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스 레만
1. 소개
'''미치광이 옌스.'''[1]
아스날 무패 우승 전성기를 함께한 레전드 수문장이자 2006년 월드컵에서 올리버 칸을 밀어내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넘버원이 된 사나이.
매우 뛰어난 실력의 골키퍼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국가 대표팀에서는 안드레아스 쾨프케와 평생의 라이벌 올리버 칸에게 밀려 국대 서드 골리로써 주목을 받지 못한 시절도 있었다. 스페인의 페페 레이나, 빅토르 발데스, 이탈리아의 크리스티안 아비아티, 프란체스코 톨도, 브라질의 호제리우 세니와 같이 뛰어난 기량을 지녔음에도 출중한 경쟁자[2] 으로 인해 대표팀과 인연이 적었던 편이었다.
다만, 레만은 2006년 월드컵과 유로 2008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한 때 녹슨 전차 군단으로 불리던 독일의 선전에 공을 세우면서 다른 불운의 골키퍼 보다는 나은편에 속한다.
2. 플레이 스타일
동갑내기 올리버 칸과는 상당히 상반된 스타일의 유형이다. 올리버 칸은 전통적인 유형의 골키퍼의 장점을 지닌 선수였다면 옌스 레만은 넓은 시야와 당시 골키퍼 치곤 수준높은 발 기술로 빌드 업 능력에 최적화 된 골키퍼라 볼 수 있다.[3]
아스날이 2000년대 중반 센터백들이 그리 제공권이 강하지 않았음에도 레만의 넓은 시야에 따른 제공권 장악이 탁월했기 때문에 레만의 노쇠화에 따른 기량하락이 시작된 2007년 이전까진 아스날의 수비는 상당히 안정적이였다. 그래서 그에게 붙인 별명이 바로 타잔이다. 높은 점프력과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상대편의 크로스를 낚아채는 장면은 그야말로 일품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공권 장악력은 그의 또다른 장기인 독보적인 스로우 능력과 시너지를 냈다. 공중볼을 캐치한 뒤에 곧바로 빠르고 정확한 던지기를 통해 전개되는 역습은 안그래도 빠르기로 유명했던 아스날의 위협적인 공격 루트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롱킥 능력이 크게 떨어진 뒤로는[4] 발로 차는 것보다 손으로 던지는 것이 더 멀리 정확히 나갈 정도였다.
3. 클럽 경력
3.1. FC 샬케 04
FC 샬케 04에서 데뷔하여 10년 동안 뛰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상당히 많은데, 그가 본격적으로 주전 골키퍼로써 뛰게 된 1993년에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전반 45분 동안 어이없이 3골을 실점한 후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교체당했는데, 이때 감독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징계를 받은 기행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주전 골키퍼로써 좋은 활약을 펼치며 공격에 가담해서 골을 넣는가하면 #[5] 1997년 UEFA컵 결승에서 인테르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할 때 맹활약을 펼쳤다.
3.2.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이후 AC 밀란으로 이적하였으나 활약이 신통치 않아 한 시즌도 못 채우고 1999년 1월 독일로 복귀했다. 그런데 이적한 팀이 샬케의 최대 라이벌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였다. 때문에 양팀 팬에게 비판을 받았는데, 샬케 팬들은 라이벌 팀으로 이적했다는 이유로, 도르트문트 팬들은 샬케 선수였다는 점을 꼬집었다. 당시 팀 상황은 주전 골리였던 슈테판 클로스가 급작스럽게 레인저스 FC로 이적한 상황이라 손쉽게 주전자리를 차지했고, 01-02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에 기여함으로써 홈팬들의 비판은 사그라들었다.
3.3. 아스날 FC
2003년에는 데이비드 시먼 이후 골키퍼를 찾고 있던 아스날 FC로 이적, 맹활약을 펼치며 전설의 아스날 '''무패우승'''에 큰 기여를 한다.[6] 이어 04-05 FA컵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아스날이 시종일관 밀리는 가운데[7] 120분 무실점에 이어 승부차기에서 폴 스콜스의 킥을 막아내며 5-4 승리를 이끌었다.
좋은 활약에 비해 실수도 상당했다. 04-05 시즌에는 한때 부진하며 마누엘 알무니아에게 잠시 주전을 빼았기기도 했다. 특히 뼈아픈 것은 05-06시즌 FC 바르셀로나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었다. 전반 18분경 레만은 골문으로 달려오던 사무엘 에투를 잡아채면서 에투를 넘어뜨렸다. 레만은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을 당했고, 결국 벵거 감독은 로베르 피레스를 빼고[8] 백업 골키퍼 마누엘 알무니아를 투입했다. 이후 아스날은 전반 37분 솔 캠벨이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나갔으나 후반 막판에 2골을 연달아 내주면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2로 패하고 말았다.
물론 결승에서의 실책이 뼈아픈 것은 사실이나, 아스날이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라가는 과정에서 레만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해당 시즌 아스날은 중반부터 주전 수비수들이 줄줄이 부상 당했음에도[9] 레만의 엄청난 선방쇼에 힘입어 10경기 연속 클린시트 및 995분 무실점[10] 행진을 달렸고, 그 중 레만은 조별리그 한 경기와 토너먼트 전경기를 뛰면서 '''7경기 연속 클린시트'''를 기록했기에[11] 레만이 아니었다면 결승에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비야레알 CF와의 준결승 2차전 막판 후안 로만 리켈메의 페널티 킥을 막아낸 것이 압권.[12]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자국에서 열린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숙명의 라이벌 올리버 칸을 밀어내고 주전으로 활약하며 그동안의 설움을 떨쳐냈다. 그러나 07-08 시즌 초반 실책성 플레이로 실점하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 결국 마누엘 알무니아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3.4. VfB 슈투트가르트
07-08 시즌 종료 후 VfB 슈투트가르트로 이적함으로써 다시 자국 리그로 복귀하였다.[13] 여전히 기행은 이어졌으나, 활약은 나쁘지 않았기에 유로 2008에서도 주전으로 뛰었고, 슈투트가르트에서 2시즌 뛰다가 2010년 6월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3.5. 아스날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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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11년 3월 아스날 FC로 깜짝 이적했다. 당시 아스날은 주전으로 쓰던 보이치에흐 슈체스니가 부상을 당했고, 백업 골키퍼였던 우카시 파비안스키마저 부상을 당했고, 골키퍼 자리에 마누엘 알무니아밖에 남지 않게 되자, 이적을 선언하며 42세의 나이로 다시 골대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아스날 복귀 이후 32라운드 블랙풀 원정 경기에서 골문을 지켰고 나머지 경기에서는 모두 벤치를 지켰다. 시즌이 끝나고 아스날을 떠났고, 다시 은퇴를 했다.
4. 국가대표
국가대표팀에서 운이 매우 없는 선수인데, 그의 경쟁자였던 올리버 칸이 국대 주전 골키퍼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4] 유로 2004 전까지 레만은 1999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과 유로 2000 예선 몇 경기, 그리고 친선 경기에 간간히 출전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유로 2004에서 독일의 엄청난 부진 이후로 위르겐 클린스만이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자 레만이 국가대표팀 주전 골키퍼로서 선정되어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에서 주전 골키퍼로서 활약했다. 친선 경기는 물론, 유로 예선에서도 주전으로 나왔다. 유로 2008때는 39살이라는 나이에도 준수하게 활약했으나 결승전에서 스페인한테 패배하여 국가대표 커리어를 준우승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5. 은퇴 이후
17-18시즌부터 아스날의 1군 코치로 일하게 되었다. 골키퍼 코치는 아니고, 1군 일반 코치였다. 그러나 우나이 에메리가 새롭게 감독이 되어 자신의 코치진을 데려오면서, 다시 아스날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잠깐 FC 아우크스부르크의 수석코치를 맡았다가 2020년 5월 10일 헤르타 BSC 이사직에 부임했다.
6. 여담
선수 생활 동안 수많은 기행을 선보인 것으로 유명했다. 03-04 프리미어리그 35라운드 토트넘 핫스퍼 원정 경기에서 2-1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 종료 직전 토트넘의 코너킥 찬스 때 로비 킨을 밀치며 페널티킥을 헌납하고 퇴장까지 당했다.[15] 2005년에는 챔피언스리그 경기 입장 전에 마시던 물병의 물을 주심에게 뿜는 기행까지 선보였다.
VfB 슈투트가르트 이적 후에는 상대 공격수가 축구화가 벗겨지자 몰래 경기장 밖으로 던져서 그 공격수가 신발을 못찾아서 한참이나 경기를 못뛰게 한 적도 있다. FIFA 규칙상 선수 누군가가 축구화가 벗겨지면 주심은 경기를 중단시키거나 그 선수를 잠시 그라운드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할 수 있는데 이 경우 후자였다.
2009년에는 경기 끝나기 9분 전에 자신에게 공을 주는 것을 거부하며 조롱하던 볼보이를 비난하기도 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 소변을 보는 등 다양한 기행을 선보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CviTqsQ5KL4 칸과 레만의 스승인 제프 마이어는 "레만은 칸이 20년 동안 했던 형편없는 짓들을 1년 만에 해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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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9일 프랑스와의 A매치에서 공격수의 상징인 9번을 등에 박고 경기에 출전한 적도 있다.2006 FIFA 월드컵 독일 8강전에서 숙명의 라이벌 아르헨티나와의 승부차기에서는 느긋하게 다리에 넣어둔 쪽지를 읽으며 PK에 임했는데, 그 쪽지는 GK 코치가 아르헨티나 키커들의 승부차기 습관을 적어준 커닝페이퍼였다. 이 커닝페이퍼가 제대로 먹혀서 레만은 로베르토 아얄라와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킥을 막아내며 4-2로 독일을 4강에 올려놓았다.[16]
은퇴 후 13-14시즌에는 몰래 훈련전술을 캐내려고 윈터브레이크 동안 도하에서 훈련하던 FC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에 변장을 하고 이것 저것 메모를 하다가 들킨 적이 있다. 레만이 한 변장이라고는 모자 눌러쓰고 선글라스 쓴게 전부였다. 레만은 이렇게 변장을 했는데도 들킨게 원통해 했다.
[1]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기행으로도 유명했기에 붙여진 별명. 그의 기행은 아래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된다.[2] 레이나와 발데스는 이케르 카시야스, 톨도와 아비아티는 지안루이지 부폰. 그나마 톨도는 유로 2000에서 부상으로 빠진 부폰을 대신해 신들린 활약을 펼친 바 있다.[3] 참고로 마누엘 노이어의 어릴 적 우상은 반 데 사르나 옌스 레만같은 빌드업에 최적화된 현대적 골키퍼들이다. 노이어의 어릴적 인터뷰에서 아약스의 경기력에 반했고, 덕분에 반 데 사르가 본인이 꼽은 최고의 골키퍼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자국골리들 중엔 옌스 레만을 우상을 삼았기 때문에 당시 레만의 소속팀인 FC 샬케 04 유스팀에 입단하게 된다.[4] 레만은 어느 순간부터 킥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센터백이 주로 골킥을 찼다.[5] 심지어 상대는 최대 라이벌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였다.[6] 이 시즌에 골키퍼 장갑 세트를 단 한 세트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이유는 경기에서 질 경우 장갑을 바꾸려 했는데 한번도 지지 않아서이다.[7] 아스날은 앙리가 부상으로 결장했고, 온타겟 1:8, 코너킥 1:12 등 전반적으로 수세였다.[8] 피레스는 이 때 자신이 교체될 줄을 몰랐다고 하며 이 교체로 자신이 구단에서 입지가 약하다고 생각해 결국 다음 시즌에 이적을 하게 된다. 그 팀은 공교롭게도 4강에서 아스날에게 챔스 결승 진출을 저지당한 비야레알이었다.[9] 특히 애슐리 콜의 장기 부상에 이어, 백업인 가엘 클리쉬 마저 잦은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챔피언스리그 13경기 동안 총 5명의 선수가 돌아가면서 레프트백으로 출전했다. 토너먼트에서는 미드필더인 마티유 플라미니가 주로 주전으로 뛰었다. 콜은 결승전이 되어서야 합류할 수 있었다.[10] 역대 챔피언스리그 최장 기록이다.[11] 조별리그는 대부분 알무니아가 출전했고, 조별리그 초반 두 경기에서의 실점과 결승전의 2실점 등 이 대회의 아스날의 모든 실점은 알무니아가 기록했다(..)[12] UEFA 공식 홈페이지를 보면 레만이 결승에서 무실점으로 퇴장당했기에 그 경기까지 쳐서 총 9경기 연속(직전 시즌 1경기를 포함해) 무실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10년도 더 넘었지만 아직 이 기록의 근처에도 간 선수가 없다.[13] 이 때도 말이 많았는데, 07-08 시즌에 아르센 벵거 감독이 그 대신 마누엘 알무니아를 팀의 주전 골키퍼로써 쓰자, 심통이 났는지 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안티-알무니아 캠페인을 이어가는 기행을 선보였다.[14] 칸도 다양한 기행을 선보였으나 그 모든 것을 엄청난 카리스마와 뛰어난 슈퍼 세이브, 그리고 2002 월드컵에서의 가공할 만한 활약상으로 묻어버렸다.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우승도 많이 차지하며 클럽 활약상도 뛰어난 선수였다.[15] 이후 데일리 스타의 브라이언 울너프는 레만을 정신병자라고까지 표현했다.[16] 보통 큰 대회 토너먼트에서는 골키퍼 코치들이 승부차기를 대비해 상대 키커들의 습관을 분석해 골키퍼에게 알려주는 건 매우 흔한 일이지만, 레만은 아예 쪽지에 적어서 경기중에 대놓고 보는 위엄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