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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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황족, 군인, 정치인, 제43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일본 최초의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인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자손이다. 정확히 말하면 후시미노미야의 20대 당주인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4남 구니노미야 아사히코의 9남이다. 즉 후시미노미야에게 있어 분가의 분가인 셈.
'''메이지 20년에 태어나 헤이세이 시대의 개막을 본 경이로운 (만) 102세의 생애'''. 일본 근현대 메이지 - 다이쇼 - 쇼와 - 헤이세이 네 시대를 모두 겪었다. 장제스, 에리히 폰 만슈타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에르빈 슈뢰딩거 등의 인물과 동갑이며, 쇼와 덴노보다 14살 연상이다. 그를 개관한 블로그인데 사견이 좀 많다.
2. 생애
2.1. 출신 배경
일본 황실에서 친왕의 호칭을 쓸 권리는 직계 왕족에게만 한하며, 그 외에는 왕(王)의 칭호를 쓴다. 그러나 후시미노미야, 카츠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간인노미야의 가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대대로 친왕의 호칭을 세습하여 '세습친왕가'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호칭과 더불어 황위 계승에도 우선권을 가져 천황이 후계자를 못 남기고 죽으면 대신 황실의 대를 이을 권리도 있다. 그 가운데 후시미노미야 가문이 가장 오래 존속해 큰 힘이 있었다.
19대 당주 후시미노미야 사다요시(伏見宮 貞敬 1776-1841) 친왕의 아들들부터 분파 미야케#s-3가 생겼다. 사다요시 친왕의 넷째 손자이자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4남인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18번째이자 마지막 아이이며 9왕자가, 바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이다. 참고로 후시미노미야는 26대 히로아키(博明) 왕으로 이어지고, 쿠니노미야는 3대로 끝,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계속 이어지나 신적강하로 친왕, 왕 칭호는 못 받는다.
2.2. 초기
1887년, 교토에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테라오 우타코(寺尾宇多子)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덴노와 소노 사치코의 9녀인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공주와 결혼했다. 즉 메이지 덴노의 사위가 되며, 쇼와 덴노의 고모부가 된다. 또한 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의 친정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왕이 그의 형이니, 고준 황후에게는 작은아버지이자 시고모부가 된다.
게다가 쇼와 덴노&고준 황후 내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의 큰며느리이니, 쇼와 덴노 내외와는 서로 사돈도 된다.
2.3. 허수아비 내각
일본 육군 대장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1]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다음 이틀 후에 일본 총리로 기용되었지만 당시 일본은 알다시피 망했어요.
일본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연합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맥아더가 사실상 일본의 실권자였으니 이 사람은 말만 황족이고 총리지 사실상 얼굴 마담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황족이란 자부심이 남아있었던 양반이라, 점령군으로 온 맥아더에게 자주 '''개겼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우락부락한 맥아더와 땅딸막한 쇼와 덴노가 대비되어 보이던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정모짤의 '''게재를 금지'''시켜버린 것. 빡친 맥아더의 명령으로 이틀만에 풀리긴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해당 사진을 보도한 신문들을 판매 금지하는 등 계속 개기자, 10월 4일 GHQ가 치안유지법 등을 폐지하면서 같이 내쫓아버렸다.
전후 첫 총리이면서 최단 재임 총리(54일)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그러나 수명으로는 오히려 역대 최장수 총리[2] (102세)라 메이지 시대에 태어나 헤이세이 시대까지 살았다는 것이 아이러니. 두 번째로 오래 산(101세)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다이쇼 시대에 태어나 레이와 시대까지 생존했다.
3. 기행
그 외 특기할 만한 사항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무지하게 오래 살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황족 직위를 '''스스로 내던지며''' 신흥종교를 만들어 '''교주'''로 활약하신 업적을 남겼다. 그 종교의 이름은 '''히가시쿠니교'''였으며 아니나 다를까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었다.
메이지 덴노가 같이 식사하자는데 '''설사가 났다는 까닭으로 거절한 흠좀무한 일화'''가 있다. 설사는 당연히 거짓 핑계. 말이 같이 먹자는 것이지 당시 일본에서 천황과 같이 밥먹기를 거절하면 중죄로 취급했다. 근데 당시의 나이가 '''최소 25살 이전'''[3] 의 이야기다.[4] 나이는 메이지가 히가시쿠니보다 35살,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다이쇼 덴노)가 8살 많다. 그래서 다이쇼 덴노에게 욕을 신나게 먹고 난 뒤[5] 스스로 신적강하를 신청했으나 메이지 덴노가 '''"이 늙은이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라고 말하면서 신분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메이지 덴노는 자기 자식들마저도 잘 안 만날 만큼 '''대인기피증'''이 심했고,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만나는 문제 때문에 황족이 신적강하를 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야말로 기분이 영 좋지 않았을 것.
프랑스 유학 사이에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화가라 속이면서 어떤 노파에게 손금을 봐달라고 했다. 노파가 손금을 보고는 '''당신은 일본의 총리를 하겠다'''라 했는데, 그제서야 신분을 밝히며 '나는 일본의 황족이자 군인이라서 정치를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파가 '일본에서 대격변이 일어나겠다. 그래서 총리를 하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히가시쿠니 본인의 회고록인 やんちゃ孤独에 따르면,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 입장을 밝혔으나 그에 동조하는 사람이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 일본 지도층에서 사이온지 총리는 꼬장꼬장한 늙은이, 히가시쿠니는 황족 가운데 좀 이상한 양반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보기 좋게 씹혔다. 솔직히 신흥 종교 교주까지 해먹었으니 맞는 말이기는 하다. 히가시쿠니는 사이온지가 죽은 뒤인 1941년, 제2차 고노에 내각의 도조 히데키 당시 육군대신에게도 직접 찾아가서 미국과 전쟁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도조 본인도 태평양 전쟁 개전에 반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도조는 고노에 총리가 사임한 후 히가시쿠니를 총리로 추천했다. 이후 전개 상황은 도조 히데키 항목 참조.
현 일본 황실의 후계자 문제를 만든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1947년에 다이쇼 덴노의 직계자손을 뺀 모든 일본 황족들이 신적강하되었는데, 신적강하 문제가 이슈였을 때, 이 사람은 아예 '''자청'''해서 신적강하를 하겠다고 언론에 밝히면서 '''다른 황족들도 동참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람의 신적강하 조치 탓에 현 일본 황실은 남성 후계자가 모자라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6] 웃기게도 이 사람은 메이지 덴노의 사위에다가 슬하 자녀들 중 하나는 쇼와 덴노의 딸과 결혼한 터라, 이 사람의 후손들이 구 황족의 부활시 여러가지 면에서 유력 후보 중 하나다. 아래 문단 참조.
사실 이 사람의 일화를 보면 유독 황족 신분을 싫어했던 듯하다. 자세한 것은 여기 참조 (일본어 자료이다.)
4. 가족과 후손
메이지 덴노의 딸인 도시코 내친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4명을 낳았다.
- 장남 모리히로(盛厚, 1916-1969) : 쇼와 덴노의 장녀인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와 결혼했으나, 시게코는 1961년에 어린 3남 2녀를 두고 병으로 죽었다. 모리히로는 데라오 요시코(寺尾佳子)와 재혼해 2남을 더 낳았지만, 후처와 5남 2녀를 남겨 두고 1969년에 죽고 말았다.
- 차남 모로마사(師正王, 1917-1923) : 관동대지진 때 만 5세로 요절.
- 3남 아와타 아키츠네(粟田彰常, 1920-2006) : 1940년 신적강하를 신청, 황족에서 화족으로 신분을 바꾸었다. 물론 1947년 신적강하 때 화족 제도가 폐지되었으므로, 이후로는 평민. 2남을 낳았다.
- 4남 타라마 토시히코(多羅間俊彦, 1929-2015) : 1951년 브라질로 이민을 갔고, 1970년에는 아예 귀화하여 국적을 브라질로 바꾸었다. 다만 이민과 귀화 후에도 일본 황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경조사를 챙겼고, 일본 여성(오키나와 출신)과 결혼했다. 자녀로는 1남을 두었다. 작가 미시마 유키오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의 장손이자 모리히로 왕의 장남인 노부히코(信彦, 1945-2019)는 도쿄 대공습 당시에 태어나 1947년 신적강하가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잠시나마 왕 칭호를 가지기도 했다. 노부히코의 아들이자 쇼와 덴노의 외증손자인 유키히코(征彦, 1974년생, 50세)는 2010년생(14세) 외아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노부히코의 남동생 나오히코(眞彦, 1953년생, 71세)도 2명의 아들과 2004년생(20세) 손자 1명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이 둘 중 하나를 아이코 공주의 부마로 삼는 방식으로 부활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보고 있다.[7]
다만 또 다른 남동생 히데히코(秀彦, 1949년생, 75세)도 2010년대에 태어난 손자들이 있다지만, 애초에 이 사람은 화족(백작)가문인 미부(壬生)가문에 양자로 갔기 때문에 복권 대상일지는 의문이다.
5. 주요경력
[1] 이 무렵 치바공업대학을 설립하였다(1942년).[2] 단순히 일본에서만 최장수가 아니라 '''전 세계의 총리들을 통틀어서도 가장 오래 살아 기네스북에도 등록되어 있다.'''[3] 메이지 덴노는 1912년에 죽었다.[4] 실제로 히가시쿠니는 황족들 사이에서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와 비슷한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5] 다이쇼 덴노는 덴노가 된 후에도 메이지 덴노와는 대조적으로 밖에 자유롭게 나가서 빈민 및 병자들과도 악수하고 학생들의 수영을 지켜보다가 물이 너무 차갑다고 지적하는, 학생들이 감기라도 들까봐 걱정하는 면모를 보였으며 자식들과도 같이 영화 보고 숨바꼭질을 하는 상당히 소탈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화를 내고 욕을 했다는 서술은 사실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다이쇼 덴노 입장에서도 상당히 불쾌하고 욕 나올 일이었다는 뜻이 된다.[6] 물론 시작은 히가시쿠니 나루히코가 하긴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남은 직계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문제였다.[7] 다른 후보들보다 이들이 아이코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이러하다. 만약 남계 여성 황족인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녀가 낳은 자녀가 황족 더 나아가 천황이 될 자격이 있는가?라는 일명 '여계천황' 문제가 발생하게 되지만, 이러한 문제는 아이코 공주가 천황의 피를 이은 또 다른 계통인 구 황족 남성과 결혼하면 외가와 친가 모두 천황의 혈통이 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조치는 사실상 구 황족이 다시 일본 황실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후미히토 황사도 큰딸 마코 공주와 작은딸 카코 공주를 구 황족 가문의 아들과 결혼시켜서 황실에 남겨 사실상 차차기 천황이 유력한 막내 히사히토 친왕을 도와달라고 할 생각이지만 두 딸은 당연히 이를 거부하고 있다. 큰딸은 이미 일본 내에서 완전히 또라이로 찍힌 이상한 놈과 결혼하겠답시고 소동을 벌이고 있는 판국이고 작은딸도 언니만큼은 아니라도 역시나 부모에게 반항하고 있으니 가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