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디즈레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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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영국의 정치인. 현 영국 보수당의 대부격 되는 인물로, '대영제국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펼쳐 빅토리아 여왕 시기 영국을 당대 패권국으로 올려놓은 총리이다.[4] 동시대 라이벌이자 자유당의 리더였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과의 평생에 걸친 경쟁 관계로도 유명하다.
2. 생애
2.1. 청년기
1804년 런던에서 역사가 아이작 디즈레일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이 D'''israel'''i인 것에서 추측 가능하듯이 유대계 영국인였다.[5] 정확히는 세파르드 유대인으로 그의 조부가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왔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미 1813년에 기독교로 개종한 세속주의자였고, 본인 역시 기독교 세례를 받은 기독교 신자였다.
17살의 나이로 변호사 사무실에 견습생 격으로 취직하였으나 법률에는 흥미를 크게 느끼지 못한채 문학에 몰두했는데, 여기서 포텐이 터진다. 첫 작품이었던 [비비앤 그레이(Vivian Grey)]와 [젊은 군주 (The Young Duke)]와 같은 작품들이 성공하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 이러한 명성을 이용해 정계로 진출하고자 시도하지만 무려 '''6번의 낙선'''(...)을 경험한 끝에야 1837년 토리당의 하원의원으로 당선에 성공한다.
2.2. 초기 정치 인생
당시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차티스트 운동에 호응[6] 하여 투표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주목을 끌던[7] 디즈레일리는 1841년 토리당 내에 청년 영국단이라는 계파를 창설하고 그들의 지도자가 된다. 이후 1846년 산업 자본가 세력을 대표하는 로버트 필 정권의 곡물법 폐지 시도에 대한 반대를 전두지휘하면서 필 내각의 붕괴를 이끌었다. '보호무역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는 덤. 이후 더비 백작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내각, 약칭 더비 내각의 재무부 장관을 지내다가 1868년 더비 백작이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영국의 40대 수상 자리에 오른다.
2.3. 1기 내각 (1868)
1868년 2월 야심차게 출범한 디즈레일리 내각은 '''불과 10개월만에 붕괴한다.''' 그가 초선 의원일 때부터 거진 20년 넘게 실행을 주장한 보통선거가 1867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이 해 처음으로 실시되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선거 결과 글래드스턴이 이끄는 자유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것.(...)
이 10개월 남짓한 시기에 디즈레일리 내각이 마주해야했던 문제는 주로 아일랜드의 종교 문제였다. 가톨릭 교도가 다수인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삼은 이후 영국은 가톨릭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일부러 국교회(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를 지원해줬는데, 문제는 이 지원이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가톨릭교도들의 분노는 이 시기 드높았고, 디즈레일리는 국비로 아일랜드에 가톨릭 대학을 건립하는 것으로 적당히 타협을 보려했지만, 자유주의자 글래드스턴과 그가 이끄는 자유당은 정교분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러한 디즈레일리의 제안에 대해 거세게 반대했다.[8] 자유당이 글래드스턴의 입장으로 대동단결한 반면, 여당은 디즈레일리의 정책을 놓고 분열이 있었기 때문에 이 종교 문제는 디즈레일리 내각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했다. 반면 자유당은 "비국교회"가 강력한 정체성이 되었다.
2.4. 야당 지도자 시절
본업인 작가로 돌아가 1870년 소설 《로세어(Lothair)》를 발표했는데, 이게 또 베스트셀러가 된다(...)[9] 한편 정치에도 여전히 관심을 두어 글래드스턴 내각의 대외적 무관심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이게 제국주의로 흐르던 민심에 제대로 적중했다. 민족주의가 팽배하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디즈레일리는 다시 대중의 지지를 회복하기 시작했다.[10]
그리고 1873년 다시 디즈레일리에게 기회가 온다. 그 기회는 역설적이게도 총리이던 시절 그의 발목을 잡은 아일랜드 내 가톨릭 대학 건립 문제였다. 글래드스턴이 야당 지도자 시절 주장하던 아일랜드 내 정교분리 시도는 막상 집권 후 거센 반발에 의해 좌절되었고, 결국 더블린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려고 했던 것. 이에 디즈레일리는 아일랜드 내 가톨릭 교회 및 자유당 내부의 글래드스턴 반대 세력과 손을 잡고 이 법안을 부결시킨다. 글래드스턴은 사임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디즈레일리에게 수상 직을 제의했지만, 여전히 자유당이 제 1당인 상황에서 또다시 단명 총리가 되기는 싫었던 디즈레일리는 여왕의 제안을 사양한다. 그리고 다음해 있을 1874년 총선을 기다렸다. 1874년 2월에 열린 총선에서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은 과반을 차지하는 낙승을 거두었고, 디즈레일리는 2번째 대영제국 총리직을 맡기 시작한다.
2.5. 2기 내각 (1874-1880)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팽창 또 팽창!"'''
야당 지도자 시절 글래드스턴 내각의 비 제국주의 정책을 호되게 비난했던 디즈레일리는 영국의 지위를 유럽 내에서 드높이기 위해 골몰했다. 애초에 본인이 대외정책을 수상직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도 흥미로운 분야로 생각하기도 했고..[11] 주요 외교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수에즈 운하 매입
기존까지 아프리카 대륙을 쭉 한 바퀴 돌아서 식민지 인도로 가야했던 영국 입장에서 경로 중 2,000km를 단축하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1869년)은 엄청난 선물이었다. 1875년에 수에즈 운하를 쓰는 선적들의 국적 중 80% 가량이 영국 선적이었던 게 이를 방증한다. 그 외에도 세포이 항쟁 등의 인도 내에서의 반란 및 러시아와의 그레이트 게임의 격화와 맞물렸고, 이 수에즈 운하회사의 주체가 영국의 영원한 라이벌 프랑스였기에, 수에즈에 대한 영국의 관심과 걱정은 해가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그런 와중 1875년 11월, 이집트의 재정악화로 당시 캐디브였던 이스마일 파샤가 왕실보유의 수에즈 운하회사 주식 17만 6,602주(총 주식의 3/5)를 매도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전해 듣게듣는다. 디즈레일리는 이 사항에 대해 바로 착수했지만, 캐디브 측이 400만 파운드(1억 프랑)이란 거금을 제시해 난관을 겪는다. 이에 디즈레일리는 영국 은행 대신 자신의 연줄이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을 이용하여[12] 거금 문제를 해결, 프랑스도 모르는 사이에 카이로에서 거래를 성사해 수에즈 운하의 운영권을 갖게 됐다.[13] 이후, 글래드스턴 내각 시기인 1882년, 이집트에서 아라비 파샤 주도의 반제국주의 운동이 거세지자 이를 빌미로 영국군을 파견,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 영국령 인도 제국 성립
세포이의 항쟁을 진압하고 20여년이 지난, 디즈레일리 2기 내각이었던 1876년, 넓은 식민지를 가지고도 황제 칭호를 얻지 못 하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원에서 왕실 칭호법(Royal Titles Act)을 통과, 영국의 식민지이던 인도와 미얀마 등을 엮어 탄생한 영국령 인도 제국(1877)의 여제 칭호를 영국 여왕에 겸임시켜, 진정한 의미의 대영제국을 구가했다. 이 인도 제국이 영국으로부터 해방되는 1947년을 대영제국의 사실상 해체라고 보는 견해도 있을 정도로 그 의미는 컸다. (자세한 내용은 인도 제국 항목 참조.) 다만, 이와 별개로 인기없는 법을 통과시킨 디즈레일리의 당시 하원 내 권위는 떨어졌다고 평가받는다.
1875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난다. 당연히 오스만 제국은 가혹하게 이 반란을 진압하고, 잔혹한 현지의 상황이 영국에 전해졌을 때 디즈레일리는 이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문제는 정적 글래드스턴[14] 이 불가리아의 독립을 촉구하는 팜플렛을 썼는데, 이것이 영국의 여론에 불을 붙였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여론에 떠밀린 결국 디즈레일리 내각은 중재단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한다. 이 와중에도 디즈레일리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고자 오스만 제국 내의 군사적 요충지에 영국군을 파견해보고자 애를 썼는데, 디즈레일리를 빼고는 의회와 내각 구성원들마저 다들 오스만 제국을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분할하는 것에 목을 맸다. 그런데 이 때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터진다. 1878년, 이 전쟁은 20여년 전 크림 전쟁과는 반대로 러시아의 압승으로 끝났고, 산 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된다. 러시아와 그 위성국가들의 영토가 대폭 넓어진 이 조약은 영국 입장으로서는 위협적인 상황이었고,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갈등의 상황에서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회담을 제의했고, 열강들의 마라톤 협상 끝에 베를린 조약을 체결, 그 결과로 영국은 터키 아래 있는 키프로스섬을 손에 넣어(실효지배), 동방의 오스만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에 성공한다. 사족으로 디즈레일리는 이 회담에서 당시 외교관들의 공용어인 프랑스어 대신에 철저히 영어로만 말을 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도 디즈레일리에게 꽤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저 나이든 유대인, 저 사람이야말로 진짜 남자지!(Der alte Jude, das ist der Mann)"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굵직굵직한 사건 외에도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줄루랜드 침공[15] 등, 디즈레일리의 팽창적 대외 정책은 임기 내내 계속됐다.2.6. 말년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1878년 이후로는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 1870년대 후반 영국 내의 흉년에 대한 대책으로 값싼 미국산 곡물을 수입해오기로 결정하면서 농민들이 보수당 지지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 또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줄루랜드 침공은 아무리 제국주의의 시기였다고 할지라도 구실도 없이 무작정 쳐들어가는 비도덕한 외교술로 여겨져 대중들에게서 지지를 받지 못했을 뿐[16] 만 아니라, 정적인 글래드스턴에게 공격의 구실로 작용한다. 결국 1880년의 총선에서 그와 보수당은 참패하고 글래드스턴이 다시 수상으로 등극하면서 그는 물러나게 된다.
수상직에서 내려온 뒤에도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못했고, 물러난 지 1년이 조금 안 됐던 1881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난다. 대중들이 몰려들어 혼란할 것을 우려해 사적으로 치뤄진 그의 장례식에는 디즈레일리를 아낀 빅토리아 여왕과 수상 글래드스턴이 참석했다. 다만 글래드스턴의 경우, 여왕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참석한 것이며 참석하고 나서도 "평생토록 이렇게 추도사를 읽는 게 힘들었던 자리는 처음이었다."고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죽어서까지도 화해하지 못했던 셈.
3. 이모저모
- 아내 메리 앤 루이스(1792~1872)와 1839년 결혼했다. 그런데, 메리는 12살 연상의 부유한 미망인이었다. 때문에 디즈레일리가 돈만 노리고 결혼을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 2년 넘게 그에게 온갖 시험을 했다. 결국 그녀는 디즈레일리가 진심이라고 판단하고 청혼을 승낙했지만, 이전에 그가 "결혼이란 무덤에 들어가는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자주 말하고 다닌 탓에 정적들은 그가 스스로 무덤에 들어갔다고 비웃었다. 실제로 디즈레일리가 돈 때문에 결혼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아내를 사랑한 것 역시 사실이긴 하다. 부부가 "사실 나 돈 때문에 당신과 결혼한 게 맞아요."/ "그래도 다음번에 저에게 청혼할 때는 사랑 때문에 하겠죠."라고 농담을 나눴다는 야사도 있다. 디즈레일리가 결혼했을 때 그 당시에는 만혼이라고 볼 수 있던 30대 중반이었고, 띠동갑 연상인 아내는 50에 가까운 나이였기에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다만 2년 넘게 시험을 했다는 일화는 진위가 의심스러운데, 메리 앤 루이스는 전 남편인 윈덤 루이스와 사별하고 1년 뒤에 디즈레일리와 재혼했기 때문이다.
- 정적 글래드스턴이 빅토리아 여왕과 불편한 관계였던 것과 달리, 디즈레일리 본인은 사적으로도 빅토리아 여왕과 매우 절친한 관계였다. 총리직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생활하던 시기에도 심심하면 빅토리아 여왕에게 호출되어 만담을 나누었을 정도. 재밌는 것은 정작 처음 대면했을 당시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디즈레일리의 요란한 옷차림[17] 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면서 뒷담을 했다고 전해진다.
- "세상에는 3가지 거짓말이 있다. 그럴 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이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에 등장한다. 암살단과 템플 기사단이라는 두 거대한 비밀 조직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암살당하기 직전까지 모르고 있다가 주인공 제이콥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는다. 참고로 아내가 키우는 개 이름이 데스몬드.(...)
[1] 백작 본인에 대한 경칭[2] 1st Earl of Beaconsfield[3] Eliezer Cogan라는 영문학자 겸 신학자라는 인물이 설립한 학교다.[4] 다만 제국주의에 대한 평 자체가 으레 그렇듯 이 때문에 비판도 받는다.[5] 오늘날까지도 영국 역사상 유일한 유대인 수상이다. 정치인 시절에 로스차일드 가문과 무척 가까워서 이걸로도 온갖 음모론이 돌았었다. 물론 데이비드 캐머런에게도 유대계의 피가 흐르기는 하지만 순혈 유대인은 디즈레일리 뿐. 어처구니없게도 국내에 나온 유대인 관련 책자에서 디즈레일리 라이벌인 글래드스턴도 유대인이라고 나온 바 있는데, 유대인이 많이 쓰는 성인 스턴(Stern)이란 점에서 나온 음모론이지만, 글래드스턴은 Glad'''Stone''' 이며, 유대인이 전혀 아니다.[6] 그가 소속된 정당이 보수 성향의 토리당임을 생각하면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훗날에도 솔즈베리 후작(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의 거센 반대를 받았다.[7] 물론 이 당시에는 정치 초짜여서 투표권 확대에 실패했다. 영국에서 보통선거가 확립되는 것은 그가 총리직에 도전할 무렵인 1867년이 되어서였다.[8] 풀어 말하자면 글래드스턴은 가톨릭과 성공회 둘 다 국가가 신경쓰지 말고 그냥 알아서 내버려둬라 라는 입장인 셈.[9] 문학성보다는 전직 총리가 소설을 써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던 듯 하다. 그러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정치인으로서의 유명세에 의존하는 작가라고 평가하기도 그런 것이, 문학성이 낮은 작가는 아니다. 원체 글솜씨가 준수하여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를 소설에 풀어내는 능력이 보통이 아닌데다 당대 작가로서의 영향력도 작지 않다.[10] 단적인 예가 1872년 왕세자(훗날의 에드워드 7세)가 병을 앓아서 양 당 지도자가 문병안을 간 적이 있는데 이것을 바라보던 대중들이 디즈레일리에게는 엄청난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낸 반면 글래드스턴에게는 침묵스킬을 시전...[11] 다만 사학자들은 그가 수상직에 오를 때까지 해외로 나가본 게 단 두 번(어린 시절 중동 여행과 파리로의 신혼 여행)이었던 점 등을 근거로, 그가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유행에 편승'''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12] 이 때 양측이 나눴다는 대화가 야사로 유명하다. 약 400만 파운드를 빌려달라는 디즈레일리의 요청을 받고, 로스차일드 측에서는 그럼 어떤 담보를 제시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디즈레일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담보는 대영제국이다."[13] 수에즈 운하 지분을 사들이는 안건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된 뒤,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합의가 됐습니다! 당신 손에 들어왔다구요, 부인!(it is settled; you have it, madam!)"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4] 당시에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언론인으로 생활 중이었다.[15] 다만 79년 초반의 이산들와나 전투에선 되레 줄루족에게 영국군이 패배했다. [16] 게다가 줄루랜드를 나중에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었으나 총도 없는 야만인이라고 얕보던 줄루 군대와 전투에서 영국군은 예상을 뛰어넘는 전사자를 내야 했기에 여론과 언론에서 쓸데없는 전쟁으로 영국 젊은이들을 죽였다고 신나게 디스당했다.[17] 공적인 자리에서는 경건함을 중시하던 빅토리아 시기에 디즈레일리는 독보적인 화려한 옷차림(연두색 연미복 등)으로 매우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