트니크 때부터 시작되었고 나중에도 계속된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우주 개발 계획에 필요한 막대한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 여론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모든 과정과 계획을 상세히 언론에 공개해왔다. 반면 소련의 우주 개발 계획은 철저히 비밀주의였고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미국이 발사하기 수개월 전부터 호들갑을 떠는 것과 달리 소련은 쥐도새도 모르게 조용히 발사시킨 뒤 사후에 성공했다고 짧게 발표하여 미국의 혈압을 급상승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2.4. 동물 날려보내기
경쟁적인 인공위성 쏘아올리기는 당연했다. 과학위성, 통신위성, 군사위성 등등. 이후에는 우주에서 공격하기 위한 무기를 장착한 위성을 발사할 계획도 세워졌었다.
하지만 인공위성 발사는 실용적인 목적이었기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미친짓(물론 좋은 방향으로)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그 준비단계라고 할 수는 있어도.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두 나라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갖춘 뒤, 그 미친짓으로 직접 이어지는 단계는 동물의 우주비행이었다.
흔히들 소련이 스푸트니크 2호로 올려보낸 라이카가 최초의 우주비행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946년에 미국이 V2로켓을 이용해 초파리를 대기권 밖으로 날려보낸게 최초의 사례이다. 하지만 이건 큰 의미가 없다.
우주로 보내진 최초의 포유류는 당연히 1957년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지구궤도를 돌았던 개인 라이카였다. 소련은 당시 우주를 비행한 개를 회수할 기술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캡슐이 대기권에 재진입하기 전에 라이카를 약물로 안락사시켰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45년 동안 진실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002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라이카는 스트레스와 캡슐의 과열로 궤도에 도달한 직후에 죽었다고 한다.
유인 우주 비행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개를 쏘아올린 소련은 1960년 9월 18일에 스푸트니크 5호에서 벨카와 스트렐카라는 두 마리의 개 외에도 여러 마리의 쥐를 궤도에 올려 모두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미국도 아프리카에서 침팬지나 원숭이를 수입하여 훈련시킨 뒤 우주로 보냈다. 하지만 얘네들은 그렇게 알려지지 않아서 이름이 뭔지, 몇 마리가 날아갔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물론 홍보하는 것을 좋아하는 NASA는 당시의 사진도 공개하고 있으니 생김새와 어떻게 갔는지 궁금하다면 무인 머큐리 계획 사진기록을 참고하자.
좀 지나서의 일이지만 소련은 1968년 9월에 달로 발사되는 존드 5호에 호스필드거북을 탑승시켰고 이것이 최초로 달 궤도를 비행한 생물이 되었다.
2.5. 유인 우주 비행- 가가린과 셰퍼드
계속해서 동물을 우주로 보냈지만 양쪽 다 겨우 동물이나 올려보내고 자랑하려 하는 게 아니었다.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기계(인공위성) 다음 차례로 모두가 사람을 우주로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너무도 당연했지만 함부로 하기 힘든 모험이기도 했다. 인공위성이나 동물 발사 실패는 시행착오 정도로 넘어갈 수 있지만 사람을 보냈다가 실패하면 자존심도 자존심이고 사기도 엄청 떨어지고 국내외의 인기도 타격이 가는 모험이었다.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을 진행하고, 스푸트니크 쇼크에 빠진 미국도 머큐리 계획에 올인을 했다. 이미 첫 인공위성을 빼앗긴 미국에게는 소련을 앞지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소련도 우주인을 보내는데 조금도 뒤쳐질 생각이 없었다. 피 말리는 경쟁 끝에 불과 25일 차이로 유리 가가린이 앨런 셰퍼드보다 먼저 유인 비행을 함으로써 최초의 유인 비행 타이틀도 소련에게 뺏기고 만다. 그나마 여기서 그치면 모르겠는데, 최초의 우주 유영마저도 소련에게 빼앗기는 바람에 체면치레 할 방법조차 없었다.
그마저도 유리 가가린은 궤도 비행, 앨런 셰퍼드는 탄도 비행이기에 미국의 우주항행 기술은 소련에 비해 크게 뒤쳐졌다는 평가를 받았고, 존 글렌이 미국 최초로 궤도 비행에 성공해 기술 격차를 좁히나 싶었으나 얼마 안 가 소련이 보스호드 계획을 통해 다인승 우주선을 만들어 또 한 방을 먹이는 데 성공한다.
2.6. 케네디의 유인 달 탐사 계획 선언
이렇게 우주 경쟁에서 두번 연거푸 간발의 차이로 밀린 미국은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에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1961년 5월 25일 국회에서 그 유명한 "10년 안으로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연설을 통해 처음으로 유인 달 착륙 계획을 언급했다.
그리고 1962년 9월 12일, 라이스 대학교에서의 연설에서 이를 보다 명확히 했다.미국은 10년 안으로 인간을 달에 보내 무사귀환시켜야 합니다. 다른 어떠한 우주 계획도 인류에게 이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는 또한 장기적인 우주 탐사 계획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며, 이를 위해 온갖 어려움과 막대한 비용을 감수할 것입니다.
first, I believe that this nation should commit itself to achieving the goal, before this decade is out, of landing a man on the Moon and returning him back safely to the earth. No single space project in this period will be more impressive to mankind, or more important for the long-range exploration of space; and none will be so difficult or expensive to accomplish.
케네디의 라이스 대학교 연설 후반부에는 '''F-1 엔진을 탑재한 새턴 로켓'''이 이미 언급되고 있다.For the eyes of the world now look into space, to the moon and to the planets beyond, and we have vowed that we shall not see it governed by a hostile flag of conquest, but by a banner of freedom and peace. ...(중략)...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세계의 눈이 지금 우주를 향해, 달과 그 너머 행성들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맹세했습니다. 우주가 적의에 차 있는 정복의 깃발(=소련) 아래 지배되도록 좌시하지 않고, 자유와 평화의 깃발 아래 지배되도록 할 것을. ...(중략)...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우리는 10년 내에 달에 갈 것이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케네디가 60년대 안으로 인간을 달로 보냈다가 귀환시키겠다고 한 발언은 당시에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너무나 시간적으로 촉박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케네디가 아무 생각 없이 단지 하면 될 것이라는 담력 내지는 무모함으로 그런 발언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사전에 폰 브라운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 기술적 가능성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부터 달 탐험을 꿈꾸어왔던 폰 브라운은 케네디 대통령이 헌츠빌에 있는 우주 로켓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는 달 로켓으로서 새턴 로켓의 모형까지 만들어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구체적인 플랜에 케네디 대통령은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후 폰 브라운 팀의 기술력에 확신을 가지게 된 케네디는 10년 안에 달에 갔다 오겠다는 연설을 했던 것이다.
2.7.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소련의 우위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의 유인 달 탐사 구상 선언 이후에 미국과 소련의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다. 1964년 10월에는 소련이 최초로 다인승 우주선인 보스호드 1호를 성공시켰고, 1965년 5월에는 보스호드 2호가 최초로 우주유영(EVA)을 성공시키면서 미국과의 격차를 벌려 나갔다. 스푸트니크와 유리 가가린이 미국보다 단 몇 주 앞서 간발의 차이로 먼저 성공시켰다면, 이제는 미국이 뒤따라 잡는데 수개월 걸릴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1964년~1965년 경이 소련이 미국을 가장 앞섰던 시기였다.
그러자 서방 언론에서도 조바심을 냈다. 어떤면에서는 미국 언론보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직접 노출되어 있던 영국 등 서유럽 언론들이 더욱 조바심을 내며 미국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1960년대 당시 미소 우주 경쟁과 관련된 레퍼런스 소스의 상당 부분이 BBC 등 영국 언론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을 봐도 당시 서유럽 언론들이 미국의 우주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독 언론 역시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아도 자국 출신의 과학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우주 개발에 은근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미국은 소련과 격차가 벌어지며 더욱 뒤쳐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다가 귀환시킨다는 궁극적인 목표하에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단계적으로 계획을 이행하고 있었다. 이 점이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NASA의 책임자가 된 직후부터 달 착륙은 물론, 장기적으로 화성 착륙까지 염두에 둔 엄청난 출력을 지닌 거대 로켓 엔진의 개발에 착수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전권을 가진 총책임자로 미국의 계획을 총지휘했는데 자신의 로켓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 케네디에게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확답했고[10]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9월 라이스 대학의 '''We choose to go to the moon''' 연설에서 이미 다섯개의 거대한 F-1 엔진을 결합한 새턴 로켓을 개발하여 달에 갈 것이다라고 구체적인 플랜을 이야기했다. 폰 브라운이 이미 50년대부터 스스로 화성 착륙을 꿈꾸며 거대 로켓 엔진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NASA는 1963년에 이미 F-1 로켓 엔진의 테스트에 들어가고 있었다. F-1 로켓 엔진의 개발 덕분에 훗날 미국은 인간을 달에 보낼 수 있었다. 반면 소련은 이러한 고출력 엔진 개발에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문 레이스에 실패하고 말았다. F-1 로켓 엔진 개발은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60년대 중반 당시에 이는 눈에 띄는 성과도 아니었고 또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마냥 미국이 소련에 뒤쳐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이에 반해 소련은 장기적인 플랜이 미국보다 덜 구체적이었고, 최초의 인공위성, 그 다음엔 동물, 사람, 다인승, 여자, 우주여행 하는 식으로 보다 작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각각을 미국보다 앞서 성취하는 방식을 취했다.
2.8. 제미니 계획과 미국의 역전
때문에 1965년경 소련과 미국의 격차는 크게 벌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5년 중반을 분기점으로 미국이 제미니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소련이 여러가지 세계인들의 이목을 끄는 미션을 성공시키며 계속 미국을 앞서나가는 동안 미국은 지엽적인 목표들을 배격하고 오로지 인간을 달로 보낸다는 목표에 집중했고, 이를 위한 여러가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제미니 계획을 실시했다. 제미니 계획은 매우 정교하게 계획되었는데, 이 때문에 머큐리 계획이 종료되고 나서도 2년 후인 1965년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그 2년 동안 사람들은 미국이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사이에 소련은 훨씬 더 앞서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1965년 중반에 일단 제미니 계획이 시작되자 그야말로 숨돌릴 틈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며 다인승 우주선, 유주유영, 랑데부, 장기간 우주체류, 도킹 등 여러 목표들을 순차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연이어 성공시켰다. 제미니 계획의 이런 미션들은 소련과의 단기적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달에 인간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기술들을 성공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2.9. 뒤쳐져 가는 소련, 미국의 유인 달 착륙 경쟁 승리
소련 역시 이번에도 미국보다 먼저 인간을 달에 보내자'''라는 각오로 임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소련의 달 착륙 계획은 'L3 계획'이라 불렸다. L3 계획은 발사체인 N1 로켓, 우주선인 소유즈, 달 착륙선의 개발로 나눠었다.
이중 가장 진행 속도가 빨랐던 것은 우주선인 소유즈의 개발이었다. 코룔로프가 구상한 소유즈 우주선은 1967년 첫 유인 발사를 가졌으나 조종사가 사망하는 사고를 겪었다. 이후 문제점을 보완하여 1968년 10월에야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미국이 아폴로 7호로 첫 유인 우주 비행을 성공한 것 보다 2주 뒤쳐진 것이었다. 소유즈 이외의 나머지 부분의 개발은 더욱 더딘 상황이었다.
문 레이스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기술은 인간과 달착륙선을 달까지 보낼 수 있는 추진력을 가진 거대한 로켓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미국의 베르너 폰 브라운은 NASA가 설립된 직후인 1959년 거대한 로켓 엔진 개발에 착수하고 있었다. 아직 케네디 대통령이 인간을 달로 보내겠다고 얘기하기도 전이었다. 브라운의 꿈은 화성 탐사였기 때문에 그가 개발한 F-1 로켓 엔진의 추진력은 인간을 달로 보내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폰 브라운은 머큐리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63년에 벌써 F-1 로켓 엔진의 프로토타입을 완성했고, F-1 로켓 엔진 5개를 조합하여 새턴 V 로켓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11]
반면 소련은 거대 로켓을 개발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코룔로프와 그의 동료 우주 공학자들은 R-7의 엔진보다 더 큰 출력을 가진 로켓 엔진을 개발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코룔로프는 고만고만한 추진력을 가진 엔진을 무려 30개나 결합한 N1 로켓을 구상했다. 그러나 30개나 되는 엔진들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66년 1월 코룔로프의 죽음 이후 소련의 우주 개발 계획 속도는 크게 둔화되었다.
그러는 사이 미국은 이미 1967년말에 새턴 V 로켓의 무인 발사에 성공했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N1 로켓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었고, 그 사이 미국은 1968년말 아폴로 8호를 성공시킴으로써 달 착륙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알렸다. 소련은 1969년 2월 21일에야 N1의 첫 무인 시범 발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N1은 발사후 68초만에 폭발하고 말았다.[12] 이 시점에서 문 레이스는 거의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N1의 무인 발사가 성공했다 하더라도 미국보다 먼저 달에 갔다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소련은 미국이 아폴로 11호를 발사시키기 직전인 7월 3일 N1의 무인 발사를 다시 한번 시도했으나 발사 직후에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발사대에서 가로로 넘어지면서 폭발한 나머지 부근에 있던 다른 발사대까지 모두 박살내 버렸다. 결국 보름 후 발사된 아폴로 11호가 성공하면서 문 레이스는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문 레이스는 미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폴로 11호가 성공한 후에도 소련은 유인 달 탐사 계획을 곧바로 접지는 않았다. 우주계획에 있어 철저한 비밀주의를 고수했고, 오직 성공했을 때만 그 결과를 발표해오던 소련은 유인 달 탐사 계획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소련은 N1의 폭발과 함께 박살이 난 발사대를 복구한 후 1971년 6월과 1972년 11월말 N1의 무인 시범 발사를 두 차례 더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1974년 11월 N1 로켓의 5차 발사가 예정되었으나, 소련 당국은 1974년 5월 마침내 달 착륙 계획을 완전히 중단시켰다. 이어 소련은 유인 달탐사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철저히 폐기했다.
사실 소련은 유인 달 탐사 계획 이외에도 60년대 중반부터 무인 달 탐사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이 덕분에 60년대 중후반 소련이 달 탐사에서도 계속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소련은 루나 탐사선을 통해 달의 무인 탐사를 처음으로 수행했다. 루나 2호는 달에 성공적으로 충돌하였으며, 루나 9호는 달에 최초로 착륙했으며 이는 TV로 중계되었다. 또한 달 뒷면의 사진을 찍었고, 후기의 루나 탐사선은 월석을 체취하여 지구로 성공적으로 귀환하는 등 이번에도 소련이 먼저 선점을 할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무인 달 탐사는 그다지 의미 없다고 판단하여 일절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유인 달 착륙 계획에만 역량을 집중시켰다.
소련은 결국 달에 인간을 보내는데 실패했지만 소련도 이 달 착륙 경쟁에서 얻은 것도 있었다. 소련은 이후 이 달 착륙 경쟁에서 개발한 소유즈를 잘 활용하게 되고, 미국도 남은 로켓을 사용하여 스카이랩과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 사용한다. 일단 역사가들의 평가로는 ASTP를 끝으로 우주 경쟁은 종지부를 찍었다고 보는 편. 하지만 이후로도 미국과 소련/러시아는 적대적이지 않다 뿐이지 경쟁심을 유지하며 온갖 돈지랄을 이어간다.
2.10. 행성 탐사
비록 달 착륙이 미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소련과 미국은 지구계를 벗어나 태양계에서도 경쟁 중이었다. 미국은 이미 매리너 계획을 통해서 수성, 금성, 화성의 궤도를 스쳐지나가는 방식으로 탐사를 진행 중이었지만, 아폴로 11호가 착륙하고 나서도 그 어떤 국가도 다른 행성에 탐사선을 착륙시키지는 못했다. 심지어는 행성에 궤도 형성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소련은 1970년 최초의 무인 달 탐사 로버인 루나호드를 달에 보낸 경험을 토대로, 마스 계획을 통해 화성에 탐사선을 보냈지만, 대부분은 착륙에 실패하거나 착륙 도중 통신이 끊겼다. 최초로 화성에 착륙한 마스 4호는 화성 표면에서 최초로 인류에게 전파를 송신했지만, 15초 후 알 수 없는 이유로 통신이 끊겼다.
1972년, 미국은 파이오니어 10호를 발사해 최초로 목성을 근접 비행했다. 파이오니어 10호는 2003년 통신이 두절되어 지금도 태양계 밖으로 나아가고 있다.
1973년, 미국은 매리너 10호를 발사하여 수성으로 보냈고, 최초로 근접 비행하였다. 2011년 메신저호가 수성에 갈 때까지 무려 38년동안 수성을 방문한 최초이자 마지막 탐사선이었다.
하지만 소련도 이를 가만 볼 수 없어, 금성 탐사를 위한 베네라 계획을 진행하게 된다. 1975년 베네라 9호가 발사되었고, 이 탐사선은 최초로 다른 행성에서 사진을 보내온 탐사선이 되었다.
이렇게 소련이 금성에 집중하는 동안, 미국은 화성에 탐사선을 보냈다. 미국은 바이킹 1호를 발사함으로써 화성에서 최초로 성공적인 미션 수행을 한 탐사선을 만들어냈다.
1977년에는 미국이 보이저 1호를 발사하면서 외행성 탐사 부문에서도 미국이 앞서나가기 시작한다.
2.11. 우주 정거장 개발과 우주왕복선
인공위성이 실현되고 달에도 인간이 다녀오자 인간을 우주공간에서 장시간 머물게 할 아이디어로 이어졌는데, 이 결실이 우주 정거장이라 볼 수 있다. 역시나 이 계획들도 여전히 경쟁중이던 소련과 미국에서 추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은 달착륙과 아폴로 계획에 주력하고 있었기에 70년대 초반에도 몇몇 우주정거장을 계획만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달에서의 패배가 확실했기에 달 유인착륙계획은 정리하고 무인 탐사선들과 살류트 계획을 추진하여 미국보다 빨리 샬류트 1호를 우주로 쏘아올리는데 성공한다.
세계 최초의 우주 정거장인 샬류트 1호는 1971년 발사 되었다. 이후 살류트 2호를 제외한 모든 우주 정거장에는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떠난 우주 비행사들이 체류했다. 살류트 6호와 7호에는 여분의 도킹 포트가 있어서 다른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 정거장에 거주하는 승무원 들을 방문하거나 프로그레스 우주선이 지구 에서 별도의 보급품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살류트 우주 정거장의 크기는 이동주택 정도 였고 1982년 발사된 살류트 7호는 4년 동안 가동되었다. 이후 소련은 살류트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모듈식 우주 정거장인 미르를 건설하였다.
한편 미국도 이에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아 프리덤이라는 우주 정거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 우주 정거장을 지을 때 사용할 우주선으로 우주왕복선이 개발되었으나, STS-51-L 이후 이 우주 정거장 계획이 백지화되며 우주왕복선만 남게 된다.
2.12. 소련 해체, ISS
이후 소련이 해체되어 러시아가 되고 양국간의 관계가 완화되자 예산이 모자라 우주정거장을 제작할 수 없었던(러시아는 미르 II, 미국은 알파) 두 단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992년에 우주 개발에 관해 협력을 선언하고 1993년 ISS의 건설을 추진을 합의하게 된다. 이후 1994년 셔틀-미르 계획이 이루어져 러시아의 우주인 세르게이 크리칼료프와 미국의 우주인 노먼 태거드가 각각 STS-60 디스커버리, 소유즈 TM-21에 탑승하고, 1995년에는 STS-63 디스커버리가 러시아 우주인 블라디미르 티토프를 태우고 미르와 랑데부한데 이어 STS-71 아틀란티스가 미르에 도킹, 승무원 로테이션을 실시했다. 이 계획은 총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2단계와 3단계가 바로 ISS의 건설과 운용. 2001년 데스티니 모듈이 ISS에 도킹하여 조립되며 2단계가 완료되었고 3단계는 ISS의 계획이 끝나는 2024년까지 지속될 예정이다.
3. 민간 기업의 우주 경쟁
ISS는 우주 개발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될만한 작품이었으나 문제는 ISS 이후로 우주개발 기술 수준이 한동안 그대로 정체되어버렸다시피 했다는 것. 냉전이 끝나면서 당장 수입으로 연결되지 않은 유인 우주선이나 행성간 우주선 발사에 기를 쓰고 정부 예산을 지출할 필요가 없어져버린 것이 정치적인 이유이고 미국은 우주왕복선의 사실상의 실패,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로 추가적인 연구자원을 제대로 투입하지 못해 소유즈 로켓이나 마르고 닳도록 쏴대는 등의 이유도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우주개발은 정체기에 들어갔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래리 페이지와 같은 실리콘 밸리의 스타들이 등장하며 사회적인 기술 투자의 관심사 역시 정보 기술 산업 쪽으로 집중되었고 이 방면의 기술은 SF 소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급격히 발전하는 동안[14] 로켓 개발은 국가와 사회의 외면 속에 방치되다시피 했다. 컨스텔레이션 계획과 아르테미스 계획은 여전한 고비용으로 인류에게 지구 밖 행성이나 위성에 발자국 찍고 돌아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주긴 아직 멀었다는 반증 밖에 되지 못해 화성 탐사와 화성 개발에는 여전히 수백년의 갭이 놓여있다는 예상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1. 재사용 로켓의 등장
2010년대에 접어들어 민간 우주기업인 스페이스X와 블루 오리진은 로켓 재활용을 위한 수직 착륙 기술의 실험 성공을 공개하며 새로운 우주 경쟁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스페이스X의 그래스 호퍼 테스트 로켓(2013)
블루 오리진의 뉴 셰퍼드 테스트 로켓(2015)
2015년 12월 스페이스X의 실 사용 로켓인 팰컨 9이 최초로 착륙에 성공하며 이 기술의 실용화를 알렸고 적어도 저궤도에서는 로켓 발사가 막대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산업이 되었음을 증명하였다.
3.2. 위성 인터넷 사업
위성 발사 비용이 낮아지기 시작하며 기존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민간 사업 영역의 초대규모 우주 프로젝트가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대형 우주 프로젝트라고 하면 허블 망원경, ISS와 같은 커다란 위성체 하나를 궤도에 올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저궤도 위성 인터넷 프로젝트는 수천개~수만개의 위성을 저궤도에 뿌려놓는다는 위성의 숫자로 그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스페이스X의 스타링크 프로젝트, 블루 오리진의 프로젝트 카이퍼, 손 마사요시의 투자와 러시아의 로켓으로 진행되는 원웹 프로젝트 등이 유사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으며 이 프로젝트들이 모두 완성된다고 가정하면 지구 저궤도는 아머드 코어 시리즈의 어설트 셀을 방불케하는 밀도로 위성들이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3.3. 달 및 화성 탐사
달 궤도 우주 정거장으로 계획중인 루나 게이트웨이는 새턴 V로켓 수준의 출력을 가진 대형 로켓이 지금의 ISS 택배를 담당하는 저궤도 로켓들만큼 자주 발사되어 달과 지구를 오갈 수 있어야 한다는 가정 하에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 역할을 맡을 NASA의 SLS 로켓의 가성비는 창렬함의 끝을 달리는 수준이었고 아폴로 계획을 가볍게 능가할 물량이 달로 향해야 할 상황에서 이 프로젝트의 소요 예산은 미국 정부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크고 아름다운 출력을 내면서도 가격은 획기적으로 저렴할 것으로 예상되는 블루 오리진의 뉴 글렌 로켓이나 스페이스X의 스타십 로켓이 아니라면 사실상 진행이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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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오리진의 CEO 제프 베조스는 이런 절박한 분위기를 이용해 아예 달 착륙선 '''Blue Moon'''까지 뉴 글렌 로켓과 함께 패키지로 구매할 것을 미국 정부에 제안하는 상술을 보여주고 있다. 지구에서 만렙을 찍은 상술로 유명한 아마존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우주 제일의 장사꾼을 목표로 하는 듯 하다.
한편 블루 오리진과 NASA를 상대로 경쟁에서 한참 앞서나가고 있는 스페이스X는 달은 안중에 없이 화성을 목표로 로켓을 개발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스타십 항목 참조.
스페이스X의 계획은 단순한 화성 유인 탐사가 아닌 유인 착륙과 동시에 화성 개발이 시작되는 비지니스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아르카디아 평원이 착륙 지점으로 준비 중인 이유 역시 해당 지점에서 화성 도시를 건설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화성에 갈 능력이 있다면 달까지 도달하는 것은 부록처럼 얻어지는 능력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스타십 로켓을 이용해 2023년 유인 달 탐사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블루 오리진처럼 고전적인 달 착륙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화성에 착륙하고 SSTO 방식으로 화성 중력권에서 이탈할 스타십 2단 로켓을 그대로 달 착륙에 사용하는 계획이다. 한 마디로 오버스펙. 소 잡는 칼로 준비운동 삼아 닭을 잡겠다는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