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한국인
日本系韓國人. 일본에선 日系韓国人이라 부른다. Japanese Korean.
일본 혈통의 한국인을 말한다. 현재의 의미는 과거 일본인이었다가 대한민국으로 귀화한 사람 또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한일혼혈을 뜻한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은 재한일본인을 확인할 것.
고대에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에 도래인과 같은 인구 교류가 있었다. 도래인은 보통 한반도나 중국에서 건너간 사람을 말하는데, 건너가는 사람이 있으면 건너오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었다. 당대의 기록들을 보았을때 인구교류가 제법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탈해 설화를 볼때 탈해라는 인물이 대체로 일본쪽에서온 인물이라는 언급이 있고, 신라의 개국공신인 호공은 아예 왜인이라 써있는데다 왜구도 오고갔다라는 기록까지 있으니, 적어도 그 이전부터 일본에서 한반도로 온 사람도 있었다는것 정도는 알수있다.[1] 그렇지만 석탈해의 출신이 일본계인지 당시 일본 동북부 지역이나 홋카이도에 살던 아이누계 종족 아니면 캄차카에서 거주한 종족이었는지는 설이 갈린다. 또한,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여말선초 시기에도 고려/조선에 투항, 귀화한 왜인들이 다수 있었다.[2]
이들이 두드러졌던 시기는 항왜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귀순했다.[3][4] 1593년부터 투항하는 자들이 늘었고 포로 개념 따윈 없었던 당시 전투답게 처음엔 죽였으나(더우기 초기 왜란당시 민간인들이 당했던 피해나 끔살등을 생각하면 복수심에서라도 살려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594년부터는 전략적 차원에서 항왜를 받아들였다. 당시 억지로 끌려와 거의 총알받이 신세였던 파벌의 일본군이 탈영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목책을 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약 1만 명 정도였다고. 다만 교차 검증이 안 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전술적으로 이들은 상당히 도움이 됐다. 조총 생산 라인의 핵심 장인으로 채용되기도 했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거나 병자호란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인 마을을 이뤄 살았으나 조선인과의 통혼에 따라 차츰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커뮤니티가 완전히 소멸되어 일부 족보 등에만 남아있다.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역시 현재는 커뮤니티가 소멸했으나, 지방분권적인 성향이 강했던 일본의 사회 분위기 덕분에 19세기까지 어느 정도 조선인 마을이 존재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 외무장관 도고 시게노리(박무덕)가 대표적인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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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상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지 1904년에 일본의 탐험가들이 가토 기요마사 군에 종군했다가 한반도에 남은 일본계 후손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통혼이 약간 이뤄졌다. 호적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국적을 나누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인 아내들은 법적으로 한국인이 된 것으로 되어 일본으로 강제송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국적을 회복하고 일본으로 귀국하는 것도 인정되었다. 한편 일본에 호적을 둔 재한일본인들은 미군정의 강제 송환에 의해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이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한다. 일본인 아내들 중 상당수는 뒤에 일본 국적을 회복하여 일본에 돌아가기도 하고, 일본 국적을 회복한 후에도 재한 일본인으로 한국에 남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만 일본인이고 어머니가 조선인인 조선에 거주한 가정의 경우에 혼혈아이가 잔류하는 것도 허용이 되었는데, 혼혈아이가 한국에 남은 경우 외가에 입적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경우가 있었다. 외가의 한국 성씨를 쓰기도 했지만 일본 성씨를 한국에서 계속 쓰기도 했는데 망절씨, 즙씨 등 일본식 성씨를 쓰는 사람들이 한국에 남아있다.
현대의 일본계 한국인의 대다수는 이들보다는 해방 후에 한국 내국인과 결혼한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한국 남성과 결혼을 할 경우에 한국 국적으로 귀화한 것으로 되어 귀화가 간단했고, 남성의 경우에도 결혼 이민자에게 특별귀화제도를 두면서 남성이 외국인인 결혼이민자의 귀화 절차가 간단해졌다. 현재 한국인 내국인과 결혼하여 한국에 체류 중인 결혼 이민자 일본인은 2012년 기준으로 12,338명인데 이 중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606명이며 11,732명은 일본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결혼을 통한 귀화자를 포함한 일본 귀화자의 숫자는 통계가 확인되지 않으나 결혼 귀화자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재일교포 북송으로 북한인 가운데도 일본계 혈통이 흐르는 사람이 있다. 재일교포 북송 당시 북한으로 건너간 일본 국적자는 최소 6,839명으로 추정한다. 일본인 배우자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인 자녀들이다. 계급사회에다 순혈주의가 강한 북한에서 이들은 차별을 받으며 일부는 탈북하여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한반도에 거주하지는 않지만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의 통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배우자가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자녀들이 이중국적으로 한국 국적도 보유하게 된다. 이런 일본계 한국인도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하나 해외교포의 혈통에 대한 통계는 딱히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숫자인지 추정하기는 어렵다.
1. 개요
일본 혈통의 한국인을 말한다. 현재의 의미는 과거 일본인이었다가 대한민국으로 귀화한 사람 또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한일혼혈을 뜻한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은 재한일본인을 확인할 것.
2. 비슷한 사례
고대에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에 도래인과 같은 인구 교류가 있었다. 도래인은 보통 한반도나 중국에서 건너간 사람을 말하는데, 건너가는 사람이 있으면 건너오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었다. 당대의 기록들을 보았을때 인구교류가 제법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탈해 설화를 볼때 탈해라는 인물이 대체로 일본쪽에서온 인물이라는 언급이 있고, 신라의 개국공신인 호공은 아예 왜인이라 써있는데다 왜구도 오고갔다라는 기록까지 있으니, 적어도 그 이전부터 일본에서 한반도로 온 사람도 있었다는것 정도는 알수있다.[1] 그렇지만 석탈해의 출신이 일본계인지 당시 일본 동북부 지역이나 홋카이도에 살던 아이누계 종족 아니면 캄차카에서 거주한 종족이었는지는 설이 갈린다. 또한,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여말선초 시기에도 고려/조선에 투항, 귀화한 왜인들이 다수 있었다.[2]
이들이 두드러졌던 시기는 항왜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귀순했다.[3][4] 1593년부터 투항하는 자들이 늘었고 포로 개념 따윈 없었던 당시 전투답게 처음엔 죽였으나(더우기 초기 왜란당시 민간인들이 당했던 피해나 끔살등을 생각하면 복수심에서라도 살려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594년부터는 전략적 차원에서 항왜를 받아들였다. 당시 억지로 끌려와 거의 총알받이 신세였던 파벌의 일본군이 탈영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목책을 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약 1만 명 정도였다고. 다만 교차 검증이 안 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전술적으로 이들은 상당히 도움이 됐다. 조총 생산 라인의 핵심 장인으로 채용되기도 했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거나 병자호란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인 마을을 이뤄 살았으나 조선인과의 통혼에 따라 차츰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커뮤니티가 완전히 소멸되어 일부 족보 등에만 남아있다.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역시 현재는 커뮤니티가 소멸했으나, 지방분권적인 성향이 강했던 일본의 사회 분위기 덕분에 19세기까지 어느 정도 조선인 마을이 존재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 외무장관 도고 시게노리(박무덕)가 대표적인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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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상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지 1904년에 일본의 탐험가들이 가토 기요마사 군에 종군했다가 한반도에 남은 일본계 후손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3. 현대에 이르러
그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통혼이 약간 이뤄졌다. 호적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국적을 나누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인 아내들은 법적으로 한국인이 된 것으로 되어 일본으로 강제송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국적을 회복하고 일본으로 귀국하는 것도 인정되었다. 한편 일본에 호적을 둔 재한일본인들은 미군정의 강제 송환에 의해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이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한다. 일본인 아내들 중 상당수는 뒤에 일본 국적을 회복하여 일본에 돌아가기도 하고, 일본 국적을 회복한 후에도 재한 일본인으로 한국에 남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만 일본인이고 어머니가 조선인인 조선에 거주한 가정의 경우에 혼혈아이가 잔류하는 것도 허용이 되었는데, 혼혈아이가 한국에 남은 경우 외가에 입적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경우가 있었다. 외가의 한국 성씨를 쓰기도 했지만 일본 성씨를 한국에서 계속 쓰기도 했는데 망절씨, 즙씨 등 일본식 성씨를 쓰는 사람들이 한국에 남아있다.
현대의 일본계 한국인의 대다수는 이들보다는 해방 후에 한국 내국인과 결혼한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한국 남성과 결혼을 할 경우에 한국 국적으로 귀화한 것으로 되어 귀화가 간단했고, 남성의 경우에도 결혼 이민자에게 특별귀화제도를 두면서 남성이 외국인인 결혼이민자의 귀화 절차가 간단해졌다. 현재 한국인 내국인과 결혼하여 한국에 체류 중인 결혼 이민자 일본인은 2012년 기준으로 12,338명인데 이 중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606명이며 11,732명은 일본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결혼을 통한 귀화자를 포함한 일본 귀화자의 숫자는 통계가 확인되지 않으나 결혼 귀화자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재일교포 북송으로 북한인 가운데도 일본계 혈통이 흐르는 사람이 있다. 재일교포 북송 당시 북한으로 건너간 일본 국적자는 최소 6,839명으로 추정한다. 일본인 배우자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인 자녀들이다. 계급사회에다 순혈주의가 강한 북한에서 이들은 차별을 받으며 일부는 탈북하여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한반도에 거주하지는 않지만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의 통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배우자가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자녀들이 이중국적으로 한국 국적도 보유하게 된다. 이런 일본계 한국인도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하나 해외교포의 혈통에 대한 통계는 딱히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숫자인지 추정하기는 어렵다.
4. 일본계 한국인
- 호공
- 호사카 유지
- 오사다 사치코 - 차 연구가. 한국 국적을 가졌고 남편이 한국인이다.
- 이방자
- 키모라 리 시몬스의 어머니가 일본계 한국인으로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 망절일랑: 망절씨의 시조이며 일본인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일본으로 간 이후에는 외가에서 어머니 성인 양씨로 살기도 했다고 한다.
- 즙간부
- 황목치승 - 일본식 이름은 아라키 하루스케. 실제로 별명 중 아라키가 있다.
- 윤학자
- 등구랑
- 평도전
- 평망고
- 평원해
- 신동주
- 신동빈
- 용구혜자
- 김형준 - 한국인 아버지, 일본인 어머니를 둔 혼혈이다.
- 김다혜 - 아버지가 한국인, 어머니가 일본인이다. 일본식 이름은 시마즈 코코아.
- 나카가와 히데코 - 일본 태생의 요리사.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귀화했고 상술한 호사카 유지와는 다르게 자기 이름을 한국식으로 고쳐 중천수자(中川秀子)라고 했지만 필명은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 괴산 점씨 - 일본계 성씨
- 항왜
- 김은경 - 납북 일본인인 요코타 메구미의 딸이다. 동명이인의 정치인 김은경과는 무관.
- 정로하 - 정준하와 일본 여성인 니모와 낳은 아들이다.
- sokodomo - 대한민국의 래퍼. 어머니가 일본인이다.
5. 둘러보기
6. 관련 문서
[1] 다만 하플로 그룹상으로 보았을때 일본인들의 특징적인 유전자인 D1b는 해안지역을 제외하면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에(2~5% 이내) 야요이인들이 주로 한반도나 중국에서 왔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2] 이들은 대체로 대마도 출신이 많았으며, 조선 초기 대일외교와 왜구 토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3] 이뭐병이라고 생각하기 쉬울지는 모르나 당시 일본군들 가운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는 파와 거부하는 파로 나뉘어져 있어서 왜란중에도 많은 대립이 있었다. 당장 2번의 왜란후 일본에서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참가자의 상당수가 이들 왜란에 참전했던 군인들이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 전부 다는 아니어도 당시의 일본군 가운데는 명목없는 전쟁에 참전했다는 생각을 가진 군인들도 상당수 되었는지라 이런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4] 당장 가토 기요마사와 코니시 유키나가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