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귀

 

이귀
李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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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이씨(延安 李氏)
이름
이귀(李貴)

옥여(玉汝)

묵재(默齋)
생몰년
1557년 ~ 1633년
1. 개요
2. 생애
2.1. 선조 치세
2.2. 임진왜란의 활약
2.4. 인조 치세
3.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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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광해군~인조 시기)의 문신. 이이성혼의 문하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항복류성룡을 따라 종군하였다.
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지만 어머니 권씨 부인의 혹독한 훈육으로 어릴 때부터 성정이 올곧고 청렴하며 1번 자신의 사람이 되면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끝까지 편을 드는 등 강단이 있기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선조 대에 이귀가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동인들의 공격을 받자 이항복과 이덕형은 이귀를 옹호하였고 이귀가 경제적으로 힘들 때도 녹봉을 덜어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해서인지 아전이 탐욕스러운 이유는 부모와 처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니 아전들에게 녹봉을 넉넉하게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광해군 시절 능양군, 김류,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모의하여 거사를 성사시킨 덕분에 반정 1등공신에 올랐으며 인조반정의 대표 인사로 꼽힌다.
이귀의 아들로는 이시백이시방이 있다. 형인 이시백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활약하여 효종영의정이 되었고, 동생인 이시방도 학업에 열중하여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시백과 이시방 형제는 김육대동법 확대에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기도 했다.

2. 생애



2.1. 선조 치세


선조 시기에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스승인 이이를 강력히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헛소리라는 등 동인들의 핍박을 받았다.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하여 10만 양병(養兵)을 주장하였으나 이귀를 시기하던 대신들이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1598년)에 대비하지 못했다.

2.2. 임진왜란의 활약


선조가 평양으로 파천하러 갈 시기에 이귀는 서울에서 강릉참봉(康陵參奉, 노원구 공릉동 소재)으로 있었는데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류성룡 휘하에서 종군했는데 선조실록에 류성룡이 선조에게 "장성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는 신이 그의 사람됨을 몰랐었는데 지난번 비로소 만나보니 취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근래 살펴보건대 군사를 훈련시켜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고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매우 훌륭합니다"라며 이귀를 칭찬하는 기록이 있다.
이어 이덕형과 이항복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으로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한 후 이천으로 가서 분조 활동을 하고 있던 세자 광해군을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는 등 이때까지만 해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2.3. 인조반정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적이지만 광해군이 총애하는 정인홍을 풀어주자고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이첨의 일파를 처형한 이유로 체포된 최기를 마중나간 일 때문에 광해군 8년 해주 옥사에 연관되어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되었고[1] 1619년 풀려나와 1622년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신경진(申景禛)·최명길·김자점 및 두 아들 이시백·이시방 등과 함께 반정을 준비하였다.
인조반정 직전에는 역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받자 "날 모함하는 놈들하고 대질을 시켜달라"며 정면돌파하기도 했다. 60이 넘은 늙은 나이에 인조반정에 직접 가담하였으며 특히 대 호랑이 특수부대인 착호갑사를 이끌고 와서 계획이 비교적 허술했던 반정 성공에 앞장섰다. 이이첨을 처형할 때 직접 심문하기도 하였는데 이이첨이 대감은 나의 마음을 알 것이라며 "내가 허균같은 놈들이 대비마마를 해치려는거 지킨 충신인거 아시죠?"[2][3]라고 살려달라고 하자 "지금까지 네 졸개들 앞장서서 악행을 저질렀던게 오늘 이 말하려고 그런 거였냐. 그럼 폐모는 누구의 뜻이었냐?"라고 비웃었다. 반정 후 1등공신으로 추대되었다.

2.4. 인조 치세


인조 즉위 직후에는 판서직에 올랐다. 반정 직후 김류와의 반목으로 좌천된 이괄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지만 이괄의 난으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물론 본인은 이괄이 역모를 꾀했다는 말에 이괄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오히려 김류가 이괄의 편을 들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기자헌을 비롯한 북인들을 처형하자는 김류의 의견에 서인 강경파이면서도 반대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권세는 오래 못가 반정 4년만에 인헌왕후 구씨[4]에 대한 예송논쟁에 휘말려 탄핵을 받아 사직했고[5], 정묘호란 때에는 최명길과 더불어 주화를 주장하였다.[6] 그외에도 이귀는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를 적극적으로 옹호했고 인조는 "경의 식견은 실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많소."라고 매우 칭찬하며 좋아했다.[7]
다만 생전에는 상당히 인조에게 신임받지 못했다. 왕 면전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욕을 하질 않나 김류에게 말싸움을 걸고 심지어 공개석상에서 정승이 자기 견해에 반대했다고 콱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고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으니...[8]
조선왕조실록 인조 3년(1625) 3월 25일 네 번째 기사에서, 사신은 이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논한다.

사신은 논한다. 이귀는 지조가 단정하지 못하고 언어가 법도가 없어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젊어서 사숙(私淑)한 기초가 있어서 그의 뜻이 이러한 것이다. 또 임금을 친애하고 국사를 근심하여 뭇사람의 비방도 피하지 않고,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였던바, 충분(忠憤) 한 가지만은 그와 비교될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다시 사람들이 이귀를 잡군자(雜君子)라고 하였다. 경연에 입시했을 적에 저촉되거나 거슬리는 말이 많아도 상이 죄주지 않았고, 진신(搢紳)들에게 욕설하기를 거리낌 없이 해도 사람들이 성내지 않았다. 매일같이 차자를 올리고 상소하였으나 말을 써 주지 않았고, 국가 일을 도모하고자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한갖 수고로울 뿐 도움이 없었다. 평생의 행사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

[史臣曰: "李貴志操不端, 言語無章, 以此取笑於世人, 而少有私淑之地, 故其意如此。 且愛君憂國, 不避衆謗, 有懷必達, 忠憤一節, 罕有其比, 故當時之人, 號李貴爲'''雜君子'''云。 入侍經筵, 言多觸忤, 而上不以爲罪, 詆辱搢紳, 無所顧忌, 而人不以爲怒。 陳箚抗疏, 無日無之, 而言不見用, 竭誠殫情, 欲濟國事, 而徒勞無益。 平生行事, 類如是矣。"]

(...)
성격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단점을 단점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가령 “공을 보면 마음의 병이 있는것 같소”('그 지랄맞은 성격 좀 고치시오'를 최대한 점잖게 돌려 표현한 거다.)라고 지적한 사람에게 그 말이 맞다며 자신에게는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의 병이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이 더 있다면 나라가 더 나아질 거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실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이이의 제자이며 유생이었던 인물이면서 '류성룡이 대간을 폐지시켜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자신 역시 류성룡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며 '말많은 대간따위 콱 폐지하는게 낫다'고까지 했다(...) 정묘호란 때 최명길과 더불어 후금에 대한 칭신을 발빠르게 거론한 것[9] 역시 아마도 이런 성향이 있어서인 듯.
아들들도 청렴하여 훗날 장남 이시백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차남 이시방은 공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역임했다. 두 형제 모두 김육대동법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이시방은 대동법 시행의 실무자 중 한 사람이었다. 대동법은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는데 이는 토지를 바탕으로 세금을 걷기 때문에 탐관오리들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역사의 기록에는 이귀의 평은 좋지 않게 쓰인 면이 많은 편이다.
그 예로 임란 당시 장성현감을 지낼 때 김덕령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10] 그 과정에서 김덕령을 아끼는 천진한 마음으로 김덕령 최강 전설을 지어내었는데, 그때마다 탐관오리들은 별 시답잖은 시비를 걸며 핍박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인터넷상의 인식과는 달리 선조는 이몽학의 난 이전까지 전공 없이 말만 무성한 김덕령을 못 미더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이귀의 말을 듣고 대간들로부터 보호하고 지원해줬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인조 재위기에 김류랑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공신 책봉을 논할 때부터 서로 삿대질하고 싸웠다고 하니 상당히 오랫동안 갈등했다. 서로 비교해보자면 분야별로 대충 이렇다.
  • 서인 장악력에서는 이귀가 한 수 위였다. 아무래도 이이의 제자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이귀가 서인 내에서는 입지가 좋았고 그래서 김류는 소북과 남인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으려고 했다.
  • 직책은 김류가 앞섰다. 왜냐면 김류는 일찍 정승에도 오르고 영의정도 해보았지만 이귀는 죽을 때까지 정승이 되어보진 못했기 때문이다.
  • 신임 역시도 김류가 앞섰다. 이귀의 성격이 성격이다보니 인조가 좀 멀리했고 특히 서인 장악력 부분에서 보듯 이귀는 결국 서인에 상당히 치우친 태도를 보였는데 마침 인조는 붕당을 혐오하는 임금이었다. 이러니 김류가 더 총애를 받고 더 빨리 출세하고 더 높은 관직에 오를 수 밖에... 단, 김류는 말년에는 인조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인조 10년의 추숭 반대에 이어 인조 말년의 강빈 사사에 반대했기 때문. 그 직전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데 찬성했는데도 말이다.
  • 능력 부분은 알려진 걸로는 김류가 한 수 위였을지도 모른다. 김류는 그나마 행정관료로서는 나름대로 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귀는 이런저런 의논은 잘 냈는데 인조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실제 능력은 알 수 없다. 능력이 있어도 신뢰를 받고 중용되어야 가능한데 이귀는 그게 아니었으니(...) 하지만 달리 보면 창과 방패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귀는 큰 의논을 잘 내놓는 창이라면 김류는 신중하지만 보수적이고 행정업무를 잘 하는 방패라 볼 수 있을 듯. 그렇기에 상호보완적이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 자식들 문제는 이귀가 나았다. 위에서 보았듯 이귀의 두 아들은 둘다 잘 나갔고 특히 이시백의 경우 김자점과 더불어 인조가 죽으면서 효종에게 잘 예우하라고 한 신하였다. 반대로 김류는 아들 김경징은 병자호란때 거하게 터뜨렸다가 사약먹고 손자 김진표는 아버지보다 한술 더 떠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자결을 강요했다.[11] 여기에 김진표는 그다지 출세하지 못해 공조 참의까지만 했다. 이시백만 해도 아버지가 해보지 못한 정승 그것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이 되었는데 말이다.

3. 관련 항목



[1] 공교롭게도 이귀가 귀양을 간 이천은 이귀가 세자 시절의 광해군을 도와 민심을 수습한 곳이다.[2] 연려실기술에서는 유순익을 통하여 '대감의 말을 듣고 힘껏 폐론(廢論)을 멈추게 하였으니 대비께서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다 내 힘이오. 그런데 어찌 특별히 용서하지 않고 죽이는 것이오'라고 말한 걸로 나온다.[3] 연려실기술과 인조실록 이귀의 비명에 의하면 이귀가 한교를 이이첨에게 보내 이이첨이 폐모론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게 설득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또 혼정평록의 기록에 의하면 기축옥사로 이이첨과 이창후가 유적에서 삭제되자 이창후가 이귀에게 자신의 사정에 대해 설명하니 이귀가 처음에는 이창후에게 너는 선비가 아니라고 책망했지만 힘을 다해 주선하겠다며 구면(具𡩄)에게 가서 이이첨과 이창후가 때를 맞추어 회문(回文)을 내지 않았다 하여 갑자기 역적을 구해내려 했다는 죄를 씌웠으니 이로 인하여 마침내 망극한 지경에 이른다면 그대들은 앞으로 선비들의 논의에 죄를 얻을 것이니 우리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 구면이 즉시 편지를 동료에게 내어 정거(停擧)가 해제되었다고 한다. 아마 이 때의 인연들 때문에 이귀에게 살려달라고 빌 생각을 한 걸로 보인다.[4] 인조의 어머니이자 정원군(원종)의 부인. 흔히 '계운궁 구씨'(啓運宮 具氏)로 일컬어 지는 사람이 이 사람. 죽었을 때는 아직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숭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계운궁'이라고 불렸다가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숭되고 난 뒤에 인헌왕후라고 시호가 올려졌다. 참고로 정원군은 광해군 시절에 죽었으나 부인은 아들이 쿠데타로 집권하는 것을 보았고 부대부인으로 격상되었으나 이때 죽었다.[5] 이때 인조는 아들로서 3년상을 치르려고 했는데 다들 태클을 걸었을때 이귀만 옹호했다.[6] 둘이서 "굳이 해야 한다면 칭신도 가능하지 않을까요?"라고 했다.[7] 인조는 이귀를 재상으로 승진시키려 했으나, 그 전에 사망하였다. 그래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8] 이때 이귀의 공격을 받았던 정승은 상촌 신흠이다. 사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귀는 이 일이 있기 전에도 '베어버리겠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인조가 직접 '이귀가 남인 정경세와 최현에게도 베어버리겠다.'고 한 적이 있음을 고백할 정도.(무려 이때는 인조를 인견한 자리였다. 그러니까 왕 앞에서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말한 셈.) 당색이 같았던 신흠에게조차 이랬으니 막가파도 이런 막가파가 없는 셈.[9] 고려 때도 송과 금을 함께 섬겼었다고 근거를 댔다.[10] 김덕령은 1592년 고경명 막하에서 의병으로 종군하다 낙향하고 1593년 독자적인 의병을 일으켰다. 참조[11] 단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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