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선수 경력

 





1. 클럽 경력



1.1. 독일로 진출하기까지


농부의 아들로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1]에서 태어난 차범근은 고추장에 보리밥을 비벼먹고 참기름을 살 돈조차 없어 비빔밥에 참기름 넣어 먹는 것조차 사치로 느낄 정도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학교가 끝나면 농부의 아들로서 소여물을 주거나 논 밭일을 도와주는 것이 그의 어린 시절이었고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신체와 운동신경이 탁월했는지 화산초등학교 4학년 때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축구, 핸드볼, 육상에 씨름까지 했다. 빠른 데다 운동신경 뛰어나니 못할 게 없었고 그러다 보니 혼자 바빴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핸드볼 예선을 뛰고, 저 동네로 날아가 축구 준결승을 뛰었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아서 동네를 대표하는 운동선수로 어릴적부터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아버지 차금동씨는 이런 차범근에게 운동선수의 재능을 알아봤고, 겨울이면 한푼두푼 어렵게 모은 돈으로 스케이트를 사서 마을 저수지로 데려가 차범근에게 신기고 계속 저수지를 돌게 하면서 하체 운동을 시켰다. 새벽이면 계속되는 운동은 아직까지 차범근이 아침운동을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차범근은 후일 아버지에게 배운 새벽운동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회상했다.#
여러 종목을 다 잘했지만, 특히 축구에서 가장 재능을 보였고 차범근은 축구부가 있던 서울 영도중으로 진학했으나 유니폼을 입기도 전에 축구부가 해체되는 불운을 겪는다. 그 바람에 팔자에도 없는 필드하키 선수가 되었고 공도 못 차면서 영등포까지 그 먼 길을 통학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했던 차범근은 집에 전학 얘기를 꺼냈고. 전학하는 데 적잖은 돈이 들었던 그 당시에 아들의 운동을 하고자 하는 정신과 근성을 간파한 아버지는 삶의 터전인 땅을 쪼개 팔아서 차범근의 전학을 돕는다. 결국 2학년 2학기 때 경신중학교로 전학에 성공한 차범근은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고 기량을 키웠지만 목표했던 경신고가[2] 진학 대상에서는 제외되고 경성고로 진로를 타진한다.
그런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경신고 교장선생님이 노발대발하면서 난리를 쳤고, 경성고 입학시험 치는 날 감독과 선배들이 들이닥쳐 경신고로 다시 진로를 돌려놨다. 헌데 이 과정에서 학교 교장에게서 큰 대접을 받고 있는 차범근을 보고 선배들이 대놓고 불만을 나타냈다. 운동부 군기가 군대 뺨치던 시절. 차범근은 겁에 질려 순간 엉뚱한 결정을 내리고 만다. "선배들 구타가 너무 두려워 가출했습니다. 서울 친구 집에 일주일을 숨어 있었어요. 근데 친구는 학교 가고 저는 집에 있으니 친구 어머니 눈치가 보여 더는 못 있겠더라고요." 농사짓는 집에서 땅을 팔아 전학까지 시켜줬는데 아들이 가출을 했으니 부모님에겐 다시 없는 불효였다.
결국, 큰형에게 연락해 다시 집으로 내려갔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경신고 장운수 감독 손에 넘겨졌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장 감독이 축구부 선배들에게 "다시 한번 차범근에게 손대면 내가 혼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방어막을 쳐준 것이다. 만에 하나 삐끗했더라면 그저 그런 필드하키 선수가 됐거나, 가출 청소년이 될 뻔했다. 그랬으면 대한민국은 축구영웅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고교 2학년 때 청소년 국가대표가 됐고, 고교 3학년 때 A대표팀으로 발탁됐다. 1972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안컵 이라크와의 조 편성 경기가 데뷔전이 됐다.
섭씨 35도가 넘는 날씨에 혀를 빼 문 선배들은 경기만 뛰면 항상 "범근아"만 외쳐댔다. 죽으라 뛰었지만 0:0이 되고 결국 PK로 승부를 가려야 했다. 지친 선배들은 후배들을 앞세웠다. 청소년대표인 차범근과 황재만(당시 고려대 1학년)이 등을 떠밀렸고, 공교롭게도 둘 다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결국 2-4로 패배한다.
차범근이 힘껏 때린 볼은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져 관중석에 떨어졌다. 속칭 새를 잡은 것이다. '''"선배들이 집합을 시켰어요. 외국에서 '옥상으로 올라와'를 한 거죠. 정말 라자호텔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천하의 차범근이 태극마크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른 셈이다.
아무튼 청소년 대표까지 했던 차범근은 축구명문인 고려대학교에 순조롭게 입학하게 되었을까? 아니다. 차범근의 고려대 행은 그의 고등학교 진학 과정보다 훨씬 더 버라이어티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경신고 교장 이하영과 축구부 감독 장운수의 대립이었다. 이하영은 연세대학교, 장운수는 경희대학교 출신으로 모교로부터 차범근을 빼내달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차범근의 친가에서는 명문인 연세대학교를 희망하고 있었고 차범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교장과 감독의 대립 속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차라리 축구를 포기하려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둘 다 허구한 날 시간 날 때마다 불러대서 "너는 연세대다 / 너는 경희대다" 하고 압박을 하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결국 이에 시달린 나머지 1971년 11월 숙소를 이탈해 집으로 귀향한다. 그리고 고향에서 동네 1년 선배이자 '''고려대 축구부 1학년 황재만'''[3]을 만난다. 황재만은 차범근의 상담을 듣고 아에 이도저도 말고 제3의 길인 고려대를 권유했다. 교장과 감독의 다툼에 지친 차범근은 동네 선배의 친절한 권유에 마음을 돌려서 바로 고려대행을 결정지었다.
당연히 경신고, 연세대, 경희대, 고려대 모두 뒤집어졌다. 앞의 셋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고려대는 "이게 웬 떡이냐!"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연세대나 경희대에서 납치(...)를 할 지 모른다는 우려, 그리고 경신고 내에서 차범근 감금하는 일같은 막장짓거리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경신고 축구부 내 코치 이경이는 고려대 축구부 감독과 절친(...)이었기에 이 정보는 고려대에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당연히 고려대는 넝쿨째 들어온 호박인 차범근을 다른 대학교로 빼앗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같은 해 12월 중순, 청소년대표 최종선발전에 출장한 차범근이 귀가를 하려고 하자 검정색 지프가 나타났다. 그리고 해군 장교 출신 고려대 럭비팀 트레이너 김영복을 필두로 한 다수의 행동대원이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싼 후 고려대행을 권유한 당사자 황재만이 차범근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고려대는 경신고가 손을 쓸 수 없는 청소년대표 선발전 종료 직후라는 그 타이밍을 노려서 전격적으로 차범근을 데려간 것이다. 차범근 본인의 동의가 없었으면 영락없는 납치였을 상황(...)이다. 그리고 고려대 축구부 및 운동계열 수뇌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바로 입학을 확정지으면서 연세대와 경희대를 벙찌게 만들었다.
이후 대학 재학 중 당시 최연소로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며 이후 신탁은행과 공군에 입단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 원래는 해군 축구단에 입단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공군측에서 부상시 의가사 전역과 '''복무 단축'''을 조건으로 제시해서 낚아채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이래놓고 전역을 시키지 않아서 첫 가계약이 날아간다.
차범근의 이름을 알리게 한 것은 국대에서의 뛰어난 활약 때문. 이 때 스탯이 엄청난데 국대 데뷔 때부터 한국에 있던 때인 72년부터 78년까지 무려 118경기 55골을 넣었으며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자이다.(24세 139일) 당시에는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던 아시아에서 한국을 비롯해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의 국가 주최로 자체적으로 많은 컵 대회들(메르데카컵, 박스컵 등등)을 개최했었고 종종 해외 클럽들을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치렀는데, 박스 컵에서 열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고 슐테 프랑크푸르트 코치 측이 박동희 축구협회 국제부장을 통해 분데스리가 진출을 타진하게 되며 결국 78년 12월 다름슈타트에 입단한다.
전에는 독일에선 관심도 없었는데 박동희 교수의 노력으로 겨우 테스트를 통해 입단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앞서 적었듯이 슐테 코치가 직접 차범근의 플레이를 보고 박 교수에게 제의를 한 것이고 링크참고, 박스컵 이전 5월 재팬 컵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의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우도 라텍 감독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4]
참고로 차범근의 서독 진출로 불똥을 맞은 건 다름 아닌 현대그룹과 한국축구계인데, 당시 현대그룹에서는 스타 선수들을 끌어 모아 축구단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축구계는 이를 계기로 프로축구를 출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스타 선수의 정점이 바로 차범근이었던 것. 그러나 차범근이 서독으로 가면서 현대는 축구단 창단을 포기했고 프로축구 출범도 연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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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해석: 한편 축구계는 현대그룹이 파격적인 조건으로 선수들을 스카우트, 팀 프로화 움직임이 있었으나 차범근의 서독행으로 팀 창단을 포기하는 바람에 프로화 움직임이 시들고 말았다.

1.2. SV 다름슈타트 98


차범근이 입대할 당시 공군의 복무기간은 35개월이었다. 그러나 공군 측에서는 팀 전력의 강화를 위해서 참모총장의 권한으로 당시 육군의 복무기간과 같은 30개월이 되면 의가사 전역을 시켜주는 조건을 내세워 공군 축구단(성무)에 입단을 제의하였다.[5] 게다가 차범근은 대졸자이기 때문에 교련과목 이수로 인한 3개월 단축 혜택을 합치면, 공군에서 약속한 군 복무기간은 27개월이 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차범근은 공군 축구단으로 입대하였으며, 제대 후 분데스리가 진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차범근의 입대 과정이 정리된 기사
35개월(공군 군 복무기간) - 5개월(공군과 육군의 군 복무기간 차이) - 3개월(교련과목 이수 혜택) = 27개월
1976년 10월에 입영하여 27개월 뒤인 1978년 12월에 전역했다고 판단하고 독일로 건너가 SV 다름슈타트와 계약하며 분데스리가에 입성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 다름슈타트에서 차범근은 VfL 보훔을 상대로 76분을 뛰었고 3:1로 다름슈타트가 승리하는데 기여하였다. 차범근은 이 경기에서 키커 평점 3점[6]을 받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쳐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었으나...
한 경기를 출전한 상태에서 차범근의 병역 기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5개월 면제는 말이 안된다고 한것.[7]그로 인해 출국 11일만에 귀국한 뒤 나머지 5개월의 복무기간을 채워 1979년 5월 31일에 만기 전역했다. 5개월 면제 약속을 파기한 공군측이 큰 잘못을 한건 맞지만 나름대로 복무기간 동안 차범근이 축구선수 생활을 할수 있게 여러모로 지원해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국가대표 소집을 군복무로 처리해줬을 정도니...... 물론 SV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은 파기되었다. 여담이지만, 다름슈타트는 그해 말에 차범근의 고등학교 2년 선배인 김진국을 영입하였으며, 2018년 1월에는 FC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지동원을 임대 영입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2019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백승호를 영입하는 데 성공해 한국인 선수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다행히 전역 후, 차범근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계약에 성공하며 분데스리가에 재입성하게된다.

1.3.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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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UEFA컵의 우승 트로피를 드는 차범근. '''
만기 제대 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다. 여기서 첫 시즌에 프랑크푸르트를 UEFA컵 [8] 정상에 올렸으며, 공격수 부분 3위를 기록하는 등 첫 시즌에 엄청난 활약을 한다.[9][10] 첫 시즌이 최전성기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80-81 시즌에는 부상 등으로 인해 리그 27 경기 8골로 비교적 부진하였으나 UEFA컵 5경기 2골, DFB-포칼 6경기 6골을 기록하며 팀의 3번째 포칼 우승을 이끌었다. 포칼 최다 득점이 6-7골 선에서 나오는걸 생각해보면 대단한 기록이다. 이후 81-82 시즌 리그 31경기 11골/시즌 38경기 12골, 82-83 시즌 리그 33경기 15골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이어갔지만 프랑크푸르트의 재정악화로 인해 당시 고 연봉자였던 차범근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된다.

1.4. 바이어 04 레버쿠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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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생애 두 번째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드는 차범근.'''
1983년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한다.[11] 차범근의 말대로 레버쿠젠은 중위권 팀이었는데, 당장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하던 4시즌의 레버쿠젠 성적을 보면 12-11-16-11위로 분데스리가가 18개 팀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명문이라고 불리기는 힘들던 팀이었다.[12] 2시즌 동안 35경기 12골, 32경기 14골을 기록하며 꾸준히 활약했으며 결국 85-86시즌 38경기 19골(리그 34경기 17골)로 정점을 찍으며 아시아 선수 유럽 4대리그 최다골[13]을 넣으며 레버쿠젠을 리그 6위로 올려 UEFA컵 진출을 성공시킨다. 다음 시즌부터는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골수가 상당히 줄었지만, UEFA컵 결승전에서 결정적인 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이어간다.[14][15] 지금이야 레버쿠젠이 분데스리가에서 우승 경쟁도 하는 강호이지만 그 당시에는 차범근이 기틀을 닦아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위권 팀이었다. 차범근은 1953년생이면서 1989년 만 36살 나이까지 뛰었으니 독일에서만 12년을 뛴 셈이다. 그리고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98골은 은퇴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다.[16] '''그리고 UEFA컵을 각각 다른 팀에서 두 번 이상 우승한 커리어를 이뤄낸 선수는 현재에도 전 세계를 통틀어서 12명 밖에 되지 않는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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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시절, 알렉스 퍼거슨 감독[18]이 차붐을 평가하면서. 1978년 UEFA컵에서 퍼거슨이 이끌던 애버딘 FC는 프랑크푸르트에게 1-0으로 패했다. 차범근은 그 경기에서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당시 독일에 진출했던 일본 선수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차범근의 포스에 눌려서 많이 가려졌다.[19]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 한국 대표로 출장했다. 일부에서는 "예선전에도 참가하지 않은 선수를 대표 팀에 넣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대여론도 있었지만 활약상이나 실력 등을 고려해 그냥 기용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실제로 차범근의 명성이 잘 알려진 해외, 특히 독일에서는 '''"차범근을 대표선수로 뽑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엔트리에 여유가 있다면 한국은 우승후보가 분명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본 경기에서는 타 팀 선수들의 집중견제로 큰 활약은 못했다. 상대팀의 마인드가 '무조건 차붐만 막으면 된다.' 였기 때문에 공을 갖고 있든 안 갖고 있든 무조건 수비수 2명이 기본적으로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르헨티나전에서는 그 당시의 아르헨티나가 워낙 쟁쟁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팀인지라 세르히오 바티스타에게 철저하게 지워져 버렸다. 차범근이 바티스타에게 지워지는 바람에 허정무가 무리하게 되었고 결국 허정무는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본의 아니게 태권킥을 시전하고 만다. 사실 이 월드컵에서 한국은 1무 2패라고는 하지만 이탈리아 상대로 2-3, 더군다나 그 중 하나가 조광래자책골인지라 이탈리아와 불가리아를 상대로 호각의 경기력을 보였고 한국이 일방적으로 밀린 유일한 상대가 아르헨티나였다. 실제로도 차범근이 막히자 수비진을 뚫을만한 공격수도 없었고. 그리고 당시 차붐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이미 34세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대였다. 게다가 최전방 스트라이커도 아니고 클럽과 달리 윙에서 뛰었으니.. 당시 레버쿠젠 구단에서도 차범근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부상을 대비한 전담 의료팀을 따로 파견을 했을 정도였다. 흠좀무...
여담으로 화려한 클럽 경력과 국대에서의 골 수, 경기 수에 비해 월드컵 출전은 위의 86년 월드컵뿐인데 이만한 선수가 왜 월드컵 경력이 1회뿐이냐고 묻는다면 그 이전의 월드컵은 이미 다 탈락했기 때문에..[20]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일본 vs 파라과이 경기를 해설(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16강, 또는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일본을 참고)할 때, 분데스리가에서 페널티 킥을 하나도 안 찬 사실을 본인 입으로 인증했다. 이유는 실축할까봐 무서워서...즉 분데스리가 골 기록 중에 페널티 킥은 한 골도 없다는 소리가 된다. 본인 입으로 말하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참고로 당시 경기는 너무 재미없어서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덧붙여서, 나중에 '차범근 위원에게 물어보세요!'에서 한 말에 의하면 페널티 킥를 못해서 페널티킥으로 넣은 골이 없는 것이며,[21] 골 많이 넣는 공격수라도 배짱이 좋지 않으면 페널티킥을 잘 차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세계적인 슈퍼스타라도 페널티 킥을 실축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2. 국가대표 경력



2.1.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970년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1971년과 1972년 연속으로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하였다.

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고려대학교 학생 신분이던 1972년에 당시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5월 7일 이라크와의 AFC 아시안컵 경기에서 데뷔하였다. 1986년 FIFA 월드컵에도 참가하였다.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1-4로 뒤지고 있을 때 6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해 무승부로 만든 일화가 유명하며 특히 일본과의 정기전을 치룰 때마다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이 유명한 일화가 기사로 정리돼 있다. 관련 기사 1986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였던 1986년 6월 10일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한 월드컵에서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국가대표로 136경기에 출전해 58골을 넣었는데 A매치 58골은 대한민국 선수 중 A매치 최다 골 기록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1972년 데뷔하여 1979년 프랑크푸르트 진출전까지 국가대표로 차출되었으며, 1979년 이후로는 국가대표를 은퇴했었다.[22]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예선에서 축협이 합류를 요청했으나 계약상의 문제로 불발되었다. 이후 1986년 한국 국가대표팀이 기적적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고 레버쿠젠과의 계약에서 국가대표 차출 문제가 해결되며 차범근을 다시 불러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차범근 본인은 처음에는 본인이 기여하지 않은 성과인데다가 나이도 상당해서 후배들을 위해 출전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한국 최고의 선수인지라 심히 오랜만에 진출한 월드컵에 차범근만한 슈퍼스타가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에 전 국민적인 성원이 이어졌고 월드컵에 출전한다. 하지만 나이도 나이고 차범근에 대한 집중 마크가 심한데다[23] 한국의 전력도 좋지 않아 조별예선에서 탈락하며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을 아쉽게 마무리한다.
이렇듯 7년간 130여경기를 출전하며 국가대표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독일로의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따져도 매년 20여 경기를 소화한 수준인데 각종 잡다한 컵의 존재를 생각해도 국가대표에서 차범근의 위엄을 알 수 있는 부분. 이때문에 신체적 전성기였던 국가대표 활약 시기에 관심이 쏟아지지만 워낙 당시의 경기 영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직접 경기 장면을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1]경기도 화성시 송산동.[2]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가 같이 있다. 참고로, 차범근은 경신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3] 황재만 선수도 이젠 거의 잊혀지지만 1970년대 국가대표에서 주전 붙박이 레프트백이었다. 차범근과 같이 국가대표 경기를 뛴 적도 있었으니 기묘한 인연이다.[4] 하지만 이 때문에 차범근의 현역시절, 특히 국가대표 차범근은 이른바 박지성, 손흥민세대인 현시대 적지 않은 라이트 해축팬 ~ 축알못 국빠들에게 심하게 저평가되고 있다. 이유는 '''첫째, 차범근이 뛰던 시기의 국가대표 경기 기록이나 영상 상당 부분이 유실되어 차범근의 젊은 시절 국가대표 경기, 대표적으로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1976년 대회때 나온 6분 해트트릭같은 20대 차범근의 활약상을 지금 거의 볼 수 없고,''' 둘째, 차범근이 현역 에이스였던 86년 이전의 대한민국 축구는 월드컵 본선 진출은 커녕 아시안컵에서도 힘겹게 경쟁하는 중상위권 국대였지만, 어느순간부너 국대 축구팬이나 축구협회나 그 시기를 아예 없던 시기로 치부하고 86년부터 시작된 월드컵 9회 연속 본선진출만 강조하고 있기에 차범근이 아무리 국대를 캐리했다 한들 "월드컵 진출도 못시켜서 86년 멕시코때 무임승차한 선수가 에이스가 무슨 에이스? 박지성, 손흥민 미만잡" 이런 논리에 동조하는 국대 축구팬들이 매우 많다는 점. 셋째, 차범근의 활약을 실제 본 장년, 노인세대들 중 후배들인 어린 국대 축구팬들에게 이를 전할 한국 사람이 정치적인 이유를 포함한 복잡한 문제로 인해 거의 없어서 구전조차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 이 때문에 차범근의 선수 경력에 대해 그를 아는 해외 축구팬,전문가들과 한국 축구팬들과의 온도차가 극명한 것이다.[5] 당시는 지금처럼 국군체육부대로 통합된 형태가 아닌 육(웅비), 해(해룡), 공군별로 축구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축구단별로 서로 경쟁 아닌 경쟁을 하던 시절이었다. 쉽게 말해, 지금은 사라진 경찰의 아산 무궁화와 현존하는 국군의 상주 상무군경 더비로 불리며 경쟁하던 것을 생각해보라.[6] 당시 독일의 평점은 내신등급처럼 낮을수록 좋았다. 즉, 1점이 우리가 흔히 아는 10점이다. 3점을 받았으니 평점 7점으로 좋은 활약을 펼친 셈이다.[7] 군 문제는 의무사항이었기에 차범근에게 5개월 면제라는 특별혜택을 준 것이 당연히 문제가 된것이다. 아무리 축구스타라고 할지라도 군 의무를 다하는 일반인들과 이러한 차별을 두는 것은 사람들이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애초에 5개월 의가사 면제를 제안했던 공군 측 인물은 사망한뒤라 차범근은 공군측과 얘기해봐야 별 소용도 없었고, 국방부와 대한체육회, 축구협회도 다른 건 다 들어줘도 병역문제만큼은 특별대우해줄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또 북한과의 아시안 게임 경기를 위해 체육회 측에서 독일 진출에 제동을 거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또한 아시안 게임에서는 당시 프로선수가 출전할 수 없기도 했다. 운동선수에 대한 병역특례는 당시에도 있었으나 기준이 엄격했다. 다만 당시 대표팀은 평소 합숙훈련을 했기 때문에 차범근이 복무 중 부대 밖에 있었던 기간이 꽤 됐다.[8]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준UEFA 챔피언스 리그쪽에 더 가깝다. 당시 유러피언컵(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은 유럽 각국의 리그 우승팀만이 참가할 수 있었고, 자국리그 우승을 놓친 팀들은 아무리 강팀이라도 UEFA컵에 가야했기 때문에, 너무 적은 수의 팀이 경쟁하는 유러피언컵보다 오히려 UEFA컵이 흥행성이 더 높았다. 물론 흥행성 애기다. 더 많은 팀들이 출전하는 UEFA컵이 흥행성은 더 높았다고 볼수도 있지만 권위나 위상은 각 리그 우승팀들이 맞붙는 유러피언컵이 언제나 최고였다. 하지만 차범근의 UEFA컵 우승이 지금의 유로파리그 우승보다 대단한것도 사실이다.[9] 공격수 평점 1위는 뮌헨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위는 함부르크의 케빈 키건. 누군지 잘 모르겠다면 '''키건은 77, 78년, 루메니게는 80, 81년 발롱도르 수상자.'''[10] Sportsbild에서 차범근을 79-80시즌 베스트 11에 선정하기도 했다. 링크참고[11] 레버쿠젠 이적 비화[12] 16위를 기록한 81-82 시즌은 강등 플레이오프까지 치러 겨우 잔류했다.[13] 이 기록은 30년이 지난 2016-17시즌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홋스퍼 FC에서 뛰던 손흥민이 21골(리그 32경기 14골)을 넣으며 깼다.[14] 1차전에서 3:0으로 지고, 2차전에서 3:0으로 이겨서 승부차기 끝에 우승한다. 이때 마지막 세 번째 골을 넣은 선수가 다름 아닌 차범근이다![15] 여담으로 이 대회에서 레버쿠젠의 8강 상대는 FC 바르셀로나였다. 1차전에서 비기고 2차전 캄 노우에서 바르셀로나를 1:0으로 이겼다.[16] 이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레전드 스트라이커인 스위스 출신의 스테판 샤퓌자가 99년에서야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참고로 샤퓌자를 처음 스위스 국가대표팀에 발탁한 감독이 바로 울리 슈틸리케다. 상당히 묘한 인연. 추후 FC 바이에른 뮌헨의 브라질 출신 선수 지오반니 에우베르가 기록을 깼지만 몇 년 뒤 또다시 바이에른의 페루 출신의 클라우디오 피사로가(당시에는 베르더 브레멘) 기록을 경신했다. 그리고 2015년 바이에른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차붐의 기록을 넘어섰다. 2019년 현재는 외국인 최다득점 9위에 랭크되어 있다.[17] 그 중 한 명이 울리 슈틸리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슈틸리케는 1975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소속으로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10년 뒤인 1985년에는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다시 한 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다른 인물들로는 데니스 베르캄프(1992년 AFC 아약스,1994년 인테르), 로타어 마테우스위르겐 클린스만(1991년 인테르, 1996년 FC 바이에른 뮌헨), 파울루 페헤이라(2003년 FC 포르투, 2013년 첼시),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2010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4년 세비야), 마르코 마린(...)(2013년 첼시, 2014년 세비야), 후안 마타(2013년 첼시, 201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페르난도 토레스(2013년 첼시, 2018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라다멜 팔카오(2011년 포르투, 2012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다비드 데헤아(2010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있다.[18] 퍼거슨은 1974년부터 감독을 맡고 있었다. 에버딘 감독은 1978년부터. 이전에는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때려쳤다고 하는데, 이 분 1941년생이다. 33살이면 약간 이른 감이 있긴 해도 충분히 선수생활을 접을 만한 나이였다. 다만 33세(저 발언을 한 당시에는 38세)라는 나이는 감독을 맡기에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매우 젊은 나이이긴 하다.[19]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분데스리가에서 윙 포워드 겸 윙백으로 뛰면서 10시즌 동안 259경기에 출전해 34골을 넣었다. 흔히들 차범근에 견주면서 오쿠데라는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래봬도 분데스리가에서 아시아 선수로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경험했으며, FC 쾰른 소속으로 78-79 유러피언컵에서 골을 넣은 적도 있는 선수이다. 그런데 동시대에 차범근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참고로, 오쿠데라는 현재 요코하마 FC의 구단주를 역임하고 있는 중이다.[20] 또한 윗 문단에도 나와있듯이 차범근은 24세 139일의 나이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역대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자다. 또한 1978년 다름슈타트에 입단하면서 사실상 국가대표를 은퇴한 상황. 그의 마지막 A매치 경기 득점도, 1978년에 이루어졌으며, 화려한 분데스리가 생활 때는 A매치에 소집되지 않았었다. 당시는 A매치 데이 같은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이었고, 냉전시대였기 때문에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영공을 통과하지 못해 서독으로 가려면 알래스카를 경유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986년 월드컵에 드디어 대한민국이 진출했고, 차범근은 8년만에 국가대표에 복귀해서, 조별리그 3경기를 뛰고, 정식으로 국가대표를 은퇴했다. 74년 월드컵 예선의 경우, 호주와 1장의 결승티켓을 놓고, 홈앤 어웨이를 모두 비기고, 마지막 재경기에서 대한민국이 패배하면서 월드컵 진출을 실패했는데, 차범근은 이 호주와의 3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하지 못했기에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으며, 78년 월드컵 예선은, 5개의 조가 모인 최종예선에서 이란과 호주와의 경기에서 승을 챙기지 못하여, 아쉽게도 2위로 월드컵 진출을 못따냈다. 차범근은 1차예선에서 2골, 최종예선에서, 3골을 넣었음에도 조국의 탈락을 바라봐야만 했다. 82년은 A매치를 뛰지 않았었기에, 86년 월드컵에 드디어 첫 출격을 하게 된 케이스.[21] 1997년 쯤 나온 '내 꿈을 펼쳐라'라는 자서전에서 보면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동남아의 모 대회에서 승부차기 1번 키커로 나왔는데 홈런 킥으로 대표 팀이 패하자 페널티 킥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고 회고한다.[22] 여러 정황을 보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보이는데, 독일 진출과 계약서에서 국가대표 차출과 관련된 내용이 명확히 되지 않아 후자와 같이 월드컵 예선 참가 요청에도 불발된 경우가 있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1979년과 1986년 월드컵 본선 사이에 엔트리에 포함된 기록이 없다.[23] 최순호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차범근은 당시에 타겟맨같은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 상대팀이 차범근을 집중 마크할 것이 당연하니 역으로 자신이 그렇게 선수를 끌고 다니고 타 선수들에게 공격 기회를 만들어주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