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대한제국)/생애
1. 개요
대한제국 고종 태황제의 생애(1852.07.25.~1919.01.21.)를 다루는 문서.
2. 가계
고종 이명복은 본래 영조와 사도세자의 후손이 아니라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8대손이었다. 왕족이라지만 9대조까지 거슬러가야 왕이 나오며, 선왕인 조선 철종과는 무려 17촌 간으로[1] , 왕위에서는 너무 한참 멀어진 일개 방계 왕족(거의 전주 이씨 말단 종친)에 불과한 처지였다. 그러나 양자 관계(훗날 고종이 되는 명복은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양아들로 입적 되었다.)를 통해 '왕위 계승권'을 논할 만큼 정말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양자 관계까지 포함하면 7촌).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은 숙종의 서자 연령군 이훤의 양손자이자 낙천군의 양자가 되었지만 후사 없이 사망했는데, 이에 조선 순조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 진사 이병원의 차남 이채중(이구)을 사후 양자로 입양시켰다. 이로써 남연군이 된 이채중은 원래 인조의 7대손으로 왕위 계승권이 없었지만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왕위계승권을 획득했다.
3. 생애 초반
1852년 7월 25일 흥선군 이하응과 군부인 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조선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동 흥선군 개인 사저에서 출생하였다.[2] 어린 시절의 고종은 특별할 것 없이 여느 일반 또래 아이들처럼 지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흥선군은 실권은 없어도 종친부의 주요 직책들을 맡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기준으로 양반에 준하는 엄연히 상류층이었다.
처음 아명은 개똥이었다가, 소년기에 명복(命福)[3] 으로 고쳤다. 그리고 조선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항렬에 맞춰 다시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가 다시 피휘를 위해 형(㷩)으로 바꿨다. 또한 처음 자(字)는 명부(明夫)였다가 즉위 후 '성림(聖臨)'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1863년 음력 12월, 그냥 평범한 종친으로 살 흥선군의 둘째아들 이명복의 인생이 한 순간에 뒤바뀌는 상황[4] 이 온다.
4. 즉위
1863년 음력 12월, 당시 왕이었던 철종이 후사없이 끝내 병으로 일찍 죽자, 흥선군과 효유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조씨)의 후원(뒷받침)으로 조선 익종(효명세자)과 신정왕후의 양자(차남)로 정식입적되어 '''익성군(翼成君)'''의 군호를 받고 곧바로 조선 제26대 왕으로 정식 즉위하였다.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흥선군의 적자인 제2자에게 사위(嗣位)시키라고 명하고, 영의정 김좌근(金左根)과 도승지 민치상(閔致庠)을 보내어 잠저에서 봉영(奉迎)하여 오게 하였다.
大王大妃殿, 命興宣君嫡己第二子 嗣位, 遣領議政金左根, 都承旨閔致庠, 奉迎于潛邸。
- 철종실록 15권, 철종 14년 12월 8일 경진 9번째기사.
4.1. 즉위 배경
여기서 "흥선군의 로비로 철종과 가까운 다른 왕손을 제치고 고종이 왕이 되었다"는 얘기가 돌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어차피 철종 다음 왕은 어떻게 따져봐도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후손 중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한 번 보자.
그 전에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은, ''''철종이 사망함으로써' 효종의 실제 혈통이 사실상 끊겼다는 것이다.'''[5]
철종 사망 당시 왕족들은 전부 사도세자의 후손들, 정확하게는 3명의 서자인 은언군, 은신군[6] , 은전군의 후손들이었다.
왕위 계승 법칙에 따르면, 후임 왕은 반드시 선왕의 아랫대에서 나와야했다. 철종 승하 당시 철종의 조카 뻘 왕족들은 은언군 계열인 이재덕, 이재성, 은신군 계열인 이재원, 이재긍, 이재면, 이명복, 이재선, 그리고 은전군 계열인 이재근이 있었다.[7][8]
먼저 은언군가를 보자. 이재덕과 이재성은 은언군의 장손 익평군의 아들이다. 이 중 이재덕은 은언군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종손이었고, 이재성은 3살밖에 안 된 너무 어린 아이인데다 서출이었다. 더군다나 이재덕은 양자였는데 애당초 이재성이 서출이라 은언군 가문을 잇지 못했기 때문에 입양온 것이고 '''그 시기도 철종이 죽기 바로 직전이었다.''' 게다가 실제로는 '''중종 때 갈라진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었기에 혈통적으로 너무 멀었다. 그래서 은언군가에서는 왕이 나올 사람이 없었다.
그 다음 은신군가를 보자. 은언군파가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상황에 그 다음 서열인 은신군가에서 왕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은신군가는 '''인조 아들(효종 바로 아랫 동생 인평대군)'''의 후손들이 입적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 혈통 상으로도 그나마 왕통과 가장 가까웠고''', 입양된 지 꽤 돼서 어느 정도 일가를 이뤘기에 현실적으로도 가장 안정적으로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은전군가의 경우는 서열 상 은신군가보다 낮으며 실제로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었다.[9] 즉, 어떻게 따져봐도 은신군가를 제치고 왕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은신군의 집안에서 왕이 나온 것이 흥선군의 로비 때문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그러나 남연군의 후손들은 많았고 그 중에서 '''굳이 이명복이 왕으로 선택된 것은 로비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흥선군의 형인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에겐 모두 아들이 1명씩 있었기 때문이다. 흥녕군과 흥완군의 자식은 양자였지만 이들도 다 친동생들의 자식이었기에 혈통의 문제는 없었다.
흥녕군의 아들(양자)은 이재원[10] 이었고, 흥완군의 아들(양자)은 이재면[11] , 흥인군의 아들은 이재긍이었다. 종법으로 따지면 저들이 이명복보다 서열이 높았지만, 저들을 제치고 이하응은 자신의 친자를 왕으로 내세운 것이다. 더군다나 이재긍의 경우, 생모가 안동 김씨였기 때문에, 안동 김씨의 세도를 멈추려던 차기 왕위 지명권자 신정왕후(효유대왕대비)는 이재긍을 후계자로 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이었다.
아무리 형 흥완군에게 양자로 들었다지만 자신의 적장자인 이재면을 놔두고[12] 차남인 이명복을 왕으로 추대한 것에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철종이 승하할 당시 이재면은 19살로 당시 기준으로는 성인이었다. 따라서 이재면이 왕위에 오르면 흥선군이나 조 대비가 섭정하며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는게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흥선군은 나이가 찬 이재면 대신 아직 어려 당분간은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이명복을 왕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어쨌든, 혈통의 문제 및 이하응의 사전 작업으로 이명복이 조선의 제26대 임금인 '''고종(高宗)'''으로 정식 즉위하였다.[13]
5. 친정(親政) 시작
사실 수렴청정은 조대비가 고종이 15세 되던 해에 물러나면서 끝났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그 때부터가 친정'''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법적 제도적 근거 없이 살아있는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실질적으로 상왕처럼 군림했기 때문에 고종의 실질적 친정은 한참 뒤로 밀리게 된다.
어린 시절에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의지와 생각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지만, 즉위 10년이 지나 22세가 되자, 최익현의 탄핵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옹호하는 신하들을 몰아내어 자기 주도적으로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친정을 하였다. 대원군 시기의 고종 시대의 치세와 대원군의 실각 과정은 흥선 대원군 항목 참조. 흔히 부인 민씨나 그 일족과 힘을 합쳤다는, 야사에서 기인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여흥민씨 세력은 받쳐줄 세(勢)가 약해 강성하지 못했다.
외척 세력이 득세하던 세도 정치를 엎고 등장한 흥선대원군이 과거의 전철을 밟으며 제대로 된 지지 기반이 있는 왕비를 뽑았을 리가 없다. 물론, 흥선 대원군의 생각과는 달리 민씨 본인이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명성황후는 가까운 가족(혈족)과 친지가 없던 거의 고아 신세였다. 그런데 어떻게 여흥 민씨가 척족 세력으로 고종 때 득세를 했을까?
기이하게도 여흥 민씨는 고종 뿐 아니라 흥선 대원군, 그 아버지 남연군에게는 처가이면서 외가이자 사돈이었다. 심지어 고종 뒤의 순종까지도 첫 부인 순명효황후가 여흥 민씨였다.[14] 단순히 명성 황후 때문에 민씨 세력이 득세했다고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고종은 친정 초기에 박규수, 이경하를 비롯한 대원군파, 중도의 안동 김씨들, 흥인군 이최응, 김병학을 비롯한 대원군 반대파를 골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균형을 잘 맞추었고, 대원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민승호와 민겸호를 비롯한 여흥 민씨들을 등용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개혁을 대부분 계승하여 호포제, 사창제, 서원 철폐 등을 고수했고, 만동묘(萬東廟)는 복구하였으나 국가가 제사를 주관하게 하여 유림의 명분은 충족시켜주되 힘은 돌려주지 않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 당백전 만큼은 아니었지만, 화폐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호전(청전)을 혁파했고, 문세도 없애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튼 이 무렵의 정치를 보면 기본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어도 '전통 시대 군주'로서 평타 이상은 되는 게 이 시기.
다만 재정적으로는 이 시기는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유는 바로 위에 언급한 '청전(淸錢)'이다. 청전은 폐지할 수 밖에 없었는데[15] , '''막상 폐지하고 보니 조선 정부의 창고에는 청전만 가득'''했다. 당백전 때와 마찬가지로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양화인 상평통보는 자기들이 챙기고, 악화인 청전만 공납으로 올려보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한순간에 파산했고, 세수 확보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렇다고 천천히 폐지할 수도 없었을 것이, 조선 정부 창고에 있던 청전을 민간에 풀고 다시 상평통보를 거둬들이면 조선정부의 피해를 민간에 억지로 떠넘기는 행태가 되고, 어차피 폐지될 청전의 유통량이 더 늘어난다. 악화이기 때문에 손에 들어온 청전은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소모해 없애버리는 것이 이득이므로, 굉장한 속도로 유통되면서 화폐경제를 붕괴시키게 된다.
6. 운요호 사건과 개항
그러던 중 1875년 운요호 사건이 강화도 앞바다에서 터진다. 측량을 구실로 접근한 일본군의 운요호는 조선군이 정당한 위협 사격을 하자 즉각 공격을 감행했고 영종도 수비대가 일본 수병 36명 (전원 전장 식 단발총 무장)의 상륙에 전혀 저항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 영종도는 1866년에는 무장한 선원 200명의 공격에 그래도 어느 정도 저항한 전과가 있는 곳이고, 운요호 한 척에 초토화되었다는 초지진 또한 그보다 고작 4년 전인 1871년에는 미 해군 포함 2척과 슬루프함 2척의 함포 사격을 하루종일 받으면서도 미군 상륙 개시 전까지 계속 응사하던 포대였다.
그런데 미군이 이토록 포격을 오래 한 것은 7~8년 전에 있었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평양 대동강에서 발생)의 영향이 좀 있었다. 제네럴 셔먼호는 무장 상선이었기 때문에 미국 측에서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킨 조선군의 군사력을 과대 평가하여 일단 화력 제압을 시도해서 오래 포격한 것이다. 게다가 조선의 화망도 매우 정교하고 밀집되어 있어서 남북 전쟁에 참여했던 미군 베테랑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워낙 잘 은폐된 포대의 위치 때문에 미군은 조선군 대포의 위치를 처음에는 가늠도 못했다. 결국 초지진 포격전은 미군도 조선군 합쳐 2명의 사상자가 전부였고 본격 전 전투는 어재연 장군이 지키던 광성보에서 터진다. 자세한 것은 신미양요 항목 참조.
그런데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느냐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874년 1월부, 즉 고종의 친정 이후 강화도 일대의 군영에 돌릴 예정이던 예산(군비/군수 지원금)들이 모조리 끊기고 박살났던 것. 청전(청나라의 동전) 폐지로 갑자기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야기되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강화도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한강 통행세)를 혁파하여 가뜩이나 재정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운요호 사건 시점에서 경기도 서해안의 주요 수군영은 몇 달째 군수 지원이 끊긴 상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부득이한 조치들이었다. 국가 1년 예산의 15배도 넘어가는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66년 11월에 당백전을 찍어낸 대원군의 화폐 정책 때문에 당시 조선의 화폐 유통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벌어지는 상황[16] 이었다. 이후 2년 만에 말도 안 되는 악화[17] 인 당백전이 폐지되었는데 인플레이션[18] 이 벌어진 상황에서 당백전이 폐지되자 조정의 재정난이 극도로 심화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원군이 주력한 것이 '''관리들이 밀수입한''' 청의 동전 청전(淸錢) 유통을 강화 하는 것이었다.
청전 유통이 합법화 된 것도 1867년의 일로 이것도 대원군의 작품이다. 그리고 유통되던 당백전을 회수하는 과정도 당백전을 청전으로 바꿔준 다음에, 당백전을 다시 녹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청전도 악화'''다.[19] 관리들이 청나라 동전을 '''밀수''' 했겠는가. 이 청전은 삽시간에 상평통보 유통량의 40%를 점유하였고, 조선 내에서는 화폐에 대한 불신풍조가 다시 일어났다. 당백전으로 불안했던 경제 사정에서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된 것도 당연한 수순. 이렇게 당백전의 발행과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재정 위기를 그나마 넘어가기 위해서 도입된 청전이 한순간에 조선을 다시 휘청하게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4년 ~ 5년.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화폐 부실 문제로 1874년 청전이 폐지되자 다시 올랐던 인플레이션을 포함해서 역작용으로 디플레이션이 이어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다시 극심한 재정난으로 돌아가야 했다. 경강수세가 폐지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고종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왕실 재정에 집착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자신이 장악하려고 하였는데, 이런 초기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대원군의 무리한 경복궁 중건이 등골 빼먹는 수준으로 조선 정부의 재정적 여력을 악화시켰다는 것과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 과정에서 발생했던 인플레이션과 폐해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왜 고종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도 다시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천천히 폐지하는 것이 어떠냐는 비판조차 말이 안 되는 것이 화폐 개혁을 시간을 두고 진행한 경우는 거의 100% 그레샴의 법칙이 왜 무서운지 알게 된다. 단적으로 당백전이 발행 되자마자 조선에서는 상평통보가 씨가 말랐고, 당백전이 폐지된 이후에도 관북 이상 지방과 영남 지방은 청전 같은 악화는 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부작용은 더더욱 집중되었다. 그 부작용은 안 그래도 허약한 조선 조정의 재정난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청전을 폐지해서 군사력을 더 떨어트렸느냐 라는 것은 억지비판이 된다.
어쨌거나 그 뒤로 고종은 새로 화폐를 발행하는 데에 상당히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한다. 묄렌도르프가 당오전(當梧錢) 주조를 주장하자 김옥균의 차관 도입에도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이 뒤통수 치는 바람에 차관 도입은 실패하고 당오전은 당오전대로 막장으로 굴러가서 효과는 못 봤다.
그러나 중화에 강자로 군림했던 중국 청이 서양(영국, 프랑스 등)에게 단숨에 수도 베이징이 무너지고 일본이 미국 페리제독에게 강제로 개항되는 상황에 군비를 삭감한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조선 경제가 초토화 되는 사태라도 불과 수년 전 외침(임진왜란(1592), 병자호란(1636))을 겪어왔던 나라에서 "당장 쓸 일도 없는 군대" 라고 신경 쓰지 않은 것은 큰 오판이자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당시 조선 조정의 인식이 "가난하고 먹을 것도 없는 우리 나라에 서양 놈들이 와서 뭐 하겠어" 하는, 인식이었던 것.
각설하고, 일본 운요호의 무력에 조선은 놀라긴 했지만, 이최응과 박규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 고종은 문호 개방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 문을 열고 '''관(館)'''을 설치하여 통상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러 유림과 대원군의 결사 반대조차 옳지 않다고 씹고 강화도 조약(이 조약은 강제로 불평등하게 체결했기에 '늑약'(勒約)이라고도 한다.)을 조선 조정과 제대로 된 협의 없이 '''반강제적으로 체결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7. 임오군란(1882)
그러던 중 민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선혜청(宣慧廳)의 부패(비리, 공금횡령 등)로 인해서 가뜩이나 신식군대 별기군 창설 이후에 푸대접받고 있던 구식 군인들이 13개월치나 월급을 못 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나마 훈련도감을 비롯해서 특별한 소속이 있는 군인들은 제때 월급을 꼬박꼬박 받을 수 있었으나, 별기군 창설 이후 수많은 구식 군인들은 특별한 소속 없이 방치되었고, 그들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재배해서 부업으로 겨우 먹고 사는 지경(한마디로 채소를 재배해야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위험 수위에 이르자 그들에게 1개월 치 급료가 지불되었는데, 문제는 급료로 지불된 쌀이 겨와 모래가 섞인 썩은 쌀들이었다. 분노한 군인들이 항의하자 고지기들은 겁도 없이 군인들에게 꺼지라고 적반하장격으로 오히려 큰소리를 쳐댔고, 분노한 군인들은 고지기를 얼굴과 몸을 반병신되게 묵사발/죽사발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않고도 규율을 지킨 것이 가상하다"고 칭찬하다면서'''[20] "나라에서 월급 못 준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니 잘 타이르라"는 정상적인 결론을 내린다. 근데 민씨 일가의 수장인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왕의 명령을 껌처럼 가볍게 씹어버리고 주모자들을 강제 감금한다.
이에 구식 군인들 사이에서 "민겸호가 잡아간 군인들을 죽일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폭발한 군인들은 선혜청 제조 민겸호,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해 원성을 하고 있던 고관 대작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일본군 교관들과 민간인도 무참히 살해했다. 주조선 일본 공사 요시모토 하나부사(義質花房)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고, 겁에 질린 고종은 허겁지겁 대원군을 모셔와 "군인들을 달래 달라"고 요청하며 다시 전권을 내어주었다. 군인들은 대궐에 나타난 대원군을 보고 환호했다. 대궐에 몰려든 군인들은 중전을 내어 줄 것을 대원군에게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중전(中殿)은 이미 승하하셨으니 안심하고 물러나라"는 말을 하여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별기군을 해체하고 강화도 조약을 비롯하여 일본과의 모든 통상 조약의 파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그런데 청 이홍장의 지시로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쳐 대원군을 자신들의 진지로 초청하는 체 하며 그를 강제 납치하여 청으로 끌고 가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동시에 홍계훈의 기지로 목숨을 건졌던 명성황후가 청나라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다시 집권하게 된다. 청이 나름 친 청적인 면모를 보인 대원군을 납치해간 이유는, 대원군의 쇄국 재개가 일본을 자극하여 동북아의 균형을 망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정여창의 눈에 들어 출세한 23세의 젊디젊은 위안스카이는 북양 군벌의 철수 이후 조선에 잔류한 청군을 지휘하며, 조선에서 총독이라도 되는 양, 고종을 꼭두각시 혹은 암군(暗君, 어리석은 임금)이라면서 자기가 행사하겠다고 오만방자하게 왕처럼 군림 행세하게 된다.
8. 갑신정변(1884.급진 개화파의 3일천하)
이 와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의 지원을 얻어 정변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1884년의 갑신정변이다. 우정국 사건을 시작으로 민영익을 베어 넘긴[21] 그들은 민씨 일파, 고종과 명성황후를 확보하여 경우궁[22] 으로 옮기고 자신들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대하던 관료들을 입궐시킨 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였다[23] .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고 김옥균 등에게 붙잡고 애원했지만, 흥분한 급진 개화파들은 고종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급진 개화파는 '''정강 14조'''를 발표하여 개각(改閣)을 선언했지만, 눈치 빠른 명성황후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고 "효유대왕대비께서 넓은 곳으로 옮기길 원한다"고 말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하여 넓어 방어하기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어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1,500명의 청군과 이에 합세한 조선군이 몰려들면서 급진 개화파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다. 급진 개화파는 고종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고종이 죽어도 효유대왕대비(신정왕후 조씨)가 계신 창덕궁에서 죽을 것을 고집하여 결국 고종을 놔두고 자기들만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투를 자른 후 일본으로 도주하는 처지가 된다.
이중에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 홍영식은 남아 오조유가 이끄는 청군에 합류하려던 고종을 만류하던 중에 느닷없이 공격해온 조선 병사들에게 도륙당해 죽는다. 결국 이들의 반정으로 인해 개화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말았고 급진 개화파의 친족들은 무참한 죽임을 당하고 저잣거리에서 효수당한다. 그리고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사대관계)은 오히려 공고해지고 말았다. 한편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조선에 한성 조약[24] 을 강요하며 배상을 받아냈고 청에겐 무력 시위를 하여 1885년에 톈진 조약[25] 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9.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갑신정변 이후 10년 간 조선은 청나라가 주도권을 잡고 유럽, 미국, 일본의 세력이 주변을 기웃거리는 묘한 공백 상태에 빠진다. 위안스카이가 총독에 준하는 권력자가 되어 조선에 군림하긴 했지만 그의 행보는 다른 열강을 의식했는지 의외로 소극적이었고 별 의미 없는 10년이 어영부영하며 훌떡 지나간다. 그 10년 간 고종은 5영을 3영으로 개편했다가 다시 4영으로 개편하는 군제 개혁에 착수했는데 기존 정변에서 거의 쓸모가 없었던 군에 대한 불신 때문에 급히 행한 것이었고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 했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 내무부를 설치하여 궁내 사무와 군국 사무를 겸하게 했고 이 과정에서 친위 세력인 여흥 민씨들을 기용했다.
육영공원을 비롯한 학교, 제중원 등의 근대식 병원, 전신, 전기 등이 이 시기에 들어왔다. 하지만 고종의 개혁들은 어디까지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대혼란 이후에 극도로 불안해진 나머지 자신의 왕권 유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두루뭉술했다. 정권 유지에 대한 집착은 정권 유지 기반인 재정 확보에 매달리게 했고 내무부는 개혁 조치가 아니라 고종의 비자금 확보에 더 주력했다.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마구잡이로 들여온 일부 무기와 군함도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한편 계속된 교세 확장에 고무되고 기존에 금지된 천주교, 개신교의 합법화에 자극받은 동학이 대대적으로 합법화를 요구하게 된다. 1892년 교주 최시형의 허락 아래에 공주에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열려 충청 감사 조병식을 통해 동학 합법화의 뜻을 전달했다. 조병식은 "나라에서 하는 일을 감영에서 와서 따지면 뭘 어쩌라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동학 단속을 완화했다. 이후 삼례에서 더 큰 집회가 열렸지만 충청도에서 거둔 것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1893년 동학 대표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최제우를 신원하고 동학을 합법화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복합상소).
이에 고종 이하 조정은 매우 긴장했다. 고종은 "이단(異團)을 탄압하는 것이 열성조(列聖祖)의 법"[26] 이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유림들도 앞을 다투어 "동학을 탄압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조정은 동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동학 지도부는 보은에 전국의 모든 교인들을 집합시켰고 '''보국안민(保國安民), 척왜양창(斥倭攘窓)의 깃발'''을 휘두르는 수만 명의 교인이 보은에 집결했다. 경악한 조정은 어윤중을 내려 보내 동학교도들을 달래려고 시도한다. 한편 조정은 동학교도들이 서울로 진공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는데 강화도와 평양의 병력을 수원과 용인시에 급파하고 서울의 군사들을 대기시키자는 논의에 '''고종은 외국 군대를 동원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조정은 고종의 주장에 크게 반대했지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쓰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입장을 계속 고수했다. "어차피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청군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한편 어윤중은 동학 교인들을 타일러서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실 해산이 신속했던 것은 동학 지도부가 전봉준을 비롯한 과격파에 스스로가 놀랐기 때문이었다. 전봉준 등은 전라도 금구로 이동하여 또 집회를 가졌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하여 마침내 봉기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조정은 황토재에서 관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홍계훈과 장위영 병력을 급파하지만 장성 전투에서 또 패전보를 듣고 전라 감영까지 함락 당하자 마침내 고종과 민영준은 위안스카이와 접촉하여 청군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위안스카이는 이에 "간단한 일"이라고 호언장담했고 이에 이홍장도 파병을 결정하여 아산만에 청군이 도착한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은 홍계훈의 독일제 쿠르프 야포 포격에 잇달아 패해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었고, 청군의 등장에 일본군이 톈진 조약을 빌미로 덩달아 인천에 나타나면서 조선도 청도 농민군도 당황한다.
농민군은 "이러다가 나라가 외세의 전쟁터가 되겠다"고 전주 화약을 관군과 맺고 평화적으로 물러났고, 조선 정부는 청과 일본에 모두 철수를 요구한다. 청나라는 이에 곧바로 응했지만 일본은 "우리가 알기론 동비(東備, 동학농민군)들이 소탕되지 않았다."란 억지를 부리며 철수를 거부한다. 그러자 청나라는 일본군이 혹시 뒤통수 맞을 것을 두려워하여 저러는가 싶어서 동시에 철수하잔 제안을 했으나 일본은 이마저도 거부한다. 이에 조선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미국, 영국이 중재에 나섰으나 일본은 거부했고 역으로 청나라에 같이 동학 운동을 진압하고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잔 제안을 한다.
청나라는 "동학란은 이미 다 끝났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일인데 왜 니들이 더 난리냐?"라고 거부했고 일본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퍼부어 아산 만에서 청나라 군함들을 전격 침몰시키니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일본은 난데없이 경복궁을 불법점령하고 조선의 대청 독립 선언을 강요한 다음에 고종을 위협하여 청나라의 모든 조약을 전면 파기하고 모든 청군은 조선을 떠나라는 명령서를 받아낸다. 일본은 대원군을 포섭하여 고종에게서 빼앗은 전권을 위임한다. 대원군은 민씨 일족들을 숙청하면서 내정 개혁에 착수하려 했지만 문제는 대원군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일본때문에 별다른 힘이 없는 바지사장 같은 느낌이라 할 수 있다. 실세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박정양을 비롯하여 일본의 후원을 받는 친일적 성향을 띄는 개화파들이었다. '''군국 기무처(軍局機務處)'''가 설치되고 갑오개혁이 실시된다.
이 시기에 노비제, 신분제가 폐지, 철폐되었고 도량형의 통일, 화폐 개혁, 조세의 금납화, 재정 일원화가 실시되었다. 과부의 재가 허용, 조혼 금지, 과거제 폐지, 과도한 고문(압슬형) 폐지, 연좌제 폐지도 동시에 실시되었으며 지방관(사또와 같은 수령)의 개인 사법권도 박탈하고 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을 일원화 했다.
한편 자신이 일본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대원군은 전봉준[27] , 이홍장 등과 은밀히 접촉하면서 힘을 합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권력을 쥐어달란 로비를 하고 있었는데 청군이 평양 전투를 비롯해서 일본군에게 개 박살나고 동학 농민군도 우금치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자세한 것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어쨌거나 조선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요동을 빼앗은 걸 다시 토해내는 것을 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할 생각을 가지고 인아거일이라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내는 외교 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독일과 미국에도 구조 요청을 보내지만... 독일 황제도 힘이 없었고,[28] 미국은 금광(금광채굴권)만 먹었다.
10.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청일 전쟁 와중에도 일본은 김홍집 (친일)내각을 통해 조선과 동맹을 불합리하게 체결했고 20개조 개혁안을 통해 고종의 실권을 상당수 뺏고 명성황후의 정사(政事) 개입도 일절 금지했다. 이 와중에 청군, 동학군과 내통한 것이 걸린 흥선대원군은 정치판에서 완전히 실각한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를 내무 대신으로 서광범을 법무 대신으로 내세웠고 고종으로 하여금 홍범 14조를 교묘하게 했다. 이 시기 고종의 호칭은 대군주로, 왕비가 왕후로, 세자가 태자로 바뀐다. 한편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 대사 베베르와 접촉하면서 "우리가 믿을 것은 러시아 황제 폐하뿐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 3세,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제국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이에 베베르도 고종 부부의 주장에 부응하면서 본국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주장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이 와중에 이준용 역모사건이 터진다.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고종에게는 3촌 조카가 된다)이 박준양, 이태용 등과 합세하여 2차 김홍집 내각을 없애고 고종과 순종, 명성 황후를 죽이고 스스로 왕좌에 앉으려 한 것이다. 이를 박영효와 서광범이 밝혀내어 자신들의 권위를 공고히 한다. 궁궐 수비대를 훈련대로 바꾸자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29] 역모를 꾀했다고 하는데 체포령이 떨어지자 박영효는 허겁지겁 일본 공사관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명성황후, 유길준, 이노우에 가오루의 모함으로 자신이 실각했다고 주장한다. 박영효에 의해 실각한 김홍집이 복귀했고 박정양, 이완용, 이운용, 이범진, 민영환 등의 정동 구락부 출신의 친미파, 친러파들이 득세(3차 김홍집 내각)한다. 박영효 중심의 친일 내각이 완전히 실각한 것이다.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훈련받던 훈련대도 해산해버린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군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 공사를 부임시켰는데 이노우에 가오루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보름이나 그와 같이 지내며 모종의 계획을 꾸몄다. 그리고 그 결과가 친청파이자 친러파였던 명성황후를 끔찍하게 시해한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엔 대원군도 동석하여 대충 명분 비슷한 것을 갖추었고 홍계훈과 이경직을 죽이고 명성 황후를 시해(살해)한다. 이 와중에 낭인들은 고종 앞에서 칼을 겨누고 왕세자 척의 머리채를 끌어잡는 등 잔혹한 행패를 부렸다. 미우라는 고종의 부름에 입궐하는 척하며 입궐하여 친미파, 친러파를 내쫓고 친일파 이재면, 조희연, 유길준으로 새로운 내각(4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각국 공사들의 추궁에 훈련대의 짓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워낙 증인이 많아서 곧 거짓말인 게 드러난다.
새로운 내각의 핵심은 유길준이었다. 그의 주도 하에 을미개혁이 실시되고 유명한 '''단발령''이 실시되어 고종과 순종이 같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머리카락을 자른다. 연금 상태의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의 외교관들과 접촉하며 일본의 독살을 우려하여 아예 그들이 만들어온 음식을 먹으며 연명했다. 그 와중에 명성 황후가 단순히 어디 피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단 정황이 포착되면서 근왕파와 민심이 매우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재순, 이도철 등의 근왕파들은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미, 친러파,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과 합세하여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는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지만 일부 대대장의 밀고로 군부 대신 어윤중에 의해 진압 당한다. 정동 구락부 인물들은 각국 공관에 대피한다.[30] 한편 고종은 유림들에게 밀사를 보내 대대적으로 의병 궐기를 촉구했고 고종 33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였는데 의병들은 애꿎은(?) 수령들을 참수하고 여러 고을을 점거했다. 이것이 을미의병이다.
11. 아관파천(러시아공사관으로 고종이 파천가다)
을미의병(1895)으로 인해서 한양에 주둔한 군사 대부분이 각 지방으로 내려가 감시가 소홀해지자 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를 타고 순종과 함께 대궐을 두고 러시아공사관[31] 으로 피신한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베베르는 인천항에 정박시켜놓은 러시아 수병 117명을 동원해 즉각 공사관에 배치함으로 공사관을 지켰는데 단순히 117명이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고종을 손아귀에 쥐고 있음을 분명하게 한 제스처였다. 사실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는 일찍이 고종이 일찍부터 막대한 이권으로 매수하다 시피한 인물이었고, 후일 고종이 친러 정책을 펴는 배경이 된 인물이었다.[32] 고종은 즉각 "김홍집 내각의 관료들을 죽이라"는 교지를 내렸고, 군중이 김홍집, 정병하 등을 노상에서 살해했고, 유길준 등은 황급히 일본으로 망명한다.
12. 독립협회
아관 파천 이후에도 고종은 한동안 러시아 공사관과 기존의 궁을 오가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부각된 단체가 '''독립협회(獨立協會)'''이다. 원래는 독립문 을 건립하기 위해서 발족했던 단체였으나, 이후 독립신문 발간 등의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그대로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별도의 단체가 되었다. 초기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형태로 출범하였으나, 개창자 중 대표적인 인물인 서재필 , 그리고 이후에 활동하는 박영효 계열 등의 영향으로 급진 개화 단체의 성격이 강해졌다. 고종의 환궁 이후에는 개혁 방안을 두고 고종과 갈등을 빚었으며 중추원 설립 과정에서 독립협회의 과욕, 친일성향을 보이던 독립협회에 대한 고종의 불신 등이 겹친 상황에서, 결국 중추원의 권한남용 사건이 터지면서 고종이 무력 해산시켰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신문, 중추원, 광무개혁 항목 참고.[33]
13. 대한제국 선포, 광무개혁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내외부에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적으로 근대 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이 자주 벌어졌고, 외부에서는 독립 협회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아관파천이 시작된 지 1년 뒤인 1897년 2월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또한 고종은 환궁 후 10월 26일에 정식으로 국호를 황제의 국가를 뜻하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며 원구단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독립된 자주국가임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 고종은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전면 추진하였다. 자세한 것은 광무개혁 항목을 살펴보자
고종은 이 개혁을 통하여 근대식 정부와 행정제도 국민개병제와 도시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황권(皇權)'을 강화하려 했지만, 결국 일제의 러일전쟁 승리와 한일의정서의 강압적인 체결에 따라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되면서 중단되었다.
14. 러일전쟁(1904~1905)
당시 대한제국은 삼국 간섭 이후로 꾸준히 신경 쓰던 인아거일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힘으로 일본을 막으려 했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당연히 러시아와 일전을 벌여야 했다. 러시아 - 일본 간의 갈등은 첨예해졌고 결국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진다. 일본은 또다시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으로 만주의 러시아 군대를 공격했고 중립을 선포한 대한제국을 강제로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34] '''이때 독도를 멋대로 자기네 땅이라고 불법으로 편입하고 다케시마(竹島)로 불법 개칭 후 선언하였다.'''[35]
일본군은 십 수년치의 국가 예산을 소모했으며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러시아 군대보다도 많은 희생자를 내며 신승한다. 사실상 일본의 가용 병력 대부분이 죽거나 다친 상황에서 러시아는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더 동원하여 한판 벌일 수 있었는데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져 러시아 내부가 뒤숭숭해지고 러시아의 경제 사정도 좋지 않은 편이라 러일 전쟁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 아래에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일본의 전략적인 승리로 끝을 맺는다. 최후의 대일 견제 세력인 러시아가 물러나면서 대한제국은 그야말로 일본 앞에 잘차려진 한 끼의 밥상이 되고 만다. 여담으로 루즈벨트는 포츠머스 조약 중재 대가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15. 을사조약(乙巳造約)(1905)
러일전쟁의 종전 이후 일본군은 경복궁을 장악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덴노의 위협적인 국서(國書)를 가지고 고종을 알현한다. 국서의 내용인즉 '순순히 외교권(外交權)을 넘긴다면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정말로. 메이지의 뜻이라기 보단 일본을 움직이던 고위 수뇌부들의 뜻이었겠지만.
고종은 "이는 나라를 망치는 일이니 죽는 한이 있어도 응할 수 없다"고 처음에 매우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물러난 이후에 열린 어전 회의(御殿會議)에선 '''어차피 일본 애들이 내가 거부한다고 그냥 물러날 놈들이 아니니 별 수 없다.'''며 결국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어차피 조약은 체결되고 나라는 합병(合秉)될 것이니 이왕 체결할 김에 최대한 대한제국에 관대한 처우라도 바라자는 안을 내놓은 이가 있었으니, 이가 바로 학부 대신 '''이완용'''이다. 그리고 고종은 "그럼 경이 잘 처리해보라"고 자신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어 물러나버리고 8대신을 이토 히로부미와 면담하게 하였다.[36] 그런데 이완용은 거의 외교권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갖다 바치는 결과를 낳았으니... 자세한 것은 을사조약 항목 참조.
이 시기 대한 제국군은 충분히 근대화되어 있는 군대였고 무장 수준은 일본이 경악할 정도였다. 이 때 '''수도 방위 병력 전부도 아니고, 경복궁을 탈환하러 온 병력만 따져서''' 후장식 강선 라이플 3천정과 야포 20문, 개틀링 기관총 8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다. 이 정도면 현대로 따져도 약 3개 대대를 무장시킬 수 있는 무장이다.[37] 그러나 고종은 '''전투를 지시하긴커녕 복귀하란 명령을 내려버린다.'''
이후 조선은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들은 물론이고 거의 전국이 발칵 뒤집혀서 대혼란에 빠졌다. 시일야방성대곡도 이때의 일. 곳곳에서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자결자(민영환이 대표적으로 을사조약의 부당함에 스스로 자결했다.)들이 속출했고 백성들은 나라가 망했다고 혼비백산했다. 평민, 유림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의병이 일어나니, 이가 바로 을사의병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항 움직임도 을사조약을 되돌리진 못 했다.
16. 헤이그 특사 밀사사건,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양위
을사조약의 체결은 단순히 외교권을 강탈한 수준이 아니었다.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종이 노골적으로 도움을 요구했던 미국과 영국 등의 국가들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38] 각국의 대사관을 강제 철수시켜버렸다.
이쯤 되면 고종이 최소, 최선적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일본은 고종의 발악을 막기 위하여 고종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고, 차례로 한국의 권리들을 차근차근 박탈했다. 고종은 마지막 시도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망명 특사로써 모스크바의 이범진을 거쳐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지만, 그들은 사전에 이 일을 안 일본의 수작으로 문전박대 당했다. 이준은 헤이그에서 객사(客死)하고 말았는데, 이는 이준이 할복 자살했다는 야사를 낳았다. 이것이 헤이그 특사 밀사사건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앞에 나아가 "멋진 일을 하셨더군요. 근데 앞으로는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지 그러십니까?"라며 비웃었으며, 이완용과 송병준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고종의 퇴위를 은근히 협박하듯이 강요했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은 앞을 다투어 고종이 일본 황제 폐하께 대죄해야 한다며 퇴위를 통해 사죄해야 한다고 고종에게 강제로 윽박지르며 설득을 빙자한 협박을 했고, 고종은 단식까지 불사하며 강경하게 버티었다.
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삼으며 박영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박영효는 이를 무마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했고, 이완용과 송병준은 전화선까지 끊고는 고종을 사실상 궁에 감금하였다. 이에 고종은 마지못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얼마 후에 일본에서 새 황제 즉위를 축하한다는 문서(공문)가 오자, 이완용은 아예 내시 2명을 데려와서 각각 고종과 순종의 자리에 세우고 날치기로 황위를 고종에서 순종으로 교체해버렸다. 그렇게 한국사 최후의 군주인 순종이 주변의 강요와 협박으로 강제 즉위했다.
그렇게 1907년, '''고종황제는 일본의 압박과 친일적인 주변 신하의 끈질긴 퇴위 강요에 끝내 못이겨 강제로 퇴위했고''',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당했다'''. 그 결과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나 숭례문에서 치열한 남대문 전투가 크게 일어났지만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기와 병력 열세 차이로 밀려나 패배했다.
그 다음 사법권과 경찰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5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조선의 명맥을 이은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이후 고종과 황족들은 일본의 강요로 일본 정부에게서 작위와 은사금을 억지로 받았다.
17. 사망(1919.01.21.)과 황제 독살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혀가 닳아 없어지고 치아는 모두 빠져나왔다. 1피트 (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선명히 나 있었다.
윤치호 일기 (1920.10.13.)
1910년 망국의 군주로 완전히 물러난 이후에도 1919년까지 생존했는데 이는 현대의학의 힘 때문에 장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국왕 치세+대한제국 황제 치세+태황제 치세+(왕공족)이태왕 치세까지 모두 합하면 영조의 재위 기간조차 넘어간다. 노년임에도 자기관리와 현대의학의 힘 때문에 건강해서 고명딸 덕혜옹주가 이 시기에 태어났다. 일제가 주선한 영친왕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약혼을 반대했지만 영친왕의 보안과 안전을 위해서 어쩔수 없이 눈물 겨자먹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1919년 1월 21일, 평소 야참으로 즐기던 식혜를 마시고 잠에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 목이 마르다며 차를 마시곤 전에 멀쩡했던 고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 곁방에서 '''붕어(崩御)'''하여 그의 인산일로 하여금 3.1 운동(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게 한, 3.1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유난히 독살설이 많은 조선 임금들[39] 중에서 화려한 대미를 장식한다. 항상 야참으로 마시던 식혜[40] 를 마신 뒤 잠자리에 들었다가 목이 마르다고 차를 마셨는데, 그 뒤 복통을 호소하다 피를 토하고 사망하였기 때문에, 식혜에 독이 있었다는 소문이 쫙 퍼져 결국 3.1 운동(독립만세운동)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덕혜옹주는 아버지가 독살당한 것으로 믿어 가쿠슈인에 다닐 적 반드시 먹는 물을 보온병에 따로 챙겨다녔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조현병까지 걸렸으며, 심지어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조차 독살당했을 거라고 판단했다.
고종 독살설의 증거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사인은 지병인 뇌일혈인데, 전조 증상이 분명한 뇌일혈에 비해서 고종은 사망 당일까지 건강 상태가 그 나이대에 비해 상당히 양호하였다. 때문에 독살이 아니라도 적어도 뇌일혈에 의한 사망 가능성은 낮다.
- 고종 사망 후 염습(殮襲, 시신을 깨끗한 여러 옷으로 감싸 봉인하는 일)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3일 만에 완전히 부패하여 이가 빠지고 살점이 떨어졌는데, 이는 조선 시대에 독약으로 자주 사용된 비상 (砒傷)의 비소 성분으로 사망 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41] 고종 사망은 양력 1월 21일, 한 겨울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3일만에 부패하는 경우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 고종에게 최후의 간식을 올린 것으로 보이는 시녀들이 이후 의문사하였다.
- 이 시기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을 비롯한 고위층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이를 고종 암살설과 연계시킬 수도 있다.[42]
한국사학계에서는 고종의 죽음에 대한 논의와 평가는 1910년대의 혁명적 환경을 외면하고, 3.1운동의 발생을 고종의 죽음이라는 우연한 사건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게재되어 있다고 하여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국적인 추모분위기와 함께 일어난 3.1운동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고종을 '''민족의 대표자'''로 인식하지는 않았더라도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는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고종 자신이 장기간 일본에 시달리면서 유의미한 반격은 거의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죽음이 도화선이된 3.1운동으로 최초로 일본에 유효타를 먹이는데 성공한다.
2009년 한국사학자 이태진과 이승엽은 '고종 독살설'에 대해 심도 깊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이태진은 창부용삼랑일기(昌副龍三郞日記)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고종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는데, 같은 자료를 분석한 이승엽은 오독의 가능성을 제기한 뒤, 고종독살설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불만과 영친왕의 혼인에 대한 반감에서 야기된 소문의 확대 재생산에 불과하며, 사실임을 증명할 만한 근거는 전무하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고종 서거 직후 보도된 한국과 일본의 자료를 검토하고 재구성하여 고종의 사인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1월 20일부터 고종 사망까지 각 보도 자료 내용을 종합하여 시간 순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월 20일
- 오전 11시 - 고종 기상, 안상호 촉탁의 배진, 아침식사 (매일신보 1919.1.22.)
- 오후 3시 - 고종 가미온담탕 진어 (매일신보 1919.1.22.)
- 오후 가미오카 대표 촉탁의 2회 배진 (경성일보 1919.1.24.)
- 오후 6시 도가와 촉탁의 배진 진맥 (경성일보 1919.1.24.)
- 오후 10시 저녁식사(평소 저녁식사 11시) (매일신보 1919.1.27.)
- 1월 21일
- 오전 1시경 발병 (매일신보 1919.1.29.)
- 발병직후 상황 김형배 전의 청심환 처방 (매일신보 1919.1.22.)
- 전의가 도가와 촉탁의에게 연락 (경성일보 1919.1.23.)
- 2시경 도가와 촉탁의 제일 먼저 배진, 뇌일혈 진단, 고종 20분마다 총 12회 경련 (경성일보 1919.1.23.)
- 4시 53분 가미오카 배진, 뇌일혈 진단 (경성일보 1919.3.16.)
- 5시 30분 모리야스 배진, 뇌일혈 진단 (매일신보 1919.1.23.)
- 6시경 고종사망직전 순종 참궁, 이후 사망 (경성일보 1919.1.23.)
한편 독살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자료는 김명길 상궁이 고종의 시신을 염(殮)할 때 시체에서 피와 살이 묻어나 독살의 의문을 표했으며 윤치호일기에 고종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오르고 이가 모두 빠져있다고 한 점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시신은 사망 후 하루 안에 바로 염을 하는데 고종의 시신은 4일 정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순종황제가 아닌 황태자가 오길 기다렸기 때문이다.
사망 후 시신은 바로 부패활동이 일어나 급격히 붓기 시작하는데, 건강한 사람의 경우 평소 장내에는 약 1kg의 세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고종은 뇌일혈을 일으키며 다소 체온이 상승하고 밤 10시에 저녁식사를 하여 다소 열이 있었으며, 따뜻한 실내에서 시신을 안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패가 심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망소식을 늦게 알린 이유는 이왕직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가 이왕직 고관들이 모두 부재중인 상황에서 자신이 대응방략을 놓고 고심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였다. 당시 이방자와 영친왕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고관들이 동경(東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국왕의 상을 비밀로 붙이고 혼례식을 올린 전례가 있음을 들어 혼례를 먼저 하려고 했으나 왕가의 혈통을 끊으려한다는 소문이 있는 상황에서 혼례식을 거행할 때,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혼례를 연기하고 이후 고종의 사망소식을 늦게나마 알리게 된 것이다.
2010년에는 일본이 일부러 고종을 독살할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이 국내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식이 본래 1919년 1월 25일에 예정된 상태이므로, 불과 4일 후에 결혼식이 예정된 상황에서, '내선일체'(內鮮一体)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던 일본이 일부러 신랑의 아버지인 고종을 제거해 물의를 일으킬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종 망명설을 부정하거나 사전에 막아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망국의 군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은 일본의 강요로 전통식으로 치뤄치지 못하고 일본식으로 치러졌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식(專統式)'은 일본식으로 치루는 장례식과는 다르게 장례를 승하한지 몇개월이 지나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조선과 대한제국의 전통이자 관습이었는데, 고종은 일제 치하 속에 일제강점기 조선령 이왕가의 '덕수궁 이태왕'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에 돌아간지 얼마 안돼서 바로 짧게 장례를 치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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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는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독약을 탔다는 증거가 처음으로 발굴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기자의 설레발 혹은 제목 낚시. 기사를 잘 읽어보면 "데라우치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요. 님 혹시 들은 내용 없음?" 이라고 구라토미가 질문한 것뿐인데, 이를 독살의 증거라고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 질문은 당시에도 독살'설'이 있었다는 증거이지 독살 자체의 증거는 아니다. 어쨌든 고종의 유해가 남아있으므로 나폴레옹처럼 현대 과학 기술로 검사해보면 독살당한 것이 사실인지 규명해 볼 수 있겠으나 황제의 능을 발굴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으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44]
그런데 고종은 사실 전에도 독이 타진 음료를 마시고 사망할 뻔 하였는데 그것은 1898년 '''김홍륙 고종 암살 미수 사건'''으로서 실각한 김홍륙이 앙심을 품고 평소 고종이 즐겨마시던 커피에 독(아편)을 넣어 벌어진 일이었다. 고종은 커피의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아서 화를 당하지 않았다. 다만 같이 커피를 마신 순종과 내관은 죽다 살아났지만 평생 후유증[45] 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정세가 어지러울 때는 독살 위협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에비슨과 같은 외국 선교사들이 보내준 연유 통조림과 삶은 계란 몇개로 연명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릉(洪陵)[46] . 명성황후와 합장되어 있다. 고종의 능은 전통적인 조선식 왕릉과는 다른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황제릉'(皇帝陵)의 형식으로 꾸민 것이라고. 본래 홍릉은 명성 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고 처음에는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묻혔었는데 1919년에 고종이 붕어(승하)하고 당시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원래 홍릉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것이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휘원'(英輝園)인데 오늘날에도 그 근처에는 '홍릉로'(洪陵路)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이 근처에는 홍릉 수목원이 있다.
뒷날 아들 순종황제가 죽은 후에도 홍릉 근처에 능을 써서 이 능역을 합쳐 홍유릉(洪裕陵)이라고 부른다. 홍유릉 뒤편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나 의친왕,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일원들의 묘소도 함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홍유릉 일대는 '''대한 제국 황족들의 가족묘'''인 셈.
18. 복제 논쟁
고종황제의 승하 이후 아직까지 잔존한 유림들 사이에선 20세기 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고종의 사망 이후 일부 유림들이 '''"우리는 대한 제국 황제(大韓帝國 太皇帝)의 신하들이지, 일본 이태왕(日本 李太王)의 신하는 한 적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折)할 수 없다!"'''라고 고종에게 절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긍섭으로 고종 무복설(無服說)을 주장하였는데, 간단히 말하면 망국의 책임이 있는 왕은 왕 대접을 해주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명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숭정제를 들며 망국의 책임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자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일제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으니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일본의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47]
그런데 서울(경성)에서 고종이 일본에게 저항하다가 끝내 독살되었단 소식이 들어오자, 그렇다면 고종은 친일을 한 것이 아닌 것이 된다고 하여 고종에게 절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후 유림계는 '''"고종황제께서는 무능하셨다. 근데 그것이 오직 그분만의 책임인가? 우리도 여러 실책을 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간재 전우 등의 강경파[48] 를 제외한 대다수 유림들은 3.1 운동 등에 참여하여 다른 종교인들과도 상호 연대하고, 파리 장서 사건을 모의하는 등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 철종을 기준으로 혈연적 촌수를 계산하면 철종 - 전계대원군 - 은언군 - 사도세자 - 영조 - 숙종 - 현종 - 효종 - 인조(공통 조상) - 인평대군 - 복녕군 - 의원군 - 안흥군 - 이진익 - 이병원 - 남연군 - 흥선대원군 - 고종.[2] 그가 태어난 사저는 처음에 구름재댁으로 불리다가 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비로소 '''운현궁(雲峴宮)'''이라는 궁의 작호를 받게 된다.[3] 무병장수, 오래 살라는 의미로 이름을 흥선군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유는 당시 흥선군의 처지가 안동 김씨 등 세도가에 붙어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리 방계 왕족 종친이라 할 지라도 목숨줄이 단명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고종이 태어났을 때 일계 종친으로 살아 가야 할 아이를 '목숨 명'에 '복 복' 자로 지은 것이다.[4] 조선의 제26대 임금으로 즉위[5] 그러니까 저 당시 철종의 후계자가 될 종친들 중 핏줄상 '''가장 가까운 게 17촌'''이란 얘기다. 5촌 조카 이재성이 있긴 했지만 후계자는 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직계 왕통의 씨가 거의 마른 상황이었다.[6]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이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지명되었으며 항렬상 계보가 명확하지 않아서 당시에는 은신군을 그냥 사도세자의 친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은신군 항목 참조.[7] 철종의 형 회평군은 자식없이 죽었고, 영평군 또한 후사가 없었으며, 흥선군의 둘째 형 흥완군은 아들을 큰형에게 입양시킨 뒤 정작 자신의 자식은 없이 죽은 상황이었다. 이들은 훗날 양자를 들이는데 고종 즉위 이후의 일이다. (참고로 어른의 사정 때문에 회평군의 후사는 두지 않았다. 자세한 건 회평군 참조.)[8] 은전군파의 이재근에겐 동생 3명이 있었지만, 다 고종 즉위 이후에 태어났다.[9] 정확히는 은전군의 양손자로 입적한 완평군(이재근의 아버지)이 경창군의 9대손이다.[10] 흥완군의 친자.[11] 흥선군의 친자.[12] 심지어 고종 즉위 후 다시 불러들여 본인의 후사를 잇게 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사실상 흥완군의 양자로 들어갔다는건 배제할 이유는 아니었던 셈.[13] 고종의 즉위로 흥완군의 양자로 갔던 형 이재면은 본가로 돌아와 이하응의 대(운현궁)를 이었다.[14] 순명효황후 민씨는 태자비 시절에 죽었고, 이후 새로 맞은 아내가 순정효황후 윤씨.[15] 인플레이션과 화폐경제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16] 당백전을 살리자니 물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당백전을 폐지하자니 조선 시장경제가 망하는 형태이기 떄문에, 흥선대원군의 무리한 (당백전)화폐정책은 백성들에게 있어 민심을 이반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17] 명목 가치는 이름 그대로 상평통보의 100배. 실질 가치는 6배 정도.[18] 당백전이 발행되고 조선의 물가는 엄청나게 폭등했다. 단적으로 쌀값은 당백전 유통 6개월 만에 6배로 폭등한다.[19] 청전은 상평통보의 1/3의 가치밖에 없는 악화였다.[20] 근데 이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에 13개월(거의 1년이상)이나 급료도 못 받았는데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지만 그런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 본인이라는 것은 망각한 듯 하다.[21] 미국인 선교사 겸 외교관, 의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죽진 않았다.[22] 현재의 덕수궁인 경''''운''''궁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後. 현목수비 박씨 추증)의 사당이다.[23] 이때 죽은 이들을 온건 개혁파라고 부르는 견해가 있지만 갑신정변 때 숙청된 이들은 급진 개화파와 척을 지고 있던 사람들(보수적인 사람)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이전에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했다고 썼지만 죽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개화에도 관여했을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다. 애초에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이유는 본인들의 처지가 막장이 되어서였지,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로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24] 일본 공사관 신축 배상 및 일본군 주둔.[25] 양국군 철수 및 동시 진입 보장.[26] 성리학이외에는 모두 탄압해야 한다는 것이 조선 태종때부터 이루어진 숭유억불정책에 기초하여 나온게 이단(천주교, 동학 등)을 탄압하는 조선 고유의 정책이다.[27] 이 과정에서 대원군에게는 고종 밀서 위조 의혹이 있다. 동학 세력은 고종의 밀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대원군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 뻥이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동학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고종은 경복궁 사건의 영향으로 일본군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밀서를 보낼 상황이 아니었고 동학 내에서도 일본에게 왕이 위협받고 있는데 2차 봉기를 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했다고 본다면 이 모든 의문들이 해결되기 때문이다.[28] 이때 독일 황제는 병신 황제(...)로 유명한 제1차 세계대전의 빌헬름 2세였다.[29] 훈련대는 일본군이 훈련하는 부대고 시위대는 미군이 훈련하는 부대다. 일본을 경계하던 고종이 이걸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30] 여담으로 일본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미우라 고로를 풀어준다. 왜냐고? "서양이 조선에 간섭하는데 우리가 간섭 못할 게 어디 있냐?"란 논리로(...)[31] 러시아가 아닌 러시아공사관이다. 분명 러시아공사관이니 조선 땅 안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을 말하는 거다.[32] 실제로 베베르는 이후 열심히 친조선 정책을 펼쳤는데, '''너무 친조선적으로 활동한다'''라는 이유로 2번이나 조선 공사 직에서 파면당할 상황이 온다. 처음은 주일 공사가 우연히 죽으면서 유임되는데, 이때 아관파천이 터진다. 고종이 베베르를 유임시켜 달라고 러시아 외무부에 편지를 보낸 것까지 남아있다. 이후에도 고종을 위한 활동을 많이 했으니, 매수는 대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33] 워낙에 모순적인 부분도 많고 흔히 교과서 등에서는 쉽게 언급 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아서 내막이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이다.[34] 고종은 이범윤을 러시아군에 합류 시켰다고 한다.[35] 일본이 다케시마(竹島)으로 불법 개칭하고, 주인없는 땅이라고 전에 공포했던 '''고종의 칙령 제41호('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독도)는 울도군에 속한다.')'''는 싸그리 무시한채 자기네 영토에 있는 시마네 현에 불법 편입하여 일본이 자국의 영토라고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일본이 독도에 대한 억지 영토 영유권 주장을 한다고 해도, 100년동안 실효적 지배 점유를 한다면 그나라의 영토로 자연스레 귀속되기 때문에 대한민국 5천만의 국민이 있는 이상 뻇는건 결코 안된다. 용납해서도 안된다.[36]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이 쓰레기 같은 나라에도 충신이 있었군요!' 하면서 감탄했다.[37] 만의 하나 일본군과의 전면전이 발발한다 치더라도 이 정도 병력은 수도 방어에 쓰일 수 있는, 즉 전술적으로 충분히 유의미한 전력이다.[38]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몇 개월 전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갖는 데에 비밀리에 합의했다. 그리고 1905년 8월 영국과 일본은 제2차 영일 동맹으로 영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에서 갖는 이익을 보장하고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옹호하기로 서로 합의하였다. 즉,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겠다는 내용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이미 차례로 승인했던 것.[39] 조선왕 독살설 참고.[40] 또는 수정과 혹은 홍차라는 설도 또한 있다. 고종이 커피를 자주 즐겨 마셨다는 것에서 나온 듯.[41] 비소 중독의 경우는 세포조직 단위부터 파괴, 사망하기 때문에 부패가 이른 편이다.[42] 그러나 기록의 진위부터 의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게, 당시 데라우치는 조선 총독이 아니라 일본 총리였다. 암살에 개입했을 가능성이야 있지만 내지 정무로도 충분히 바빴었을 사람이 식민지의 실권 다 잃은 황제의 암살에 신경쓸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들지는 의문이다.[43] 일제 강점기 자작 작위와 은사금 3만원을 받았던 인물로 '''고종의 5촌 조카'''이기도 하다. 친조카인 영선군은 정적이었던 것 등, 고종은 일가와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44] 실제로 청나라의 비운의 황제로 알려진 광서제의 유해를 부검한 결과 비소 성분이 발견되어 독살당했음이 밝혀지기도 했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위안스카이. 서태후도 함께 용의선상에 오르고 있으나 당니 서태후는 이질이라는 중병에 걸려 있었고 익일에 광서제를 따라갈 정도로 몸이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서태후의 악명을 고려하면 결코 배제할 수는 없으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위안스카이의 이후 막장 짓거리를 생각해보면 정황상 위안스카이가 가장 유력하다.[45] 순종은 먹었을 당시 치아 전체가 헐어 빠졌고, 심각한 복통이 발생되어 구토, 혈설사가 몇주 내내 발생하여 고생했다고 한다.[46] 공교롭게도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능호도 홍릉(洪陵)으로 한자까지 똑같다.[47] 이 주장으로 조긍섭은 최병심 등의 상복 찬성파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고 제자에게도 절연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다가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듣자 한발 물러서 상복을 입게 된다.[48] 유림 강경파들은 "머리 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伏鞫運動)은 유림으로써 상종할 일이 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3.1 운동 참여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