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끝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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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발단과 정축지변
3. 정축지변 이후
4. 세조실록에 기록된 정축지변
5. 여담
6. 관련 문서


1. 소개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1] 동촌1리의 다른 이름. 조선 시대의 슬픈 역사 중 하나인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이 있다. 이 사건으로 순흥 안씨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평민으로 추락했으며 대부분의 순흥 안씨들이 순흥을 떠나 전국 각지[2]로 흩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마을 이름은 "피"가 냇물을 따라 흐르다 멈춰 "끝"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으며, 단종애사를 통해 유명해졌다.

2. 발단과 정축지변


계유정난을 통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축출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동복 동생인 금성대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여 눈 밖에 난 금성대군은 계속하여 유배지가 옮겨지다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순흥도호부(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로 보내진다.
그러나 의지의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입을 맞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시녀 김련과 관노가 격문을 빼내 밀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나 버렸다. 당시 풍기(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현감이던 김효급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알렸다.[3] 이때가 세조 3년이던 1457년이었다. 단종을 복위를 시키려던 금성대군은 사사당했으며,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계속된 복위 운동으로 인해 단종도 결국에는 목을 매어 자살한다.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도시전설인 "정축지변"이 등장하는데, 정축지변은 안동부사 한명진(세조의 최측근인 한명회의 6촌)이 독단적으로 군세를 이끌고 와서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한양에서 철기병이 출동하여 2차 학살을 저질렀고, 이 때문에 당시 도호부였던 순흥은 황폐화되었고 근방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야사이다.
당시 순흥과 주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호(戶)가 284호, 구(口:인구)가 1,679명이었다.# [4] 토성(土姓 : 원래부터 그 지방에 살고 았는 성씨)은 안(安)·이(李)·신(申)·윤(尹)의 4성이었다.(세종실록지리지 1454년 기준) 워낙 정축지변 자체가 단종 복위 운동을 기반으로 한 도시전설이지만, 단종 복위 운동이 처절하게 진행되었으며[5], 세조의 찬탈에 대한 당시의 여론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단종애사의 묘사에 따르면 이때 순흥 청다리 아래 목 잘려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4km나 흘러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이며, 때문에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게 되었다.[6] 당시 순흥에 본적을 두고 있던 순흥 안씨는 이 때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3. 정축지변 이후


순흥은 역모의 땅이라 하여 온갖 차별을 받게 되었다. 당시 도호부였을 만큼 컸던 순흥은 단종 복위 운동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폐부가 되었으며, 넓은 땅덩어리는 각각 영천(榮川), 풍기, 봉화로 갈갈이 찢겨져 통합됐다.[7]
이 사건으로 순흥이 큰 고을이 되지 못하고 작은 시골로 현대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만약 순흥이 세조의 찬탈과 단종 복위 운동이라는 참화없이 계속 발전하였다면, 영주시(→ 순흥시)의 중심부는 현 시가지가 아니라 순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순흥의 위치상 순흥이 영천이나 풍기보다 더 큰 고을이었다 해도,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을 통폐합했던 일제의 의도 상(설령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고 한국 스스로 행정구역 개편을 했더라도) 현재와 같이 영천(영주)이나 풍기가 중심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순흥이 교통의 요충지가 되기는 어려운 것이, 순흥 서쪽은 소백산의 제1봉 비로봉이 정면으로 버티고 있다. 이런 소백산 아래에 철도터널을 뚫을 기술력은 1990년대는 되어야 한다. 당연히 도로든 철도든 풍기 옆 죽령으로 깔 수밖에 없고 죽령 교통로에서 순흥은 벗어나 있다. 타 지역의 예를 들면 전라북도 고부군도 정읍현보다 더 큰 고을이었지만, 부군면 통폐합호남선호남가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 정읍에 통합됐다. 또한 행정구역 등급은 순흥이 도호부로 더 높았지만, 위의 각주에 나왔듯 인구는 영천(현 영주 시가지)이 훨씬 더 많았다. 하천(서천) 하류 지역이고 교통이 발달해 고을의 입지 자체가 순흥보다 좋기 때문이다. 순흥이 속한 경북 북부가 쇠퇴한 지금 와서는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또 약 90여년 후 순흥에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정축지변 당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밤마다 울어대자, 이들을 달래기 위해 바위에 붉은 글씨로 경(敬)이라 새겼다는 '경자바위'의 유래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이야순(1755년 ~ 1831년)의 글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정축지변과 경자바위
금성대군 역시 이때 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왕실 족보라 할 수 있는 종적에서 지워지기까지 했다. 이때 연루된 자들은 영조 14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복권된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인 영조 18년 금성대군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한 금성단이 순흥에 세워진다.[8]
간혹 지역 주민들이 어린이들을 놀릴 때 '순흥의 청다리[9]에서 주워왔다'고 농담을 하는데, 흔히 전해지는 것처럼 방탕한 유생들의 사생아들을 이 다리에 버려 키운 것이 아니라, 도시전설인 정축지변 당시 고아가 된 어린 아이들이 이곳에 버려졌다가 키워진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마을은 영주시의 주요 관광지인 부석사소수서원(선비촌)으로 향하다 보면, 길가에 세워둔 큰 비석 덕분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4. 세조실록에 기록된 정축지변


1.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9일 기해 2번째 기사. 금성대군이 순흥에 안치된 후 역모를 꾸민 안순손 등을 처벌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유(李瑜)가 순흥에 안치(安置)된 뒤로부터, 다른 뜻이 있어 기관(記官) 중재(仲才)와 품관 안순손(安順孫)·김유성(金由性)·안처강(安處强)·안효우(安孝友)와 군사 황치(黃緻)·신극장(辛克長)과 향리(鄕吏) 김근(金根)·안당(安堂)·김각(金恪) 등에게 뇌물을 주어, 중재의 아들 호인(好仁)을 시켜, 옛 종[奴] 정유재(鄭有才)와 그의 무리인 범삼(凡三)·석정(石丁)·석구지(石仇知)·범이(凡伊) 및 풍산 관노(豐山官奴) 이동(李同)을 불러, 군사를 일으킬 것을 공모하고, 각각 병장을 휴대하게 하였으며, 또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에게 금정자(金頂子)와 산호 입영(珊瑚笠纓)을 주고, 또 말하기를, ‘공(公)은 근일에 반드시 당상관(堂上官)이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보흠이 이를 받지 않으니, 이유(李瑜)가 말하기를, ‘마땅히 다른 날 이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내려갔다는 것을 듣고, 거짓 말하기를, ‘유모(乳母) 소비(小非)가 내 첩자(妾子) 오을망(吾乙亡)을 발로 차서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이보흠과 중재(仲才)를 청하여 들여 이를 신문(訊問)하기를 청한다.’고 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데, 내가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 청컨대 공(公)은 군병을 모아서 나와 더불어 오늘 밤에 곧장 영천(榮川)을 공격하여, 영천에서 호응하지 않으면 군법(軍法)으로 종사(從事)하고, 즉시 안동(安東)으로 향하면, 안동은 나의 가동(家僮)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2, 3천의 병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를 호령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절제사·처치사(處置使), 제읍의 수령·교수관(敎授官) 등의 성명을 기록하고, 칼을 빼어 이보흠을 위협하여 서명(署名)하게 하고, 취각(吹角)과 타각고(打角鼓)를 시켜 빨리 인신(印信)과 군기(軍器)를 취득하라고 독촉하고, 종이를 중재에게 주어 패자(牌子)를 발급하여 군사를 모으게 하고, 스스로 맹세하는 글을 지어 이르기를, ‘간신(姦臣)이 정권(政權)을 마음대로 하고, 종친이 유도해 도와서 주상(主上)을 방출(放黜)하고 사직(社稷)을 전복(顚覆)하였으니, 한마음으로 광구(匡救)하되, 만일 두 가지 마음을 가지면, 천지의 신기(神祇)와 사직(社稷)·종묘(宗廟)의 신이 날로 이에 감림(監臨)할 것이다.’ 하고, 이보흠·중재(仲才)와 더불어 같이 서명(署名)하여 맹세하기를 요구하고, 드디어 이보흠에게 정자(頂子)·입영(笠纓) 및 단자의(段子衣)를 주었습니다. 이어서 견고한 갑옷[甲]을 찾으니 이보흠이 없다고 사절하였으나, 유가 다시 안동(安東)에 철갑(鐵甲)을 요청하고 이보흠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지금 풍기 군사(豐基郡事)를 죽령(竹嶺)으로 보내고, 문경 현감(聞慶縣監)은 초점(草岾)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끊게 하고, 그 오는 자를 거절하지 않으면, 본도에서 종사(從仕)하는 자는 처자(妻子)를 잊지 못하여 바람에 쏠리듯이 올 것이니, 인하여 군사를 모집한다면 성사(成事)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보흠이 일찍이 거짓으로 진양(鎭穰)한다 일컬으고, 맹인(盲人) 석경(石敬)을 (瑜)에게 보내어 유를 달래어 말하기를, ‘전조(前朝)의 왕자가 젊어서부터 중[僧]이 되어 화(禍)를 면한 자가 자못 많았다.’ 하고, 또 중[僧] 나부(懶夫)에게 묻기를, ‘유(瑜)가 이 고을에서 평생을 마치겠는가? 장차 서울로 돌아가겠는가?’ 하니, 나부가 대답하기를, ‘허몽상(虛蒙相)이 있다.’고 하여, 이보흠이 이를 유에게 말하니, 유가 말하기를, ‘내가 계양군(桂陽君)의 연고로 죄를 얻고 왔는데, 근래에는 위문하지도 않으니 일이 헤아리기 어려운 데에 있다. 너도 또한 두려워할 만하다. 너는 옛날 이용(李瑢)과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마침 지금 이 고을에 수령이 되었고, 나도 또한 이곳에 왔지만 지금은 죄의 유무도 묻지 않고 좌죄(坐罪)한다.’ 하니, 이보흠이 말하기를, ‘정난(靖難) 때는 그 사태가 매우 급하여 간혹 신문(訊問)하지 않고 저죄(抵罪)한 자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유가 이보흠과 더불어 모역(謀逆)한 것이 매우 명백합니다. 그 중재(仲才)·호인(好仁)·정유재(鄭有才)·석정(石丁)·범삼(凡三)·석구지(石仇知)·범이(凡伊)·이동(李同)·안순손(安順孫)·김유성(金由性)·안처강(安處强)·안효우(安孝友)·황치(黃緻)·김근(金根)·신극장(辛克長)·안당(安堂)·김각(金恪)은 모두 각각 승복(承服)하였으니, 다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법에 의해 연좌(緣坐)케 하며, 재산은 적몰(籍沒)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안순손·황치·김유성·안처강·안효우·신극장은 처참(處斬)하되, 연좌하지 말게 하고, 이보흠·김근은 (杖) 1백 대에 (流) 3천리에 처하고, 김각은 장 1백 대에, 안당은 장 80대에 처하며, 석경은 논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때 죄를 범한 자는 무지(無知)한 소민(小民)이 많았는데, 간사한 사람들이 속이고 미혹(迷惑)하여 정상이 의사(疑似)한 자도 또한 있었다. 임금이 조율장(照律狀)을 의정부에 내려 이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그 일이 반역(反逆)에 관계되었으므로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고 거의 무거운 법전을 따랐는데, 신숙주(申叔舟)는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어찌 많이 사람을 죽이겠는가? 마땅히 정상을 살펴 죄를 정해야 한다."

하였다. 이로써 생명을 온전히 한 자가 많았다.

2.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0일 경술 1번째 기사. 양녕대군이 세 번 노산군 등의 처벌을 청하자 대신들과 의논하겠다고 하다

양녕대군 이제(李禔) 등이 아뢰기를,

"전에 청한 이유(李瑜)와 노산군(魯山君)·이영(李瓔)·이어(李𤥽)·이전(李瑔)·정종(鄭悰)·송현수(宋玹壽) 등의 일을, 청컨대 속히 결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근일에 사무가 번다(繁多)하여 상량(商量)할 겨를이 없었다."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이와 같은 큰 일은 상량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보흠(李甫欽)도 죽지 않았으니,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른 것이 옳겠는가?"

하니, 또 아뢰기를,

"이보흠도 또한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말하는 바가 옳다. 마땅히 대신과 더불어 상세히 의논하겠다."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신숙주(申叔舟)·황수신(黃守身)·박중손(朴仲孫)이 아뢰기를,

"전일에 아뢴 바의 (瑜)와 노산군(魯山君)의 일을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상의 재가(裁可)를 입지 못하여, 신 등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감히 신총(宸聰)을 어지럽혔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보흠(李甫欽)도 죽지 않았으니, 어찌 죄는 같은 데 벌이 다른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이보흠의 죄도 또한 법과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러나 유(瑜)와는 조금 다릅니다. 청컨대 먼저 괴수를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와 같이 큰 일을 대신이 제회(齊會)하지 않고서 결단함이 옳겠는가? 마땅히 영의정과 더불어 같이 의논하겠다."

하였다.

3.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1일 신해 1번째 기사. 대간 등이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벌을 청하였으나 허락치 않다

근정문(勤政門)에 나아가서 조참(朝參)을 받았다. 고취(鼓吹)는 진설하고 연주하지는 않았다. 대간(臺諫)에서 이유(李瑜)와 노산군(魯山君)·이영(李瓔)·이어(李𤥽)·이전(李瑔)·송현수(宋玹壽) 등의 죄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죄는 분간(分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종친(宗親) 및 의정부(議政府)·충훈부(忠勳府)·육조(六曹)에서도 또한 이를 가지고 계청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누가 괴수(魁首)인가?"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전년의 변란으로써 본다면, 노산군(魯山君)이 괴수가 되고, 금일에 있어서는 유(瑜)가 괴수가 됩니다. 그러나 대역(大逆)이란 수종(首從)을 분간하지 않고 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청컨대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가서 영의정 정인지(鄭麟趾)·좌의정 정창손(鄭昌孫)·우의정 강맹경(姜孟卿)·좌찬성 신숙주(申叔舟)·우찬성 황수신(黃守身)·우참찬(右參贊) 박중손(朴仲孫)·예조 판서 이승손(李承孫)·병조 판서 홍달손(洪達孫)·공조 판서 심회(沈澮)·형조 판서 박원형(朴元亨)·도승지 조석문(曹錫文)을 인견하고, 관사(觀射)하였다. 사복(司僕)·내금위(內禁衛) 등이 3대(隊)로 나누어서 솔[侯]을 쏘았다. 지중추원사 홍윤성(洪允成)이 쏜 것은 명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임금이〉 내구마(內廐馬)를 내려 주었다.

4.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1일 신해 2번째 기사.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화의군 등을 금방에 처하다. 노산군이 자살하자 예로써 장사 지내다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듣건대, 유예부단(猶預不斷)하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고, 사은(私恩)으로 대의(大義)를 멸절(滅絶)하면 대계(大計)를 해친다고 합니다. 전일에 간흉(姦兇)들의 변란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참여하여 종사에 죄를 지었고, 이유(李瑜)는 그를 성원(聲援)하는 일당과 교결(交結)하고 불궤(不軌)할 것을 도모하여 신민이 함께 분노(憤怒)하는데, 전하께서 오히려 사사로운 은혜를 돌아보시고 차마 법에 두지 못하시어, 외방으로 옮겨 놓으시고 곡진히 성명(性命)을 보전케 하셨는데도, 오히려 그 재조(再造)의 덕(德)을 알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여 장차 노산군을 끼고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고 하였으니, 죄악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서 천지가 용납하지 않는데, 어찌 다시 용서하여 국법을 문란케 하겠습니까? 신 등이 누차 법을 바루시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분울(憤鬱)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영(李瓔)·이어(李𤥽)·이전(李瑔)·정종(鄭悰)·송현수(宋玹壽) 등의 흉악한 모역죄는, 왕법(王法)에 반드시 주살(誅殺)하여 용서하지 못할 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의로써 결단하시어 전형(典刑)을 바르게 밝히어서 화근(禍根)을 끊고 인심을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등이 상소하기를,

"그윽이 생각하건대, 은혜는 가볍고 의리는 무거운 것이어서, 대의가 있는 곳에는 친속(親屬)도 주멸(誅滅)하는 법입니다. 노산군의 전일의 변(變)은 그 죄가 종사에 관계되어 입으로 말할 수 없으며, 유는 화심(禍心)을 품고 불궤(不軌)를 꾀하였으니 죽어도 남는 죄가 있는데, 전하께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외방에 안치(安置)해 두었습니다. 은사(恩賜)가 많이 무거웠는데도, 오히려 성은(聖恩)을 생각하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서 반란을 시도하며 노산군을 끼려고 도모하였으니, 그 죄는 천지 사이에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뜻을 굽혀 그 죽음을 용서하시려고 하여 신 등이 여러 날 정청(庭請)을 계속하였으나, 유윤(兪允)을 입지 못하여, 대소 신료가 분통함과 억울함을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이영(李瓔)·이어(李𤥽)·전(瑔)·정종(鄭悰)·송현수(宋玹壽) 등의 일당이 반역한 죄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대의로써 결단하시어 전형(典刑)을 바르게 밝히시어 신민의 여망(輿望)에 부응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이유(李瑜)는 사사(賜死)하고, 영(瓔)·이어(李𤥽)·전(瑔)·송현수(宋玹壽)는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정인지 등이 다시 아뢰기를,

"영(瓔)·이어(李𤥽)·전(瑔)·정종(鄭悰)·송현수(宋玹壽)도 죄가 같으니, 또한 법대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불가하다. 옛 사람의 말에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협박에 못이겨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고, 또 성인(聖人)은 너무 심한 것은 하지 않았으니, 이제 만약 아울러서 법대로 처치한다면 이는 너무 심하다."

하고, 명하여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다시 영(瓔) 등의 금방(禁防)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5. 여담


정축지변이 도시전설인 이유는 바로 세조의 찬탈 과정과 단종 복위 운동 속에서 학살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독단적으로 군세를 일으켜서 순흥에서 학살하거나 철기병이 와서 순흥을 처참한 지경으로 황폐화 되었다는 기록이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정축지변 때 진두지휘한 사람이 안동부사 한명진이라 기술되어 있으나,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조 4년 당시 안동부사는 조안효이다. 한명진이란 이름은 세조실록 전체에서 찾아보기 힘든데, 왜냐하면 2년 전인 1454년에 이미 죽었다.
게다가 저 정도의 학살을 저지를 정도면 군사도 많이 동원했을텐데 그런 기록은 없다. 더구나 '철기군'을 동원했다면 평안도, 함경도의 정예군 또는 한양의 경군을 동원했다는 말인데, 실록 등에는 그런 대규모의 병력 이동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
또한 금성대군으로 인하여 후에 순흥 지역을 다른 행정구역과 해체한 것은 맞으나, 해당 기록을 살펴보면 관에서 일하는 아전, 호장 등은 처형이 아닌 다른 고을로 이전시키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행정구역 조정 이후 경상도 관찰사가 보낸 상소에서 사람이 많아 합속시킬 수 없다는 문구가 나오는데, 그런 대학살이 있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또한 조선은, 단지 반역모의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한 고을을 통째로 제노사이드시킬 정도로 무식하게 막나갈 수 있는 국가가 절대로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고을 사람 상당수가 합세하여 실제로 반란을 저지른 몇몇 사례(이징옥의 난, 홍경래의 난 등)에서도 전투와는 상관없는 대량 학살을 저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전 왕조인 고려 때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보통은 반역향 지정을 통해 지역을 격하하고 지역차별을 유도하는 식으로 제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6. 관련 문서




[1] 1914년 일제의 부군면 통폐합 전에는 순흥군이 아닌 풍기군 대부분과 영천(榮川)군 일부였는데, 후술하듯이 원래는 순흥부였다가 본 사건으로 폐지되고 풍기, 영천에 통폐합됐다가, 훗날 순흥부가 복설(復設)될 때 순흥부에 편입되지 않고 그대로 풍기와 영천의 일부로 남았다. 현재도 순흥면과 접하긴 하지만, 영주 시내와 풍기읍 사이에 끼어있어 실제로 이들과 생활권이 더 밀접하다.[2] 주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 등지[3] 여기에는 다른 속사정이 존재하는데 사실은 김효급이 관노가 빼돌린 격문을 뒤쫓아가 가로채서 공을 세웠다고 한다.[4] 같은 지면에 기록된 영천군은 377호 5,902인, 풍기군은 160호 1,511인으로 기록되어 있다.[5] 역사가들은 단종 복위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이 이 중에서 어림잡아 약 300여명 정도가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6] 원래 동촌리는 원래 순흥부 대평면 우음리(구도리)였으나, 순흥의 폐부와 함께 풍기군 동촌면으로 개편된 후 다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정면 동촌리로 변경되었다.[7] 이후 숙종 때 순흥부가 복구되지만, 1914년 일제의 부군면 통폐합 때 영천(榮川)을 중심으로 풍기와 함께 영주군에 통합돼 다시 사라진다.[8] 금성단 근처에는 정축지변 당시 스스로 말라죽은 후 200년 뒤 되살아나 충신수라 불리는 압각수가 있다. 이 나무가 되살아나고 불과 1년 후 순흥도호부가 재설치되었기에, 압각수는 현재까지도 영물로 전해진다.(압각수)[9] 원래 이름은 제월교로, 퇴계 이황이 이름 붙인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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