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시오 데 로욜라
1. 개요
라틴어: Sanctus Ignatius de Loyola
스페인어: San Ignacio de Loyola
이탈리아어: Sant'Ignazio di Loyola
프랑스어: Saint Ignace de Loyola
영어: St. Ignatius of Loyola
가톨릭의 수도자이자 사제, 성인(1491년 12월 24일 ~ 1556년 7월 31일). 예수회의 창설자이며, 군인과 만학도, 피정, 영신수련의 수호성인이다. 축일은 7월 31일.
[image]
한 컷으로 보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삶. 아디다스 데이비드 베컴 Impossible is nothing 광고를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2. 나도 성인들처럼
'타는 불'이라는 뜻을 가진 이냐시오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귀족 출신으로, 1491년에 로욜라에 있던 성에서 태어났다. 소싯적에는 싸움이나 노름, 연애 같은 일들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기사 교육을 받은 그는 팜플로나 지방에 있는 나바라 국(國) 재상의 부하가 되었다. 그런데 1521년에 이 지역에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포탄에 맞아 다리를 다쳤다.
로욜라 성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는데, 뼈가 잘못 붙어서 다시 부러뜨리고 교정해야했다. 이 과정에서도 죽다 살아났으며, 이후 뼈가 또 잘못 붙어서 다친 다리가 다른 쪽보다 짧아진채 뼈가 튀어 나왔고, 끔찍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불구자만은 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의사들에게 다시 수술을 요청했다. 그동안 그에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 이후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았다.
이냐시오는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기사들의 사랑을 다룬 소설을 읽고 싶었지만, 마땅한 책이 없어서 집어든 것이 삭센의 루돌프가 쓴 <그리스도의 생애>와 비라지오의 야곱이 쓴 <성인열전>이었다고 한다. 그는 책을 통해 '나도 성인들처럼 회개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1][2][3]
이냐시오는 몸이 회복되자, 꿈 속에서 성모 마리아를 보고 난 다음 몬세라트에 있는 성모의 성지로 순례를 떠났으며, 1년여 동안 만레사 근처에 머물며 때로는 도미니코회 수사와 함께, 또 어떤 때는 극빈자 수용소나 언덕의 동굴 속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그가 '수련기'라고 불렀던 이 시기에 이냐시오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4] 가 지은 <그리스도를 따름(준주성범)>[5] 을 몇 번이고 읽었으며, 매일 무릎을 꿇고 여러 시간씩 기도를 하면서 제 삶을 돌이켜 성찰하곤 했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의혹과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군인 출신이었던 이냐시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에 대해 얼마나 갑갑해 하였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는 명쾌한 답을 얻고 싶었지만, 돌아온 것은 의기소침과 우울증뿐이어서 이렇게 소리치곤 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떤 사람에게서도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종류이든 약간의 도움이라도 희망할 수 있다면 어떤 수고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어디서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길을 알려 주십시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개 뒤를 쫓아가는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습니다.
3. 예수회 설립
그 무렵 카르도나 강가에서 이냐시오는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 화해했다는 개인적인 확신이었으며, 구원에 대한 두려움과 조바심 때문에 자기 죄를 쉴새 없이 고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 이냐시오는 날마다 행하던 단식을 멈추고, 피가 튀어오를 때까지 채찍으로 제 몸을 매질하던 짓을 그만 두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봉헌하기로 마음먹는다.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이냐시오는 33살의 늦은 나이였지만 더 효과적인 봉사를 위해서 바르셀로나, 알칼라, 살라망카 등지에서 문법, 철학,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냐시오는 틈틈이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자신의 고유한 길을 걸어 하느님을 찾아가는 영성수련을 지도했다. 아직 학생 신분으로 설익은 지식을 전하다 보니,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냐시오는 동냥으로 학비를 마련해서 공부를 계속하였는데, 교회당국의 입장과 달리 그의 영성수련은 동료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것이어서 1534년에는 그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성당에서 서원까지 하게 된다. 이게 실마리가 되어 예수회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537년 겨울 이냐시오는 동료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이냐시오는 예수로부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가 세운 수도회를 '예수의 동반자'(Compañía de Jesús), 즉 예수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537년에는 다른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사제서품까지 받았는데, 이때 그의 46살이었다. 1540년에는 교황 바오로 3세가 예수회를 인정해 주었다. 이냐시오는 교황이 지시하면 무슨 일이든지 실천하며,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기동성과 융통성을 가진 준비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수회의 초대 총장이 된 이냐시오는 1556년 7월 31일 선종할 때까지 예수회를 이끌었다. 초기부터 인도와 일본 등지에 선교사를 파견할 수 있었던 예수회는 이냐시오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110개의 수도원에 1,000명 가까운 회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로마에서는 성매매 여성들과 길거리의 불량배들의 교정과 자립을 돕기 위한 시설을 운영하였다. 콜레지오 로마노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곧 그레고리안 대학의 전신이다. 그리고 이냐시오는 1609년에 복자품에, 1622년에는 성인#s-2품에 오르게 된다.
[1] 참고로 예수회 3대 총장이며 예수회의 제2의 창립자로 존경받는 성 프란치스코 데 보르하(악명 높은 보르자 가문 출신) 또한 원래 귀족이자 군인으로서 당시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 5세의 왕비였던 포르투갈의 이사벨을 모시다가 왕비가 죽자 크게 비통하며 "다시는 필멸자를 주군으로 섬기지 않겠다."라고 맹세하며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2] 예수회 한국관구에서 발행한, 예수회의 역사를 소개한 책 - 역대 총장들의 재임 시기별로 시대를 나누어서 서술한 책 - 에 따르면, 사망한 이사벨 왕비의 시신을 운구하는 책임을 맡아 장지까지 운구하던 중,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래 관을 열어봤는데, 운구하는 동안 이미 부패가 진행된 이사벨의 시신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아 "썩어 없어질 필멸자를 더이상 섬기지 않겠다." 맹세했다고 한다[3]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생전 에피소드들 중 이냐시오 고유의 수도자 양성 교육을 특색있게 보여주는 일화로, 어느 명망 있는 후작이 예수회에 입회했는데 그동안의 귀족으로서의 생활과 전혀 다른 수도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여 이냐시오에게 예수회에서 나가겠다고 하자, 이냐시오가 "당분간은 수도회 규칙에 얽매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 말했다고 한다. 결국 그 후작은 자신의 수도자로서의 열망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중에는 성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에피소드 속의 후작 출신 수사가 프란치스코 데 보르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아시는 분 있으면 사실 여부 확인 바림[4] 가톨릭과 개신교에 모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지금의 네덜란드 빈더스헤임(Windesheim)과 즈볼러(Zwolle)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빈더스헤임에 있던 아켐피스의 수도원은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후 개혁교회(장로교회)로 개조되었다.[5] 한국어판은 한국 가톨릭 최초의 박사 신부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을수 라우렌시오(1907-1971) 신부가 번역했다. 윤 신부는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제2대 학장이자, 인보성체수녀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