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선

 


<colbgcolor=#005BAB> '''제9 ~10대 인천광역시장
최기선
崔箕善 | Choi Gi-sun
'''
[image]
'''본관'''
해주 최씨[1]
'''출생'''
1945년 5월 15일
경기도 김포군 통진면
(現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2]
'''사망'''
2018년 2월 28일(향년 73세)
서울특별시
'''학력'''
서울 보성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 / 학사)
'''가족'''
배우자 김베로니카, 장남 최강수, 차남 최강국
'''종교'''
천주교(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3'''
'''재임기간'''
제13대 경기도 부천시 남구 국회의원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제 9·10대 인천광역시장
1995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둘러 보기
5.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2. 생애


1945년 경기도 김포군 통진면(現 김포시 통진읍)[3]에서 아버지 최중돈(崔重敦)과 어머니 안동 권씨 권순일(權順一)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보성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외환은행 인천지점에 근무하였다.
원래 정치에 입문하면서 김대중계 정치인으로 활동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김영삼의 비서를 지내서 부인의 권유로 김영삼계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공보비서를 지냈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신한민주당에서 부대변인 등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남구(경인고속도로 이남 지역)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당 박규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3년부터 관선 인천직할시장을 역임했으나 1994년 가을에 터진 북구청 세무비리 사건으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인천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자유민주연합 강우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8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는데 사실 원래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기로 했다가 자민련측의 요구로 성사된 것이다.[4] 사실 인천광역시에 충청도 출신이 많다는 이점도 있고 해서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한나라당 안상수 후보를 무난히 꺾고 연임에 성공하였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송도국제도시 개발 성사, 선인재단의 시립화, 옹진군강화군, 김포군 검단면을 인천에 편입시킨 인천 광역화가 있다.[5] 당시 인천직할시와 경기도는 협의 과정에서 인천시는 당초 김포군, 강화군, 옹진군을 요구했고 경기도는 무리하게 도역의 인천 편입을 거부함으로 부천시, 시흥시, 김포군을 뺏기지 않기 위해 옹진, 강화 등을 포기했다고 한다.
2002년, 대우자동차판매 3억원 수뢰 혐의로 기소되었고[6]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하였다. 이후로 한동안 정치 행보를 보이지 않다가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인천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안상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로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면서 현재의 더불어민주당과 노선을 같이 하였다.
관선 시장으로 1년 6개월, 민선 시장으로 8년 등 총 9년 6개월간 인천시장을 역임해 1981년 7월 인천직할시 출범 이후 역대 인천광역시장으로는 가장 오랜 기간동안 시장으로 재임한 인물이다.[7] 그만큼 이름값(?)이 제법 있어서인지,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전국적으로 열린우리당이 폭망한 와중에도 20% 넘는 득표율을 올리며 선거 비용 보전은 받아냈다.(.....)
정치 행적을 놓고 철새라는 비난이 있으나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민주자유당과 자유민주연합은 스스로의 성향과 배치되는 당이어서 애초부터 고민을 많이 해왔다고. 실제로 자유민주연합 탈당 이후의 행보, 특히 2006년 지방선거 때 사실상 몰락 징조가 보였던 열린우리당을 택한 이래 민주당계 정당의 선거 활동에 적극 참여한걸 고려하면 본인의 주장을 어느 정도 입증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2월 28일 새벽, 서울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장례는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시 남구

'''30,616 (24.82%)'''
'''당선 (1위)'''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시 남구

50,077 (34.29%)
낙선 (2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광역시장
'''383,965 (40.81%)'''
'''당선 (1위)'''
'''초선''' [8]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375,051 (53.49%)'''
'''당선 (1위)'''
'''재선'''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650 (23.58%)
낙선 (2위)


4. 둘러 보기




5. 관련 문서



[1] 현감공 각파 36세. 해주 최씨 대종회 제12·13·14대 회장을 지낸 바 있다.[2] #[3] #[4] 이로 인해 원래 자민련에 입당해 경기지사 선거에 나갈 예정이었던 임창열 전 지사가 국민회의로 가게 되었다.[5] 본인의 고향인 김포시(당시 김포군)의 인천 편입도 추진하였다. 그 결과가 '''검단의 인천 편입'''.[6]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7] 2위는 민선 3, 4기 시장으로 8년동안 재임했던 후임자 안상수.[8] 1998.04.03 한나라당 탈당, 자유민주연합 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