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링/일본
1. 역사
아시아권에서는 컬링의 역사가 가장 길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아시아에서 컬링을 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1937년 1월에 야마나시현에서 컬링 대회가 열렸다는 기사가 존재하지만, 일본에 컬링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건 1980년 홋카이도와 캐나다 앨버타주가 자매 결연을 맺은 것이 계기가 돼, 홋카이도 각지에서 컬링 강습회가 열리면서부터다.
이 때문에 일본 컬링선수는 홋카이도 출신이 많으며, 특히 키타미시가 '컬링 시티'라 불리는 일본 컬링의 중심지다[1] . 홋카이도에 컬링 강습회가 처음 열렸을 당시 강습회에 참가했던 오구리 유지가 일본 컬링의 개척자로 꼽힌다. 오구리는 지역 주민들과 합심해 일본 최초 컬링 전용 경기장인 토코로정 컬링홀을 만들었고, 이후 컬링선수들을 발굴·육성했다.
홋카이도 다음으로 손꼽히는 곳은 나가노현이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 마침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컬링이 정식 종목이 되면서 나가노에서도 전문 선수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이밖에 아오모리현에서도 2007 세계여자컬링선수권대회를 유치한 것이 계기가 돼 현 차원에서 전문 팀(팀 아오모리)을 꾸리며 컬링선수 육성을 지원했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이 된 컬링 경기가 TV 중계가 되면서 점차 일본 대중들에게도 인지도가 생겼다. 그리고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메달권이 유력했던 일본 선수들이 죄다 노메달에 잇따라 탈락하면서 대신 방송사들은 매일 같이 경기가 있던 컬링 경기를 생중계했는데, 애초에 기대치가 낮았던 일본 여자 컬링 대표팀 '팀 아오모리'가 4승 5패로 비교적 선전하면서 일본에서 컬링 인지도가 단숨에 올라갔다.[2]
생활체육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컬링 인구도 제법 되고 한국보다 인프라 여건도 낫지만,[3] 협회 사정은 한국과 비슷하게 열악하다. 평창 올림픽에서 전국민적 관심을 받았고 일본 컬링 사상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땄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컬링협회가 재정난에 처해 있어 협회 차원의 포상금은 받지 못했다. 그나마 협회 스폰서인 JA전농[4] 으로부터 쌀 6t을 현물로 받은 것이 전부. 기사 단 협회 포상금과는 별도로 JOC(일본 올림픽 위원회)차원의 메달 포상금은 받는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 안습인데 대한컬링경기연맹이 관리단체로 지정된 막장상황이라 협회 포상금은 0원이다. 물론 일본과 마찬가지로 협회 포상금과는 별도로 문체부에서 나오는 메달 포상금은 받았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컬링에 대한 관심이 폭주했다.기사 평창 올림픽을 본 후 컬링을 시작한 사람들을 일컫는 '평창조(平昌組)'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으며, 그 평창조에 해당 하는 선수가 2019년 일본선수권에 출전하기도 했다.
2. 대회
일본 컬링 협회(JCA) 공식 주관 대회로는 일본 컬링 선수권 대회(일본선수권), 일본 믹스더블 컬링 선수권 대회, 일본 주니어 컬링 선수권 대회, 일본 시니어 컬링 선수권 대회, 전일본 대학 컬링 선수권 대회 등이 있다.
2.1. 일본선수권
매년 2월 말이나 3월 초에 열린다. 2011년부터 JA전농이 스폰서를 맡으면서 공식 명칭은 '''젠노 일본 컬링 선수권 대회'''(全農日本カーリング選手権大会)이다.
과거에는 팀마다 개성 있는 이름을 썼지만 2005년부터 팀명에 제한을 적용했다. 팀 이름에 스킵 이름이 들어가거나, 학생팀의 경우 재학 중인 학교 이름이 들어가거나, 직장팀은 회사 법인명이 들어가거나, 이도 저도 싫다면 연고지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5]
2019년 기준 출전팀은 올림픽 대표팀, 전년도 우승팀, 홋카이도 3팀, 도호쿠 1팀, 관동 1팀, 중부 1팀, 서일본 1팀 등 총 9팀이다.[6] 2020년부터는 전년도 우승팀, 전년도 준우승팀, 5개 지역에서 1팀씩, 월드 컬링 투어 상위팀 1팀, 와일드 카드 1팀 등 9팀이 출전한다.
9개 팀간 라운드 로빈 후 상위 4팀간 페이지 플레이오프 방식으로 우승팀을 가린다. 우승팀에게는 당해 세계선수권 출전권이 주어진다.
2.1.1. 남자
2.1.2. 여자
2.1.3. 대표팀 결정전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때부터 올림픽이 있을 때만 별도의 올림픽 대표팀 결정전을 치르다가, 2012년부터 일본선수권 우승팀의 세계선수권 출전 자격은 그대로 유지하되, 별도의 대표팀 결정전을 치러 올림픽 및 아시아 태평양 컬링 선수권 대회(PACC) 대표팀을 정했다.
참가 대상은 그동안 몇 차례 변경됐다. 3년간 일본선수권 성적 상위 2팀만 경기한 적도 있고, 대표팀 결정전이 있기 최근 2년간 일본선수권 우승 및 준우승팀이 대상인 적도 있고, 당해 일본선수권 4위까지 4팀간의 경기로 정한 적도 있다. 2019년 다시 규정이 변경되면서 대표팀 결정전은 올림픽 대표팀 결정전과 올림픽 직후 올림픽 대표팀이 일본선수권에 참가하지 않은 경우에 한해 대표팀 결정전을 치르는 것으로 변경됐고, 평소에는 일본선수권 우승팀이 해당 연도 세계선수권과 아시아태평양선수권까지 모두 출전한다.
- 남자
- 여자
2.2. 일본 믹스더블 선수권
처음에는 매년 12월에 열렸지만, 4회 대회(2011년)부터 매년 2월 말이나 3월 초에 열린다. 부부(※)가 참가하는 경우도 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믹스더블이 정식 종목이 되면서 이를 대비해 2017년부터 기존 4인팀 선수들도 강화위원회 추천으로 출전할 수 있어서 기존 4인팀 선수들끼리 파트너를 이뤄 참가하는 경우가 늘었다.
2.3. 월드 컬링 투어 대회
일본에서는 정기적으로 월드 컬링 투어 대회가 열린다. 2018년 11월에는 WCT Japan이 공식 발족했다.
한국의 컬링 실업팀도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대부분 참가한다. 캐나다나 유럽 팀도 출전하지만, 아무래도 아시아가 컬링의 주류는 아니다 보니 대회 포인트는 그리 높지 않다. 카루이자와 국제컬링선수권대회는 그 역사나 상징성 때문에 상위권 팀도 참가하곤 해서 포인트가 높지만, 역사가 짧은 홋카이도은행 컬링 클래식의 경우에는 이 대회 우승보다 캐나다의 투어 대회 준우승 포인트가 더 높을 때가 있다.
아래의 3개 대회 외에 모리오카시 메모리얼 컵(盛岡市メモリアルカップ), 미네베아 미츠미 컵(ミネベアミツミカップ), WCT 쿠로사와배(WCT黒澤杯) 등도 있으나 이 대회들은 모두 대회 규모가 작아 일본 자국 팀만 참가하고, 미네베아 미츠미 컵은 남자부 경기만 있고, 쿠로사와배는 남녀팀 구분 없이 공동으로 경기를 하는 대회라서 여기에서는 따로 다루지는 않는다.
2.3.1. 카루이자와 국제컬링선수권대회
軽井沢国際カーリング選手権大会 / Karuizawa International Curling Championship
컬링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대회로, 대회 장소도 당시 컬링 경기가 열렸던 카루이자와다.[21] 보통 매년 12월 중순에 열린다.
2014년에 월드 컬링 투어의 정식 대회로 편입됐다. 그 이전에도 월드 컬링 투어의 포인트는 반영됐지만, 2013년까지는 5개 해외팀과 일본 국가대표와 그외 일본의 2팀 등 남녀 각각 8개 팀을 초청하는 방식이었다. 월드 컬링 투어에 편입된 2014년부터는 남녀 각각 12개 팀이 참가해서 3개조로 나뉘어서 조별리그를 치른 후 상위 8개 팀간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정한다.
2.3.2. 홋카이도은행 컬링 클래식
どうぎんカーリングクラシック / Hokkaido Bank Curling Classic
2016년 시작됐다. 매년 8월에 열려, 컬링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투어 대회다.
장소는 홋카이도 삿포로시의 도은[22] 컬링 스타디움. 남녀 각각 10개 팀이 참가해 2개조로 조별 리그를 치른 후 상위 4팀간의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정한다.
2.3.3. ADVICS 컵
アドヴィックスカップ
홋카이도 키타미시의 어드빅스 토코로 컬링홀 개장을 기념하기 위해 2014년 시작된 대회로, 2019년 월드 컬링 투어의 정식 대회로 편입됐다.
남녀팀 구분 없이 같이 대회를 치렀으나, 월드 컬링 투어의 대회가 되면서 다른 투어 대회처럼 남녀부가 나뉘었다. 또한 2018년까지는 매년 7월경에 열렸으나 2019년부터는 홋카이도은행 컬링 클래식 이후로 옮겨졌다.
원래 일본 자국팀들만 참가하는 대회였으나 2018년에는 한국의 강원도청과 홍콩 여자 국가대표팀이 참가했다.
3. 현역 주요 컬링팀
이외에도 많은 팀들이 있지만, 국가대표 경험이 있다거나 후원사를 둘 정도로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팀만 다룬다.
3.1. 남자
3.1.1. SC카루이자와클럽
풀네임은 스포츠 커뮤니티 카루이자와 클럽. 영어 약칭은 SCKC. 뒤의 클럽을 빼고 SC카루이자와라고도 불린다. 1999년 당시 카루이자와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모로즈미 유스케와 컬링부 코치 나가오카 하토미(長岡はと美)[24] 가 만든 'AXE' 팀이 전신이다. SC카루이자와클럽 팀이 만들어진 건 2005년이다.
일본 남자 컬링을 대표하는 팀으로, 2017년까지 일본선수권 통산 8번 우승에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이후 자력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그러나 평창 올림픽 이후 핍스 히라타 코우스케가 고향 홋카이도로 돌아가 새로 팀[25] 을 만들고, 서드 시미즈 테츠로도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 컬링팀으로 이적한 후 대체선수 1명을 구하지 못해 기존 선수들은 휴식을 선언했다.
휴식을 선언한 후 남은 선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스킵 모로즈미 유스케는 중부전력의 코치를 맡게 됐고, 모로즈미 유스케의 동생이자 리드였던 모로즈미 코스케는 프리 선언 후 2018-2019 시즌 동안 도쿄의 I.C.E. 팀에서 활동했고, 세컨드이자 팀의 연장자인 야마구치 츠요시는 팀에 잔류해 새로 팀원을 구성했다. 모로즈미 형제가 별도의 팀을 만들면서 지역 라이벌 관계가 됐다. 한편 팀을 재편하면서 지역 주니어선수들을 육성하기 위해 산하에 '엘리트 아카데미'라는 팀을 별도로 만들었다.
- 코칭스태프
니시무로 유지[26] (코치), 오기하라 료(코치)
- 선수
- 시즌별 역대 선수
- 과거 소속 선수
- 마츠무라 유타: 현재 홋카이도 삿포로 콘사도레 컬링팀 소속.
- 모로즈미 유스케: 창단 멤버. 현재 TM카루이자와 소속.
- 모로즈미 코스케: 창단 멤버. 현재 TM카루이자와 소속.
- 시미즈 테츠로: 현재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 컬링팀 소속.
- 히라타 코우스케: 1992년 5월 1일생. 홋카이도 키타미시 출신. 현재 KiT Curling Club 소속.
- 역대 월드 컬링 투어 랭킹
3.1.2.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 컬링팀
약칭은 콘사도레. 팀 아오모리의 코치였던 아베 신야가 2012년에 만든 4REAL 팀[28] 이 전신이다.
2018년 SC카루이자와클럽의 시미즈 테츠로가 4REAL 팀에 합류한 후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에서 컬링팀을 만들었다. 앞서 2017년 창단된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 배드민턴팀처럼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의 관련 법인인 일반 사단법인 콘사도레 홋카이도 스포츠클럽이 운영을 맡는다. 한편 로코 솔라레와 비슷하게 선수들의 본업은 따로 있다.
원래 4REAL 팀은 삿포로시를 거점으로 했다가 2017년부터 키타미시로 이전했는데, 콘사도레 삿포로 컬링팀도 그대로 키타미시를 거점으로 한다고. 한편 그동안 스킵을 맡았던 아베는 포스 마츠무라 유타에게 스킵을 넘겼다.
2018년 대표팀 결정팀에서 우승해 아시아태평양선수권에 출전해 일본 남자 대표팀으로는 2년만에 금메달을 땄고, 2019년 일본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세계선수권에도 출전했다. 비록 4위로 메달은 못 땄지만, 남자팀 역시 제대로 된 지원만 받쳐준다면[29] 세계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음을 입증하며 다른 일본 남자 컬링선수들에게도 자극이 됐다.
2019년 PACC에서는 준우승한데 이어 세계 퀄리피케이션 이벤트에서는 러시아에 패해 3위를 하면서 2020년 세계선수권에는 출전하지 못하게 됐다. [30] 이후 코로나 19 때문에 세계선수권이 취소되긴 했지만.
- 코칭스태프
밥 어셀[31] (코치)
- 선수
- 시즌별 역대 선수
- 역대 월드 컬링 투어 랭킹
3.1.3. TM카루이자와
풀네임은 '팀 모로즈미 카루이자와', 약칭은 'TMK'. SC카루이자와클럽에서 활동했던 모로즈미 유스케가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출전을 위해 2019년 만든 팀이다.
모로즈미 형제, 삿포로국제대학 팀에서 활동한 이와이 마사키[37] 와 슈쿠야 료타로 등 4명으로 구성됐다. 핍스 없이 4명이 전부인데, 아무래도 핍스의 경우에는 경기 출장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어서 해당 선수 성장에 지장이 갈까봐 모로즈미는 평소에 4인 체제를 선호했다고.
팀의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서 모로즈미 형제의 아버지가 대표이사를 맡아 TM카루이자와 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팀 창단 시점에서 스폰서 기업도 이미 확정된 상태다.
모로즈미가 중부전력 코치를 맡으면서 중부전력이 성장할 수 있었기에 중부전력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주목됐는데, 그대로 중부전력 코치를 겸한다.
- 선수
- 역대 월드 컬링 투어 랭킹
3.2. 여자
3.2.1. 로코 솔라레
해당 문서 참조.
3.2.2. 홋카이도은행 포르티우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과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당시 일본 여자 컬링 대표팀 선수였지만 결혼과 출산으로 컬링계를 잠시 떠났던 오가사와라 아유미(오노데라 아유미)와 후나야마 유미에(하야시 유미에)가 선수 복귀를 선언하고, 2011년 홋카이도은행이 스폰서를 맡아 만들어졌다. 포르티우스란 이름은 올림픽의 모토인 '''Citius, Altius, Fortius!'''에서 따온 것으로, 오가사와라와 후나야마가 팀 아오모리를 만들었을 초기에도 포르티우스를 팀명으로 썼었다.
오가사와라와 후나야마의 중학교 후배인 요시다 치나미와 오노데라 카호 2명이 가세해 4인 체제가 만들어졌고, 이후 토마베치 미치코를 영입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대표팀으로도 출전해 스킵 오가사와라는 일본 선수단 기수를 맡았고[39] , 경기에서는 5위를 하면서 당시 일본 대표팀으로서는 최고 성적을 달성했지만, 올림픽 종료 후 체제 정비에 나서며 요시다와 토마베치를 내보냈다. 대신 일본주니어선수권 3연패를 달성한 삿포로국제대학 출신의 요시무라 사야카, 팀 아오모리 소속으로 팀 해체 후에도 아오모리에 잔류했던 오미야 안나를 영입했다.
스킵인 오가사와라의 성격을 따라 팀 분위기가 좀 딱딱한 편이었다. 요시다 치나미를 방출한 건 당시 감독이던 후지 미키[40] 의 선택이었지만, 오가사와라의 평소 성격 때문인지 일본의 일부 컬링팬들은 요시다의 방출을 두고 오가사와라를 비난했었다.
2018년 6월 오가사와라가 탈퇴하고 요시무라 사야카가 새로 스킵을 맡게 됐다.
2019-2020 시즌 그랜드슬램 중 마스터즈에서 일본팀으로는 처음으로 결승까지 진출해 준우승했다.
- 코칭스태프
사토 히로시(코치)
- 선수
- 시즌별 역대 선수
- 과거 소속 선수
- 오가사와라 아유미: 창단 멤버. 1978년 11월 25일생. 홋카이도 키타미시 출신. 퇴단할 시기만 하더라도 현역 연장의 꿈을 갖고 있었지만, 2019년 일본 주니어팀의 전임 코치를 맡으면서 사실상 은퇴했다. 2020년 일본컬링협회의 이사로 취임했다.
- 요시다 치나미: 현재 로코 솔라레 소속.
- 토마베치 미치코[45] : 1980년 1월 29일생. 이와테현 니노헤시 출신. 고교 졸업 후 약국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던 중 컬링을 접했다. 일본 믹스더블의 베테랑으로, 남편인 토마베치 켄지와 함께 세계믹스더블선수권에 4차례(2008, 2011, 2012, 2015) 출전했다.
- 역대 월드 컬링 투어 랭킹
3.2.3. 중부전력 컬링팀
원래 중부전력 컬링팀은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의 영향으로 컬링이 주목받으며 사내 직원들간의 결속력 강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2009년에 이치카와 미요, 사토 미유키, 시미즈 에미, 후지사와 시오리, 후지사와 사츠키 등 만 20세 이하의 젊은 선수들로 전문 팀이 만들어졌다.
2011년부터 4년 연속 일본선수권에서 우승하며 팀 아오모리를 잇는 일본 여자 컬링을 대표하는 팀으로 자리 잡나 싶었지만,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대표팀 결정전에서 홋카이도은행 포르티우스에게 지고 말았다. 이후 2014년 5월 실질적인 팀 리더를 맡고 있던 이치카와가 결혼을 하면서 은퇴하고 사토도 마찬가지로 팀을 떠났다. 2015년에는 회사 경영의 악화로 컬링팀 활동을 잠정 축소하기로 하면서 향후 선수 생활에 노란불이 켜질까 우려했던 후지사와 사츠키는 모토하시 마리의 권유로 로코 솔라레로 이적했다. 팀 창단 때부터 스킵을 맡아 가장 큰 전력이었던 후지사와의 이탈에 마츠무라 치아키도 잠시 방황하면서[46] 중부전력은 2016년 중부지역 선수권에서 고교생으로 이뤄진 '카루이자와 파이어봄버'[47] 에게 패해 일본선수권 출전권을 놓치고 말았다.
이후 시미즈 에미는 팀 주장으로, 마츠무라 치아키가 새로운 스킵을 맡아 팀을 재정비해 2017년 일본선수권에서는 로코 솔라레를 꺾고 우승하면서 로코 솔라레의 평창 올림픽 직행에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대표팀 결정전에서는 끝내 패했고, 이후 중부전력 팀 창단 멤버 중 유일하게 팀에 남았던 시미즈 에미가 은퇴했다.
2018-2019 시즌 중 SC카루이자와클럽의 스킵이었던 모로즈미 유스케를 코치로 영입하고 선수들의 포지션 교체가 있었는데, 이게 시너지 효과를 불러오면서 2019 일본선수권에서는 전승 우승하면서 후지사와 탈퇴 후 6년만에 세계선수권에 출전하게 됐다.[48] 세계선수권에서는 한국 대표팀인 춘천시청에 져서 최종 4위를 했다. 그래도 2016년 로코 솔라레의 2위 다음으로 높은 성적이었고, 춘천시청이 나이는 더 어리지만 주니어 대표 경험이 있는 반면 중부전력 선수 중 3명은 주니어 대표 경험도 없어서 국가대표로는 첫 출전이었고 그나마 국가대표 경험이 있는 마츠무라 치아키도 6년만의 국가대표 출전이었다.
소속 선수들은 평상시에는 중부전력의 평사원으로 근무하는데, 팀원 각자 근무지가 다르다. 만약 한 곳에서 같이 근무할 경우 대회 출장으로 자리를 비워야할 때 다른 직원들 근무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수들의 훈련시간을 보장해주고 올림픽이 있는 시즌에는 이를 대비해 선수들의 근무 시간을 조절해주는 등, 주 2회 밖에 연습을 못하는 팀 후지큐에 비하면 선수로서 운동하기에는 나은 편이다. 평창 올림픽으로 컬링의 인기가 올라가고 2019년 세계선수권에서도 선전하면서 비시즌 기간임에도 선수들의 근무시간에 대신 훈련시간을 주는 등 전보다 훈련 환경이 더 좋아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젊은 선수들로 팀을 꾸렸음에도 계속된 팀원 교체로 평균 연령이 낮기 때문에 일본 현지에서도 언론 주목도가 높지만, 아무래도 컬링선수이기 이전에 한 기업의 직원이다 보니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개별 인터뷰는 사양한다.
- 코칭스태프
와다 히로아키(부장), 모로즈미 유스케(코치), 시미즈 에미[49] (매니저)
- 선수
- 시즌별 역대 선수
- 과거 소속 선수
- 사토 미유키: 창단 멤버. 1989년 12월 26일생. 나가노현 카루이자와정 출신. 시미즈 에미, 이치카와 미요와는 학창 시절부터 'wish'라는 팀으로 같이 활동했었다. 원래 고교 졸업 직후 중부전력에 입사했지만, 중부전력 컬링팀이 창설되기 전까지 한동안 같은 지역팀인 팀 나가노 소속으로 활동했었다.
- 시미즈 에미: 창단 멤버. 1990년 12월 21일생. 나가노현 카루이자와정 출신.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 컬링팀 소속 시미즈 테츠로의 동생. 2017년 은퇴 후 팀 매니저를 맡고 있다. 은퇴하기에는 젊은 나이이기도 해서 2019년 일본선수권과 세계선수권에서는 핍스로 이름을 올렸다.
- 이치카와 미요: 창단 멤버. 1989년 6월 28일생. 나가노현 카루이자와정 출신. 현역 시절 실질적인 팀의 리더 역할을 맡았으며, 빼어난 외모로 '빙상의 사사키 노조미'라는 별명도 있었다. 은퇴 후 NHK의 컬링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후지사와 사츠키: 창단 멤버. 현재 로코 솔라레 소속.
- : 창단 멤버. 후지사와 사츠키의 언니. 부상 때문에 1시즌도 채 못 채우고 탈퇴한지라 소속 멤버로 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부상 때문에 전문선수에서는 은퇴하고 이후 물리치료사가 돼 나가노의 한 정형외과에서 일하다가 2019년 일본 믹스더블선수권에 출전하면서 오랜만에 공식 대회에 모습을 보였다. 최종 4위를 했는데, 사츠키와는 서로 조가 달라 자매간의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 역대 월드 컬링 투어 랭킹
3.2.4. 팀 후지큐
원래 창단 당시 이름은 '팀 후지야마'였으나 2015년 일본 대표 결정전을 앞두고 '팀 후지큐'로 이름을 바꿨다.
홋카이도 컬링에 오구리 유지가 있었다면 팀 후지큐의 창단에는 코바야시 히로시가 있었다. 코바야시는 1980년대에 선수로 활동했고,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는 컬링 경기위원장을 맡았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과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해설자를 맡아 친근하고 알기 쉬운 해설로 당시 일본 컬링 붐에 일조했다. 코바야시는 2005년에 자비로 야마나시현 야마나카코촌(山中湖村)[52] 에 일본 최초의 민간 운영 컬링장인 '컬플렉스 후지(Curlplex Fuji)'를 건립한 후 후지급행의 도움을 받아 컬링팀 창단을 주도했다. 코바야시는 팀 후지큐의 단장 겸 감독을 맡아 팀을 지휘하다 췌장암으로 2016년 2월에 사망했다.
창단 멤버인 소노베 준코(=니시무로 준코)는 원래 나가노현 출신으로, 팀 나가노에서 활동하다 팀이 해체되며 후지급행에 입사했고, 지역 학생들과 함께 팀이 만들었다. 소노베를 제외하면 다들 학생인데다 또다른 창단멤버이자 스킵인 코아나 토리[53] 를 제외하면 팀 멤버가 자주 바뀌면서 한동안은 지역선수권에서도 물만 먹었다. 그러다 2014년 일본선수권에 첫 출전한 후 2015년 일본선수권부터 입상권에 들기 시작해 마침내 2018년 일본선수권에서 우승했다.
2019년 7월 니시무로 준코가 팀 탈퇴와 함께 후지급행에서도 퇴사했음을 밝혔다. 또한 니시무로의 남편이자 팀 후지큐의 창단 때부터 코치를 맡았던 니시무로 유지 역시 팀을 떠났다. 부부가 관동 중부 믹스더블 선수권에 출전할 예정이라서 아예 컬링을 그만두는 건 아닌데다 남편의 본가인 야마나시현에 가게를 차리는 등 컬링을 계속하는 한 기존 선수들과 인연도 계속될 것이기에 보다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팀을 떠난 것으로 추측된다.
소속 선수들은 평상시에는 후지큐 하이랜드의 직원으로 근무하고 주 2회 정도만 연습한다. 다른 여자팀들이 실력 뿐만 아니라 미모도 주목받는 것과 달리, 이국적인 외모의 이시가키를 제외한 다른 팀원들은 외모가 수수한 편인데다 다른 일본 국내 강팀에도 굴하지 않고 도전적인 이미지[54] 때문에 일본 현지에서는 여성 팬 비율이 높다고 한다.
기업에서 운영하는 팀치고 의외인 면이 있다면, 모기업에서 팀에 대한 홍보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팀들과 달리 홈페이지도 없다가 2020년에서야 공식 SNS 계정을 만들었다.
- 선수
- 시즌별 역대 선수
- 과거 소속 선수
- 니시무로 준코[57] : 창단 멤버. 1980년 12월 21일생. 나가노현 카루이자와정 출신. 팀 나가노의 스킵.
- 이시카와 요코[58] : 1968년 8월 20일생. 홋카이도 혼베츠정 출신. 팀 후지야마 명의로 활동하던 초창기에 잠시 활동했었다. 원래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로,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 출전해 500m와 1000m 종목에서 나란히 24위를 했었다. 사실 후지급행은 스케이트팀(스피드 스케이팅)이 일본 여자 빙상 실업팀의 명문으로 통하며, 이시카와도 고교 졸업 후 1987년에 후지급행 스케이트팀에 입단해 활동했었다.
- 역대 월드 컬링 투어 랭킹
4. 과거 주요 컬링팀
4.1. 여자
4.1.1. 카와니시건설 여자 컬링팀
카와니시[59] 건설은 키타미시에 있는 건설회사다. 1983년 홋카이도 빙상연맹 회장을 겸하고 있던 카와니시 사장이 컬링을 사기(社技)로 삼아 컬링팀을 만들곤 사내 여직원들에게 컬링을 권장했다.[60] 1989년 두 번째로 열린 일본선수권에서 우승하는 등 1990년대 여자 실업팀 중에는 오비히로의 토코포장도로 컬링팀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나가노 올림픽 이전까지 일본은 올림픽을 대비해 일본선수권과 별개로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을 선발해 별도로 대표팀을 꾸렸으며, 컬링이 시범종목이던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도 일본 대표팀은 토코포장도로와 카와니시건설 연합팀이 출전했다. 컬링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후 처음 열린 올림픽 대표 결정전에서는 심슨즈에게 지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했고, 이후로는 다른 신생팀이 떠오르면서 올림픽 대표 결정전에 참가하지 못한 채 2006년 해체됐다.
이후 팀 아오모리에서 활동하는 아오타 시노부, 이시자키 코토미, 모토하시 마리 등이 처음 활동한 실업팀이기도 하다.
2시트 뿐이지만 1995년에는 회사 건물 옆에 전용 컬링장도 지었다. 아래의 심슨즈 팀을 모델로 한 동명의 영화에서 2시트 컬링장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카와니시건설 컬링홀이다. 후지사와 사츠키도 카와니시건설 컬링홀에서 컬링을 시작했다고 한다.
- 주요 선수
- 니와 아케미[61] : 1973년 3월 24일생. 나가노 올림픽 당시 대표팀의 핍스. 위에서 언급했듯이 1990년대에는 선수들의 기량을 위주로 대표팀 선수를 선발했는데, 니와는 고교 졸업 후 카와니시건설에 입사한 후 컬링을 시작했음에도 입문 1년만에 대표팀에 뽑혔다. 나가노 올림픽 이후 결혼하면서 도쿄로 이주해 전문 선수로는 은퇴했다.
- 아오타 시노부: 1977년 10월 26일생. 2000년대 들어 스킵을 맡았다.
- 오카자키 유카리: 원래는 스킵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 아오타 시노부와 포지션을 맞바꿨다.
- 이시자키 코토미: 1979년 1월 4일생. 홋카이도 오비히로시 출신.
- 모토하시 마리: 핍스로 1년 가량 있다가 팀 아오모리로 이적했다.
4.1.2. 심슨즈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일본 여자 컬링 대표팀. 주니어 시절 일본주니어선수권 4연패를 달성했으며, 1999년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이는 일본 컬링 대표팀 첫 세계선수권 메달이었다.
선수 4명 모두 홋카이도 키타미시 출신으로 특히 그중 3명이 중, 고교 동기여서 일본에서 화제가 돼 2006년 이들의 고교 시절을 배경으로 한 동명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다만 영화는 각색된 부분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영화에서는 고교 때 컬링을 시작한 것처럼 묘사됐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중학교 때부터 컬링을 같이 해온 사이인데다 카토 아키코는 9살부터 컬링을 해왔으며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는 당시 만 19세의 나이로 일본 대표팀 서드를 맡았다.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룬 만큼 2003년에 팀을 해체했으나, 계속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자 했던 오노데라와 하야시는 같은 해 아오모리에 스카우트돼 '팀 아오모리'를 창단했다.
팀 이름은 중학교 시절 선수들이 즐겨보던 심슨 가족에서 따온 것인데, 선수들의 착각으로 팀명은 잘못 만들어졌다. 일본에서 심슨 가족은 'ザ・シンプソンズ'로 표기하는데 팀 이름에는 プ가 빠졌다. 팀의 영문 이름도 p가 빠진 Simsons.
- 코칭스태프
오미야 요시유키[63] (코치)
- 선수
4.1.3. 팀 아오모리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과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일본 여자 컬링 대표팀. 2000년대 중반 일본 컬링 붐을 이끈 팀이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당시 여자 컬링 대표팀이었던 심슨즈가 2003년 해체하고 오노데라 아유미(오가사와라 아유미)와 하야시 유미에(후나야마 유미에) 2명은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는데, 마침 2007 세계 여자 컬링 선수권대회를 유치하는 등 나름대로 컬링에 투자하려던 아오모리시에서 둘을 영입하며[66] 전문 컬링팀을 만들었다. 오노데라의 권유로 대학생이던 테라다 사쿠라코와 메구로 모에가 가세해 팀원이 구성됐다. 이후 2005년 2월 메구로 모에가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며 마리린즈, 카와니시건설 등의 팀에서 활동했으며 오노데라와 하야시의 고교 후배인 모토하시 마리를 영입했다.
토리노 올림픽 이후 오노데라와 하야시가 은퇴를 결정하고,[67] 남은 선수들은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로 하면서 'GALLOP'에서 활동하던 야마우라 마요를 정식 멤버로 영입했다. 2007년 테라다가 컨디션 난조로 휴식기를 갖기로 하면서 대신 카와니시건설의 이시자키 코토미를 영입했다.
이러한 계속되는 멤버 교체에도 불구하고 팀 아오모리는 일본선수권에서 5년 연속 우승하면서 일본 여자 컬링계를 평정해 2010 밴쿠버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여전히 메달권에는 들지 못했고, 올림픽 후 당시 스킵이었던 메구로 모에가 결혼과 함께 은퇴를 발표했다. 남은 선수들은 다음 올림픽을 준비하고자 했지만, 결국 모토하시 마리도 팀을 탈퇴해 고향인 홋카이도로 돌아가 로코 솔라레를 창단했다. 이후 오가사와라와 후나야마도 복귀해 홋카이도은행 포르티우스를 창단했다. 잇따른 신생팀 창단에 아오모리현 출신 선수가 잘 없어서 팀 아오모리는 선수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2011년 이후로는 번번이 일본선수권 우승을 놓치며 2013년 휴식기에 들어가며 사실상 해체됐다.
2017년에 팀 아오모리의 마지막 스킵이었던 아오타 시노부가 'Delight 아오모리'라는 팀을 만들며 컬링에 복귀했는데, Delight 아오모리는 팀 아오모리와는 별개의 팀이라고 밝혔다.
- 코칭스태프
아베 신야(코치)
- 주요 선수
- 오노데라 아유미[68] : 창단 멤버. 심슨즈 시절에는 세컨드였지만 팀 아오모리 때부터 스킵을 맡았다.
- 하야시 유미에[69] : 창단 멤버. 현재 홋카이도은행 포르티우스 소속.
- 메구로 모에: 창단 멤버. 2010 밴쿠버 올림픽 당시 스킵. 1984년 11월 20일생. 홋카이도 미나미후라노정 출신.
- 테라다 사쿠라코: 창단 멤버. 1984년 5월 17일생. 홋카이도 미나미후라노정 출신.
- 모토하시 마리
- 야마우라 마요: 1984년 4월 9일생. 나가노현 미요타정 출신.
- 이시자키 코토미: 현재 로코 솔라레 소속.
- 오미야 안나: 현재 홋카이도은행 포르티우스 소속.
- 아오타 시노부: 팀 아오모리의 마지막 스킵.
4.1.4. 팀 나가노
10여 년간 일본 여자 컬링계에서 활동했지만 라이벌인 팀 아오모리에게 가려 빛을 못 본 비운의 팀이다.
1994년 카루이자와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츠치야 유카코와 소노베 준코가 만든 '팀 콰르텟'이 전신이다. 팀 콰르텟은 얼마 후 이후 PicTic으로 팀 이름을 바꿨다가 규정 때문에 대회에는 '팀 츠치야', '팀 나가노' 등의 명의로 출전했다. 1997년 소노베 준코의 동생인 소노베 토모코가 가세하면서 주축 3인방이 자리 잡는데, 당시 츠치야와 준코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토모코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이 3명이 주축된 팀 나가노는 리드와 핍스는 그때마다 다른 선수들로 채웠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 컬링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면서 컬링 경기가 열린 카루이자와에는 별도의 성화대가 만들어졌는데, 소노베 준코가 카루이자와 성화대의 최종 점화자로 선발됐다. 이처럼 고향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리면서 선수들의 올림픽에 대한 열망도 컸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주니어 시절에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 주니어 컬링 선수권 4년 연속 준우승에 그쳤고, 팀 나가노가 활동한 16년간 일본선수권 우승은 단 1차례 뿐이고, 그나마 일본 대표팀으로 출전한 2007 창춘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는 예선 1위로 결승에 진출했는데 한국 대표팀이었던 전북도청에게 지면서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과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대표팀 결정전에서 연거푸 팀 아오모리에 우승을 내줬다는 것이다.
2009년 11월에 있었던 밴쿠버 올림픽 대표팀 결정전 때는 이번이 팀 나가노의 마지막 올림픽 도전이 되리란 걸 팀 아오모리 선수들도 짐작을 했는지, 우승 후 인터뷰에서 팀 아오모리의 모토하시 마리는 울먹이며 "팀 나가노에게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하겠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팀 나가노는 2010년 4월 팀 해체를 발표했다.
팀의 주축 3명 모두 결혼도 미루고 20대를 오로지 컬링에만 매달렸던 것치고는 아쉬운 마무리였다. 그래도 라이벌이었던 팀 아오모리가 현 차원의 지원을 받았던 반면, 팀 나가노는 고교 때부터 선수들 각자 알바로 번 돈으로 팀을 운영했다.[70] 양팀의 여건을 비교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으니 오히려 그런 열악한 환경에도 엘리트 팀과 경쟁했다는 게 대단한 수준이었다.
이후 소노베 준코는 팀 후지큐에 입단했고, 츠치야 유카코는 2011년 일본선수권 한정으로 중부전력의 핍스로 등록돼 두번째 일본선수권 우승을 경험했다.
- 코칭스태프
니시무로 유지(코치)
- 주요 선수
- 츠치야 유카코: 창단 멤버. 1980년 5월 6일생. 포지션은 스킵.
- 소노베 준코: 창단 멤버. 1980년 12월 21일생. 소노베 토모코의 언니. 주로 서드를 맡았다.
- 소노베 토모코: 1982년 8월 25일생. 소노베 준코의 동생. 주로 세컨드를 맡았다.
- 카메야마 치에미: 1984년 10월 31일생. 2001년부터 2006년까지 활동. 학업 때문에 2006년 9월 팀에서 탈퇴했다.
- 사토 미츠키: 1985년 3월 19일생. 2003년부터 2009년까지 활동. 사토 미유키와 성이 같은데 혈연 관계인지는 불명.[71]
- 사토 미유키: 1989년 12월 26일생.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활동. 당시 팀의 막내로 핍스를 맡았고, 2009년 신생팀 중부전력 컬링팀에 입단했다.
- 타니모토 아야코: 1968년 9월 28일생. 팀 나가노의 마지막 리드.
4.1.5. 히토 커뮤니케이션즈 red WINS
약칭은 red WINS. 2014년 8월 삿포로국제대학 출신 선수들을 중심으로, 유통·통신 분야에서 아웃소싱 및 인재 소개 사업을 하는 히토 커뮤니케이션즈에서 만든 컬링팀이다.
WINS란 이름은 요시무라 사야카가 초등학교 시절 만든 팀 이름으로 중학교 때 이다 리나, 이시가키 마오, 우지하라 리사가 WINS에 가세했다.[73] WINS는 같은 토코로 출신의 요시다 치나미가 이끌던 ROBINS[74] , 옆동네라 할 수 있는 키타미의 후지사와 사츠키 자매[75] 가 주축인 STAYGOLD II[76] 와 중, 고교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동향 출신에 각 팀의 주축 선수들 모두 1991년생으로 동갑내기(요시무라 사야카는 빠른 1992년생)인지라 일본 여자 컬링의 황금세대라고 통한다. 현재 각자 다른 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라이벌이면서도 사적으로는 두루두루 친하다.
요시다의 ROBINS가 이미 중학교 때 일본선수권 3위를 할 정도로 파란을 일으켰지만, 고교 때는 WINS가 ROBINS를 앞지르며 일본선수권에서 준우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일본 주니어 선수권 우승은 STAYGOLD II[77] 의 몫이었다. 후지사와가 고교 졸업 후 중부전력에 입사하고 요시다 역시 홋카이도은행에 스카우트된 반면, WINS의 멤버들 중 오노데라 카호를 제외한 모두 삿포로국제대학에 특기생으로 입학해 대학 때까지 팀을 계속 유지하며 3년 연속 일본주니어선수권과 아시아 태평양 주니어 컬링 선수권 대회(PAJCC)에서 우승하며 세계주니어컬링선수권대회에 출전했고 2013년 동메달을 땄다. 이는 1999년 심슨즈가 은메달을 딴 후 14년만의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메달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스킵 요시무라만 홋카이도은행에 스카우트되고 우지하라는 컬링을 그만두지만, 이다 리나와 이시가키 마오는 같은 대학 출신 선수를 모아 red WINS를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선수권에서는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스폰서 문제로 2016년 5월 휴식기에 들어가며 사실상 팀이 해체됐다. 세컨드이자 실질적인 팀의 리더 역할을 했던 이시가키 마오는 팀 후지큐로 이적했다.
- 선수
- 이다 리나: 스킵
- 나이토 타마미: 서드
- 이시가키 마오: 세컨드 겸 주장
- 이시야마 나츠코: 리드
- 코야마 에미코: 핍스
[1] 정확하게는 키타미시의 토코로정. 키타미시는 3개 정이 합병된 탓에 면적이 꽤 넓다.[2] 2006년 이전까지 일본선수권 평균 관람객은 100명 남짓이었지만 토리노 올림픽에서의 분투로 이후 2006년 일본선수권 관객은 그보다 '''10배 증가'''한 1000명 규모였다고.[3] 도도부현 중 컬링 전용 경기장이 있는 곳만 홋카이도, 아오모리현, 나가노현, 야마나시현, 오카야마현 등 5곳이고 시마네현과 아이치현에는 컬링 시트가 상설 설치된 스케이트장이 있다.[4] 일본 전국농업협동조합연합회. 우리나라로 치면 농협과 같은 곳이다.[5] 로코 솔라레가 'LS키타미' 명의로 출전한 게 이 때문이다. 2018년 로코 솔라레가 일반 사단법인으로 인가되면서 팀명을 로코 솔라레 그대로 쓸 수 있게 됐다.[6] 각 지역별 출전팀은 지역선수권을 통해 선발한다.[A] A B C D E F G 아이스맨, 팀 토코로, 팀 키타미는 동일팀.[B] A B C D E VICTORY, VICTORIOUS, 팀 카시와기, 팀 아사마는 동일팀.[C] A B SUPER MAINERS, 팀 오미야는 동일팀.[D] A B C D E 삿포로, 팀 홋카이도는 동일팀.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의 전신.[E] A B team IWAI, 삿포로국제대학은 동일팀.[F] A B C PicTic, 팀 츠치야, 팀 나가노는 동일팀.[7] 팀 아오모리의 전신. 오노데라 아유미와 하야시 유미에가 아오모리로 이적한 후 처음 만든 팀이다.[G] A B C D E 포르티우스, 아오모리현 협회, 팀 아오모리는 동일팀.[8] 요시다 치나미가 이끌던 ROBINS.[H] A B C 팀 토코로, 토코로고교, 삿포로국제대학은 동일팀. 히토 커뮤니케이션스 red WINS의 전신.[I] A B C D 팀 후지야마, 후지큐는 동일팀.[9] SC카루이자와클럽이 PACC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면서 다시 결정전을 치렀다.[10] 과거 3년간 일본선수권 성적 상위 2팀이 대상.[11] 일본선수권 성적에 따라 협회에서 선발한 2팀이 대상.[12] 2008, 2009 일본선수권 우승팀 및 준우승팀이 대상.[13] 2013 일본선수권 상위 4개팀이 대상.[14] 라운드로빈 결과가 1승 5패로 동일.[15] 2016·2017 일본선수권 우승팀이 대상.[16] 이후 결혼해 토마베치로 성을 바꾼다.[17] 부녀[18] 마츠무라 유타, 마츠무라 치아키의 부모님.[19] 후지사와 사츠키의 오빠.[20] 남매[21] 다만 나가노 올림픽 당시 컬링 경기장이었던 '카자코시공원 아이스 아레나'는 원래 스케이트장이고, 2013년에 별도의 컬링장을 만들었다.[22] 네이밍 스폰서인 홋카이도은행의 약칭. 원래 이름은 삿포로시 컬링장이다.[23] 기존 스킵이었던 김수혁이 이적하고, 대신 김정민을 영입한 이후의 첫 대회. 당시는 투어 대회도 아니어서 박종덕 대신 양세영 감독이 선수로 출전했다.[24] 일본 컬링계의 대모로 통하며 SC카루이자와클럽 뿐만 아니라 한때는 중부전력 컬링팀의 코치도 겸했다. 막내딸 나나에가 야마구치 츠요시와 결혼해 야마구치와는 장모-사위 관계다.[25] KiTCurlingClub. 규정 때문에 공식 대회에서는 '팀 히라타'로 활동한다.[26] 전 후지큐 코치.[27] 여동생 카나이 아스카도 컬링선수로 엘리트 아카데미 소속이며, 2019년 세계주니어선수권에 일본 대표팀 핍스로 이름을 올렸다.[28] 규정 때문에 그동안 일본선수권에는 '삿포로', '팀 홋카이도' 등의 명의로 출전했다.[29] 4REAL 시절에는 주로 일본에서 열린 투어 대회에만 참가했고 캐나다 원정은 1달 이내로 짧아서 투어 랭킹 역시 낮을 수밖에 없었다.[30] 원래 태평양-아시아 지역에는 2팀이 세계선수권에 직행할 수 있는데, 2019년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대표팀이었던 서울시청이 꼴찌를 하는 바람에 남자부는 1팀이 줄어 2019년 PACC 우승팀만 세계선수권에 직행하게 됐다.[31] 2015년부터 평창 올림픽까지 경북체육회 남자팀의 외국인 코치였다.[32] 아베 신조와 이름이 비슷한데, 성의 읽는 방법이 같을 뿐 보다시피 표기는 다르다.[33] 2005년부터 팀 아오모리의 코치를 역임하며 팀 아오모리가 일본 대표팀으로 출전한 2006 토리노 올림픽과 2010 밴쿠버 올림픽 당시 여자 대표팀 감독도 맡았다. 그런데 나이로는 선수였던 오노데라 아유미(오가사와라 아유미)와 하야시 유미에(후나야마 유미에)보다 2살 연하였다. 오가사와라와는 2017년 일본 믹스더블 선수권에 같이 출전해 우승한 바 있다.[34] 중부전력의 매니저 시미즈 에미의 오빠. 남동생 시미즈 요시로도 컬링선수로 '카루이자와CC(팀 시미즈)'의 스킵이다.[35] 중부전력 서드 마츠무라 치아키의 오빠. 남동생 마츠무라 하야토도 컬링선수로 'Ignites 나가노(팀 마츠무라)'의 스킵이다. 부모님도 일본 믹스더블 선수권에 여러 차례 출전한 적 있으며 아버지 마츠무라 타모츠는 '카루이자와 CC'의 서드다. 아내는 요시다 치나미-유리카 자매의 맏언니 요시다 나츠키(마츠무라 나츠키).[36] 2019-2020 시즌을 앞두고 궤양성 대장염으로 투병하면서 2019년 PACC까지는 아이타 코스케가 리드를 맡았다.[37] 2018년 일본선수권에서 깜짝 우승하며 세계선수권에 출전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스킵인 자신의 이름을 따 팀 이와이 명의로 참가했는데, 2018-2019 시즌에는 팀원 문제로 대학생이 아님에도 본의 아니게 삿포로국제대학 팀에 소속돼 활동했었다.[38] 홋카이도청에 근무 중인 현직 공무원이었으나 모로즈미의 설득으로 공무원을 그만두고 팀에 합류했다.[39] 그동안 컬링선수가 일본 선수단 기수를 맡은 적이 없어서 선정됐다.[40] Fuji Miki. 일본계 캐나다인으로, 미키가 성이다.[41] 심슨즈와 2002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여자 대표팀 코치였던 오미야 요시유키의 딸. 주니어 시절에는 모토하시 마리의 마리린즈에서 활동했으며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02년 세계주니어선수권에 출전한 바 있다.[42] 중학교 시절 요시다 치나미, 스즈키 유미와 ROBINS 팀으로 활동했고, 고등학교 때는 혼자만 다른 학교로 진학해 요시무라 사야카의 WINS 팀에서 활동했다. 한편 100m 허들과 7종 경기로 인터하이에 출장할 정도로 육상에도 재능을 보여, 고교 졸업 후 다른 WINS 선수들이 삿포로국제대학에 진학한 것과 달리 혼자 육상 명문으로 꼽히는 추쿄대학에 육상 특기생으로 진학했다. 대학 진학 후 오가사와라 아유미와 요시다 치나미의 권유로 홋카이도은행에 입단했다. 한편 아버지 오노데라 료지는 로코 솔라레의 코치다.[43] 초등학교 때 WINS 팀을 결성해 대학 때까지 비공식적으로 이 이름을 썼으나 대학 졸업을 앞두고 혼자만 홋카이도은행에 스카우트되면서 남은 동기들끼리 만든 팀이 히토커뮤니케이션 red WINS다.[44] 학창 시절은 아오모리에서 보냈다.[45] 결혼 전 성은 타이라.[46] 마츠무라는 컬링을 관두려고 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팀에 남았다.[47] 실제 대회에는 규정 때문에 '팀 카루이자와'로 출전했다. 이후 중부전력에 입사하는 나카지마 세이나가 당시 스킵이었다.[48] 앞서 2017년 일본선수권에서도 우승했으나, 2016년 PACC에서 당시 일본 여자 대표팀이 3위에 그쳐서 세계선수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49]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의 서드 시미즈 테츠로의 여동생.[50]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의 스킵 마츠무라 유타의 여동생.[51] 원래 체조를 하다가 중학생 때 컬링으로 전향했다.[52] 후지고코 중 하나인 야마나카 호가 있다. 촌 전체가 해발 1000m 정도의 고원 지대라서 연평균 기온이 홋카이도와 비슷하다. 일본에 컬링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1937년''' 1월에 일본 최초로 컬링 대회가 열렸다는 기사가 있는데, 대회 장소가 얼어붙은 야마나카 호였다고 한다.[53] 참고로 팀 창단 당시 '''중학생'''이었다.[54] 특히나 그동안 일본 컬링은 홋카이도 출신과 나가노현 출신의 경쟁이 주류였는데, 후지큐의 스킵인 코아나 토리는 야마나시현 출신이다.[55] 이란성 쌍둥이로 남자 형제인 이시가키 류야도 컬링선수 출신으로 2010년 세계선수권에 일본 대표팀의 핍스로 출전한 바 있다. 다만 전문선수의 길을 걸은 마오와 달리 류야는 이후 취직하면서 취미로 컬링을 했는데, 2020년 11월 남매가 같이 관동 믹스더블 선수권에 함께 출전해 준우승했다.[56] 출산 때문에 2018 세계선수권에는 빠지고, 대신 홋카이도은행의 오노데라 카호가 서드로 출전했다.[57] 결혼 전 성은 소노베.[58] 결혼 전 성은 후카자와.[59] 창업주의 성에서 따온 이름이다. 참고로 河西는 카사이라고도 읽을 수 있는데, 실제 다른 곳에 카사이건설이 별개로 있다.[60] 비록 시기가 너무 일렀지만 이후 올림픽 때 여자 대표팀의 활약으로 컬링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사장이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61] 이후 결혼해서 오사와로 성을 바꿨다.[62] 당시 카와니시건설 소속. 올림픽 한정 핍스로 출전했다.[63] 현재 홋카이도은행 소속인 오미야 안나의 아버지. 1998년 나가노 올림픽 때는 선수로서 당시 대표팀의 세컨드를 맡았다.[64] 이후 결혼해서 세키와로 성을 바꾼다.[65] 이후 결혼해서 마츠자와로 성을 바꾼다.[66] 아오모리시 문화스포츠진흥공사의 직원으로 취직시켰다.[67] 둘은 이후 2011년 홋카이도은행 포르티우스 팀을 만들며 복귀했다.[68] 이후 결혼하면서 성을 오가사와라로 바꿨다.[69] 이후 결혼하면서 성을 후나야마로 바꿨다.[70] 그나마 토리노 올림픽을 앞두고 지역 후원회가 생긴 덕분에 매년 해외 원정을 갈 수 있었다고.[71] 사토가 흔한 성인데다 서로 이름 표기법도 다르다. 미츠키는 이름을 히라가나로 표기하는 반면 미유키는 한자로 표기한다.[72] 이시가키 마오가 운영을 맡았다. 2016년 2월 이후 업데이트 중단.[73] 실제 대회에서는 규정 때문에 학교명을 팀 이름으로 썼다.[74] 치나미의 중학교 동창인 스즈키 유미와 오노데라 카호, 치나미의 동생 요시다 유리카가 같은 팀이었다. 실제 대회에서는 규정 때문에 'JJ토코로', '팀 토코로' 등의 명의를 사용했다.[75] 동생인 사츠키가 스킵이고 언니 후지사와 시오리가 서드를 맡았고, 팀 코치는 후지사와 자매의 어머니인 후지사와 나오코가 맡았다.[76] 실제 대회에서는 규정 때문에 '팀 키타미' 명의로 출전했다.[77] 당시 후지사와는 일본 주니어 선수권에만 집중하며 일본선수권에는 출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