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터펄트 작전
1. 배경
1.1. 독일 전격전
1940년, 프랑스는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완벽하게 박살나버렸다. 훗날,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소위 '전격전'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허접하기 이를 데 없었던 독일 국방군의 작전 계획을 스스로 완성시켜 준 연합군은 도처에서 밀리고 밀리고 또 밀리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군이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고, 육군도 아라스 전차전이나 샤를 드 골 중령이 이끄는 제4기갑사단의 분투 등,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대책없이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결국 독일은 연합군 작전 계획 상의 허점을 고맙게 처묵처묵하면서 38만 명에 이르는 연합군 병사들을 됭케르크에 고립시킨다. 하지만 여기서 독일군 내부에서 의견이 갈라지는데 빠르게 공격해서 포위된 연합군을 전멸시키자는 일선 지휘관(구데리안, 라인하르트)의 의견과, 육군사령부와 야전군, 집단군 사령관들(클루게, 룬드슈테트)과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부대간의 간격을 좁히자는 의견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히틀러 또한 간격을 좁히는게 좋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에 진격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된다.
연합군은 이틈을 타서 됭케르크에 방어를 보강하는 한편 대대적인 철수, 즉 됭케르크 철수를 감행했다.
하지만 그건 영국의 사정이었고, 프랑스 측에서는 프랑코 총통의 은사였으며 당시 스페인 대사였던 앙리 필리프 페탱 원수가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이때 프랑코 총통은 "장군님, 가지 마세요. 저 자들은 자신들의 실책을 모두 당신에게 떠넘길 작정입니다. 여기에 계세요. 가시면 안됩니다."라고 간곡히 만류했지만, 페탱 원수는 "알고 있습니다, 장군. 하지만 이것이 제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라 대답하고 돌아와 임시 국가 수반이 되어서 독일과의 휴전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1.2. 프랑스 해군 함대와 영국의 곤란
그런데 영국 정부를 곤란에 빠트린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거의 멀쩡하게 남아있는 '''프랑스 해군 함대'''였다.
항복 당시, 포츠머스와 플리머스 항구에 정박한 쿠르베급 전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8척, 잠수함 약간, 그리고 소해정 및 대공함정 200척은 영국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프랑스 함대도 영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있었고, 잔 다르크급, 에밀 베르탱급도 캐터펄트 작전 바로 얼마 전인 5월 말에 브레스트항에서 영국 영향권이라고 볼 수 있는 캐나다로 탈출에 성공했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프랑스 본토의 툴롱, 알제리의 오랑 등에 영국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프랑스 함정들이 다수 정박해있다는 점이었는데, 그 중에는 최신예 전함인 됭케르크급, 리슐리외급을 비롯하여 항공기 수송함 베아른, 다수의 구축함 및 순양함이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의 나르빅 등지에서 전력이 뒤떨어지는 독일 해군 해상 함대와 교전, 쌍방의 손실은 비슷했지만, HMS 글로리어스가 '''전함의 포격에 격침당한 항공모함'''이라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는 등, 객관적인 전력 차를 생각한다면 엄청난 망신을 당한 영국은 이들 함정이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을 매우 두려워하게 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독일 해군은 그나마도 있던 수상함 전력을 거진 날려먹었지만 이들 함정을 접수한다면 단기간에 전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영국은 전 세계에 함대를 분산 배치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 상황에서 독일 해군이 통상파괴전을 기도한다면 아주아주 재미없는 상황이 벌어질 우려가 있었다.
이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인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이었다. 프랑스 전격전이 진행되면서 프랑스가 항복하더라도 영국과 함께 싸우겠다고 했다가, 이후에는 프랑스의 함정이 독일군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겠다고 했다가, 이후에는 프랑스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하겠다면서 2주에 걸쳐서 여러번 말을 바꿨다. 당연히 영국의 다를랑 제독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캐터펄트 작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1.3. 독일 해군 수상함대의 사정
'''제3제국의 서자'''로 불리던 크릭스마리네, 특히 그 중에서도 수상함대의 상황은 아주 암울하여,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원수가 "이제 우리 해군에겐 멋지게 죽는 일만 남았다."고 자조하던 개전 당시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은 '''"독일에서 날아다니는 모든 날개 달린 것은 비행기에서 새에 이르기까지 죄다 내 것"'''이라면서 뻗대던 괴링의 삽질로 지지부진한 상태였고, 베르사유 조약의 여파로 변변한 전함도 얼마 없었으며, 나르빅 전투에서 다수의 구축함과 순양함을 손실하여 그나마도 얼마 남지 않았던 수상함 세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2]
그래서 사실상 비스마르크급 전함 2척과 기존의 포켓전함 몇 척만이 이들의 주력 함정이었다. 이 상황에서 독일이 멀쩡한 프랑스 함대를 그냥 놓아 둘 생각이...
1.4.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애초에 독일은 프랑스 함대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영국이 알았다면 아주 놀랐을 노릇이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독일은 프랑스의 함정을 자군에 편입시켜 쓸 계획이 없었다.''' 휴전 조항 8조를 보면 '프랑스 함대는 지정된 항구에 집결하여 독일 및 이탈리아 해군의 감시 하에 무장 해제를 하며, 이들 함정은 전력으로 사용하지 아니한다.'고 되어있다.[3]
'''물론 독일이 진짜로 그걸 계속 지킬 가능성은 없는게 문제지만 말이다.'''[4] 이 조약을 해독한 영국 입장에서는 독일의 약속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었고, 뮌헨 협정을 어기고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이 무장 해제를 핑계로 프랑스 함대를 뺏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훗날 북아프리카 전역이 연합군의 승리로 결론나자 나머지 비시 프랑스를 통제하려 했는데 뭐를 더 말할까. 아무튼 프랑스는 독일의 요구 사항을 가능한 유리하게 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 건너편에 있어서 이런 상황을 알 수도 없었고, 밥줄이 끊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영국은 결국 지중해의 주력함들을 불러모아서 프랑스 함대를 인수, 혹은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캐터펄트 작전이다.
2. 작전 진행
영국 해군은 제임스 서머빌 해군대장의 지휘 하에 후드, 아크 로열, 레졸루션, 밸리언트 등 항공모함 1척, 전함 3척, 순양함 2척, 구축함 11척으로 구성된 'H기동부대'를 파견하여 프랑스 함대에 대한 통제를 시도했다.
다행히 포츠머스의 프랑스 함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영국 함대에 합류했지만 북아프리카 오랑의 메르 엘 케비르 항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이곳의 함대는 쟝술 제독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휴전 협상의 진행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중이었다.
서머빌 제독이야 프랑스가 독일한테 배를 넘겨주느니 차라리 자침시켜버릴 위인들임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발포를 하기 꺼려하며 시한을 연장하였다.It is impossible for us, your comrades up to now, to allow your fine ships to fall into the power of the German enemy. We are determined to fight on until the end, and if we win, as we think we shall, we shall never forget that France was our Ally, that our interests are the same as hers, and that our common enemy is Germany. Should we conquer we solemnly declare that we shall restore the greatness and territory of France.
For this purpose we must make sure that the best ships of the French Navy are not used against us by the common foe.
In these circumstances, His Majesty’s Government have instructed me to demand that the French Fleet now at Mers el Kebir and Oran shall act in accordance with one of the following alternatives;
(a) Sail with us and continue the fight until victory against the Germans.
(b) Sail with reduced crews under our control to a British port. The reduced crews would be repatriated at the earliest moment. If either of these courses is adopted by you we will restore your ships to France at the conclusion of the war or pay full compensation if they are damaged meanwhile.
(c) Alternatively if you feel bound to stipulate that your ships should not be used against the Germans unless they break the Armistice, then sail them with us with reduced crews to some French port in the West Indies — Martinique for instance — where they can be demilitarised to our satisfaction, or perhaps be entrusted to the United States and remain safe until the end of the war, the crews being repatriated.
If you refuse these fair offers, I must with profound regret, require you to sink your ships within 6 hours. Finally, failing the above, I have the orders from His Majesty’s Government to use whatever force may be necessary to prevent your ships from falling into German hands.
한역)동지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의 훌륭한 함선이 적국 독일의 손에 떨어지게 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연코 끝까지 싸울 것이며,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이 우리가 승리한다면, 우리는 프랑스가 본국의 동맹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의 국익이 본국의 국익과 동일하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공적은 독일이라는 것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의 위대함과 영토를 당신들에게 되찾아 줄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프랑스 해군의 함정들이 공통의 적에게 쓰여서 우리에게 저항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하에, 국왕 폐하의 내각(영국정부)은 본관(서머빌 제독)에게 현재 오랑의 메르 엘 케비르 항구에 주둔 중인 프랑스 함대에게 다음과 같은 절차를 제안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a) 우리와 함께 승리의 그 날까지 계속 독일과 싸울 것.
(b) 잔존 승조원들은 영국 항구로 회항하여 우리의 통제를 받을 것. 잔존 승조원들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프랑스 본국으로 송환될 것입니다.
위의 조건 중 하나를 선택하신다면, 우리는 전쟁 종결시 함정들을 돌려드리거나 피해를 입은 함정들에 대한 응당의 보상을 해드릴 것입니다.
(c) 만일 귀하께서, 독일이 휴전 협정을 파기하지 않는 이상 이 함정들이 독일에게 저항하는 데에 쓰이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서인도 제도에 있는 몇몇 프랑스 항구로 함대를 보내어 이들이 우리 함대의 감독 하에 무장해제를 한 다음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의해 보관을 받을것. 승조원들은 프랑스 본토로 송환될 것입니다.
귀하가 6시간 이내에 확답을 주지 않는다면, 본관은 깊은 슬픔과 후회를 안고서 귀하께 귀하의 함대를 격침시키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만일 이 모든 요청을 거부하신다면, 본관은 국왕 폐하의 내각으로부터 귀하의 함대가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을 통보드립니다.
-서머빌 제독이 쟝술 제독에게 보낸 통지.
문제는 쟝술 제독이 위의 선택지 중 3번째, 그러니까 서인도 제도에 가서 무장해제를 한다는 선택지를 상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국에게 함대를 넘기든지, 싸우든지 선택지 2개만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쟝술 제독에게는 '적'에게 함대가 빼앗길 것 같으면 미국으로 도망가라는 명령이 있는 상태였는데, 물론 '적'은 독일군을 의미했지만 명령을 잘 해석하면 양측 모두 타협의 여지가 남아있는 상태였다. 쟝술 제독은 여기서 또 문제를 일으켰는데, 영국은 프랑스어 구사자인 아크 로열의 함장 홀랜드 대령을[5] 보냈는데, 고위 장성을 보내지 않았다고 빡쳐서 Bernard Dufay 대위를 보내서 대신 협상하게 했다. 원래 기한인 오후 3시로부터 45분 전에서야 겨우 홀랜드 대령을 만났는데, 발포하기 꺼려했던 서머빌 제독은 기한을 오후 5시 30분으로 연장했다. 하지만 쟝술 제독은 영국이 발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고, 계속 시간을 끌었다. 프랑스의 지원함대가 툴롱항에서 오고있다는 첩보를 받은 가운데, 결국 홀랜드 대령은 오후 5시 25분에 메르 엘 케비를 떠났다.
한편 별도의 함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커닝햄 제독은 그 곳의 프랑스 함대를 이끄는 고드프루아 제독과의 협상에 성공하여 모든 프랑스 함정에서 연료를 뽑아내고 함포의 중요 부품을 들어내서 폐품으로 만들어, 사실상 무장해제를 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사실 영국령 이집트라는 공간적 한계상 저항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프랑스령 알제리에 있던 이들과는 제반조건이 달랐던 것.
3.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날강도가 되다
결국 오후 5시 54분, 영국 함대는 발포를 시작했다. 전함 브로타뉴는 탄약고에 직격당하여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는데, 이에 서머빌 제독은 선원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잠시 발포중지를 명령했다. 쟝술 제독은 고민 끝에 모든 함정을 해상에서 무장해제하겠다고 응답했지만, 서머빌 제독은 프랑스가 함선을 당장 자침하지 않으면 발포를 이어가겠다고 답신했다. 스트라스부르는 브로타뉴의 폭발으로 일어난 연기를 이용하여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를 뒤늦게 발견한 후드와 여러 호위함들이 쫓아갔지만, 작은 어뢰정인 Louis Frossard이 혼자서 돌격하여 어뢰 2발을 발사했다. 이를 회피하기 위하여 후드를 위시한 영국함대 함선들은 변침해야 했고, 이 분전 덕분에 스트라스부르는 도망칠 수 있었다. 놀랍게도 Louis Frossard는 피해 없이 항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느닷없는 공격을 받은 프랑스 함대도 반격에 나섰고, 결국 '''트라팔가르 해전 이래 135년만에 처음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해상전이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패전 직후의 상황에서 갑자기 항구 안에 있는 상태로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메르 엘 케비르의 프랑스 함대는 다수가 격침당했다. 전함만 따져봐도 브르타뉴가 격침당하고 뒹케르크와 프로방스는 대파되어 해저에 처박히고 말았다. 순양전함 스트라스부르를 위시한 몇 척의 순양함만이 간신히 탈출하여 툴롱으로 향했다. 카사블랑카에 정박 중이던 장 바르는 다행히 화를 모면할 수 있었고, 7월 8일에는 또 다른 항공모함 HMS 허미즈에서 이함한 페어리 소드피시 뇌격기 부대와 어뢰정이 다카르에 정박 중이던 리슐리외에 공격을 가하여 대파시켰다.
서인도 제도의 함정들은 미국의 협력을 얻어서 무력화시켰다. 임무를 끝낸 H기동부대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4. 결과
영국 국민들은 '간만에 정부가 한 건을 해냈다'면서 열광했지만, 정부의 반응은 이렇듯 암울했다. 그리고 이든의 예측대로, 프랑스의 반응은 '''동맹국일 때는 언제고 이젠 우리 등 뒤에 칼을 꽂다니'''였다.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영국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던 비시 정부는 단박에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했으며, 비시 프랑스 군대에는 반(反) 영국 정서가 퍼져나갔다. 그 결과, 1940년 다카르 앞바다에서는 리슐리외를 위시한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 및 드 골의 공격을 방어했으며, 1942년 횃불 작전 때는 카사블랑카에 정박해있던 장 바르가 미완성 상태로 주포도 1개 주포탑만 완성돼서 절반인 4문만 보유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게 저항하여 미국 전함 USS 매사추세츠와의 포격전 끝에 대파당했고, 연합군은 한동안 비시 프랑스 군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야 했다.
물론 리슐리외는 미국에서 재개장을 받고 자유 프랑스 해군 소속으로 영국 함대와 함께 작전하는 등의 기록이 있지만, 보통 이런 경우는 비시 프랑스로부터 전투를 통해 배를 빼앗거나 항복시킨 후의 이야기라는 것이 문제다.
이 때문에 횃불 작전 당시 미국 외교관 로버트 H.머피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에게 이 사건을 들면서 프랑스는 순순히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여서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한테 "미국인도 영국놈들하고 같은 족속이구만!"하고 까였다.
5. 평가
'''쓸데없이 적만 만들어버린 영국의 병크 VS 전략적으로 어쩔수 없는 선택'''
어떤 역사가들은 이러한 영국의 행동은 배신 행위나 마찬가지고, 쟝 술 제독이 응답 시간 내에 무장해제를 하겠다고 응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행동하여 예비 전력이 될지도 모르는 프랑스 전함을 침몰시키고 쓸데없이 반영 감정을 증폭시켰다고 평가하는 반면에, 다른 역사가들은 이후의 전쟁 판도를 보아 타당한 결정이라고 평가한다. 함대를 전략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현상유지에 급급하던 프랑스 제독들의 잘못도 없다고 볼 수 없다. 나머지 함대는 프랑스가 함락되고 2년 뒤 독일이 비시 프랑스와의 협약을 어기고 함대를 강탈하려고 하자 툴롱 항에서 자침한다. 툴롱 프랑스 함대 자침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