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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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정치인. 현 노무현재단 이사, 노무현시민학교 교장, 노무현시민센터 건립추진위원장
노무현 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대표적 친노계 참여계 정치인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3대 요직인 국정상황실장, 의전비서관, 대변인을 모두 역임했다. 이후 국민참여당 최고위원, 정의당 대표를 역임하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같이 근무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문재인이 있는데, 당시 청와대에서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문재인과 천호선은 직책상 함께 일해야 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전혀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친노 참여계 정치인이며, 노무현재단 이사를 맡고 있지만, 노무현 사망 10주년을 맞아 이제는 노무현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때라고 말하야 친노계에 파문이 일기도 했다.
2. 생애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언론 기사마다 상충되는 내용이 많다.
1962년 서울특별시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친가, 외가 모두 '''서울토박이'''임을 강조한다. 아버지가 대기업에 다녔기 때문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환일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성적이 안 나오며 점차 방황하였다고 한다. 대학 진학은 스스로도 매우 운이 좋았다고 말하였는데, 당시 밑져야 본전이어서 연세대에 엄청 상향 지원해서 원서를 썼는데,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만 합격하고 나머지 대학은 다 떨어졌다고 한다.
고교 시절 국어교사의 영향으로 사상화되기 시작했으며, 대학시절 운동권 지도부로 활동했다. 당시 운동권 지도부가 으레 그렇듯 감옥을 갈 것을 염두에 두고 애초에 군대는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졸업이 다가오는데도 정작 투옥이 안 돼서 결국 군대에 가야 하나 걱정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데모에 나섰을 때 기적처럼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감옥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아 운좋게 학원 자율화 조치로 4개월만에 석방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덕분에 짧은 감옥 생활을 하고도 군대에 가지 않는 1석2조의 혜택을 누리고 87년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운은 나중에게 그에게는 독이 되었는데 6월 항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졸업했기 때문에 이후 운동권 출신으로서 가장 큰 훈장을 달 기회를 놓쳐버리게 된 것. 실제로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바로 아래 운동권 후배들이 나중에 대거 정치계 거물로 성장했지만 그에 비해 천호선은 정치가로서 상대적으로 흐지부지한 경력을 쌓아갔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운동권을 하다가 졸업 후에는 노동운동을 할 것이라고 진로를 정해두고 있었고, 대학 졸업 후 87년 럭키금성 비디오 테이프 공장에 취업했다. 본인은 위장 취업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써클의 선배의 아버지가 장관을 지낸 권력자였고 그 연줄로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쟁의에 가담해 해고당했다. 학생운동 시절에 비하면 아직은 신입이라 노동쟁의의 핵심 주동자는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옥 경력 때문에 쉽게 정체가 파악되었다고 한다.
이후 1991년 수원 혹은 강남[1] 에서 중3·고1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 학원강사로 일했는데, 한때 수강생 600명을 보유한 자칭 스타강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인터뷰를 보면 사실은 처음에는 비인기 강사였다고 한다. 회사에서 잘린 후 인맥을 써서 대형학원 단과반 강사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까는 좋았는데, 사실 강사로서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다가 2명만 남게 되었고, 어느날 출근해보니 강의가 폐강되었고 교무실에 자신의 책상이 없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 다른 학원에 다시 취업하여 인기 강사의 팜플렛을 따라 자신의 얼굴이 나온 홍보 팜플렛을 세련되게 제작했는데 덕분에 학생들이 몰려 순식간에 600명의 학생을 거느린 강사가 되었다고 한다. 연봉도 상당히 좋아졌다고 한다.
한편 그의 아내 이원희는 이광재의 후배였고 그 인연으로 이원희는 노무현 의원실에서 인턴 비서로 일했다고 한다. 이 인연으로 1988년 12월 노무현 의원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했다고 한다. 천호선은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면서 노무현을 실제로 처음 보았다고 한다. 당시 노무현이 청문회 스타로 뜬 직후여서 하객들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주례 내용은 기억 안나지만 무척 길었다고 한다....
학원 강사를 시작한지 몇 개월 만에 때려치고 이광재의 추천으로 1991년 노무현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기사 하지만 1년 후 노무현이 낙선했고, 유인태 의원 보좌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후 2002 대선 때까지 노무현과는 10년간 인연이 없었다고 한다.
유인태 의원이 내무위 소속이었기 때문에 지방자치제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이에 대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민주당에서 386의 기초의원 출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지방자치 실시 초기 민주당이 선거에서 성과를 낸 것에 자신의 공이 컸다고 자평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부대변인을 역임했다. 하지만 나중에 노무현의 사람이 되고 나서는 자주 김대중의 제왕적 정치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본인이 훗날 민주당이 아닌 정의당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도 근원은 김대중 정치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라고 말했을 정도.
2000년 그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이를 정치와 접목시키려 했다. 정치 사이트인 이윈컴닷컴(eWincom.com)을 기획했고, 이후 정치 여론조사 사이트인 보트코리아(votekorea.net)를 운영했다.
2002 대선 때 노무현 후보의 캠프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노무현은 천호선이 인터넷이라는 신 매체, 특히 인터넷 여론조사에 해박하다는 점을 높이 샀던 모양이다. 천호선은 노무현 후보의 인터넷 정치 홍보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때문에 노무현 캠프 출신들에게 그는 '천 사장님'이라 불린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정권 내내 대통령비서실에서 줄곧 근무했다. 인터넷 여론조사에 능했기 때문에 청와대 국민참여수석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후 청와대 3대 요직을 두루 거치고, 마지막으로 청와대 대변인을 맡아 친노들에게는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대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당시 이광재 의원의 철도공사유전사업 의혹을 고의 은폐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열린우리당이 망한 이후 민주당계 정당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가, 노무현 자살을 계기로 국민참여당 창당에 참여해 최고위원과 서울시당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2010년 7.28 재보선에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 민주노동당 - 국민참여당의 야 3당 단일화 경선에서 민주당의 장상 후보에게 패배해 사퇴했다.
진보신당 탈당파(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이 합당하여 출범한 통합진보당에서 당 대변인을 맡았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은평구 을 지역구에 야권 단일후보로 재출마했다. 유시민의 그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은평 지역에 연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강북에서 가장 호남 인구 비율이 많고 전통적으로 야당 지지 성향이 강했던 은평 을 지역구를 선택하여 출마했다.[2] 하지만 출마 직전까지도 이 지역에서 활동이 전무했기 때문에 은평구의 토착 주민들에게는 거부감이 높았다. 물론 은평구는 토박이 비중이 매우 낮은 편이고 대부분이 지방 이주민 출신들로 구성된 동네이긴 하다. 결국 이 지역의 터줏대감인 이재오에게 패배했다.
2012년 5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 후 통합진보당을 탈당하고, 정의당에서 2013년 7월에서 2015년 7월까지 대표를 역임했다. 당 대표 수락연설 전문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당시 수원시 정(영통) 지역에 출마하였으나, 서울 동작구 을 지역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 기동민 후보가 사퇴하면서 노회찬 후보를 지지함에 따라, 후보를 사퇴하고 박광온 후보를 지지하게 된다.
이 기간에 박광온 후보의 딸과 함께, 둘째 아들이 트위터를 통해, 박광온 후보 딸의 SNS 응원을 벤치마킹하여, 서로 응원한 것이 화제가 되었었다. 다만, 박광온 후보의 딸의 압도적인 트잉여의 센스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을 받았으며, 후보가 사퇴함에따라 같이 활동을 중지했다. 관련 기사
20대 총선과 19대 대선에서 정의당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2019년 1월 유시민의 알릴레오 서브 코너인 '고칠레오'의 공동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3. 평가
유시민과 함께 참여계의 핵심으로 분류된다. 유시민의 정계 은퇴 이후로는 사실상 참여계의 좌장격. 정치적 성향은 유시민에 비해 진보적인 편이고, 당내 화합을 중요시했던 당 대표 시절에 보여 주었던 모습들로 타 계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편. 전반적으로 온화하고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해 당 화합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대표를 지낸 유명인사치고는 지역구 선거이력도 굉장히 안습한데, 19대 총선에서 이재오 의원에게 패배하였던 은평구 을은, 수년간 지역구를 꾸려왔음에도 불구하고 20대 총선에서는 김제남 의원에게 넘어갔고, (건강문제때문에 불출마한다고 당내에 알렸다.) 재보궐선거에서 출마하였던 수원 영통 역시 20대 총선에서는 박원석 의원이 출마하게 되었다. 본인의 사명은 새로운 진보정치인의 발굴이라고 말한다.
4. 여담
결혼식의 주례를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대 총선 당시 결혼식 장면을 활용했던 홍보영상
안면 비대칭이 있다. 특히 양쪽 입꼬리가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
무한도전 선택 2014에서 정형돈 후보를 지지했다고 한다.
5. 선거 이력
[1] 이 부분은 인터뷰마다 내용이 다르다.[2] 물론 이 지역에서 이재오가 오랫동안 국회의원을 해먹기는 했지만 이재오 본인이 원래 민중당 출신이기도 하거니와 한나라당 안에서도 항상 지도부에 대항하는 트롤짓을 벌이며 당의 분열을 조장하던 인물이었기에 호남 출신들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일부러 이재오를 뽑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3] 전임자 창조한국당 문국현 당선 무효[4] 민주당 장상 후보와 야권단일화로 인한 후보사퇴[5] 전임자 김진표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출마[6] 새정치민주연합 박광온 후보와 야권단일화로 인한 후보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