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통일범민족연합
1. 개요
祖國統一凡民族聯合
1990년 문익환 목사 등 당시 여러 민주화, 통일 운동가들이 만든 단체이나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세웠다고 주장하는 단체. 그러나 북한에서 미화하는 것처럼 1990년대 초반부터 조금씩 친북 성향을 보였고, 1993년 문익환 목사 지지 세력이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고 나가면서 현재는 종북성향을 지닌 단체가 되었다.
'민족'을 가치로 내세우며 북한과 연계한 통일운동을 표방한다.
1997년 이적단체로 지정되었으며, 2012년 야권연대 당시 부의장 노수희가 연관되어 있다.[1]
주요 단체가로는 <범민련 진군가>와 <범민련 찬가>가 있다.
2. 역사
한민족의 통일방안과 통일실천에 대해 논의하자는 목적으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남한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1990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제1회 범민족대회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범민족적 통일운동체를 결성하기로 결정해 1990년 11월 20일 독일 베를린에서 남·북한·해외동포 3자 회담을 개최, 범민련을 결성했으며 1990년 12월 범민련 해외본부[2] , 1991년 1월23일 범민련 남측본부, 1991년 1월25일 범민련 북측본부가 탄생했다. 범민련은 남, 북, 해외동포에 각각 본부를 구성하는 한편 따로 중앙본부를 꾸리고 남북한, 해외에서 공동의장 1명을 각각 선출하며 부의장과 중앙위원을 따로 선출했다.
문익환 목사[3] 가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재독출신 음악가 윤이상이 해외지부 초대위원장을 역임했다.##김구의 남북회담에 김신, 선우진과 함께 북한에 갔다온 신창균(2007년 사망)이 명예회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90년 범민련의 창립은 국제적으론 냉전 종식, 국내적으론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민간통일운동을 활성화해보자는 측면에서 당대의 민주화운동가, 통일운동가들이 총결집한 결과물이었다. 당시의 노태우 정부도 이런 흐름 속에서 "북한 및 공산권과 조건없이 대화하겠다"는 7.7선언을 내놓고 남북고위급회담, 총리회담을 연달아 개최하는 등 남북대화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범민련에 배타적이지 않았다. 이때문에 범민련이 남/북/해외 공동으로 8.15기념행사로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호의적으로 반응하였다. 하지만 남과 북 그리고 민/관 공동행사로 기획되던 범민족대회는 결국 정부와 범민련간의 의견불일치로 민간행사로만 진행되었다. 그마저도 범민련 내외부의 운동권 정파들의 개입으로 일반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축제를 만들겠다는 애초 의도와는 완전히 벗어나서 사실상 운동권들만의 행사로 전락했다. 범민련은 1992년 창설한 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과 함께 매년 8월 15일 범민족대회/통일대축전을 개최했지만, 원천봉쇄 초동진압을 외치는 정권과의 격렬한 충돌로 서울시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시가전이 되고 말았다. 1992년 범민족대회에선 전경 만여명이 행사 장소인 중앙대 흑석캠퍼스를 물샐틈없이 포위했고, 학교 뒷산을 넘어서 탈출에 성공한 수 천여 명의 참가자(대부분 대학생)들이 관악산 자락을 타고 이동해서 서울대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매년 이런 일이 반복되었으며 1994년에 서울대에서 열린 제5차 범민족대회 당시 경찰 헬기에서 뿌려대는 최루액 속에서도 대회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범민련 창립을 주도했던 문익환 목사가 1994년 범민련이 북한의 대남공작도구로 전락했다면서 범민련을 해산하고 새로운통일운동단체(새통체)를 만들자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북한 정권의 공작으로 순수한 민간통일운동이라는 창립 초기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친북성과 폭력성만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일반인들한테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통일운동의 방향과 성격을 두고 새로운통일운동체 일명 새통체 논쟁이 격렬해졌지만 문제를 제기했던 문익환 목사가 사망하면서 논쟁은 스리슬쩍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북한에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북한붕괴론이 득세하면서 민간통일운동도 위축되었다.[4]
문익환 목사는 사망했지만, 그의 문제제기에 공감했던 인사들은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약칭 민족회의)라는 새로운 통일운동단체를 결성하였다. 주의해야 할 것은 민족회의도 역시 NL계가 주도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범민련과 민족회의의 대립을 북한을 둘러싼 NL계의 분화로 해석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즉 북한 정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NL강경파와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할뿐 독자적인 통일운동을 지향하는 NL온건파의 대립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 민족회의도 남-북-해외 3자연대식의 통일운동에는 긍정적이었으나, 북한은 일방적으로 범민련만을 지지하면서 민족회의를 외면했다.
범민련 창립과 범민족대회의 뒷배경 그리고 통일운동 진영과 정부의 갈등, 문익환 목사와 북한의 갈등에 대해선 한겨레신문의 기획연재 <박찬수의 NL 현대사>를 참조할만하다.
이후로 범민련은 NLPDR 주사파 그중에서도 초강경파들이 장악한 운동권내 한개 분파로 전락했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이후에도 매년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고 북한에 사람을 보내는 등 활동을 지속했지만, 일반인들에겐 듣보잡이었다. 1996년 8월 범청학련과 함께 연세대학교에서 범민족대회/통일대축전을 개최하고 한총련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촉발된게 바로 연세대 사태이다. 정권이 행사시작때는 내버려뒀다가, 행사가 끝나갈때에 원천봉쇄를 실행해서 일부러 폭력투쟁을 유도했다는 썰이 팽배하지만, 하여튼 오랜시간 서울 시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시가전이 벌어지면서 학생운동, 통일운동 세력이 일반인들에게 완전히 버림받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연세대 사태 때도 참여단체에 불과한 한총련만 오지게 욕을 처먹었고, 정작 행사를 주최한 범민련은 완전 듣보잡이었다. 그만큼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후에는 NL 내부의 노선분화가 가속화되면서 범민련은 그쪽에서도 그냥 듣보잡이 되었다. 범민족대회가 쪼개져서 열릴 때도 있을 정도. 이후 범민족대회는 1999년 제10회까지 해오다가 2000년에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을 고려하여 범민족대회를 열지 않겠다는 서한을 보내면서 막을 내렸다. 더 나아가 1998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발족 이후 정부 주도의 통일운동은 당연시되기 시작했다.[5]
북한의 범민련 북측 본부는 김일성이 직접 자신의 '''항일 빨치산 전통을 이어받은 통일조직'''이라 칭송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 바가 있으며 당비서 겸 조평통 부위원장 윤기복이 초대 의장, 문예총위원장 백인준이 2대 의장, 통전부 부부장 겸 조평통 서기국장인 안경호가 3대 의장을 맡았다. 이렇듯 김일성이 직접 범민련의 존재를 강조하는 한편 북한의 고위급 대남공작기구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단체의 정체성은 뻔할 뻔자다.
금강산 통일기행을 개최하기도 하였으며 한반도기를 태극기 대신 사용하자고 주장하였다.
반전, 반핵을 주 테마로 삼고 있다. (단, 북한은 빼고 남한과 미국만)[6]
2000년대 중반까지는 이적단체 해제 운동을 많이 벌였다.
3. 역대 남측본부 의장
- 문익환 준비위원장 (1991~1993)
- 강희남 (1993~2000)
- 이종린 (2000~2003)
- 나창순 (2003~2005)
- 이규재 (2005~ )
4. 대한민국에서의 평가
평가는 대체적으로 매우 안 좋다.
북한과 관련된 이적혐의를 짙게 받았으며,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가 단순히 사이비 종교스러운 종북주의자들의 모임이라면, 범민련은 실질적으로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거나 각종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왔다는 점[7] 에서 질이 훨씬 나쁘다.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선결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내세우고 있다. 범민련이 원하는 통일은 북한 주도의 통일이기에 자유주의적 입장에선 차라리 북한과 대치하는 바에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결국 1997년 대법원에서 이적단체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적단체가입차 처벌및 동조자 처벌, 이적단체 활동 금지와 같은 법률이 없기에 실질적으로 해체되지는 않았고 홈페이지까지 운영되었으나 2015년 12월 28일부로 방심위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2017년 8월 15일에 기어코 또 문을 열었다. 남측본부와 북측본부는 사이트가 따로 있고, 일본에도 사이트가 하나 있다. 이는 조총련과의 연계차원에서 일본에도 사무실을 두고 홈페이지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지도부나 종북적 활동에 참여했던 주요 혐의자들은 대부분 검거가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이 재조직해서 간신히 붙들고 있는 상황. [8] 2009년에 초대 남측본부 의장인 강희남 목사가 병마와 싸우다가, 고통을 못이겨 자살했을 때(향년 89세)의 공식 논평만 봐도 이들의 성향이 어떤지는 짐작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침략자 미군과 역도 이명박을 몰아내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자주 통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이며, 그외에도 '''고 김일성 주석께서 서거하셨다'''는 등의 표현만 봐도(...) 간부들도 구치소에 가는 일이 있어도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지는 않을 듯.
그리고 김정일이 사망한 직후인 2012년 1월에 드디어 일을 냈다! 2012년 1월 3일에 안드로이드 용으로 종북 어플리케이션(...)을 배포했다. 기사에 따르면 이 어플리케이션은“김정일 국방위원장님, 통일조국에 영생하소서 ...(중략)...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급작스런 서거는 결코 겪어서는 안 될 민족적 비보(悲報)”라면서 “후대의 역사는 누가 진정한 애국자이고, 누가 민족의 수호자였는가를 기억할 것”이라는 조사를 싣고 ‘선전교양물’ 메뉴에서는 숨진 김정일을 ‘거인(巨人)’, ‘김일성 민족(북한주민을 지칭)의 운명이자 미래’, ‘무적 힘의 상징’이라고 표현하면서 찬양한 글들을 모아놨다.
2012년 3월 24일에는 김정일 사망 100일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 노수희가 한국 정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방북 했다. 북한에서 104일 동안 머물며 한국 정부를 비난하고 '''김정일의 죽음이 민족의 가장 큰 상실이며 최대 슬픔'''이라는 개드립을 날리며 북한의 선전도구로 이용당하다가 7월 5일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이에 대해 범민련 남측본부는 노수희 방북은 칭찬할 일이라는 드립을 상큼하게 날렸다. 그리고 우리민족끼리에서는 그 사건을 가지고 제대로 디스를 했다... 관련영상 링크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남북관계를 20년 이상 후퇴시킬 적대 정책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고위급 대화를 즉각 재개하고 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라'라는 내용의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위의 내용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현재의 범민련은 단순한 종북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남측 본부'''와 '''북측 본부'''가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들끼리 자료들을 주고 받다가 처벌 받는 경우도 잦다. 정기적으로 팩스를 통해 지령을 받는데, 이걸 '''총회'''라고 부른다.
이를 사이버 안보단체를 표방하는 우익 단체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으며 검찰측은 “위법사실이 밝혀질 경우 법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하겠다”며 수사의지를 천명하였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다양한 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이 결집해서 만들었던 초기의 범민련과 문익환 목사 사후 특히 2000년대 이후의 범민련은 사실상 다른 단체이다. 현재의 범민련에는 북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NL초강경파, 통일만 되면 지상천국이 열린다고 믿는 광적인 통일지상주의자, 그리고 여기에 낚인 순진한 몽상가들 뿐이다.
5. 관련 문서
[1] 노수희는 야권연대 창단식에 얼마 안 있다 바로 북으로 넘어가 김일성, 김정일을 참배하고 판문점으로 돌아오자마자 체포되어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았다.[2] 음악가 윤이상이 초대 의장을 맡았다.[3] 그는 이후에 '''북한이 범민련을 대남공작기구로만 사용한다'''는 의혹을 가졌고, 이러한 문제를 타파하려고 시도했으나(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기존에 있던 범민련을 해산하고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를 조직하려 했다) 북쪽에서 ''''문익환은 안기부 프락치다''''라는 팩스를 보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심장마비로 별세. 뭐, 북측에서 일단 애도를 표하기는 했다[4] 구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고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나설때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우리식 사회주의라며 북한을 찬양하던 NL 주사파 그룹 내에서 자신들의 이념에 의문이 제기된게 이때이다. 문민정부의 출범, 평화적인 시민사회운동의 급성장, 김일성의 사망과 고난의 행군, 문익환 목사의 문제제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이 시기에 NL운동내에서 급격한 노선 분화가 이루어진다. 비주사 NL 그룹은 PD온건파와 통합해서 사민주의 성향의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을 형성했고, NL온건파들중에 상당수는 아예 주체사상을 버리고 시민운동이나 제도정치권쪽으로 건너갔다. 심지어는 주사파의 대부라던 김영환(1963)조차 공개적으로 주체사상의 수령론을 비판하고 이후 북한민주화운동가로 전향한다. 주체사상을 고수한 이들도 기존의 종북노선, 강경폭력투쟁을 고수하는 강경파와 이들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온건파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강경파들이 범민련과 한총련을 장악하고 터트린게 1996년 연세대 사태,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와중에 벌어진 이석 치사 사건이다. 온건파들은 학생운동권에선 사람사랑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진보정당운동, 노동운동에 뛰어드는데 대표적인 그룹이 경기동부연합...[5] 이때가 되면 극심한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에 시달리던 북한 입장에선 북미협상, 남북대화를 통해서 고립에서 탈출하고 남한 재벌들을 북에 유치해서 경제를 재건하는게 훨씬 중요하지 남한의 주사파들은 더이상 아무 쓸모가 없는 골칫덩이에 불과했다. 범민련이나 남쪽 주사파들하고 소위 민간교류, 통일운동 백날 해봤자 쌀 한톨도 안나오니 그냥 팽한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남한 주사파의 북에 대한 짝사랑은 애처로울 정도로 계속 이어진다.[6] 이 시기는 아직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맘놓고 반핵을 주장했다. 당시 세계 반핵회의도 평양에서 수차례 열렸다. 물론 들어올때와 나갈때 다르다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게 되자 순식간에 입을 싹 닦았다(...).[7] 사실상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인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와 관련이 있다.[8] 참고로, 알림마당의 성명/논평/결의문/회견문에서 '북측본부'를 검색해보면 북한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