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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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WWA 흥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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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6일 병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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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3일 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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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심 코리아 화보.
본명
이왕표(李王杓)
별칭
나는 표범, 슈퍼 드래곤
생년월일
1954년 6월 11일
출생지
충청남도 천안시
사망
2018년 9월 4일 (향년 64세)
사망지
서울특별시
신장
190cm
체중
약 90kg[1]
종교
개신교(나사렛)
피니시
드래곤 스페셜 링크
파워 밤
테마곡
Super Dragon
1. 개요
2. 커리어
3. 비판
3.1. 시대착오적인 발상
3.2. 한국 프로레슬링에 대한 존중 부족
3.3. 운영 미숙
3.4. 후계자 양성 실패


1. 개요


어떤 사람들은 레슬링을 짜고 한다고 말하지. 각본에 의해 기술을 부린다는 거야. 우리는 '''진짜''' 피와 땀방울을 흘리는 거야. 아무런 고통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지. 그래서 내 챔피언 벨트는 더욱 더 값진 거야. '''진짜''' 피와 땀방울이 묻은 챔피언 벨트이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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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 Mass - "진짜" 뮤직비디오 中.

대한민국프로레슬러이자, 김일의 제자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 프로레슬링의 상징으로 스스로 군림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KBS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할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꾸준히 TV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 박치기왕 코너에서는 개그맨 백재현이 그에게 프로레슬링을 배운 적이 있었다.

2. 커리어


젋은 시절에는 나름 잘 나갔다.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했을 때엔 오니타 아츠시와 데뷔전을 가지고, 후치 마사노부에게 승리하는 등 유망주였다. 게다가 안토니오 이노키가 '나는 표범이다!'라고 해서 플라잉 쟈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일의 직계 제자라 그 입김도 한몫했을 것이다. 신일본 프로레슬링 시절에 헐크 호건과 경기하여 액스 봄버를 맞고 기절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는데, 이것이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며 이왕표가 거짓말한다는 루머가 많았지만 프로레슬링 경기 기록 사이트인 케이지매치넷에 기록이 남아있다. 재규어 리가 이왕표이며, 그 태그팀 파트너인 양승휘는 역발산이다
그 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별다른 푸쉬나 역할을 전혀 못받자 역발산과 함께 김일이 세운 한국 프로레슬링으로 이적해서, 태그팀으로 주로 출전해 이왕표가 당한다 → 역발산과 어렵게 태그 → 승리 패턴으로 명줄을 이어갔다. 한국 텔레비전 지상파 채널이 명절이나마 마지막으로 프로레슬링을 중계했던 시기가 이때였다. 비실비실해서 힘도 제대로 못 쓰던 프로레슬러로 당시의 이왕표를 기억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후의 행보로 봤을 때 이왕표가 잡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신일본 프로레슬링 최강의 태그팀 중 하나인 슈퍼 스트롱 머신 출신인 역발산의 위치는 당시의 이왕표가 어찌할 짬이 아니었다.
흥행이 좀 되는 듯했던 한국 프로레슬링은 1980년대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에 한국 프로레슬링이 GWF로 흡수되어서 그 쪽으로 옮기는데, 당시 미국 남서부의 최강자였던 로드 프라이스를 꺾은 데 이어 GWF 챔피언이었던 빅 쟈니 호크를 물리치며 커리어 첫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2] [3] 그 후 이왕표는 유명해지기 전의 부커 T를 꺾었고, ECW 챔피언 경력을 가진 마이크 어썸까지 꺾으며 최전성기를 구가한다. 25번 타이틀 방어를 한 이왕표는 본인을 영구 GWF 챔피언으로 굳히며 한국 프로레슬링에 대한 불안감을 서서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2000년에 WWA를 부활시키는데, 문제는 이왕표가 루 테즈를 꼬드겨서 WWA의 관련자들과 상의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설이 있다는 거다. WWA 타이틀 결정전에서 자이언트 커간을 물리치며 WWA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후로는 홍키 통크 맨, 가짜 커트 앵글(헤르난데스) 등을 상대로 승리하며 후계자 양성은커녕 '''8년 이상 타이틀을 방어'''하는 장기집권으로 한국 프로레슬링을 점점 막장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종합격투기 열풍에 편승해 울트라 FC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2008년에 밥 샙과의 종합격투기 경기를 발표하여 검색어 순위 1위까지 올라가는 등 엄청난 흥행을 예고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각본이 있는 종합격투기 시합[4]에서 밥 샙을 이긴 후 전적 1전 1승 0패로 '''울트라 FC의 초대 챔피언'''까지 차지했다. 이후에도 밥 샙과 연계하여 WWA 흥행에서 프로레슬링 룰로 시합을 가지다가 레더페이스의 난입 때문에 밥 샙에게 패해서 벨트를 뺏기지만, 밥 샙이 레더페이스의 배신으로 위기에 몰리자 밥 샙을 도와주는 스토리로 선회했다. 챔피언이 된 밥 샙이 입국금지를 당하기도 했지만 2010년에 지방 흥행을 울산에서 개최해서 밥 샙을 이기며 또다시 WWA 챔피언에 등극했다.
2013년 8월, 담도암으로 수술 후 위독한 상태에 빠졌지만 회복하였다. 2013년 11월 15일에 KBS2 여유만만에 출연했는데, 담낭암 수술을 받기 전에 죽을 각오로 사후장기기증을 서약했고, 특히 안구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실명한 방송인 이동우에게 기증하기로 했었다고 밝혔다.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 발언이 다시 주목을 받았고 실제로도 기사화가 되면서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왕표의 여동생이 언론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기증을 받아 각막 수술을 해도 시력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이왕표가 암 환자라 기증 자체가 불가능해서 마음만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기에 서로 만나서 마음을 확인한 것까지가 사실이고 미담이었다고 딱 잘라 말했다.
2014년 10월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대리운전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 5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치른다. 미사와 미츠하루가 이왕표를 선배로 대우해준 덕에 2000년대에 한국에서 WWA가 부활한 뒤 프로레슬링 NOAH와도 교류가 있었다. 그래서 이왕표의 은퇴식 때 마루후지 나오미치를 섭외할 수 있었고, 당일 흥행에서 '마루후지 나오미치 & 키타미야 미츠히로(후에 키타미야 마사로 링네임 개명) vs 조경호 & 김민호'의 태그 경기가 제일 좋은 평을 받았다.
2015년 5월 27일에 고향인 천안의 유관순 체육관에서 치를 예정이었던 은퇴 경기는 본인의 건강 문제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담낭암이 갑작스레 재발하며 투병 끝에 2018년 9월 4일 오전, 향년 6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왕표의 사망 이후 이낙연 국무총리김남훈 등이 애도를 표했고, JTBC 뉴스룸에서는 손석희 앵커가 앵커브리핑을 통해 이왕표의 죽음을 기렸다. 이왕표의 사망 이후 데이브 멜처가 그에 대해 짧게 소개했다. # 그리고 일본 내 매체에서도 짧게 이왕표의 부고 기사를 올렸다.
이왕표의 시신은 이후 화장되어 고양시 통일로 청아공원에 안치되었다.

3. 비판


대한민국 프로레슬링 매니아치고 한국 프로레슬링에 관심 안 가져본 사람 없고, 한국 프로레슬링에 관심 가져본 사람치고 이왕표 욕 안 해본 사람 없다. 2007년 이후 '왕표 Suck!'이라는 챈트가 공공연하게 WWA 흥행 때 나올 정도로 단체 운영이나 처신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또한 상기한 잦은 예능 출현으로 프로레슬링의 이미지를 꽤 많이 깎아먹었다고 보기도 한다.

3.1. 시대착오적인 발상


1970년대나 유행하던 '''빅맨이 나쁜 짓을 하면 자신이 혼내준다'''는 권선징악적 애국심 마케팅으로, 애들도 외면하는 주제를 계속 우려먹었다. 이런 마케팅이나 각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고, 강력한 선역은 WWE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도 쓰는 흥행 공식이라 존 시나타나하시 히로시 등이 무적 선역 기믹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왕표 1인 독재를 고집했고, 한국인 선수들을 무조건적 선역으로 내세워 애국주의만 강조하면서 후계자 혹은 젊은 선수들 육성이 어려워졌다. 업계 최고라는 WWE조차 존 시나의 후계자로 로만 레인즈를 섣불리 밀었다가 역풍을 맞는 현실이 무적 선역 기믹의 어려움을 잘 설명해준다. 이런 판국에 진부한 애국주의 선악 대결 구도에서 팬들이 재미를 느낄 리가 없다. 오죽하면 악역을 수행하는 외국 선수들이 관중들에게 환호를 받고 한국 선수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방송에서 프로레슬링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패널 등으로 꼭 출연해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희화적인 모습으로 대중에 접근해 가뜩이나 열악한 한국 프로레슬링에 대한 인식을 바닥까지 떨어뜨렸다는 비판도 받았다. 거기에 계속해서 리얼리즘만 강조하는 점도 문제가 있다. WWF에서 WW'''E'''(엔터테인먼트)로 이름을 바꾸고, 경기 시작 전 "각본에 의한 것이지만 기술은 진짜"라며 엔터테인먼트임을 강조하는 미국의 단체와 정반대의 길을 간다. 그리고 이왕표가 주장하는 리얼리즘이라는 것도 단순히 거짓말일 뿐인 것을 억지우기기로 뭉개누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나 다 각본으로 짜고 치는 경기인 걸 알고있는데 상대가 무슨 원수니 라이벌이니 하는 진부한 낡은 각본을 들고와서 실제 상황이라 우긴다. UFC 등의 실전격투기 대회가 각종 TV매체에서 방영되는 시점에서 프로레슬링은 어린 아이가 봐도 각본대로 짜고치는 뮤지컬 정도로 밖에 안보이는데 자꾸 이런 것들을 실제 상황이라고 우기면 호기심에 한번쯤 볼까 싶어도 관심이 뚝 떨어지게 되는 건 당연하다.
프로레슬링을 바탕으로 격기도라는 무도를 창설했다. 이왕표 측 한국 프로레슬링 계열이 주구장창 주장하는 것은 '''프로레슬링은 이 격기도라는 무술을 베이스로 펼쳐지는 실전'''이라는 것인데, 아무도 믿지 않는다. 김병만을 비롯한 몇몇 프로레슬링 좋아하는 개그맨들이 격기도 수련 경력이 있긴 하다. 이후 통일교 재단의 선문대학교 체육학부 무도학과의 교수를 하였다.
울트라 FC도 막상 흥행이 열리니 MMA가 아니라 '''종합격투기의 모습을 한 프로레슬링'''이었다. 이왕표의 '프로레슬링은 진짜다!'라는 '''컨셉'''에 맞췄다고 할 수 있다. 종합격투기 이전 이종격투기 여명기에 이노키즘을 기반으로 탄생한 단체 UWF와 유사한 형태다. 종합격투기 컨셉의 프로레슬링 경기는 해외 프로레슬링계에서도 제법 펼쳐진다. 종합격투기처럼 보이도록 합을 맞추고 각본을 짠 프로레슬링 경기인데, 해외에서는 관중들도 무늬만 종합격투기란 걸 다 알고 본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에 대한 이해도가 바닥을 치는 국내 현실에서 이왕표는 무작정 실전이었다고 우기니 좋은 평가를 받기가 어렵다. 밥 샙과 종합격투기 룰로 치른 첫 경기는 실전 시합이었다고 끝까지 주장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셔독의 전적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이 대전으로 잠시나마 기대했던 사람들은 또 실망하고, 안 그래도 웃음거리가 된 한국 프로레슬링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3.2. 한국 프로레슬링에 대한 존중 부족


WWA를 설립한 이후론 김일의 후계자를 자처했지만 이왕표는 김일이 한국 프로레슬러들에게 비난당하던 시절에 그들과 함께 김일을 욕하다가 사태가 다시 김일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그에게 붙은 기회주의적인 면을 보였다. # 게다가 김일이 일본에서 어렵게 살다가 겨우 귀국했을 때 이왕표는 하나도 도움을 준 게 없고, 박삼중 등이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김일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김일을 팔아먹고 다녔다.
이왕표의 사망 이후 MBC SPORTS 부산 유튜브 계정으로 이왕표의 경기 중 GWF 타이틀 17차 방어전이 영상으로 올라왔는데, 3류 악당 기믹으로 분장한 '쇼군 카미카제'란 선수를 상대로 나쁜 퀄리티의 경기 끝에 이왕표가 이기며 GWF 타이틀을 방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쇼군 카미카제'란 선수가 그저 그런 선수가 아니라 김일의 제자 및 양자이자 이왕표의 선배이며, 1970년대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점보 츠루타와 양대산맥으로 활약했고, 한국인 최초로 WWE의 링에 올랐던 김덕이었다.
이왕표보다 훨씬 격이 높은 선배인 김덕을 상대로 퓨드를 만들어 한국 프로레슬링 계에 안토니오 이노키 등의 거물을 불러와 시합을 했던 김일 시절처럼 다시금 양질의 경기를 올릴 생각은 하지 않고, 어느 정도 실력이 검증된 김덕을 3류 악당으로 만들어 김덕이 제 기량을 전혀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90년대는 북미, 멕시코, 일본 등의 메이저 프로레슬링 계에서는 2000년대의 암흑기를 맞이하기 전이라 좋은 선수와 양질의 경기가 나오던 황금기였는데도 해설자를 통해 3류 악당으로 연출한 '쇼군 카미카제'를 당시 현역이던 전일본 프로레슬링 사천왕과 동급으로 포장하는 짓을 저지르면서, 프로레슬링 자체를 싸구려 쇼 그 이상으로 보일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김덕은 특정 단체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던 상태라 이런 굴욕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김덕을 2008년까지도 WWA에 판테온, 울트라 엑스, 울트라 C 등의 링네임을 가진 무개성 마스크 프로레슬러로 출전시켜서 이왕표 본인을 비롯해 노지심 등의 후배들에게 잡을 시키는 등 김일 다음으로 세계적인 인지도가 있는 한국계 프로레슬러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즉 이왕표는 본인과 관련된 이득을 위해서는 한국 프로레슬링 계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조차 보이지 않았다.

3.3. 운영 미숙


WWA 최고 회장이었던 AAA의 안토니오 페냐도 WWA에 신경을 전혀 안 썼으며, 루 테즈 이후 회장이 된 압둘라 더 부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형편없는 각본과 운영, 돈 들여 티켓을 구매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막장 흥행으로, 한때는 NWA와 자웅을 겨루며 최고의 전통을 가진 단체였던 WWA를 한국으로 타이틀이 넘어오자마자 유령단체로 전락하게 만들었으며, 건강이 나빴던 말년의 김일을 반억지로 끌고다니는 한편 김일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이용해 다른 단체들의 성장 자체를 막아 국내 프로레슬링을 빈사 상태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생전 김일이 안토니오 이노키도, 자이언트 바바도 차지하지 못했던 타이틀이라며 자랑할 정도로 W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역도산의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세계 타이틀이기도 했던 유구한 역사의 W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은 프로레슬링 비인기 국가 지방 단체 타이틀보다도 못하게 되었다.
다만 예전부터 WWA의 후계를 자처하는 단체들은 우리나라의 WWA 이외에도 존재하는데, 이름도 모두 World Wrestling Association으로 동일하다. 과거의 WWA 월드 챔피언쉽은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쉽에 흡수된 이상 이제 정통성은 입김이 강한 단체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과거 WWA의 선수단이나 프런트 등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NWA Hollywood는 독자적으로 성업하며, 한국 프로레슬링이 WWA 타이틀의 정통성을 맘대로 주장하자 제제를 가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울트라 FC"의 경우엔 당시 돈 프라이 등 이종 격투기에서는 잔뼈만 굵은 퇴물들을 긁어 모아 어떻게든 흥행을 열어보려 했지만 부실한 운영으로 한때 흥행이 취소된 적도 있었다. 돈 프라이를 제외한 모든 선수는 구두 계약이었고, 인터파크가 가져가는 티켓 수수료를 생각하지 않고 가격을 책정해서 티켓 발매 중에 입장료를 수정하는 등 미숙한 운영을 보여주었다.

3.4. 후계자 양성 실패


후계자 양성 면에서는 지나치게 빅맨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으며, 후배들을 믿지 못하는지 자신이 간섭해 직접 경기를 뛰었다. 그러다 보니 밑에서 묵묵히 훈련하던 훈련생들도 거의 모두 나갔고, WWA의 미래라고 국내팬들이 그나마 많은 희망을 걸었던 한대호 선수마저 싸이월드 홈피에 'WWA의 현실'이라는 글을 올리고 탈퇴했다. 이후 한대호는 천규덕의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한국 프로레슬링의 부활을 바란 것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여전히 어려운 여건에서 연습하고 무대에 서는 젊은 선수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혜택이 돌아가는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라며 프로레슬링 KOREA를 출범시켰다. 이왕표와 쌓인 게 많은 한대호였지만 이왕표가 담도암으로 투병할 때에는 이왕표의 쾌유만을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은퇴 이후 한 팟캐스트에서 가진 인터뷰를 통해 본인이 받는 비판에 대해 발언한다. 악역 전환을 하거나 자신이 한 발 빠져 1선에서 물러나고 싶어도 주간 흥행이 아닌 1년에 한두 번 정도 흥행을 여는 WWA의 현실상 악역 전환을 위한 개연성 있는 스토리를 만들 수가 없으며, 일부러 경기를 안 하고 경기 중 난입 정도만 소화한 경우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반응은 "왜 이왕표가 경기를 안 하지?"라며 불만 섞인 반응이 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1] JTBC 뉴스룸 2015/5/25 인터뷰 때 밝힌 체중으로, 프로레슬러로서 전성기 때의 체중은 120kg 정도다. 병상 생활로 체중이 많이 내려갔다.[2] 오리지날 GWF는 북미 프로레슬링이 지역구이던 시절에 나름 규모있는 단체였다. 이 GWF에선 당시에도 유명세를 보이던 에디 길버트, 마이크 어썸을 비롯해 무명시절의 부커 T, JBL 등이 활동했다. 하지만 GWF 타이틀은 월드 타이틀로 인정받지는 못했는데, 이왕표가 GWF 챔피언이 된 후 GWF가 망하자 이것을 맘대로 세계 타이틀이라고 주장하며 본인이 'GWF 세계 타이틀'이 걸린 흥행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3] 프로레슬링 갤러리에서 의혹을 제기한 주장글[4] 대다수가 프로레슬링 경기처럼 각본이 있는 시합인 걸 알았지만 이왕표 측은 끝까지 실전 시합이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