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국민당(2000년)

 


'''대한민국 연립여당'''
유신정우회
,(1973.3.~1979.10.),

'''민주국민당
(2001.4. ~ 2001.8.)
'''

더불어시민당
,(2020.3.~2020.5.),
'''자유민주연합
(1998.2.~2001.8.)
'''
[image]
'''민주국민당'''
'''공식명칭'''
민주국민당 (民主國民黨)
'''약칭'''
민국당 (民國黨)
'''창당일'''
2000년 3월 8일
'''해산일'''
2004년 4월 18일
'''의석 수'''
'''1석 / 299석'''
'''이념'''
보수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우익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18 (여의도동, 극동VIP빌딩 5층)
'''당 색'''
푸른색 (#050099)
연두색 (#73BF58)
1. 개요
2. 역사
3. 역대 당대표
4. 유사정당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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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급하게 창당되어 정확히 4년 존속한 정당이다. 약칭은 '''민국당'''(民國黨).
2001년 4월 16일, 새천년민주당이 선언한 3당 연합으로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연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

2. 역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이회창 총재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중진급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정치신인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규모의 물갈이를 단행한다.[2] 이 때 공천탈락자들 중에는 바로 이회창 총재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한 김윤환 前 신한국당 대표와 한승수 전 경제 부총리 같은 민정계 일부, 그리고 신상우 의원, 문정수 前 부산시장, 김광일 前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한 구 민주계 일부, 조순 전 총재와 이기택 의원을 위시한 옛 민주당 인사 여기에 1997년 대선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겨뤘던 이수성 前 국무총리[3]까지 거물급 인사들이 수두룩했다. 그외에도 현역의원 공천탈락자가 수십여명으로 공천학살이란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공천탈락에 반발해서 조순, 이기택, 김윤환, 신상우 등 중진급 인사들은 탈당 및 신당 창당을 선언한다. 여기에 당시 여당새천년민주당의 공천에서 밀려난 김상현[4][5]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대구에서 2회 내리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던 서훈 의원[6], 원외에서 독자행보를 하고 있던 박찬종 前 의원과 꾸준히 정치권 진입을 시도하고 있던 재야운동가 장기표[7] 등의 인사들까지 합류하면서 세를 키웠다. 거기다가 막판에는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허화평[8]까지 참여했다. 창당을 선언한지 불과 19일만인 2000년 3월 8일 조순을 당 대표로 추대하고 공식적으로 창당했다.
그러나 현역의원만 수십여명이 참여할 것이란 호언장담과는 달리, 대부분의 공천탈락자들이 지도부의 설득으로 당잔류를 선택하면서 새천년민주당에서 지역구 2석(김상현, 박정훈), 한나라당에선 지역구 6명(김윤환, 신상우, 한승수, 조순, 서훈, 김동주)전국구 2명(김철, 윤원중)만이 탈당해서 민국당에 합류하였다.[9] 그나마 정당법에 따라서 전국구 2명은 탈당과 동시에 국회의원직 상실. 이러면서 많이 위축되었고, 최대 50석까지 노린다던 기세도 사그라든다. 그래도 창당초기에는 영남권을 중심으로 현역 의원만 10명에, 인지도가 높은 전, 현직 의원, 장관, 지자체장급들이 다수라서 제법 여론조사에서 우위에 나오는 결과도 나왔다. 여기에 한나라, 민주 양당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나름 지역기반이 있는 정치지망생[10]들을 대거 공천해서 전국 227개 지역구 가운데 161곳에 후보를 내면서 전국정당의 모양새를 갖추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반호남지역감정을 폭발시켜서 지역구 15석 전국구 5석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가담했던 정치인들의 성향이 워낙 극에서 극으로 갈리는 관계로 여러가지 난맥상이 불거지면서 시망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쨌든 당장 총선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영남권에서 워낙 인지도가 높은 인사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이름값으로 어찌저찌 성공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론은 그런 거 없었다.'''
수도권이야 애당초 경쟁력있는 후보 자체가 드물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문제는 살아남을 줄 알았던 영남권에서조차 한나라당에게 완전히 털린 것이었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 구미시에서 이 동네의 킹왕짱이자 민정계의 거두 '''김윤환''' 후보가 무소속 도의원 출신 김성조 한나라당 후보에게 털린 것, 전직 국무총리이자 유력 대권후보였던 '''이수성''' 후보가 고향 칠곡군에서 한나라당의 정치 신인에게 패한 장면이었다.[11] 즉, 2000년 16대 총선에서 보여준 것은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정당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당선이 유력해 보였던 민주국민당 후보들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 데에는 한나라당의 "민국당 찍으면 DJ를 도와주는 격"이라는 논리가 먹힌 것도 한몫했다.
그래도 영남권에서 2등 낙선도 있고 표도 긁어모아서 지역구 후보들의 전국 득표율 합계는 3.7%.[12] 이걸로 봉쇄조항 3%를 넘겨 전국구 1번 강숙자 후보가 금배지를 달았고, 춘천시에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출신의 한승수 후보가 당선되며 2석 짜리 정당으로 생존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30석을 장담하던 초반의 기세에 비하면 망했어요.
그 뒤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한테 국회의원까지 꿔주면서 다시 손을 잡았는데도 국회 과반수에 2석이 모자라자 민주국민당에도 손을 내밀었다. 이 과정에서 이기택, 장기표 등 반 DJ를 표명했던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세가 줄었지만[13] 어쨌든 3당 연합으로 간신히 생존에 성공. 3당 연합의 대가로 유일한 지역구 당선자였던 한승수 의원이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14]
하지만 처음부터 이념이나 정책 등 아무런 공통분모도 없이 당장 눈앞의 금뱃지만을 보고 모인 사람들이라 선거결과가 안좋자 대부분 흩어져 버렸다. 당 창당을 주도했던 김윤환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나머지 인사들은 명패만 걸어두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2년도 못돼서 2001년 9월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에 자민련이 찬성하면서 DJP연합이 붕괴했고, DJP연합의 부족함 틈새를 메꿔주던 민국당의 가치도 급속도로 추락한다. 당시 김대중 정부 입장에서는 자민련이 이탈했기 때문에 민국당 국회의원 2명을 잡고 있어봐야 어차피 국회 과반수에는 훨씬 못미친다. 배려해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결국 다음해 2월 한승수 의원이 외교통상부 장관에서 사퇴한다.
그리고 지방선거와 대선이 예정된 2002년이 되자 모두들 자기 갈길을 가버렸다.
신상우영남 출신 옛 민주계 인사들은 노무현 후보캠프로 들어갔으며, 신상우는 부산상고 후배인 노무현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애초에 민주당 출신이던 김상현도 민주당으로 복당해서 지방선거 직후에 치뤄진[15]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광주 북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재야 출신 장기표는 민주당 후보로 영등포 재보선에 출마하였으나 권영세에 패배해자 다시 민주당을 탈당했다.[16]
당의 유일한 지역구 당선자였던 한승수 의원이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한나라당으로 복당하면서 의석수도 1석으로 줄었다. 다른 한나라당 출신들도 대부분 조용히 원대복귀하였고, 월드컵 열풍으로 정몽준의 인기가 치솟자 국민통합21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참가하였으나 모든 후보가 낙선하였다. 당 창당의 주역인 김윤환은 2003년 사망하였다.
이렇게 민주국민당은 비례대표(전국구) 강숙자 의원과 껍데기만 남았으며[17], 결국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폭망하면서 정당 등록이 취소[18]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당을 지켰던(?) 강숙자 전 의원은 금뱃지는커녕 상습 범죄자로 전락해버렸다.
이 당에서 출마했던 정치 신인 중 이후에 국회의원이 된 인물로는 김한표, 심재엽, 이동섭, 이한정 의원 등이 있다.

3. 역대 당대표




4. 유사정당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잠깐 있었던 국민생각이 이 당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여당 일부 인사들이 탈당하여 급조한 정당이었고 결과가 참담했다는 점에서. 다만 결과는 그나마 민주국민당이 훨씬 양호해서, 국민생각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광삭 크리. 그리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의 한광옥 전 대표가 동교동계 일부를 긁어모아서 창당했던 정통민주당 역시 이 당과 행보가 거의 유사했는데, 결과는 역시 참패였고, 한광옥은 결국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며 새누리당에 합류했다. 참고로 장기표는 이 모든 정당에 참여했다. 국민생각 창당준비위원회에 합류했다가 창당대회 하루 전날에 탈당해서 정통민주당에 합류했고 역시나 선거에선 낙선했다! 민주국민당의 한계를 재확인한 것으로 더이상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선거를 앞두고 몇몇 명망가들이 급조하는 정당에는 표를 주지 않는다는걸 다시금 보여준 것이다.
2016년안철수-천정배 의원이 창당한 국민의당이 이 당과 비슷한 결말을 맞을 것으라는 예상이 있[19]었으나 결과는 14대 총선의 통일국민당, 15대 총선의 자유민주연합의 결과와 같이 정반대로 나타났다. 20대 총선 항목 참조.

5. 둘러보기





한나라당

'''민주국민당'''

한나라당
(개별 합류)

[1] 아사히 신문발 보도 참조[2]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에 대선 직후 집권세력(국민회의)의 의원빼가기, 1998년 지방선거 패배, 외환위기책임론 등으로 극도로 위축되있던 한나라당은 2000년 총선도 패배가 유력했는데, 윤여준이 제시한 대규모 물갈이로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기사회생하였고 윤여준은 이때부터 보수의 전략가, 보수의 장자방이란 칭호를 받으면서 급부상한다.[3] 다만 이수성은 미묘한게 1997년 대선무렵에 탈당했고 민화협 상임의장을 거쳐 돌아온 케이스.[4] 당시 김상현은 '내가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간다'고 호언장담했다.[5] 대선 당시에 보인 독자행보로 DJ에게 찍혔다는 것이 정설. 김상현의 원 지역구인 서대문 갑에서는 정치신인인 우상호가 출마했고, 결국 한나라당 이성헌에게 패했다.[6] 다만 1996년에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한나라당 당적을 가지고는 있었다.[7] 이 사람은 홍사덕 무소속 의원과 신당창당을 시도했지만 홍사덕이 한나라당으로 가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8] 본래 김용환과 손을 잡고 희망의한국신당을 창당했으나 당을 옮겼다.[9] 또한 제 3당인 자민련이 있었기 때문에, 공천에 떨어져서 원 소속당에 잔류하던가, 아니면 탈당을 해서 당을 옮기더라도 그나마 기반이 있는 자민련으로 들어가지, 구태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신생정당인 민국당으로 가는 모험을 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10] 거제에서 김기춘에게 밀려서 한나라당 공천탈락해 민국당으로 온 김한표도 이 중 한 사람이다. 이후 19대 국회에서는 원내 입성에 성공했다.[11] 여담으로 당시 김윤환 의원를 꺾은 김성조 후보와 이수성 후보를 격침시킨 이인기 후보는 그 후 연달아 같은 지역구에서 18대 국회까지 내리 3선에 성공하지만, 둘 다 19대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 공천에서 떨어지거나 불출마 선언을 했고 뒤에는 사실상 정계 은퇴 상태이다.[12] 당시는 1인2표제 도입이전으로, 각 정당 후보들이 지역구에서 얻은 표를 모두 합쳐서 전국구 의원을 배분했다. 헌법재판소가 2002년 지역구 후보자 득표로 전국구 후보자 당선을 결정하는 것은 '이중투표'에 해당한다면서 위헌판정을 내리자, 여야 합의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였다.[13] 막상 장기표는 2002년에 새천년민주당으로 들어가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나 권영세에게 져서 또 탈당한다. 다만 2002년 민주당은 DJ의 힘이 약해진지라, 장기표가 들어가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다.[14]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한승수의 입각 덕분에 차관자리에서 경질된 반기문이 다시 부활할 수 있었으니 좋은 결과였다.[15] 당시 광주 북의 국회의원인 박광태가 광주시장출마로 사퇴하면서 김상현이 들어간 것이다.[16] 장기표는 민중당(1990년) 창당에 참여한 이후로 입당(혹은 창당)-선거출마-낙선-탈당-또다른 정당 입당(혹은 창당)-선거출마-낙선-탈당의 무한루프를 타고 있다. 당선이 안돼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뿐 거쳐간 정당을 보면 이인제 뺨칠 정도의 철새다.[17] 그나마도 전국구의원은 탈당시에 자동으로 의원직 상실인지라 당 잔류.[18] 2014년 헌법재판소가 이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19] 당내 주도권 갈등으로 인해 탈당한 거대 정당의 거물급 인사들이 주도해 창당한 정당이라는 것과 선거를 앞두고 거대정당을 탈당했거나 무소속이었던 의원들을 영입해 세를 불렸던 것, 당시 제1야당의 텃밭에서 선거 전 지지율 돌풍을 일으켰던 것,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 존재했던 정당명을 다시 사용했다는 것 등 닮은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