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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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3년까지 포인트 가드로 활동한 샌프란시스코 출신 전 NBA 선수. 존 스탁턴의 그늘에 갇힌 은근 콩라인.(통산 어시스트 2위, 통산 스틸 2위, 포인트 가드 기준 트리플 더블 3위) 하지만 그 또한 전설에 남을 선수임에는 분명하다.
2. 커리어
2.1. NBA 데뷔 이전
데릭 지터처럼 흑인-백인 부부의 혼혈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흑인이고 어머니가 아일랜드계통.[2] 어렸을 때, 동네에서 선배 게리 페이튼과 1on1을 하면서 농구실력을 키웠다. 그 때부터 게임을 보는 시야와 수비실력, 패싱 스킬을 연마해왔고 이후 UC 버클리에 진학하여 2년 동안 평균 14.9점, 8.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대학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후 1994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1라운드 2순위로[3] , 댈러스 매버릭스에 지명된다.
2.2. NBA 시절
2.2.1. 댈러스 매버릭스 1기 시절
댈러스는 제이슨 키드의 합류로 자말 매쉬번, 짐 잭슨 등 '3J'로 불리는 촉망받는 신예들을 모아놓은 전도유망한 팀이 되었다. 루키 시즌에 키드는 79경기에 출전하여 평균 11.7점, 7.7어시스트, 1.9스틸을 기록하며 그랜트 힐과 함께 그 해 공동 신인왕에 선정된다. 그러나 필드골 성공률이 38.5%, 3점슛 성공률이 27.2%에 그쳐 점프슛을 의미하는 알파벳 'J'를 뺀 'Ason Kidd'라는 좋지 못한 별명을 얻고 만다.
1995-96 시즌에 키드는 평균 16.6점 9.7어시스트 2.2스틸을 기록하며 향상된 모습을 보여줬지만, 팀의 현실은 시궁창, 26승 56패의 저조한 성적을 보이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다. 특히 이 시즌에 키드는 총 328개의 턴오버를 범하며 전체 턴오버 부문 1위에 오르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턴오버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4] 그리고 경기장 밖에서는 유명 흑인 여가수 토니 브랙스턴을 사이에 두고 팀 동료 짐 잭슨과 삼각관계가 되는 바람에 더욱 더 안좋은 방향으로 이슈를 생산하고 말았다.
2.2.2. 피닉스 선즈 시절
1996년 12월 26일 제이슨 키드는 샘 카셀,마이클 핀리,AC그린과의 3:3 트레이드로 피닉스 선즈로 이적했다. 1997-98 시즌에 82게임 전경기를 38분의 시간 동안 활약하여 평균 11.6점, 9.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998-99 시즌에는 평균 41.2분을 뛰면서 16.9점, 10.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생애 처음으로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하고 어시스트 왕에 오른다. 이후 00-01시즌까지 피닉스 선즈에서 세 차례나 평균 어시스트 부문 1위에 오르는데 이는 각 시대의 전설적인 가드들인 밥 쿠지, 오스카 로버트슨, 존 스탁턴에 이은 4번째 기록에 해당된다. 그러나 서부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샌안토니오 스퍼스 등의 강팀들 속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것은 쉽지 않았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때 드림팀 4기 주장으로서 금메달을 따냈으나, 2001년 1월에 아내 주마나에게 가정폭력을 행사한 게 언론에 알려져 파문이 일었고, 인터넷 토론방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기자들조차 "선수로서의 키드에 매력을 못 느낀다"고 보도할 정도로 이미지는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심지어 플옵에서도 신흥강호 새크라멘토 킹스에게 스윕당한 후 제리 콜란젤로 구단주가 이미지 쇄신을 위해 스테판 마버리와 맞바꿔 뉴저지 네츠로 트레이드시켰다.
2.2.3. 백투백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 뉴저지 네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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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올 당시 팀에는 전체 1번 출신의 넘버원 속공 피니셔 캐년 마틴과 다재다능한 공격수 리처드 제퍼슨, 경험이 많은 케리 키틀즈 등의 선수가 포진되어 있있으나, 팀은 1990년대 초반 잠깐 반짝한 걸 빼곤 줄곧 중하위권이었으며 동부 컨퍼런스의 대표적인 부상병동이었다.
키드는 팀 선수들을 다독여 건강을 되찾게 해 줬고, 그는 평균 14.7점, 7.3리바운드, 9.9어시스트, 2.2스틸을 기록했다. 정규시즌 MVP 투표에서 팀 던컨에 밀려 아쉽게 MVP에 선정되지 못했지만 52승 30패의 성적으로 약체였던 뉴저지를 동부지구 1위에 올려 놓는다. 그 해 플레이오프에서 인디애나, 샬럿, 보스턴을 내리 격파하고 NBA 진출한 후의 네츠 역사상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했지만...상대는 NBA의 지배자였던 샤킬 오닐과 리그 최고의 슈팅 가드로 발돋움하던 코비 브라이언트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결국 코비-샤크의 벽에 막혀 4:0으로 깔끔하게 스윕당하며 아쉬운 준우승에 그친다.
다음해 2002-03 시즌에 키드는 평균 18.7점, 8.9어시스트, 2.2스틸을 기록하였다. 득점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었고, 어시스트왕의 자리를 재탈환하였다. 뉴저지의 성적은 49승 33패로 당시 2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밀워키, 보스턴, 디트로이트를 물리치고 2년 연속 파이널에 진출하지만, 이번에 만난 상대는 팀 던컨의 샌안토니오 스퍼스 였다. 4차전까지 2승 2패로 선전했으나, 이후 내리 2연패하며 2년 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파이널 평균 19.6점을 기록했으나 빛이 바랬다.[5]
한편 2004년에 뉴저지로 이적한 빈스 카터와 함께 키드는 새로운 삼각편대를 형성하며 백코트 오펜스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고질적인 골밑 불안으로 팀 성적은 마틴이 있을 때 만큼 안정적이지 못하였다. 당시 팀 리바운드 1위를 키드가 할 정도로 이 당시 키드는 혼자서 리바운드를 잡고 속공 패스를 뿌리는 괴물같은 모습을 선보이곤 했다.[6] 당시 카터, 제퍼슨과 함께 수많은 앨리웁 영상을 찍어내던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그러나 2005-2006-2007 플레이오프에서의 계속되는 탈락으로 한계가 보이자, 키드는 2008년 2월 19일에 자신의 신인 시절을 함께 했던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적한다.
2.2.4. 댈러스 매버릭스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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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적할 당시, 그의 한국나이는 36살로 예전의 스피드를 보일 수 없는 상태였고, 득점력도 이전만큼 못하였다. 그러나 키드의 패싱 센스와 코트비전은 여전하였다. 서부컨퍼런스는 우승을 노리기엔 경쟁자들이 치열한 곳이지만, 그 중 댈러스 매버릭스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함께 2000년대 들어 우승 후보로 꼽히는 팀 중 하나였다. 그리고 10-11시즌에 그들에게 기회는 찾아온다. 이 시즌에 키드는 덕 노비츠키, 숀 매리언, 타이슨 챈들러, 캐런 버틀러, 제이슨 테리 등의 선수들과 함께 플레이를 하였는데, 짧은 출전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리더로서 노비츠키와 함께 팀을 이끌었다. 57승 25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고 플레이오프에 진출. 첫 상대인 포틀랜드를 4승2패로 꺾고, 전 시즌 우승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4승으로 스윕했다[7] . 서부 파이널에서 케빈 듀란트의 오클라호마를 4승 1패로 꺾고 만난 최종 상대는 마이애미 히트. 오프 시즌에서 'The Decision'이라는 쇼를 벌이며 합류한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쉬가 건재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키드는 르브론이나 웨이드와의 매치업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중요한 순간마다 3점슛을 꽂아넣으며 데뷔한지 17년 만에 '''첫 우승'''에 성공했다.
2012년 시즌에는 만 39세의 나이로 활동했는데 그와 드래프트 동기중 현역으로 뛰는 선수는 키드 바로 다음에 뽑힌 그랜트 힐(現 애틀랜타 호크스 공동 구단주)과 전체 5순위로 뽑힌 주완 하워드(現 미시간 대학교 감독) 둘 뿐이며[8] 드래프트 동기인 몬티 윌리엄스는 지금 뉴올리언스 호네츠의 감독이다. 나이로 구분할 경우 위의 2명보다 생일이 늦어서 NBA 전체에서 4번째 최고령이다. 그랜트 힐이 1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센터 커트 토마스가 2위, 주완 하워드가 3위, 키드가 4위이다.
디펜딩 챔피언 댈러스는 우승의 주역이었던 타이슨 챈들러와 J.J. 바레아를 보내고 라마 오돔과 빈스 카터를 영입하면서 다시금 패권에 도전하였지만, 오돔이 핵돔, 독돔이 되면서 씹망... 그래도 간신히 서부 7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상대는 득점왕 케빈 듀란트가 버티는 오클라호마 시티. 4:0으로 손쉽게 스윕당하면서 시즌을 마친다.[9]
2.2.5. 뉴욕 닉스 시절
2012년 7월 6일, FA자격이었던 키드는 뉴욕 닉스에게 3년간 9m의 금액을 받고 뉴욕으로 가게 되었다. 배런 데이비스나 마이크 비비보다 훨씬 나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뉴욕 팬들은 기대하고 있다. 카멜로 앤서니와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타이슨 챈들러와의 호흡이 기대된다. 제레미 린만 남는다면, 그의 좋은 멘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허나 제레미 린은 떠나버리고 레이먼드 펠튼이 대신 자리를 차지한 상황.
2012-13 시즌 올스타전 이전까지만 해도 뉴욕의 '''상승세'''를 이끄는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체력이나 피지컬은 많이 약해졌지만 특유의 농구센스와 스틸감각, 3점슛은 살아있었다. 허나 올스타전을 전후로 펠튼, 캠비, 쉬드, 멜로, 아마레, 챈들러 등 팀의 주요선수들이 부상으로 골골대며 승패를 반복하고 있는 실정.
2013년 2월 19일부로 통산 12000 어시스트를 돌파하였다. 뉴욕 닉스가 동부컨퍼런스에서 2위를 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 1라운드 상대인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 올라갔으나 2라운드 상대인 인디애나 페이서스전에서는 시리즈 내내 무득점으로 부진하면서 팀도 탈락했다.
2013년 5월 1일부로 NBA Sportsmanship Award[10] 를 작년에 이어 2회 연속으로 수상하였다. NBA에서는 최초.
신인왕 동기 그랜트 힐 은퇴 이후 키드 역시 2012-13 시즌이 끝나고 은퇴. 그리고 은퇴하자마자 브루클린 네츠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뉴저지 네츠 시절 활약을 인정받아 브루클린 네츠에서 키드의 번호인 5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10월 17일 마이애미 히트와의 프리시즌 경기에서 결번식을 할 예정.
3. 기록
키드의 통산 필드골 성공률은 딱 40.0%로 2000년대 포인트 가드 라이벌이라 불리는 스티브 내쉬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편. 커리어 하이 야투율이 .444로 4할 5푼이 안된다. 그래도 꾸준히 폼을 교정하며 노력한 끝에 3점슛 성공률은 통산 34.9%까지 올렸고 마찬가지로 세트슛으로 던지는 자유투 성공율 역시 .785로 나쁘지 않은 편. 커리어 후반 댈러스 시절부터는 2점슛 시도보다 3점슛 시도가 많다. 댈러스에서는 전문 3점슈터 수준인 4할 이상의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11]
통산 어시스트는 12,091개로 존 스탁턴에 이어 2위. 통산 스틸 역시 2684개로 존 스탁턴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리바운드 역시 뛰어나서 평균 6.3개, 통산 8,725개로 통산 리바운드 순위 59위에 랭크돼 있다. 왠만한 파워포워드들과 통산 수치가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키드의 가장 위대한 점은 현역으로서 유일하게 '100개'의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사나이라는 점이다. 107개의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키드는 오스카 로버트슨(181개)과 러셀 웨스트브룩, 매직 존슨(138개)에 이어 역대 4위에 위치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통산 17000득점 - 12000어시 - 8500리바 - 2600스틸'''을 돌파한 NBA 역사상 유일한 선수이자 역대 3위에 위치한 트리플더블러이면서, 통산 1950개 이상의 3점슛을 성공하여 알렌과 밀러에 이어 역대 3위에 위치한 3점슈터. [12]
4. 플레이 스타일
'''퓨어 포인트 가드의 정석'''[13] 이며 자신을 제외한 코트 위에 있는 4명의 선수들의 힘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데뷔초반에는 화려한 패스를 많이 보여주었으나 그에 따라 실책도 많은 편이었다. 커리어가 쌓이면서 간결하고 실책이 없는 패스를 많이 했다. 데뷔때부터 은퇴까지 야투율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던지기보다는 돌파나 어시스트에 능수능란했다.
속공은 물론 하프코트 오펜스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최대 장점은 뉴저지 네츠시절 극대화 되었던 속공 전개능력. 잘달리는 포워드, 속공 피니셔가 있으면 그의 패스가 극대화 된다. 만년 하위를 예약해 놓던 뉴저지네츠(現 브루클린 네츠)에 제이슨키드라는 선수 단 한명이 가세한 것만으로 바로 NBA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 것만 봐도 그의 위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전술이해도가 뛰어나고 농구를 영리하게 할 줄 안다. 전성기 시절에 게임 당 앨리웁 패스를 몇 개씩 성공시킬 정도로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주로 돌파에 이은 득점보다는 패스를 선호하는 편이다. 초창기 매버릭스 시절과 전성기 시절엔 간간히 빠른 스피드로 드라이브인 득점을 하기도 했다. 키드의 뛰어난 코트비젼은 공격은 물론 수비에서도 빛을 발하여 상대의 패스길을 읽고 스틸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특히 트리플 더블 머신이라는 별명답게 가드, 3점슛을 많이 던지는 선수임에도 리바운드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는데, 이는 193cm 95kg이라는 포인트 가드치고는 매우 크고 묵직한 체격인 덕에 동포지션 선수와의 몸싸움대결에선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포인트가드들이 포스트업 플레이를 즐기는 경우는 드문데 제이슨 키드에게 있어서는 패스/돌파/점퍼 말고도 포스트업이라는 또 하나의 옵션이 있으니 상대팀에서 수비하기 까다로운 선수였다. 리바운드가 뛰어난 이유는 1번치고 큰 키뿐만아니라 노골되어 튕긴 공의 낙하지점을 재빠르게 포착해 걷어내는 판단력과 부지런함을 갖췄기 때문이다. 뉴저지 시절 팀내 평균리바운드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리바운드가 많은 덕분에 공격 속도가 타 가드보다 훨씬 빠르다. 공격 전개를 위해 리바운드를 잡은 같은 편 선수가 공을 줄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됐었기에. 수비역시 수비 전술이해도가 뛰어나고 포인트 가드 중에서는 뛰어난 피지컬을 이용하는 수비를 하고 패싱레인을 읽는 눈이 탁월하다. 2번 선수들 막는데도 피지컬 적으로 문제가 없어 상대팀 2번이 1번보다 더 뛰어나면 2번을 수비하기도 한다. 스틸이나 턴오버유도기술도 수준급.'
단점은 앞에서 주구장창 설명했듯이 슛. 상대 수비와 1:1에선 자기가 직접 찬스를 만들어 슛하는 경우가 없었다. 주로 받아먹기식 슛밖에 안 던졌는데 가끔씩 컨디션 좋을때 묻지마 3점을 던지는 버릇이 있을 정도로 3점을 많이 시도하는 편이다. 한 때 자유투라인에서 골대를 향해 손키스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선수 생활 초기에는 "Ason"이란 별명답게 슛이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으나 나중에 피닉스로 이적한 이후 점점 괜찮아졌고 결국 80% 정도의 확률높은 자유투 성공률을 갖추게 된다. 통산 자유투 성공률은 약 78%. 이 단점이 좀 치명적이 됐는지, ESPN의 평가에서는 내쉬에게 밀렸다.
예로부터 레전드 포인트가드들을 보면 절대다수가 수준급의 공격능력을 지녔었다. 역사상 최초로 리그를 지배하는 수준의 포인트가드였던 밥 쿠지는 최정상급의 어시스트능력(8연속 어시스트왕으로 스탁턴에 이어 역대 2위)과 더불어 통산 18.4점에 달하는 뛰어난 득점력을 지녔었고, 오스카 로버트슨은 아예 전성기에 30점을 넘길 정도로 트리플더블 머신, 월트 프레이저 역시 통산득점이 20점에 가까웠다. 마크 프라이스는 저질 운동능력을 커버하는 정밀한 슈팅력의 소유자였으며, 아이재아 토마스는 파이널 한 쿼터에 25점을 넣을 정도였고, 존 스탁턴은 패스 우선시인 본인 성향상 득점 수치는 낮지만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유타의 클러치 타임을 전담했으며 PG로선 당대 최고 수준의 공격스킬을 모두 갖고 있었다. 찰스 바클리와 피닉스를 이끌었던 케빈 존슨 역시 20점 10어시스트를 넘긴 시즌이 여러번 있을 정도니, 득점기술이 빈약하면서도 역대급 PG가 된 키드가 예외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레전드 PG 중에 키드에(통산 12.6점, 커리어하이 18.7) 비견될만한 빈약한 득점력을 가진 선수는 시애틀, 보스턴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니스 존슨 정도(통산 11.8, 커리어하이 19.5)인데 존슨은 무려 9차례나 올디펜스 팀에 오르는 수비 스페셜리스트에 가까웠다. 심지어 역대 PG중 최고의 수비수라고 할법한 게리 페이튼조차 커리어하이가 무려 24.2점에 7시즌이나 평균 20점을 넘겼다. 즉, 슛의 중요도가 커진 것은 현대농구에 들어서지만, 예나 지금이나 PG들이 수준급의 득점력은 필요했다는 것. 당연한게 PG가 아예 득점력이 없다면 수비를 몰고 다른 곳으로 패스를 해주는게 의미가 없다. 슛이 빈약하지만 그나마 포스트업을 득점을 해줄 수 있는 키드 (비슷한 케이스로 슛은 없지만 골밑돌파가 위력적이었던 라존 론도)였기에 평균 이상 득점력으로 위력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키드가 그만큼의 득점력이라도 없었다면 아무리 패싱력과 게임조립 능력이 좋아도 반쪽짜리 선수로 전락했을 것이다.
5. 지도자로 새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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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3일 부로 브라이언 쇼와의 경쟁 끝에 결국 네츠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선수를 바로 감독으로 선임한 예는 거의 손꼽을 정도라.. 상당히 이례적인 케이스긴 하다. 과연 선수시절 네츠를 잘 이끌었던 것처럼 감독으로서도 잘 이끌지...?
일단 11월 말 까지는 팀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슈퍼스타급으로 평가받던 선수들이 부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초보감독으로서 제대로 된 지휘를 아직 하고는 있지 못하다는 평. 게다가 한국 기준 11월 28일 LA 레이커스와의 홈경기에서 브루클린 네츠의 타이슨 테일러에게 고의로 밀치게 해 음료를 쏟게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타이션 테일러가 가는 중 키드가 'Hit me'라고 말했기 때문에 사실상 고의로 한것이라고 팬들과 언론 모두 짐작하고 있다.[14] 결국 벌금 5만 달러를 냈다.
결국 시즌 중 감독급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로렌스 프랭크[15] 를 해임하는 등 내홍이 있었는데, 그 뒤로 팀이 정신을 차렸는지 페이스를 회복하며 44승 38패로 동부지구 6번시드를 따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성공했다. 그리고 오프시즌, 1시즌밖에 경험하지 않은 초짜 감독 주제에 구단 운영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다 거부당하고, 이에 밀워키 벅스 감독자리로 이직하게 되었다. 밀워키의 구단주와 친분이 있는 사이라 으리로 얻어낸 감독직이 아닌가 하고 말이 많다.
그러나 정작 밀워키 벅스에선 많은 선수층을 바탕으로 칼같은 로테이션을 돌리면서 5할 이상의 승률을 거두고 있다... 2017시즌의 벅스는 2라운드 36순위에 득템한 가드 말콤 브록던, 수비 커맨더 크리스 미들턴과 루키 센터 쏜 메이커, 에이스 쿤보등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긴팔 수비수 집단으로 운동능력과 지능적 협력수비를 구성해 젊으면서도 유니크한 팀을 구성해 미래가 기대되는 팀을 만들었다.
그리스에서 온 괴인 야니스 아데토쿤보는 NBA에 처음 왔었을 때 자기를 벤치멤버로 보낸 키드 감독에게 화가 나서 당신은 프로 때 얼마나 잘했나보자! 라는 심정으로 키드의 기록을 봤다가 데꿀멍했다고 한다.(...) 지금은 키드의 지도 아래 크게 성장하고 있는 중.
현지시간으로 2018년 1월 22일에 제자리걸음인 성적과 선수 혹사를 이유로 전격 경질당했다. 키드 본인도 제자리걸음인 성적 때문에 압박을 받았는지 로테이션을 칼같이 돌리던 부임 초기와 달리 17-18 시즌은 주전 선수들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결국 감독 커리어를 내려놓고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영입되었다. 감독으로서 뚜렷한 커리어가 없고 특별한 강점을 보여주지도 못했던것이 감독 키드의 실패 요인으로 보인다.[16] [17]
6. 여담
- 여자 관계에서 말이 많은 인물이기도 한데, 1994년 UC버클리 시절 프로 데뷔를 앞두고 한 여성으로부터 키드에게 폭행당했다고 고소를 당해 이미지가 깎였고, 댈러스 시절 전술한 토니 브랙스턴 삼각관계로 논란이 된 후 1997년에 주마나 메리 샤마하와 결혼해 1남 2녀를 뒀으나, 2001년에 말다툼을 하다 가정폭력을 행사해 이미지가 나빠져 벌금 200달러를 냈고, 이후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2007년에 이혼했다.[18] 2011년 9월에 모델 출신 포르슐라 콜먼과 재혼했다.
- 자유투 루틴으로는 키스를 날리는 버릇이 있다. 위 영구결번 사진이 해당 루틴이다.
7. 관련 문서
8. 참고 문헌
- I LOVE NBA - 손대범 저. 루키. 2004. p385~386.
[1] 맨발 신장 6' 2" = 188cm, 착화 신장 6' 4" = 193cm[2] 사진상으로 신인때부터 명백하게 백인처럼 보였으나 본인의 정체성은 흑인이었다. 타이거우즈가 한때나마 자기를 전혀 흑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점과 정반대[3] 이때 전체 1순위는 Big Dog이란 별명을 가진 글렌 로빈슨이었다. 로빈슨은 훗날 올스타에 두 차례 뽑히는 등 준수한 커리어를 보내지만 그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건 데뷔도 안한 신인 주제에 94년 기준으로 전례가 없던 계약기간 13년, 총액 1억달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경기도 안 뛴 새파란 애송이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인 마이클 조던, 샤킬 오닐, 하킴 올라주원도 못 받은 연봉을 달라고 한 것. 결국 그는 10년 6천8백만달러에 계약을 하는데 이는 신인이 맺은 계약으로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으며 이후 NBA가 루키스케일(모든 신인들이 지명순위에 따라 고정된 액수에 계약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받는 1순위의 연봉이 3백만달러가 조금 넘는다. 1라운드 지명자는 최소 3년 계약에 팀 의향에 따라 동일한 조건으로 1년 연장 가능)을 도입함에 따라 당연히 로빈슨보다 큰 규모의 계약이 규정이 바뀌지 않는한 다시는 못 나오게 된다.[4] 말년에 다시 턴오버가 잦아지고 있다.[5] 03년도 팀 던컨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득점, 리바, 어시, 블락 네 부분에 있어서 팀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그의 상대였던 키드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 2승이라도 한게 기적. 특히 마지막 6번째 경기에 21점 20리바운드 10어시스트 8블락이라는 쿼드러플 더블에 가까운 스탯을 찍어버리니... [6] 팀에 있던 빅맨들이 하나도 도움이 안 되었다. 한 때 모닝과 무톰보가 머무르던 시절도 있었지만 부상과 트레이드로 별 도움이 못되었고, 이후 샤리프 압둘라힘, 네나드 크리스티치, 미키 무어, 제이슨 콜린스 등 키드의 레벨을 받쳐줄 선수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7] 사실 2011년 댈러스는 우승은 커녕 2라운드에서 레이커스에게 져서 탈락할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예상이었기 때문에 스윕은 상당히 충격적인 결과였다. 심지어 댈러스를 응원하던 팬들에게도...[8] 그나마 주완 하워드는 거의 출장을 안(못)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키드와 힐 2명이라고 봐도 무방. 공동으로 신인왕 타더니 말년까지 비슷하게...[9] 1차전에서 케빈 듀란트의 마지막 역전 샷이 들어가면서 99:98로 패한게 컸다. 그 샷만 아니었으면 시리즈가 이렇게 쉽게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10] 조 듀마스 트로피라고도 불린다. 스포츠맨십이 뛰어났던 조 듀마스를 기리면서, 한 시즌 동안 스포츠맨십이 뛰어난 선수를 '''동료 선수들의 투표'''를 통해 선발한다.[11] 다만 말년의 키드는 무리한 슛을 절대 던지지 않을 정도로 신중한 슛셀력션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이 수치엔 약간 거품이 있다. 실제로 매버릭스 시절에도 그를 다소 섀깅했을 때는 3점 성공률이 좋지 않은 경기도 있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 수준이지 4할 이상 성공률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긴 무리. 비슷한 케이스가 바로 브루스 보웬으로 보웬의 슈팅력은 외곽선수로서 평균 이하였지만, 지능적으로 NBA 원래 3점슛 거리보다 1미터 가까이 짧은 양 사이드에서만, 그것도 수비가 없을때만 노려서 쏴서 4할이 넘는 높은 성공률을 기록했다. 게다가 키드나 보웬같은 선수들은 슛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수비가 약간 헐겁다는 점도 있다. 물론 자유투도 잘 못 넣는 보웬보다는 키드의 슈팅력이 훨씬 뛰어나긴 했다. 포인트는 3점슛 4할 슈터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12] 2019년 현재는 스테판 커리에 의해 이 기록은 깨진 상태.[13] 득점보다 어시스트나 스틸등 포인트가드 본연의 임무를 중시하는 포인트 가드. 현역 선수 중에서는 크리스 폴, 라존 론도 등이 대표적이다.[14] 이렇게 한 이유는 네츠가 타임아웃을 모두 썼기 떄문. 음료를 쏟게 되면 바닥을 닦기 위해 경기가 잠시 중단될 테니 그 사이에 빠르게 작전지시를 한다는 기책이자 꼼수였다.[15] 뉴저지 네츠 시절 키드를 감독하기도 했다.[16] 게다가 키드가 물러나자마자 벅스는 정규시즌 1위에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17] 레이커스의 입장은 론조 볼을 보다 더 훈련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인 듯하다. 그러나 볼은 트레이드되어 팀을 나갔다.[18] 위에 나온 키스를 날리는 사진은 이혼 전까지 그가 매번 자유투마다 하던 세러모니로 부인을 위해 한 것. 이혼 전에 나온 게임 중 NBA 라이브 2007같은 경우 이 세러모니가 나온다. 당연히 이혼 이후엔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