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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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국적의 MLB 출신 감독. KIA 타이거즈 제9대 감독이다.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3루수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데뷔를 하여 활약하며 자이언츠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짧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을 거쳐 말년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현역 시절 별명으로는 '''The Big Marine'''과 '''Matt The Bat'''이 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캘리포니아 주의 작은 도시 비숍에서 아버지 아서 윌리엄스와 어머니 사라 윌리엄스가 낳은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맷 윌리엄스가 12세가 되자 가족이 카슨 시티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성장하여 카슨고등학교를 다녔다. 카슨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부 카슨 세네터스의 쿼터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참고로 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83년 드래프트에 뉴욕 메츠의 27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계약하지 않았고, 네바다 대학교 라스 베가스 캠퍼스에 진학하여 야구 장학금을 받으며 야구부에서 뛰었다. 특히 대학교 3학년 시절부터 유격수로 전미 아마추어 전체 1등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기대가 큰 유망주였다.
1985년 7월 10일부터 20일까지 미국 국가대표 자격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한미대학야구 교류전에 참가하였다. 당시 7월 1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미대학야구 2차전에서 4회말에 솔로포를 기록하고, 도루 시도도 했으나 위의 동아일보 기사 사진과 같이 한양대 포수 김상국의 송구와, 유격수 류중일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8]
당해년도 8월에는 캐나다에서 개최된 대륙간컵 야구대회에서 조 지라디, 케빈 브라운과 국가대표로 뽑히기도 했으나,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5위를 기록했다.[9]
2.2.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2.2.1. 1986 시즌~1989 시즌
1986년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1라운드 전체 3번이라는 높은 순위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11]
알 로젠[12] 자이언츠 단장은 신인 맷 윌리엄스에 기대하는 바가 컸고, 자신이 선수 시절에 사용하던 똑같은 모델의 방망이를 주문해서 맷 윌리엄스에게 건네줄 정도로 특별히 아꼈다.
1987년 4월 11일, AAA에서 드디어 MLB로 승격하며 MLB 첫 데뷔전을 치뤘다. 데뷔전에서 첫 안타는 오렐 허샤이저에게 기록했다. 하지만 부상 및 부진으로 AAA와 메이저를 왔다갔다 했고, 3루수보다는 유격수로 더 많이 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후 메이저 2년 차인 1988 시즌에는 놀란 라이언에게 만루홈런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부상과 부진을 반복하며 마이너와 메이저를 왔다갔다 했다.
3년 차인 1989 시즌 스프링캠프에서 로저 크레이그 감독은 맷 윌리엄스에게 3루수로 고정을 시켜준다고 선언한 뒤 무한신뢰를 보냈으나, 시즌이 시작되고 한 달만에 타율이 .130까지 떨어지면서 다시 AAA로 내려갔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부모에게 전화해서 야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 결국 여름에 다시 메이저로 올라와서 더스티 베이커 타격코치 밑에서 타격폼을 대거 수정했다. 이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시카고 컵스와 맞붙게 된 1989년 NLCS에서 3할의 타율과 2홈런, 9타점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1989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허나 월드 시리즈 3차전 시작 30분을 앞두고 샌프란시스코 지진#s-2이 일어나서 3차전이 연기되었는데, 그로 인해 라인업에 변화가 생겼다. 호세 유리베가 맡던 유격수 포지션을 맷 윌리엄스가 맡고, 맷 윌리엄스의 본 포지션인 3루수는 켄 오버펠이 맡게 된 것. 아무튼 3차전에서 맷 윌리엄스는 2회말에 솔로 홈런을 치며 생애 첫 월드 시리즈 홈런을 기록했으나 결국 자이언츠는 무기력하게 1승도 하지 못하고 4패를 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
2.2.2. 1990 시즌~1996 시즌
1990 시즌부터 붙박이 3루수로 정착하여 드디어 포텐이 폭발, 맹타를 휘두르며 생애 첫 올스타 선정과 실버 슬러거와 타점왕을 수상했고, 시즌 MVP 투표에서 6위에 올랐다.
1991 시즌부터 1997 시즌까지는 골드 글러브를 4차례 수상한다. 30개 이상의 홈런을 6번 기록하였고, 그 중 최전성기인 1994 시즌에는 43개의 홈런과 96개의 타점을 기록했는데, 1994 시즌이 파업으로 인해 팀당 113~115경기만 치렀던 단축 시즌이었음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성적이다. 그 해 활약을 바탕으로 내셔널리그 MVP 투표에서 제프 배그웰에 이어 2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1995 시즌에는 5월 한 달동안 타율 0.405, 12홈런, 31타점 등으로 월간 MVP에 선정되어 1994 시즌에 이어 또 엄청난 성적을 거둘 것으로 기대를 받았으나, 다음 달인 6월에 파울볼에 오른 발을 맞으며 부상을 입어서 결국 76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1996 시즌에는 22홈런을 기록했으나, 2년 연속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였다. 정리하자면, 자이언츠에서 .280-290 정도의 타율에 홈런은 30-40개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선수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2.2.3. 트레이드
1993 시즌부터 배리 본즈가 이적해오면서 자이언츠는 '''배리 본즈-맷 윌리엄스-윌 클락'''이라는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를 가지게 되었지만, 정작 포스트시즌 진출은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배리 본즈와의 불화로 인하여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는데, 제프 켄트를 포함하여 인디언스와 트레이드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게다가 인디언스도 알버트 벨이 떠나갔기 때문에, 강타자를 원하기도 했다. 당연히 자이언츠팬들은 노발대발하며 반대했으나 트레이드는 이뤄져서 결국 윌리엄스는 인디언스로 이적하고 자이언츠는 제프 켄트, 호세 비스카이노, 훌리안 타바레스를 받게 된다.
켄트는 나름 괜찮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였으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같이 넘어간 비스카이노는 그저 그렇다는 평이었고, 타바레스는 5점대 평균자책점의 불펜투수였다. 상식적으로 이뤄지기 힘든 트레이드였지만, 윌리엄스와 본즈의 마찰의 문제도 있고, 1995~1996년 2년 간 윌리엄스가 비율스탯은 높았지만 부상으로 출장경기 수가 줄어들면서 부진하기도 했다.
당시 자이언츠 단장 브라이언 세이빈이 신구장인 오라클 파크 건축[13] 을 위해 고액 연봉자인 맷 윌리엄스를 내보내야만 했었기 때문에 결국 윌리엄스는 인디언스로 이적한다. 당시 기사[14]
2.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윌리엄스가 오게 되면서 짐 토미는 1루수로 이동을 했고, 7월 말에는 타율이 .239까지 떨어지는 부진을 기록했으나 결국 팀의 핵타선과 투수의 조화로 인디언스는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며 우승을 꿈꾸게 된다. 윌리엄스의 1997년 월드 시리즈 성적은 타출장 .385/.515/.538에 홈런 1개까지 적립. 그러나 결국 말린스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하며 인디언스는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사실 윌리엄스가 인디언스에 합류할 때부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합류 한 지 얼마되지 않아 당시 부인이었던 트레이시 던컨에게 이혼 서류를 받았다는 것. 윌리엄스의 이혼 진행은 스프링캠프 때 시작되어 1997년 6월 중순에 세 자녀의 공동양육권을 가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참고로 당시 세 자녀는 애리조나 주 파라다이스 밸리에 살고 있었다. 결국 자녀들을 보고 싶은 마음과 당시 8년 간의 결혼 생활이 엉망이 되어 윌리엄스는 내셔널리그 중 특히 신생팀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이적하기를 원했다.
2.4.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
결국 1997년 12월 1일에 트래비스 프라이먼, 톰 마틴과 현금을 얹어 1:2 현금 트레이드로 신생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윌리엄스는 5년 계약 연장 5,500만 달러에 합의했으며, 대신 애리조나가 1998 시즌 급여를 약 700만 달러에서 450만 달러로 줄이며 계약을 마무리했다.
애리조나에서 6시즌을 뛰면서 1999 시즌에 커리어 유일의 3할-30홈런-100타점을 기록하였고[15] 시즌 MVP 투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2001년 월드 시리즈 2차전에서는 호투하던 앤디 페티트를 상대로 쓰리런을 작렬하며 결국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획득했다. 당시 애리조나에서 마무리 투수로 활동했던 김병현과는 같은 시기에 뛰었던 팀 동료이며, 그래서 국내에서 인지도가 있는 야구인이다. 여담으로, 2001년 월드 시리즈 당시 피홈런을 허용한 뒤 패닉에 빠진 김병현을 윌리엄스가 위로해주는 사진이 국내에서 유명하다. 사진이 첨부된 기사
디백스 시절은 냉정히 평가하면 1999 시즌 이후로는 노쇠화로 인해 부진에 빠졌고, 결국 애리조나 시절의 전체적인 성적은 전성기에 비해 그다지 좋지는 않게 되었다.[16]
2.5. 은퇴
결국 2003년 5월 31일을 끝으로 은퇴했는데, 은퇴 직전 콜로라도 로키스와 시카고 컵스의 영입 제안이 왔으나 거절했다. 콜로라도로 가기에는 자녀 3명과 함께 애리조나 피닉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하기 힘들어서 거절했고, 컵스는 은사 더스티 베이커가 감독으로 재임 중이어서 갈 수도 있었으나 장고 끝에 거절했다.
2.6. 총평
메이저리그 통산 올스타 5회, 실버 슬러거 5회, 골드 글러브 4회, 홈런왕 1회, 타점왕 1회를 수상하였다. 1878안타 378홈런 1218타점. 통산 비율 스탯은 .268/.317/.489로 장타율은 최정상급, 타율은 중심타선 선수로서 간신히 커트라인 통과, 출루율은 홈런을 많이 쳐서 좋은 볼을 잘 받지 못하는 중심타선 타자 치고는 굉장히 낮다. 한 시즌 볼넷 최고 기록이 43개에 그칠 정도로 볼넷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현역 시절을 정리하자면 타율과 출루율은 낮으나 준수한 수비력과 화끈한 장타력을 보유했던 당대 메이저리그 정상급 3루수였다고 할 수 있다.
현역 은퇴 후 2008년에 새롭게 설립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여 오라클 파크에 팀의 역사를 빛낸 여러 대선수들과 함께 개인 기념 현판이 전시되어 있다.
2009년에 같은 팀 동료였던 마크 그레이스, 제이 벨 등과 나란히 명예의 전당에 입후보했으나 1.3%, 7표에 그치면서 나란히 탈락했다.
2018년에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창단 20주년 기념 팀 명단에 레전드 3루수로 랭크되기도 했다.
기록만 보면 역대 KBO 감독 중 첫 손에 꼽히는 활약을 했지만, 맷 윌리엄스/비판 및 논란 문서에도 나와있는 2007년 공개된 '''미첼 리포트에서 금지약물을 복용했음이 드러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17]
2.7. 연도별 연봉 추이
- 드래프트 계약 시즌인 1986년부터 메이저로 처음 콜업된 1987년에는 연봉에 대한 기록이 알려지지 않았다.
2.8. 연도별 기록
-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3. 지도자 경력
3.1. 역대 감독 전적
4. 프런트 경력
2003년 5월 31일,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은퇴한 이후 애리조나의 소액 구단주 겸 단장특별보좌직을 수행했다.
5. 해설위원 경력
5.1. 해설위원 1기
2005년부터 2009년까지 FOX Sports Arizona와 Arizona Sports 620에서 TV와 라디오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2. 해설위원 2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코치에서 경질된 후 2017년에는 지역방송국인 NBC Sports Bay Area에서 2010년 월드 시리즈 우승멤버인 코디 로스, 하비에르 로페즈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스튜디오 분석가로 활동했다.
6. 비판 및 논란
7. 여담
[1] 대학 시절과 프로 데뷔 초창기에는 주로 유격수로 출장했다.[2] 브루클린 로빈스(現 LA 다저스)와 미네소타 트윈스의 전신팀이었던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외야수로 활동했다.[3] 어렸을 적 사고로 오른쪽 눈이 실명했지만 빠른 공을 던졌던 소프트볼 투수 출신이다.[4] 테니스 선수 출신이다.[A] A B C 첫 번째 배우자 트레이시 던컨과 낳은 3명의 자녀.[5] 2011년 49라운드 전체 1474순위의 하위픽으로 애리조나에 입단. 다만 메이저 리그 입성은 실패했다.[6] 현재 배우자인 에리카 먼로 윌리엄스과 낳은 자녀. TikTok 스타로 미국에서 유명하다.[7] 금지약물 복용[8] 맷 윌리엄스가 KIA 감독으로 부임한 뒤, 와인 투어로 선물을 주고받는 2020년 8월에 류중일 LG 감독이 위의 사진들을 맷 윌리엄스에게 보여주며 서로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해당 기사[9] 여담으로, 이 당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류중일, 박노준, 한희민, 김기범 등이 포진되어 있었으나, 미국과 맞대결은 없었다. 대한민국은 준우승을 기록했다.[10] 메이저 리그 승격 후 2년 차 시즌. 신인급 시절이라 등번호도 자신을 상징하는 9번이 아닌 10번을 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여담으로 1988 시즌까지만 10번을 사용하고, 1989 시즌부터는 9번을 달았다.[11] 참고로 그 다음 순번인 전체 4번은 텍사스 레인저스가 지명한 케빈 브라운이었다.[12] 선수 시절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레전드 3루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미합중국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그 치열했던 오키나와 전투에 직접 참여하고, 1946년 예비군 대위로 전역하여 마이너리그를 3년 간 폭격하고, 다시 메이저리그 입성 후 1953년에는 시즌 타율 2위, 홈런 1위, 타점 1위를 기록하며 '만장일치 MVP'를 받았다. 클리블랜드 역사상 단일시즌 임팩트 갑이라고 부를만 한 레전드 인물.[13] 당시 자이언츠는 캔들스틱 파크를 사용하고 있었다. 캔들스틱 파크는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벗어난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야구팬들을 많이 모을 수 있기에는 한계가 있던 구장이었다.[14] 이 트레이드는 제프 켄트를 중심타자로 키워내 6년 간 써먹은 자이언츠에게는 확실한 승리였고, 클리블랜드 입장에서는 맷 윌리엄스를 1년간 잘 써먹긴 했지만 윌리엄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맹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승에는 실패하여 윈윈이라고 하기엔 조금 아쉬운 트레이드가 되었다. 단 클리블랜드가 윌리엄스를 보내고 받아온 트래비스 프라이먼도 클리블랜드에서 꽤 좋은 성적을 내기는 했다.[15] 통산 타율이 낮은 선수라 3할을 넘은 것은 세 번인데, 그 중 1995, 1996 시즌은 부상으로 경기를 많이 빠지면서 30홈런을 넘지 못했다.[16] 전성기에는 한 시즌에 4.5에서 6 정도의 WAR를 쌓던 선수였지만 애리조나 6시즌 동안 올린 WAR가 8에서 9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 4가 1999년 한 시즌. 즉 나머지 5시즌은 평균 WAR가 1 정도였다는 것.[17] 미첼 리포트는 2007년에 터졌고, 윌리엄스는 약물을 2002년에 복용하고 2003년에 은퇴해서 따로 징계를 받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