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평가

 


1. 당대
2. 사후
2.1. 조선 초
2.2. 조선 중기
2.3. 근현대
3. 그 외


1. 당대


폐세자 되기 전까지의 양녕의 기록은 대개 천박한 무리들과 어울려 시장바닥을 헤매고 다닌다거나, 이런저런 여자와 더러운 스캔들을 만드는 경우로 까이는 게 많았다.
폐세자 시절의 행동을 가지고 인륜을 벗어난 막장이니 뭐니 하지만, 최소한 세자 시절동안엔 인륜을 벗어났다고 할 정도의 막장행각은 의외로 별로 없었다. 단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어리와의 간통사건도 인간으로서 도덕 개념 없음을 인증한 것이라면 모르되, 인륜까지 저버린 사건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큰아버지인 정종이 아끼던 기생과 관계를 갖기도 했지만, 일단 이건 모르고 한 일이기에 어떻게든 무마되었다.
하지만 폐세자 이후를 본다면? 세종대왕의 한결같은 은혜를, 세종 후손들의 골육상쟁을 부추기는 것으로 갚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역덕후들에게는 인간말종으로 여겨져 까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동생의 적장손을 죽인 것으로 모자라, 자기 아들의 첩까지 빼앗았다.[1] 이 일로 인해, 그 아들이 반쯤 미쳐서 이후 아버지보다 더한 인간말종의 길을 걷다가, 유배지에서 자결 시도를 한 후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는데, 양녕대군의 적자 중 3남인 서산군 이혜가 그 주인공.
이혜는 아버지 양녕대군보다 더한 막장짓이 많았다. 단오절(端午節)에 금지된 석전(石戰)을 하다가 탄핵받고 충청도 진천군으로 추방당했다든지, 한 기생을 차지하겠다고 다른 사람과 싸움을 벌여 또 탄핵을 받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벌이고 남의 첩을 빼앗기도 했으며, 사람을 때려죽이라고 시켰다.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가 사람을 다치게 한 일도 있었다. 결국 세종 29년(1447년) 10월 3일,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종부시(宗簿寺)[2]에서 그 죄를 청하자, 세종은 '직첩(職牒)[3]을 거두어 고성현에 안치하고, 그 도의 감사에게 일러 밭과 집을 주게 하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사냥을 나가지 못하게 하며, 또 바깥사람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실록》 세종 32년(1450년)의 기사에서는, 이러한 명령을 내린 데에, '혜는 양녕대군 이제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한테 빼앗기고 울화병이 생겨, 술김에 사람을 자꾸 죽여 이러한 명령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왕자의 아들인 군(君)의 칭호를 몰수당하고, 서산'''윤(尹)'''으로 강등 당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는지 사람을 구타한 일로 이마저도 서산윤에서 '''황계령(黃溪令)'''[4]으로 강등되었다. 세종이 승하한 직후 유배지에서 도망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양녕대군이 사람을 시켜 찾게 했으나 소득은 없었다. 그 동안에 금강산에 입산해 지내다가 돌아왔으며, 문종 2년(1451년)에 유배지에서 자결을 시도하여, 그 후유증으로 같은 해 4월 10일, 사망했다.
사실 양녕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 어머니, 동생 복을 타고났다는 시각도 있다. 그 냉혈한 군주인 부왕 태종은 자식들에게, 특히 장자인 양녕에게 한없이 물렀고, 모후 원경왕후는 양녕이 폐세자 되기 직전까지도 양녕을 두둔했으며, 그가 폐세자 되고 대신 세자 자리와 왕위에 오른 동생 세종대왕은, 양녕의 비행을 끝까지 눈감아 주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태종 이방원이 아닌 '''영조고려 광종이었다고 생각해보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조선사 전체를 봐도, '''인위적으로 폐위된 세자가 여생을 누린 경우'''는 양녕이 '''유일'''하다.[5]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王兄佛兄)"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양반의 생애를 묘사하는말로 그보다 어울리는 말은 없다고 해도 될 수준. 나머지 남동생들은 예의바르고 의젓하고 인정도 많았는데 양녕은 비정하고 방탕하고 철없다는게 대수였다.
온갖가지 비행과 말썽이 백성들의 동정론을 불러오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로 볼 수 없는게 세종 사후에도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민폐와 말썽을 골라 피워댔다.

2. 사후



2.1. 조선 초


이렇게 생전에는 망나니였던 양녕대군은 사후에는 도리어 평가가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심지어 폐세자 된 사연이, 아우가 성인(聖人)인 것을 알고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는 이야기로 둔갑하게 된다. 사실 조선 전기의 기록에서는 양녕의 세자 양보설을 찾아볼 수 없다.
양녕이 사망한 해에 급제해서 조정에 들어와 세조 시대에 벼슬을 지낸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만 해도,

"양녕이 세자로 있을 때에, 노래와 여자에게만 빠져서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

라고 하면서 '''대놓고 까고 있다'''. 다만 《용재총화》에서는 또,

"양녕이 비록 실덕(失德)하여 세자의 위는 폐함을 당했지만, 만년에는 때를 따라서 스스로를 숨겼다."

라고 세조와 농담을 주고받은 것도 기록하면서, 미약하게나마 실드를 쳐주고 있다. 또 선조시대에 써진 《동각잡기》에도 양녕대군을 상당히 까고 있어서, 이 시기까지만 해도 양녕대군에게 긍정적인 여론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 자신도 《선조실록》의 기록에서…

옛날에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매우 광패(狂悖)하였으므로 외방에 두었으나 제어하지 못하였다. ㅡ 선조 34년 신축(1601) 2월 10일(기묘) 기사 중

고 언급하여, 양녕대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6]

2.2. 조선 중기


그런데 《선조실록》에서 양녕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옛날 태종조(太宗朝)에 양녕 대군 이제(讓寧大君 李禔)는 세종(世宗)이 응부(應符)한 것을 알고는 즉시 미친체 하였다. 그리하여 강관(講官)이 진달하는 글은 모두 읽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언문(諺文)으로 번역한 연후에야 진달하도록 허락하였다'''. 어느 날 야반(夜半)에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 李𥙷)의 집에 뛰어 들어가자, 효령 일가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양녕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 효령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말을 하고는 돌아왔다. 동틀 녘에 효령 역시 가사(袈裟)를 걸치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고 말았다. 양녕은 또 복중(服中)에 궁성(宮城)을 넘어서 양주(楊州)의 기사(妓舍)로 가거나, 혹 사냥꾼들과 함께 응견(鷹犬)을 싣고 산골짜기로 출입하거나 하였으므로, 태종이 대노한 나머지 주청(奏請)하여 폐위(廢位)시키고, 세종을 세자로 세웠다. 대개 효령은 차서가 세종 위에 있었으므로, 양녕 자신이 폐위당하여도 효령에게 죄가 없으면 세종이 설 수 없을까 염려한 나머지 귀엣말을 한 것으로, 실은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세종이 즉위하여서는 우애가 지극히 돈독하였다. ㅡ 선조 36년 계묘(1603, 만력 31) 3월 9일(을축) 사관의 논(論) 중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뭔가 이 사관은 좀 당황스럽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게 언제인데(1443년 12월)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1400~1418)에 언문(諺文)읽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7] 게다가 효령대군이 아예 출가를 했다는 황당한 이야기까지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완전히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조시대의 문신 김시양이 쓴 《자해필담》이다.

양녕대군은 세자가 되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체하고 사양하니, 태종이 결국 폐하고 세종을 세웠다.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자기의 재주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이럭저럭 지냈기 때문에, 내외(內外)ㆍ상하(上下)에 모두 환심을 얻었고, 세종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매양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고 거의 매일 서로 즐겼다. 여러 번 잔치하는 기구를 주셨고,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세종이 여러 번 성 밖으로 나가 청하니, 지극한 정의가 무간(無間)하였다. 세조(世祖)가 임금이 된 뒤에 왕자와 대신이 많이 죽음을 당하였지만, 양녕은 능히 지혜로써 스스로를 보전하였고, 세조도 혐의 없이 높이 대우하니, 사람들은 그가 임금 자리를 사양하여 어진 이에게 밀어 준 것을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고, 끝까지 몸을 잘 보전한 것을 더욱 어렵다 하였다.

이렇게 세자 양보설을 주장하였고, 또한 양녕대군의 문재(文才)를 칭찬하기도 했다.

양녕은 젊어서부터 문장을 잘 하였으나, 세종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보고 짐짓 글을 모르는 체하고 미친 체하여 방자히 놀았기 때문에, 태종도 글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중간에 양녕의 시를 기술) 비록 문인(文人)이라고 하는 사람도, 필시 이보다 훨씬 낫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연대 미상의 조선말기 이야기책인 《축수편》에서는,

양녕이 비록 실덕(失德)을 하여 폐함을 당하였지만, '''미친 체하고 방랑하는 것이 실로 태백(泰伯)과 같다고 하였다'''.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崇禮門) 석 자는 그가 쓴 글씨로서, 웅장하고 뛰어남은 그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라고 하여, 그를 옛날 주나라(周)의 태백(泰伯)[8]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실학자라고 하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양녕에 대한 평가는,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였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여,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

즉, '''세자 양보설이 생겨난 것은 조선시대에서도 상당히 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로는 많은 기록에서 양녕대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세자 양보설 때문에, 단순한 난봉꾼이던 양녕대군의 이미지는, '권력을 버리고 쾌락을 택한 호남아' 정도로 향상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숙종 원년인 1675년, 양녕대군의 외손계열인 허목의 주청으로 세자 양보설은 완전히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어, 양녕대군은 태백과 같이 덕이 있는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한 현인이라는 명분으로 사당에 모셔지게 된다.[9] 덤으로 효령대군도 같이 모셔졌다. 이후 1789년에는 정조의 친필 편액까지 내려왔다. 이 지덕사는 원래 숭례문 밖인 도동에 있었으나, 1912년, 일제에 의해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로써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양녕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출처불명의 낭설이 돌기 시작했으며, 서서히 이것이 국가의 공식적인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이런 "와전된 사실"이 나도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세자였던 인물인데, '''개망나니 짓을 하다 폐위 당했다'''보다는 '''동생이 어진 것을 알고 일부러 왕위를 양보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왕실의 체통을 위해서라도 더 낫지 않은가. 사실 양녕대군의 비행이 문제가 되던 조선 전기에도 왕실의 체통을 염두해서 양녕의 이미지를 최대한 좋게하려던 흔적이 보인다. 바로 양녕대군의 군호이다. '양녕(讓寧)'의 '양(讓)'이 바로 ''''양'''보한다', '사'''양'''한다'는 뜻이다.[10]
게다가 이런 야사가 공식화 되는 건 왕실 체통을 살리는 것과 동시에 세종의 위엄을 강조하는 효과도 있으니 세종의 후손인 조선 후기 왕들에게도 나쁠 게 없다. 조선 전기에야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양녕대군의 비행을 비판할 필요라도 있었지만, 선조 재위기 정도 되면 백 년 전에 죽은 양녕대군을 포장해준다고 정통성에 흠이 나지도 않을테고.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만 해도 흑역사급 조상들에 대해서는 삭제나 왜곡을 해서라도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경우가 허다한데 하물며 왕족, 그것도 왕의 친아들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액면 그대로 기록해 눈살을 찌푸리게 할 필요가 있을까?

2.3. 근현대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도 이런 시각이 굳어지게 된다. 근대기에 이르러서는 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 《세종대왕》, 《양녕대군》에서 이 설이 차용되면서, 완전히 평판이 굳어지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전문가들이나 한학자들이나 보는 수준이었고, 대중적으로 연려실기술이 작가들이 훨신 접하기 쉬운책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점도 감안해야되지만.
월탄 박종화는 양녕대군에 대해서 왕조시대와는 또 다른 해석을 하나 했다. 기존의 '양보설'과 양녕대군의 방탕한 모습을 조합한 정신적 해석으로서, 바로 '''양녕대군은 태조, 태종 시기의 살육에 혐오감을 느꼈고, 권력을 버리고 인간적인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했다'''는 '예술가적 해석'이다. 이 때문에 양녕대군의 행동은 단순한 위악적인 모습을 넘어서, 호탕하고 인간적이고 통쾌하고 뭐 그런 "현대적인" 수식어까지 얻게 된다. 뭐 《세종대왕》 머리말에서는, 아예 대놓고 '부정적 인간형' 양녕대군과, '긍정적 인간형' 세종대왕을 대비하여 탐구해보겠다고 밝히고 있으니까.
방송, 드라마 업계에서는 특히 이러한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90년대의 드라마 《용의 눈물》 역시 이런 관점에서 써진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이 드라마는 월탄의 《세종대왕》을 원작으로 삼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비록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었을 시점에 제작되었기에 조선왕조실록을 어느정도 참고해서 썼다고는 하지만 야사들도 많이 반영한 결과이다. 사실 현대인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머리 좋고 재능 있지만, 놀기 좋아하고 인간적인' 이미지의 양녕대군은, 9할 이상이 이 드라마의 이민우의 본좌연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조흔파의 주유천하같은 책을 보면 양녕대군이 매우 긍정적으로 쓰여있고, 양녕대군의 부정적인 면모가 대중들에게 화자되기 시작한것은 조선왕조실록이 인터넷에 공개된 21세기 들어서의 일이었다.
2014년 2월 9일에 KBS 교양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 양녕대군에 관해 다루었는데, 참석한 이해영 영화감독은, 자꾸만 양녕대군을 세속의 부와 권력을 초월한 호탕하고 통쾌한 인물[11]로 해석하여, 같이 있던 역사학자의 안색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 역사학자가 "그 양반 단종 죽이는 데도 한몫 했을 정도로 권력에 기웃거린 양반입니다만?"이라고 지적해줘도, "그냥 살고 싶어서 세자 자리를 그만둔, 조선사에 통쾌함을 남긴 남자" 라고 결론을 짓는 등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그 옆에 있던 인문사회학자 남경태는, "태종은 양녕대군을 보면서 참 나를 닮았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시인 류근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태종이 집권 과정에서 피를 많이 뿌렸고, 왕이 된 후에 여색을 밝힌 것을 보아, 패륜아이면서 풍류를 좋아하는 면을 닮았다고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일단 태종은 공사 구분도 못하고 놀기만 하던 무책임하고 한심한 인간이 결코 아니었다[12].

3. 그 외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임진왜란 시기에 양녕대군과 유사한 사례가 하나 더 나타난다는 것. 바로 광해군의 형 임해군이다. 다만, 이 양반은 사고 치는 스케일이 양녕대군보다 더 컸고, 결국 곱게 가지도 못했다. 쉴드는 전혀 받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쓰레기라는 올바른 평가를 받고 있다.

[1] 폐세자 시절의 행위와 달리, 이건 어떤 변론의 여지도 없는 인간말종의 행위다. 이 덕분에 양녕은 인간말종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2] 오타가 아니다. 관청 시(寺)라고도 하며, 왕실의 계보를 찬록(撰錄)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官衙)였다. 이를테면 국가기록원+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검찰의 종합판이었달까.[3]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4] 령(令)은 종5품 종친의 작위이다.[5] 양녕 외에 조선에서 폐위된 세자는 이방석, 폐세자 이황, 폐세자 이지, 사도세자가 있는데 저들은 정변이나 반정으로 폐위되거나 막장스런 사태로 폐위된 터라 여생을 누리고 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6] 임해군은 말이 더 필요없는 쓰레기고 광해군은 처음엔 잘 했는데 왕되고 나서 끝없는 옥사와 궁궐 공사 등으로 왕 되기 이전의 평판이 무색해졌고 순화군은 임해군보다는 낫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툭하면 사람죽이는 살인마, 정원군은 앞에 나온 임해군과 순화군보다도 더하다는 평가를 들었다.[7] 다만 여기서 언문이란 한자어는 꼭 한글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읽기 쉽게 구어체로 쓴 문장을 지칭할 수도 있다. 한글/역사 항목의 '언문' 단락 참조.[8] 주(周) 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 태왕이 그의 아우 계력(季歷)의 아들인 문왕(文王)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는 왕위를 계력에게 전하려 하자, 왕위를 아우 계력에게 양보하고서, 형월(荊越)지방으로 피하여 은둔하였음.[9] 단적으로 양녕대군이 모셔진 사당의 이름은 지덕사至德祠인데, 지덕至德이란 표현 자체가 공자가 태백을 일컫는 말이다.[10] 동, 서양을 막론하고 왕실에게 있어 체통이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실권 없이 상징으로 남아있는 왕실일지라도 왕실 인물이 불륜이나 욕설, 폭행 등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면 신문이나 뉴스에서 대서특필되지 않던가.[11] 설령 저들이 미화하는대로 양녕이 자의로 세자자리를 내줬다 한들 틀린 묘사이다. 나라와 민중을 위해 불철주야 일해야 하는 국왕의 자리 대신 자신은 아무런 생산적인 역할조차 하지 않으면서 핏줄 덕에 얻은 부와 지위로 평생 호의호식하며 행패 부리고 살겠다는 것이 어떻게 세속을 초월한 삶인지 의문. 도리어 더하기 힘들 정도로 지극히 세속적이다.[12] 물론 여성편력이 심해 부인이었던 원경왕후와 다툴정도로 문제가 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공신과 외척을 축출해 왕권을 강화하고 특히 외척에 대한 거의 알레르기성 반응을 가진 까닭에 자신의 처가, 심지어 사돈까지 정리해 세종대왕이 성군의 길을 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던 공로가 있다. 더구나 인텔리 출신 왕답게 경연에서도 아무도 알지 못했던 사례를 가지고 신료들을 GG치게 한 인물이다. 개망나니 양녕과 비교할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