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
朝鮮水軍 / Joseon Navy
조선왕조의 수군. 조선 이전 시대 한반도의 수군에 대해서는 한국사/군사 문서 참조.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강을 통한 수운이 발달한 한반도에서는 수상 교통의 비중이 높았다. 당연히 왜구를 비롯한 해적[1] 과 타국군의 침략과 약탈에 대비해야 했으므로 고려 수군을 이어받은 조선 수군은 건국 초부터 잘 만들어진 제도와 우수한 화력 및 전술로 해상적대세력을 압도해야 했다.
조선 수군제도의 성립 및 변화에 대해 설명한 글 : https://ehddu.tistory.com/576
조선 초기 수군은 각 도별로 1명 내지 2명의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2] 를 두고 그 아래 포·진에 수군도첨절제사(水軍都僉節制使)[3] 및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등을 두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병마도절제사의 수군 통수 문제와 관련하여 몇 차례 개편 이후 수군도안무처치사 체제가 확립되어 후대에 이르게 되었다. 초기 제도적으로 정비된 수군은 그 고된 근무환경과 열악한 조건 등으로 인하여 대립(代立) 방군수포(대신 포를 납부하여 군역을 면하는 일) 등으로 점차 군역을 기피하게 되었고, 죄인 등이 수군에 충원되면서 수군은 천역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실제로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맏아들인 정진 역시 전라도 수군으로 강제복무하게 되어야 했던 기록이 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을 명예직으로 수여하고 요역을 면제하고, 여러 혜택을 배려하였으나 여전히 수군에 충원되는 것을 여러 백성들이 기피한 까닭에 성종대에 이르러 수군역을 세습하게 하여 일정한 군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수군역의 세습은 천역화를 가속화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칠반천역의 하나로 간주되게 하였다.[4]
각 도마다 주진, 거진, 제진을 두었고,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시기 창설되었으며 각각 지휘체계가 나눠져있었던 수군을 거의 다 총괄하는 직책으로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 혹은 해군작전사령관에 해당한다.[5] 경상, 전라, 충청도의 하삼도의 수군을 모두 지휘한다. 실질적으로 조선 수군의 거의 대부분을 지휘하게 되는 종2품 관직이다. 임진왜란 중 각 도 수사(水使) 간의 원활한 지휘체계를 위하여 1593년 관직이 신설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순신 항목과 원균 항목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삼도수군통제사는 초대, 3대 통제사를 맡은 이순신과 그 후임이였던 원균이다. 제4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 이후로는 거의 경상우수사가 이를 겸하게 되었고, 임기는 2년이었으나 중임되는 경우도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지휘하는 통제영은 설치 직후에는 한산도에 있었으나 칠천량 해전 이후 고금도로 옮겼으며, 이후 통영에 설치되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도수군통제사 항목 참조.
정묘, 병자호란 이후 창설된 직책이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전라, 경상, 충청수군을 이끌고 남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경계한다면, 삼도수군통어사는 경기, 충청,[6] 황해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이나 북방에서 침입하는 외적을 경계하였다. 양대 호란 이후 위기 상황 시 조정이 강화도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따른 서해안 통합 방위가 필요해짐에 따라 신설된 직책이다. 품계는 통제사와 동일한 종2품의 무관이 임명되었으며, 강화도를 관할하는 경기수사를 겸임하였다.
조선시대 각 도의 수군을 통솔하던 정3품 외관직 무관이었다. 오늘날의 함대사령관에 해당한다. 줄여서 수사라고도 부르며, 임기는 2년이었다.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하여 만들었던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를 1466년 세조 12년에 다시 개칭한 것으로 각 도의 정원은 경상, 전라에 각 3명, 경기, 충청, 평안에 각 2명, 황해, 강원에 각 1명씩 배정하였다. 이후 도의 지리적 여건이 고려되어 전임 수군절도사는 경상 전라 함경도에 각 2명(좌,우로 분도하여 구분하였다), 경기 충청에 각 1명씩 모두 6명만이 배정되었다. 나머지 11명은 해당 도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겸임하였다. 이 중 충청수사와 경상좌/우수사, 전라좌/우수사는 임진왜란 이 후 삼도수군통제사 직속 수사로 편제되었으며 경상우수사는 삼도수군통제사가 겸임하였다.
수사는 각 도의 연해변에 있는 진, 포, 보에 소속된 전선과 주장인 첨절제사(종3품), 우후(정4품), 동첨절제사(종4품) 등을 지휘 통솔하였다.
역시 자세한 내용은 수군절도사 항목 참조.
조선시대 각 도의 거진에서 수군을 통솔하던 종3품 무관 벼슬이다. 오늘날의 전단장에 해당한다.
조선 때 각 도의 여러 진에 배치되었던 종4품의 무관직이다. 오늘날의 전대장에 해당한다. 본래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의 수에 따라 만호, 천호, 백호 등으로 구분하여 불렸으나 점차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여 이 호칭으로 고정되었다. 임기는 900일이었고 무예를 시험하여 임명하되 무과합격자, 겸사복, 내금위 등은 시험과 관계없이 임명되었다.
조선 후기, 숙종 시기에는 수군 무용론이나 감축론이 대두되었다. 수군은 쇠퇴하여 유명무실해졌으며, 수군을 폐지하고 조운선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수군은 거의 정체 상태였다.
고종 30년(1893년) 3월 22일, 강화와 갑곶, 진해에 통제영학당이 설치되었고 교육이 실시되기도 하였으나 폐지되었다. 고종 32년 삼도수군통제영과 각도 수영이 혁파되고 전통적인 수군은 해산되었다.
조선 수군은 대한민국 해군과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 조선 수군의 혁파와 대한민국 해군 창설은 수십년의 시간 격차가 존재하고, 인적 자원이나 조직 체계, 무기 체계 면에서 전혀 계승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간접적으로 연결하는 대한제국군에서 해군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의 국방력이 방해받다가 단절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해군에서는 조선 수군이 한반도의 바다를 지켜온 선배 조직이므로, 해군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조선 수군의 계승자로 여기고 있다. 몇 해군부대 마크에 거북선이 들어갈 정도.
예를 들어서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현충사를 참배하고 충무공 이순신에게 현대 해군식으로 '제독'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전 해군 장병들에게 이순신 '제독'에 대한 교육을 하며 정신적 계승을 하고 있다. 또한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 등 함선에 조선시대 수군 장수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11]
1. 개요
조선왕조의 수군. 조선 이전 시대 한반도의 수군에 대해서는 한국사/군사 문서 참조.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강을 통한 수운이 발달한 한반도에서는 수상 교통의 비중이 높았다. 당연히 왜구를 비롯한 해적[1] 과 타국군의 침략과 약탈에 대비해야 했으므로 고려 수군을 이어받은 조선 수군은 건국 초부터 잘 만들어진 제도와 우수한 화력 및 전술로 해상적대세력을 압도해야 했다.
조선 수군제도의 성립 및 변화에 대해 설명한 글 : https://ehddu.tistory.com/576
2. 상세
조선 초기 수군은 각 도별로 1명 내지 2명의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2] 를 두고 그 아래 포·진에 수군도첨절제사(水軍都僉節制使)[3] 및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등을 두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병마도절제사의 수군 통수 문제와 관련하여 몇 차례 개편 이후 수군도안무처치사 체제가 확립되어 후대에 이르게 되었다. 초기 제도적으로 정비된 수군은 그 고된 근무환경과 열악한 조건 등으로 인하여 대립(代立) 방군수포(대신 포를 납부하여 군역을 면하는 일) 등으로 점차 군역을 기피하게 되었고, 죄인 등이 수군에 충원되면서 수군은 천역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실제로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맏아들인 정진 역시 전라도 수군으로 강제복무하게 되어야 했던 기록이 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을 명예직으로 수여하고 요역을 면제하고, 여러 혜택을 배려하였으나 여전히 수군에 충원되는 것을 여러 백성들이 기피한 까닭에 성종대에 이르러 수군역을 세습하게 하여 일정한 군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수군역의 세습은 천역화를 가속화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칠반천역의 하나로 간주되게 하였다.[4]
2.1. 조선 수군의 편제
각 도마다 주진, 거진, 제진을 두었고,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 주진(主鎭) -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수사(水使)
- 거진(巨鎭) -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 제진(諸鎭) - 만호(萬戶)
2.1.1.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임진왜란 시기 창설되었으며 각각 지휘체계가 나눠져있었던 수군을 거의 다 총괄하는 직책으로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 혹은 해군작전사령관에 해당한다.[5] 경상, 전라, 충청도의 하삼도의 수군을 모두 지휘한다. 실질적으로 조선 수군의 거의 대부분을 지휘하게 되는 종2품 관직이다. 임진왜란 중 각 도 수사(水使) 간의 원활한 지휘체계를 위하여 1593년 관직이 신설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순신 항목과 원균 항목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삼도수군통제사는 초대, 3대 통제사를 맡은 이순신과 그 후임이였던 원균이다. 제4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 이후로는 거의 경상우수사가 이를 겸하게 되었고, 임기는 2년이었으나 중임되는 경우도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지휘하는 통제영은 설치 직후에는 한산도에 있었으나 칠천량 해전 이후 고금도로 옮겼으며, 이후 통영에 설치되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도수군통제사 항목 참조.
2.1.2.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
정묘, 병자호란 이후 창설된 직책이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전라, 경상, 충청수군을 이끌고 남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경계한다면, 삼도수군통어사는 경기, 충청,[6] 황해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이나 북방에서 침입하는 외적을 경계하였다. 양대 호란 이후 위기 상황 시 조정이 강화도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따른 서해안 통합 방위가 필요해짐에 따라 신설된 직책이다. 품계는 통제사와 동일한 종2품의 무관이 임명되었으며, 강화도를 관할하는 경기수사를 겸임하였다.
2.1.3. 수군절도사
조선시대 각 도의 수군을 통솔하던 정3품 외관직 무관이었다. 오늘날의 함대사령관에 해당한다. 줄여서 수사라고도 부르며, 임기는 2년이었다.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하여 만들었던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를 1466년 세조 12년에 다시 개칭한 것으로 각 도의 정원은 경상, 전라에 각 3명, 경기, 충청, 평안에 각 2명, 황해, 강원에 각 1명씩 배정하였다. 이후 도의 지리적 여건이 고려되어 전임 수군절도사는 경상 전라 함경도에 각 2명(좌,우로 분도하여 구분하였다), 경기 충청에 각 1명씩 모두 6명만이 배정되었다. 나머지 11명은 해당 도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겸임하였다. 이 중 충청수사와 경상좌/우수사, 전라좌/우수사는 임진왜란 이 후 삼도수군통제사 직속 수사로 편제되었으며 경상우수사는 삼도수군통제사가 겸임하였다.
수사는 각 도의 연해변에 있는 진, 포, 보에 소속된 전선과 주장인 첨절제사(종3품), 우후(정4품), 동첨절제사(종4품) 등을 지휘 통솔하였다.
역시 자세한 내용은 수군절도사 항목 참조.
2.1.4. 첨절제사
조선시대 각 도의 거진에서 수군을 통솔하던 종3품 무관 벼슬이다. 오늘날의 전단장에 해당한다.
2.1.5. 수군 만호
조선 때 각 도의 여러 진에 배치되었던 종4품의 무관직이다. 오늘날의 전대장에 해당한다. 본래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의 수에 따라 만호, 천호, 백호 등으로 구분하여 불렸으나 점차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여 이 호칭으로 고정되었다. 임기는 900일이었고 무예를 시험하여 임명하되 무과합격자, 겸사복, 내금위 등은 시험과 관계없이 임명되었다.
2.1.6. 수영
- 삼도수군통어영 (교동 수영)
- 경기수영(교동 수영)
- 충청수영(보령 수영)
- 황해수영
2.2. 운용한 전선
- 맹선
- 추왜별선 - 속도가 빠른 왜선을 추적하기 위한 쾌속선이다. 이름이 비슷한 왜별선은 왜구선을 포획하여 견본으로 둔 것이다.
- 판옥선
- 거북선
- 해골선
- 방패선(방선) - 뱃전에 방패판을 둘러친 배로, 경기/충청 지역 등 대형선이 활동하기 어려운 서해안 지역의 물이 얕은 곳에 주로 배치되었다.
- 병선 - 주력함(거북선, 판옥선, 방패선)에 딸린 소형 무장선이다.
- 사후선 - 거북선, 판옥선, 방패선, 병선에 1척씩 딸린 배로, 연락이나 정찰에 쓰인 비무장선이다.
- 포작선 - 고기잡는 배, 즉 어선이다. 실질적으로 조선 수군에 제일 많았다. 화포를 거치해서 전투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수송용이나 원래의 업무인 고기잡이 용도로도 많이 사용했다.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청어 잡이로 군자금을 마련했던 걸 생각하면 포작선의 가치를 가볍게 볼 수 없다.[9]
2.3. 사용한 병기
2.4. 수군의 황혼
조선 후기, 숙종 시기에는 수군 무용론이나 감축론이 대두되었다. 수군은 쇠퇴하여 유명무실해졌으며, 수군을 폐지하고 조운선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수군은 거의 정체 상태였다.
고종 30년(1893년) 3월 22일, 강화와 갑곶, 진해에 통제영학당이 설치되었고 교육이 실시되기도 하였으나 폐지되었다. 고종 32년 삼도수군통제영과 각도 수영이 혁파되고 전통적인 수군은 해산되었다.
3. 대한민국 해군과의 관련
조선 수군은 대한민국 해군과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 조선 수군의 혁파와 대한민국 해군 창설은 수십년의 시간 격차가 존재하고, 인적 자원이나 조직 체계, 무기 체계 면에서 전혀 계승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간접적으로 연결하는 대한제국군에서 해군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의 국방력이 방해받다가 단절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해군에서는 조선 수군이 한반도의 바다를 지켜온 선배 조직이므로, 해군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조선 수군의 계승자로 여기고 있다. 몇 해군부대 마크에 거북선이 들어갈 정도.
예를 들어서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현충사를 참배하고 충무공 이순신에게 현대 해군식으로 '제독'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전 해군 장병들에게 이순신 '제독'에 대한 교육을 하며 정신적 계승을 하고 있다. 또한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 등 함선에 조선시대 수군 장수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11]
4. 관련 항목
[1] 민간에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여진족 해적도 악명 높았다.[2] 약칭은 수사[3] 약칭은 첨사[4] 이 점은 유럽도 마찬가지. 대항해시절 선원이 모자라 부랑자나 죄수를 끌어오기도 하고, 남의 배 선원을 가로채기도 했다. 심지어 납치(!)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타국의 외교관도 영국에 왔다가 영국 해군에 납치된 사례가 있으며, 미국 선원들을 납치하려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어 1812년에 전쟁까지 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항구 술집에서는 해군 납치조와 민간 선박 선원들 간의 집단 패싸움도 잦았다고.[5] 정확히 말하면 해군참모총장이 해군작전사령관을 겸임하고 군정권과 군령권을 모두 행사하는 개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당시 미 해군참모총장이던 어니스트 킹 제독이 이런 방식으로 작전권을 행사했다.[6] 충청수사는 남해안으로 외적이 침입할 경우, 통제사의 지휘를, 서해안이나 북방으로 외적이 침입할 경우는 통어사의 지휘를 받게끔 되어 있었다.[7] 거제현 오아포에 있다가 임진왜란 이후로는 두룡포로 옮겨가고 거제현 두룡포에서 고성현 두룡포로 행정구역이 변경된다. 삼도수군통제사가 경상우수사를 겸임하였다. 이 거제현과 고성현에 있던 통제영에서 유래한 지명이 현재 통영시[8] 충남 보령 오천면 소재 오천항이 수영이였다. 외적이 남해 방면으로 침입하면 통제영 휘하에, 서해 방면으로 침입하면 통어영 휘하에 소속되었다.[9] 농담이 아니라 1, 2차 세계대전 때도 대형 어선들이 징발되어 수송 임무나 잠수함 초계 임무를 맡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어선이 침투 중인 간첩 잠수정을 잡은 사례가 있다. 그것도 그물로.(...)[10] 기다란 낫인데 도선해서 백병전을 벌이려는 왜병들을 저지하는 겸 베어버리는데 사용했다.[11] 조선 수군 장수들에 더해서 장보고, 광개토대왕, 대조영, 강감찬, 류성룡, 율곡 이이 등 위인들의 이름은 시대를 막론하고 붙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