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내전
(아랍어) الحرب الأهلية اللبنانية
(히브리어) מלחמת האזרחים בלבנון
Lebanese Civil War (영어)
La guerre du Liban, ou guerre civile libanaise (프랑스어)
La guerra civile libanese, Guerra civile in libano (이탈리아어)
레바논은 중동 한복판에 위치하는 인구 비율로 따지면 '''중동 제1의 기독교 국가''' (기독교 인구수로는 이집트가 1위, 비율은 10%미만이지만 콥트교를 비롯한 기독교도가 900만 정도)다. 이슬람이 발흥하기 수백 년 전부터 로마 제국의 속주인 시리아 코일레 속주(Provincia Syria Coele) 관할구역이었고, 로마제국이 쇠퇴할 때까지 그 보호 아래에 있었다. 그 영향으로 고대부터 기독계 마론파의 비중이 상당한 지역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레반트 일대를 뺏겼다가 잠시 수복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쇠퇴한 이후로는 이슬람 제국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십자군(1095~1291)시대에는 다시 기독교 세력의 지배를 받는다. 마지막 십자군 국가 트리폴리 백국과 십자군 국가의 맹주인 예루살렘 왕국이 레반트 지역에서 쫓겨 날 때까지 (해안 지역 한정) 2백 년 동안 십자군 국가가 존속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마론파 기독교도들이 적극적으로 십자군에 협력하였다.
십자군 국가 멸망(1291) 이후 레바논은 맘루크 왕조의 영향을 받다가 이슬람 역사상 최강의 제국인 오스만 제국(1299~1922)에 점령 당한 후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허약해지자 무슬림과 마론파 교도 간의 다툼이 끊이지 않다가, 프랑스가 개입해 1861년 오스만 제국에게서 자치권을 보장 받게 되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전하자 프랑스 제3공화국은 시리아와 레바논을 식민지 시리아-레바논으로 삼아 위임 통치하기 시작했다.
원래 레바논의 영역은‘산악 레바논’이라고 불렸는데, 드루즈파 에미르가 다스리는 오스만 제국의 자치 지역이던 산악 레바논 에미르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원래의 레바논 영역(산악 레바논)을 넘어‘대 레바논’이라고 불리는 시리아 영역인 베카 계곡, 레바논 북부와 트리폴리시, 레바논 남부를 포함하여 레바논 국경선을 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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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선 안이 원래의 '산악 레바논' 영역.
이 때 시리아 내륙 일부가 레바논으로 편입되면서 기독교인이 다수지만 무슬림들의 비중도 상당해졌다. 이렇게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그어버린 국경선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 간의 반목을 이용해서 레바논의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방해하려는 프랑스의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사실 원래 오스만 제국 시절인 1913년 레바논(소레바논)의 인구 41만 명의 대부분(79.4%)이 기독교도였고, 무슬림은 20.6%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오스만 제국 멸망 이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면서 무슬림이 다수인 베카 계곡 등이 레바논에 편입되다 보니, 1932년 센서스에서는 기독교인의 비율은 52.4%로 떨어지고, 무슬림의 비율이 39%까지 올라갔다.이후 기독교인들이 대거 해외로 유출[1] 되고 난민을 받는 등의 결과로 기독교-이슬람 인구가 역전된 것이다.
다만 52.4%라는 비율은 기독교도들을 지원해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자 했던 프랑스 위임통치 정부가 1932년 조사 당시 외국에 있는 레바논 기독교도들까지 포함시켜 실상을 조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구 87만 5252명 중 기독교도가 45만 8987명으로 여타 집단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실상은 기독교도와 무슬림 비율이 같거나 후자가 살짝 우세한 것이었다. 프랑스 당국은 이러한 각색된 결과로 레바논 의회의 의석 배분에 있어 기독교도와 무슬림 비율을 6대 5로 설정하였고, 이는 독립 후에 그대로 적용되어 사실 5보다는 6에 가까웠던 무슬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내전의 씨앗이 되었다. 천년 이상 공존하던 레바논의 아랍인들이 십자군 이후 최초로 종교를 따라 대립하게 된 것이다.
독립 운동 과정에서 원래 레바논 지역의 주류였던 마론파 교인들은 소 레바논주의를 주장해서 기독계 거주 지역 위주로 영토 면적을 줄이려고 했지만 타 기독교 종파와 드루즈파,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계열은 아랍 민족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대 레바논주의를 주장했다.
이 갈등은 1943년 독립하면서 국민협정으로 다수인 마론파 기독교도가 대통령직을 차지하고 수니파가 국무총리, 시아파가 국회의장 등 각 종파들이 각료와 군의 직위를 나누어 가지고 국회의석을 기독교(57) : 무슬림(42)로 권력 배분하기로 합의하면서 임시로 봉합됐다.
하지만 독립을 위해 미뤄놨던 이 내부 갈등은 다시 폭발해 레바논 내전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고 만다.
이집트 혁명(1952)과 수에즈 전쟁(1956)으로 아랍 민족주의가 유행하고 이스라엘의 탄압을 피해 대규모 팔레스타인 난민이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유입된다. 이런 변화는 레바논에 권력불균형을 초래했다. 그 와중에 기독교계 샤문 대통령은 1957년 의회선거에서 기독교 진영의 확대를 노리면서 헌법을 무시하고 국가원수의 지위를 유지하려 하자 레바논 내 이슬람 세력은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1958년 5월 전국적으로 소요를 일으켰으며 한 달 후에는 수도 베이루트까지 파급되어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샤문 대통령은 1958년 7월 15일 미국에게 개입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영국과 터키 주둔 병력 15,000명을 베이루트에 상륙시켰다. 미군이 개입하고 대통령 선출을 국회에 맡기기로 하면서 일단 사태는 수습되었다. 미국은 1958년 10월 중순부터 병력을 철수시켰으나 3개월간의 내전으로 2,7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미군도 240명의 사상자를 냈다. 팔레스타인 난민 발생 배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팔레스타인/역사 문서 참조.
이 기간 동안 아랍계는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과 무슬림의 높은 출산율로 인하여 급증하고, 기존 레바논의 주류를 차지했던 기독교계 인구가 전체 인구의 과반수에서 1/3수준까지 감소했다.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 범아랍주의와 소레바논주의, 우익과 좌익이 겨루는 혼란상황에 빠져 들고 있는데 집권세력인 마론파 기독교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양보하면서 타협하고 국정을 안정시킬 마음이 없었다.
한편, 1964년 자신들의 정치적,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아랍권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자, 아메드 슈커리를 수장으로 내세워 PLO가 창설되었다. 1969년 야세르 아라파트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던 PLO를 장악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한 민족 해방운동 기구로 변모시켰다.
PLO 창립 초기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은 요르단에 근거지를 두었다. 그러나 PLO가 요르단 정부와 각종 마찰을 빚다가 PFLP 동시다발 하이재킹 사건을 저지르자, 참고 참았던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가 빡돌아서 1970년 9월 15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PLO 진압작전을 요르단군에 지시한다. 일명 검은 9월 사건이다. 이때 살아남은 일부 과격파 PLO가 검은 9월단을 결성하고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를 일으킨다.
PLO는 검은 9월 사건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고 인접한 레바논으로 거점을 이동하여 베이루트에 캠프를 설치했다.
레바논 정부는 1969년 PLO와 카이로 협정을 맺어 레바논 남부 지역에 PLO가 사실상 지배하는 팔레스타인 난민 밀집 지역를 방관하였고, 이 지역을 거점으로 PLO가 벌이는 테러활동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모른 척 해 버렸다. 레바논의 주류인 마론파는 "레바논 남부는 어차피 기독교도가 살던 소 레바논 지역도 아니고 원래 이슬람 애들이 살던 땅. 어떻게 돌아가던 우리는 관심없어"라는 마인드 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PLO는 베이루트와 레바논 남부를 근거지로 해서 1974년 4월의 Kiyat Shmona 학살, 5월의 Ma’alot 학살을 비롯한 대 이스라엘 테러활동을 거듭했고, 이스라엘은 공군이나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레바논 남부 및 베이루트를 수시로 공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의 개입은 다시 레바논 내에서 분쟁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5년 4월, 레바논 정부에서 마론파 교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어업권을 주자 시아파 어민들이 이에 반발하여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에 레바논군이 시아파 어민들을 무력으로 강제진압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자극 받았는지 PLO 계열 전사들이 탄 버스가 기독교 마론파 팔랑헤당이 예배를 거행하는 교회에 총격을 가하고, 팔랑헤당 민병대도 순순히 당하지 않고 응전함으로써 총격전으로 27명이 사망했다. 레바논은 기독교계와 이슬람계가 서로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나 있던 상황이었고, 이 교회 총격사건을 계기(핑계?)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은 저격, 로켓탄 공격 등 산발적으로 벌어졌으며 PLO, 마론파, 시아파, 수니파, 정교회 등의 민병대는 교전보다 각기 검문소를 설치하여 대립하는 파벌의 민간인을 납치, 고문, 처형하는 데 열을 올렸다.
내전 발발 이후 외국인 관광객과 외교관의 납치도 빈발했으며, 경찰력이 마비되고 중동의 금융허브로 중동의 파리라고 불렸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전투와 범죄로 황폐화되었다.
1975년 10월 이후 해안선을 따라 지은 호텔 등을 각종 종파의 민병대들이 검거하여 요새화 한 후에 시가전을 벌였다. 진지로 변한 호텔을 향해 상대방 민병대에게 총격을 가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 결과 베이루트는 이슬람 교도와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은 서(西) 베이루트와 마론파가 거주하던 동(東) 베이루트로 나누어졌다.
1976년 5월, 레바논 정부는 내전이 점점 수습불가 상황으로 치닫자, 역사적, 문화적으로 그나마 가까운 시리아에 개입을 요청한다. 시리아는 무슬림이 절대다수이긴 하지만 기독교도도 적지 않아 '''중동 제2의 기독교 국가'''이고 다른 이슬람 국가에 비해서는 기독교에 친화적이다. 레바논 정부의 요청을 받은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를 지원하고 급진적 PLO 및 드루즈파를 제압하는데 협력하기로 하고 레바논에 시리아군을 파견했다.
1976년 9월 기독계 마론파 내에서도 시리아에 대한 반발이 발생하여 반시리아, 반팔레스타인을 기치로 삼아 레바논 군단(LF)이라는 민병대를 결성했다. 시리아군과 LF는 산발적으로 충돌했고 PLO나 드루즈파와도 전투를 펼쳤다. 정규군인 시리아군에 비해서 열세에 놓인 LF는 자신을 지원해 줄 세력을 찾았고, 이스라엘은 LF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레바논 내 이슬람 세력과 싸우도록 부추긴다. 이스라엘 판 이이제이 전술이다.
한편, 시리아는 레바논 내전 개입 전에 이스라엘과 비공개로 ‘레드라인’ 협정을 체결했다. 베이루트 이남에 여단 규모를 웃도는 시리아 주력부대를 주둔시키지 않고, 레바논 안에 이스라엘을 사정권에 둘 수 있는 시리아군의 장거리포, 미사일, 로켓탄을 배치하지 않으며, 전투기나 폭격기는 일체 레바논 국내에 주둔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LF는 이 협정을 역이용해서 시리아군을 상대로 도발을 감행해서 마론파의 거점인 동 베이루트에 시라아 군이 포격을 가하도록 유도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중대한 협정 위반으로 시리아를 비난했고 특수부대와 공군기를 출동시켰고, 리타니 강 이남의 레바논 남부를 점령했으나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레바논군 장교였던 하다트에게 점령지를 양도했다. 야심만만했던 하다트는 자유레바논군이라는 민병 조직을 결성해서 이스라엘에 협력했다.
1980년에는 레바논 각지에서 시리아군과 LF가 충돌하고, 베이루트와 베카 고원을 연결하는 군사도로를 건설한 LF에게 시리아가 공격을 가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전투기가 시리아 헬기를 격추시켰다. 시리아도 대응으로 지대공 미사일을 베카 고원에 전진 배치하는 등 군사행동에 나선다. 이로서 우리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베이루트 이북은 시리아가 베이루트 이남은 이스라엘이 먹죠라고 했던 '레드라인' 협정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1981년 7월 10일, 레바논 남부에서 교전이 벌어지자 이스라엘은 공습을 개시했고 5일 뒤에 PLO는 이스라엘 북부에 포격을 개시했다.
1981년 7월 17일, 이스라엘 공군이 베이루트 시내의 PLO본부와 남부 레바논의 PLO 거점에 대규모 공격을 실시하여 약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800명이 부상당했다. 국제사회가 개입하자 이스라엘군은 일단 철수했다.
1982년 4월 21일 자유레바논군의 포대를 방문한 이스라엘군 장교가 지뢰를 밟고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보복으로 PLO가 통제하고 있는 다무르의 항구마을을 공격하여 23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5월 9일 이스라엘 공군은 레바논을 재차 공격했다.
이때부터는 전쟁터만 레바논이지 사실상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전쟁이었다. 시리아와 레바논 이외의 다른 아랍 국가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PLO는 국가급 무장단체지 국가는 아니였으니까..
1982년 6월, 이스라엘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 직전에 PLO, 시리아군 전력은 다음과 같았다.
PLO는 정규훈련을 받은 병력 4,500명을 포함하여 6,000여명을 남부 레바논에 배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60대의 T-34/85와 T-54, 55 20여 대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130mm포와 155mm중포를 포함한 야포가 90문, 122mm 카추샤 다연장로켓 80문 및 120mm~160mm 박격포 200문으로 포병전력을 구성했다. 이 외에도 대공화기, 대전차 미사일 등을 장비하여 게릴라 조직의 수준을 넘어 준 정규군급의 무장을 장비했으며 이스라엘의 정보부가 분석한 바로는 1981년 6월에 약 80문이었던 야포와 로켓포의 수를 불과 1년 만에 3배인 250문으로 증강시킬 정도였다.
시리아군은 레바논 내전 개입 이후 항상 1개 사단전력을 레바논에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레바논의 시리아 주둔군은 베카계곡과 베이루트에 둘로 나뉘어 병력 3만에 전차 71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82년 6월 6일, 영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 테러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이스라엘은 ‘갈릴리 평화’ 작전을 개시한다. 이스라엘군은 약 6만~7만 8천의 병력을 이즈하크 모르드카이 소장의 서부군(지중해 방면)과 아미르 드로리 중장의 중부군(레바논 산지 서쪽 능선), 아비그도르 벤갈 소장의 동부군(베카 계곡과 헤르몬 산지), 3방향으로 레바논 영내로 진입한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군은 PLO가 장악하고 있는 뷰포트 성채(Beaufort Castle)에 골라니 여단 소속 2개 중대를 투입하여 갈고리를 이용해서 암벽을 기어 올랐고 PLO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백병전 끝에 요새를 점령했다.
1982년 6월 7일 이스라엘군은 공격을 재개해 티레를 고립시켰으며 북쪽의 시돈에 함포사격을 가하면서 특수부대를 상륙시키고 레바논 남부의 UNIFIL 지역을 돌파하고 각 거점을 우회하면서 빠르게 레바논으로 진격했지만 야간이 되자 정돈을 위해 잠시 후퇴했다.
1982년 6월 8일, 이스라엘군은 점차 PLO가 아니라 시리아군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스라엘 중부군의 선두 기동부대는 후속부대가 거점을 점령하도록 맡겨두고 베이루트를 향해 진격했다. 해안에서는 아침에 공중전이 벌어져 이스라엘 공군기가 시리아의 MiG 2기를 격추시켰고 티레가 함락되고 시돈이 포위되면서 베이루트 진입로에 장애물을 제거했다.
1982년 6월 9일, 이스라엘군은 테크니컬 새거 대전차 미사일(ATM) 팀에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보병, 포병, 기갑에 의한 연계와 반응장갑을 활용하여 공격에 대응해 나갔다. 이스라엘 지상군이 베카 고원의 입구인 Joub Jannine을 장악하면서 시리아는 베이루트 주둔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레바논 주둔군이 괴멸될 것을 우려한 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군의 지대공 미사일(SAM) 망을 베카 고원으로 전진배치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이미 무인정찰기(RPV)로 이 지역의 병력 이동을 낱낱히 관측했고 지상관측부대와 정찰기의 정보는 통신망을 관할하는 E-2C 호크아이 조기경보기에 전송되었다. 이런 압도적인 정보력을 바탕으로 이스라엘군은 전진배치된 SAM을 걷어내고 시리아 공군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6월 9일 오후 2시를 작전을 개기한다.
96기의 F-15, F-16, Kifr C-2S가 제공권을 장악한 가운데 RPV는 전파방해를 개시했고 F-4 전폭기들이 파상공세를 개시하자 전자장비가 마비된 시리아군 SAM기지는 혼란에 휩쌓였고 연이어 제2파 92기가 공격을 개시하고 지상군이 포격을 개시하자 SAM 포대들은 차례차례 전투불능이 됐다. 불과 1시간 만에 19개소의 SAM기지 중 17개소가 완파되었고 남은 기지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반면, 이스라엘의 전력손실은 A-4 1기와 F-4 1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스라엘군의 제2파가 공격을 개시하자 시리아 공군은 MiG-21, 23, 25 및 수호이 Su-7s을 대규모로 출격시켜 요격에 나섰으며 양측 합계 200기에 달하는 전투기들이 베카 계곡 상공에서 공중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은 시리아 공군의 접근을 조기경보기로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공군은 당대 최강의 제공전투기 F-15로 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리아 공군은 전적으로 지상 기지에서 관제를 받는 것을 전제로 훈련을 받았다.[2] 즉, 시리아 공군은 독립적인 방어체계가 아니라 지상 관제를 받는 대공방어망 역할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 관제를 해주어야 할 기지들이 이스라엘 공군의 전파방해(ECM)에 전혀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결국 시리아 공군은 베카 계곡에서 참패했다.
이 날 이스라엘군은 제1전에서만 29기의 MiG기를 격추시켰고 그날 밤까지 41기 이상의 시리아 공군기가 격추시켰다. 2차대전 이후 단일 교전 기준으로 공중전 최대규모 승리였다. 이스라엘기의 격추는 대부분 1976년에 도입한 신형 AIM-9L 사이드와인더에 의한 것으로 기체의 열을 감지하는 이 미사일은 적기를 HUD에 넣기만 하면 적기가 어떻게 회피해도 록온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시리아군의 경우에는 전반적으로 공대공 유도미사일에서 열세에 있었고 소련의 신형 공대공 미사일 Atoll도 성능에서 훨씬 뒤처져 있었다.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은 해안에서는 해군의 지원포화에 힘입어 다무르(Damour)를 점령했고 밤까지 해안의 이스라엘 군은 베이루트를 불과 10km 남겨둔 지점까지 전진했지만 중부집단과 합류를 위해 대기에 들어갔다. 한편 중부군은 베이루트-다마스커스간 고속도를 점령해 나갔으나 시리아군은 제진(Jezzine)북부의 술탄 야쿠브(Sultan Yakoub)에 1특공대대와 제58기계화 여단를 매목시킨 채로 이스라엘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982년 6월 10일 주간에 시리아군이 도로를 따라 맹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야간에 전진하던 이스라엘 군은 10일 밤 기습을 당했다. 시리아군이 포격을 가하자 흙먼지가 일어 시야에 제한을 받았고, 시야 확보를 위해 해치를 열고 몸을 내민 이스라엘군 전차장들은 시리아군 저격수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1982년 6월 11일 새벽까지 이스라엘군은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상황을 파악한 후방의 이스라엘 포병들이 지원포격을 실시하면서 상황이 호전되었고 해가 뜰 무렵에는 본격적인 전차전이 벌어졌다. 시리아군도 다마스커스-베이루트 고속도로를 통해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스라엘 공군이 지원하러 온 시리아군 제1기갑사단 전차 절반 이상을 이동 중에 파괴하여 지원을 차단했다. 6시간이 넘는 전차전 끝에 이스라엘은 베카-제닌을 잇는 도로를 완전히 장악한다.
당시 최신식이었던 메르카바 전차와 T-72 전차 간의 대결은 메르카바 전차의 완승으로 끝났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피해를 입은 시리아군은 결국 11일 정오 휴전에 합의했으며 PLO는 베이루트에서 절망적인 농성을 준비했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남부 4,500 ㎦를 점령했지만 이스라엘의 침공에 전 세계의 비난이 몰렸고 이미 시돈에서 격렬한 시가전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낸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에서도 격렬한 시가전을 무턱대고 시도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를 포위한 채 직접적인 시가전에 바로 들어가기 전에 확성기를 이용해서 항복을 권고했다. 그러자 PLO는 이스라엘 공군의 정밀폭격에 맞서 민간인을 지붕에 올려놓는 방법으로 응수했다.
PLO 지도자 아라파트는 결사항전을 부르짖었지만, 레바논 내에 이미 아군은 없었다. 레바논 최대의 파벌인 이슬람 시아파는 이제 골치거리가 되버린 PLO를 공격하는 이스라엘을 수수방관했고 마론파 기독교 민병대는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에 협력했다. PLO는 12살 소년병에게까지 RPG-7을 쥐어주면서 저항했지만 아랍권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성명을 발표할 뿐 어느 나라도 군사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시리아와 정전을 맺은 4일 후, 베이루트를 포위한 이스라엘군은 보병과 포병을 투입해서 시가전을 시작했다. PLO는 항복을 거부한 채 베이루트에서 저항했지만 외부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레바논 이슬람 세력까지 나서서 PLO에게 명예로운 후퇴를 요구하자 PLO는 눈물을 머금고 베이루트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7월 3일 아라파트는 PLO 지도부를 이끌고 레바논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미국 정부의 레바논 특사인 필립 하비브[3] 에게 전달한다.
1982년 8월 둘째주부터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UN 평화유지군의 호위를 받으며 베이루트에서 철수했다.
PLO와 시리아군 축출이라는 1차 목표를 달성한 이스라엘은 마론파 기독교 팔랑헤당의 젊은 지도자 바시르 제마엘을 내세워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정권을 수립하려고 시도했고, 1982년 8월 23일 바시르 제마엘은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지만 같은 해 9월 14일, 팔랑헤당 회합에 참석했다가 시리아의 비밀요원 하비브 사르투니에게 암살당했다.
1982년 9월 16일, 정치공작을 방해 받은 이스라엘군과 지도자를 잃은 기독교계 팔랑헤 민병대는 베이루트 외곽에 있는 두 개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진입한다. 이스라엘군은 난민촌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했고, 기독교계 팔랑헤당 민병대 200명은 난민촌에 숨어든 PLO 전사들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난민촌으로 들이닥쳤다.
지도자가 암살당해 눈이 뒤집어진 팔랑헤당 민병대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PLO 색출은 명분에 불과했고, 난민촌에 진입한 민병대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3일에 지나고 18일이 돼서야 민병대가 난민촌에서 철수했다. 그들이 철수한 난민촌에는 수백구가 넘는 시체가 널려 있었고, 여자와 어린이들의 시체도 36구나 확인됐다.
학살 사건의 희생자는 레바논 경찰이 460명 이상, 이스라엘은 800명 이상, PLO는 3,000명 이상이라고 각각 추정했다. 팔랑헤당 민병대가 증거인멸을 위해 시체를 고의적으로 훼손한 경우가 많아서 민간인이 정확하게 몇명이나 희생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스라엘군은 단순히 난민촌에서 외곽으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한 수준으로 방관만 한 게 아니었다. 팔랑헤당 민병대가 난민촌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중에 팔랑헤당 민병대를 위해 이스라엘군이 난민촌 상공에다 조명탄을 지원사격 하면서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를 '''사브라, 샤틸라 난민촌 학살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이 드러나면서 '''이스라엘 국내에서만 30만 명이 책임자 처벌을 외칠 정도로'''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고, 이로 인해서 책임자인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이 퇴임하였으며 이스라엘의 물가상승률은 크게 치솟아서 1983년에 191%, 1984년에 445%를 기록할 정도의 대타격을 입는다. 이는 이스라엘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내전 개입은 공식적으로 밝혀진 '''9.11 테러의 도화선'''이다. 빈 라덴이 이스라엘의 침공을 보고 격분해서 9.11 테러를 기획한 것이라고.
블랙 라군에서도 이에 관한 내용이 비슷하게나마 나오는데, 이때는 12화에 1987년 베이루트라 언급함으로써 연도가 바뀌었고 적십자 캠프라 나오긴 했지만 사브라, 샤틸라 난민촌 학살사건이 모티브임을 알 수 있다.
1983년 10월 16일 레바논 남부의 나바티야에서 이스라엘군이 시아파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군은 격렬한 저항에 시달렸다. 매복공격, 차량을 이용한 자살폭탄공격, 폭탄테러 등등 수단과 장소를 가리지 않은 테러 앞에 이스라엘 군은 끝없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때 이스라엘을 상대로 레바논 남부에서 게릴라 전에 나서면서 세력을 키운 단체가 있었으니, 그 단체가 바로 헤즈볼라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1990년 레바논 내전 종결 후, 16년 만에 제2라운드를 본격적으로 치룬다. 물론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이 중간에 16년 동안이나 안 싸우고 쉬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헤즈볼라는 1982년 창설 이래로 쉬지 않고 이스라엘을 목표로 테러와 게릴라 전을 벌렸다. 이스라엘도 지지 않고 대 테러 부대를 투입한 토벌 작전과 폭격, 암살 등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싸우던 양측의 분쟁이 전쟁급으로 확대 된 게 2006년...
이스라엘 군은 레바논에 정치공작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자 1983년 9월 말부터 국제여론의 악화를 핑계로 베이루트에서 철수해서 레바논 남부로 후퇴했다가 2000년 완전히 철수한다.
이스라엘군이 빠져나간 자리를 미국을 핵심으로 하는 프랑스, 이탈리아군이 평화유지 활동을 위해 들어왔다.
1983년 10월 23일, 헤즈볼라 조직원이 다이너마이트 수 톤을 실은 트럭으로 베이루트 미군 사령부에 돌진하여 자폭테러를 감행했다. 헤즈볼라 입장에서는 평화유지군이라면서 들어온 미군도 이스라엘군과 똑같이 서방세계에서 온 침략자였다. 이 자폭테러 한 방에 미군 241명, 프랑스군 58명이 폭사했고, 이후에도 평화유지군을 상대로 자살폭탄테러가 계속되자 미군은 결국 철수한다.
이후 레바논 정부는 유명 무실해지고 각 종파별 민병대가 레바논을 분할 통치하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된다. 나중에는 같은 종파 민병대 간에도 대립이 발생했다.
1986년 이스라엘에게 패배해서 물러났던 시리아군이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다시 레바논에 개입한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로 물러서자 이스라엘 등쌀에 쫓겨났던 PLO 전사들도 레바논으로 돌아왔는데, 시리아 입장에서는 PLO도 껄끄러운 존재라 시리아군과 기독교계 아말 민병대가 PLO 소탕을 위해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를 공격했다. 시리아군이 협조하는 가운데 아말 민병대가 PLO 계열 난민 캠프를 포위한 뒤에 물과 식량 유입을 차단하고, 집요하게 총격전을 벌이자 다수의 팔레스타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1988년에 아민 제마이엘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되었지만 원래 이슬람교의 자리였던 수상직에 기독교계 마론파인 미셸 아운이 임명되었다. 그 직후 아민은 레바논에서 망명하여 미국으로 이주했다. 레바논은 일시적으로 대통령이 공석인 상황이 발생했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재로 내전 종결을 목표로 하는 타이프 합의가 채택되었다.
처음에 각 종파 민병지도자들과 시리아가 협상에 소극적이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설득으로 시리아는 찬성으로 돌아섰고, 각 종파별 민병대도 친 이란 파 헤즈볼라, 친 이스라엘파 남 레바논군, 반 시리아 파 아운파를 제외한 대부분 조직이 이 합의에 동의했다.
시리아는 반시리아파인 미셸 아운의 수상취임을 거부하여 전통적으로 수상을 배출했던 수니파에서 셀림 알 호스를 수상으로 취임시켰다. 그리고 시리아군 주둔지였던 베카 고원에서 사실상 휴면상태로 있던 라야크 공군기지에 국회의원을 소집시켜 명문가 출신 정치가였던 르네 무아와드를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그 결과, 반시리아의 아운 정권과 타이프 합의에 기치한 무아와드 대통령의 정권, 두 세력이 레바논 국내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립이 이어지던 와중에 아운파를 뒤에서 도와주던 이라크가 1990년 걸프 전쟁에 돌입하면서 아운파에 대한 지원을 끊자, 아운파는 레바논 내외에서 고립된다.
1990년 8월 집권하고 있던 기독교계 마론파가 기독교와 무슬림간의 국회 의석을 64:64로 하는 헌법 개정에 동의했다.
1990년 10월 13일 걸프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던 미국의 묵인 아래 시리아군이 대대적인 아운파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시리아군에 패한 아운파 지도자 미셸 아운이 파리로 망명하는 것으로 레바논 내전은 막을 내린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진 1차 레바논 내전은 추정 사망자 15만 명 이상, 중상자 10만 명 이상, 난민 90만 명 이상, 잿더미로 변한 수많은 건물과 망가져 버린 경제를 남기고 끝났다. 레바논의 인구가 겨우 수백만에 불과하고 국토 면적도 대한민국의 1/10 수준인 소국임을 감안하면... 누구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는 완전 거덜났다.
굳이 '''1차 레바논 내전의 책임 소재를 가린다면 프랑스,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미국, 러시아, 영국, 이란, 이라크, 오스만제국, 마론파, PLO, 팔레스타인 난민, 이슬람 원리주의자, 종파별 분리주의자 등등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리고...
파리로 망명한 미셸 아운은 1991년 10월, 내란, 반란 등의 혐의에 대해서 사면을 받았다. 2005년 2월 친 서방파인 라피크 바하 엘 딘 알 하리리 총리가 차량폭탄테러로 죽고, 암살 배후가 시리아라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레바논에서는 시위가 이어졌다. 2005년 4월 시리아군이 레바논에서 전면 철수했다. 2005년 5월, 시리아군이 철수하자 미셸 아운은 레바논으로 귀국한다. 2014년 5월 미셜 술라이만 대통령의 임기만료 후 29개월 동안 레바논 의회는 정파갈등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했다. 2016년 10월 31일, 미셸 아운은 127명의 국회의원 중 83명의 찬성으로 임기 6년의 제13대 레바논 대통령에서 선출됐다. 기독교계 마론파에서 배정되는 레바논 대통령 자리에 미셸 아운이 오른 이유는 그가 기독교도임에도 친 헤즈볼라 성향이라는 점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관점도 있다.
(히브리어) מלחמת האזרחים בלבנון
Lebanese Civil War (영어)
La guerre du Liban, ou guerre civile libanaise (프랑스어)
La guerra civile libanese, Guerra civile in libano (이탈리아어)
1. 배경
레바논은 중동 한복판에 위치하는 인구 비율로 따지면 '''중동 제1의 기독교 국가''' (기독교 인구수로는 이집트가 1위, 비율은 10%미만이지만 콥트교를 비롯한 기독교도가 900만 정도)다. 이슬람이 발흥하기 수백 년 전부터 로마 제국의 속주인 시리아 코일레 속주(Provincia Syria Coele) 관할구역이었고, 로마제국이 쇠퇴할 때까지 그 보호 아래에 있었다. 그 영향으로 고대부터 기독계 마론파의 비중이 상당한 지역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레반트 일대를 뺏겼다가 잠시 수복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쇠퇴한 이후로는 이슬람 제국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십자군(1095~1291)시대에는 다시 기독교 세력의 지배를 받는다. 마지막 십자군 국가 트리폴리 백국과 십자군 국가의 맹주인 예루살렘 왕국이 레반트 지역에서 쫓겨 날 때까지 (해안 지역 한정) 2백 년 동안 십자군 국가가 존속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마론파 기독교도들이 적극적으로 십자군에 협력하였다.
십자군 국가 멸망(1291) 이후 레바논은 맘루크 왕조의 영향을 받다가 이슬람 역사상 최강의 제국인 오스만 제국(1299~1922)에 점령 당한 후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허약해지자 무슬림과 마론파 교도 간의 다툼이 끊이지 않다가, 프랑스가 개입해 1861년 오스만 제국에게서 자치권을 보장 받게 되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전하자 프랑스 제3공화국은 시리아와 레바논을 식민지 시리아-레바논으로 삼아 위임 통치하기 시작했다.
원래 레바논의 영역은‘산악 레바논’이라고 불렸는데, 드루즈파 에미르가 다스리는 오스만 제국의 자치 지역이던 산악 레바논 에미르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원래의 레바논 영역(산악 레바논)을 넘어‘대 레바논’이라고 불리는 시리아 영역인 베카 계곡, 레바논 북부와 트리폴리시, 레바논 남부를 포함하여 레바논 국경선을 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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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선 안이 원래의 '산악 레바논' 영역.
이 때 시리아 내륙 일부가 레바논으로 편입되면서 기독교인이 다수지만 무슬림들의 비중도 상당해졌다. 이렇게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그어버린 국경선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 간의 반목을 이용해서 레바논의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방해하려는 프랑스의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사실 원래 오스만 제국 시절인 1913년 레바논(소레바논)의 인구 41만 명의 대부분(79.4%)이 기독교도였고, 무슬림은 20.6%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오스만 제국 멸망 이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면서 무슬림이 다수인 베카 계곡 등이 레바논에 편입되다 보니, 1932년 센서스에서는 기독교인의 비율은 52.4%로 떨어지고, 무슬림의 비율이 39%까지 올라갔다.이후 기독교인들이 대거 해외로 유출[1] 되고 난민을 받는 등의 결과로 기독교-이슬람 인구가 역전된 것이다.
다만 52.4%라는 비율은 기독교도들을 지원해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자 했던 프랑스 위임통치 정부가 1932년 조사 당시 외국에 있는 레바논 기독교도들까지 포함시켜 실상을 조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구 87만 5252명 중 기독교도가 45만 8987명으로 여타 집단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실상은 기독교도와 무슬림 비율이 같거나 후자가 살짝 우세한 것이었다. 프랑스 당국은 이러한 각색된 결과로 레바논 의회의 의석 배분에 있어 기독교도와 무슬림 비율을 6대 5로 설정하였고, 이는 독립 후에 그대로 적용되어 사실 5보다는 6에 가까웠던 무슬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내전의 씨앗이 되었다. 천년 이상 공존하던 레바논의 아랍인들이 십자군 이후 최초로 종교를 따라 대립하게 된 것이다.
독립 운동 과정에서 원래 레바논 지역의 주류였던 마론파 교인들은 소 레바논주의를 주장해서 기독계 거주 지역 위주로 영토 면적을 줄이려고 했지만 타 기독교 종파와 드루즈파,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계열은 아랍 민족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대 레바논주의를 주장했다.
이 갈등은 1943년 독립하면서 국민협정으로 다수인 마론파 기독교도가 대통령직을 차지하고 수니파가 국무총리, 시아파가 국회의장 등 각 종파들이 각료와 군의 직위를 나누어 가지고 국회의석을 기독교(57) : 무슬림(42)로 권력 배분하기로 합의하면서 임시로 봉합됐다.
하지만 독립을 위해 미뤄놨던 이 내부 갈등은 다시 폭발해 레바논 내전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고 만다.
2. 독립 이후 불안한 국내정세 (1950~1974)
이집트 혁명(1952)과 수에즈 전쟁(1956)으로 아랍 민족주의가 유행하고 이스라엘의 탄압을 피해 대규모 팔레스타인 난민이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유입된다. 이런 변화는 레바논에 권력불균형을 초래했다. 그 와중에 기독교계 샤문 대통령은 1957년 의회선거에서 기독교 진영의 확대를 노리면서 헌법을 무시하고 국가원수의 지위를 유지하려 하자 레바논 내 이슬람 세력은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1958년 5월 전국적으로 소요를 일으켰으며 한 달 후에는 수도 베이루트까지 파급되어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샤문 대통령은 1958년 7월 15일 미국에게 개입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영국과 터키 주둔 병력 15,000명을 베이루트에 상륙시켰다. 미군이 개입하고 대통령 선출을 국회에 맡기기로 하면서 일단 사태는 수습되었다. 미국은 1958년 10월 중순부터 병력을 철수시켰으나 3개월간의 내전으로 2,7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미군도 240명의 사상자를 냈다. 팔레스타인 난민 발생 배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팔레스타인/역사 문서 참조.
이 기간 동안 아랍계는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과 무슬림의 높은 출산율로 인하여 급증하고, 기존 레바논의 주류를 차지했던 기독교계 인구가 전체 인구의 과반수에서 1/3수준까지 감소했다.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 범아랍주의와 소레바논주의, 우익과 좌익이 겨루는 혼란상황에 빠져 들고 있는데 집권세력인 마론파 기독교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양보하면서 타협하고 국정을 안정시킬 마음이 없었다.
한편, 1964년 자신들의 정치적,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아랍권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자, 아메드 슈커리를 수장으로 내세워 PLO가 창설되었다. 1969년 야세르 아라파트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던 PLO를 장악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한 민족 해방운동 기구로 변모시켰다.
PLO 창립 초기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은 요르단에 근거지를 두었다. 그러나 PLO가 요르단 정부와 각종 마찰을 빚다가 PFLP 동시다발 하이재킹 사건을 저지르자, 참고 참았던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가 빡돌아서 1970년 9월 15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PLO 진압작전을 요르단군에 지시한다. 일명 검은 9월 사건이다. 이때 살아남은 일부 과격파 PLO가 검은 9월단을 결성하고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를 일으킨다.
PLO는 검은 9월 사건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고 인접한 레바논으로 거점을 이동하여 베이루트에 캠프를 설치했다.
레바논 정부는 1969년 PLO와 카이로 협정을 맺어 레바논 남부 지역에 PLO가 사실상 지배하는 팔레스타인 난민 밀집 지역를 방관하였고, 이 지역을 거점으로 PLO가 벌이는 테러활동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모른 척 해 버렸다. 레바논의 주류인 마론파는 "레바논 남부는 어차피 기독교도가 살던 소 레바논 지역도 아니고 원래 이슬람 애들이 살던 땅. 어떻게 돌아가던 우리는 관심없어"라는 마인드 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PLO는 베이루트와 레바논 남부를 근거지로 해서 1974년 4월의 Kiyat Shmona 학살, 5월의 Ma’alot 학살을 비롯한 대 이스라엘 테러활동을 거듭했고, 이스라엘은 공군이나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레바논 남부 및 베이루트를 수시로 공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의 개입은 다시 레바논 내에서 분쟁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3. 본격적인 내전 진행(1975~1990)
3.1. 내전 발발 초창기
1975년 4월, 레바논 정부에서 마론파 교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어업권을 주자 시아파 어민들이 이에 반발하여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에 레바논군이 시아파 어민들을 무력으로 강제진압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자극 받았는지 PLO 계열 전사들이 탄 버스가 기독교 마론파 팔랑헤당이 예배를 거행하는 교회에 총격을 가하고, 팔랑헤당 민병대도 순순히 당하지 않고 응전함으로써 총격전으로 27명이 사망했다. 레바논은 기독교계와 이슬람계가 서로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나 있던 상황이었고, 이 교회 총격사건을 계기(핑계?)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은 저격, 로켓탄 공격 등 산발적으로 벌어졌으며 PLO, 마론파, 시아파, 수니파, 정교회 등의 민병대는 교전보다 각기 검문소를 설치하여 대립하는 파벌의 민간인을 납치, 고문, 처형하는 데 열을 올렸다.
내전 발발 이후 외국인 관광객과 외교관의 납치도 빈발했으며, 경찰력이 마비되고 중동의 금융허브로 중동의 파리라고 불렸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전투와 범죄로 황폐화되었다.
1975년 10월 이후 해안선을 따라 지은 호텔 등을 각종 종파의 민병대들이 검거하여 요새화 한 후에 시가전을 벌였다. 진지로 변한 호텔을 향해 상대방 민병대에게 총격을 가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 결과 베이루트는 이슬람 교도와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은 서(西) 베이루트와 마론파가 거주하던 동(東) 베이루트로 나누어졌다.
3.2. 시리아군 개입과 제1차 이스라엘-레바논 분쟁 (1976년 5월 ~ )
1976년 5월, 레바논 정부는 내전이 점점 수습불가 상황으로 치닫자, 역사적, 문화적으로 그나마 가까운 시리아에 개입을 요청한다. 시리아는 무슬림이 절대다수이긴 하지만 기독교도도 적지 않아 '''중동 제2의 기독교 국가'''이고 다른 이슬람 국가에 비해서는 기독교에 친화적이다. 레바논 정부의 요청을 받은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를 지원하고 급진적 PLO 및 드루즈파를 제압하는데 협력하기로 하고 레바논에 시리아군을 파견했다.
1976년 9월 기독계 마론파 내에서도 시리아에 대한 반발이 발생하여 반시리아, 반팔레스타인을 기치로 삼아 레바논 군단(LF)이라는 민병대를 결성했다. 시리아군과 LF는 산발적으로 충돌했고 PLO나 드루즈파와도 전투를 펼쳤다. 정규군인 시리아군에 비해서 열세에 놓인 LF는 자신을 지원해 줄 세력을 찾았고, 이스라엘은 LF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레바논 내 이슬람 세력과 싸우도록 부추긴다. 이스라엘 판 이이제이 전술이다.
한편, 시리아는 레바논 내전 개입 전에 이스라엘과 비공개로 ‘레드라인’ 협정을 체결했다. 베이루트 이남에 여단 규모를 웃도는 시리아 주력부대를 주둔시키지 않고, 레바논 안에 이스라엘을 사정권에 둘 수 있는 시리아군의 장거리포, 미사일, 로켓탄을 배치하지 않으며, 전투기나 폭격기는 일체 레바논 국내에 주둔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LF는 이 협정을 역이용해서 시리아군을 상대로 도발을 감행해서 마론파의 거점인 동 베이루트에 시라아 군이 포격을 가하도록 유도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중대한 협정 위반으로 시리아를 비난했고 특수부대와 공군기를 출동시켰고, 리타니 강 이남의 레바논 남부를 점령했으나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레바논군 장교였던 하다트에게 점령지를 양도했다. 야심만만했던 하다트는 자유레바논군이라는 민병 조직을 결성해서 이스라엘에 협력했다.
1980년에는 레바논 각지에서 시리아군과 LF가 충돌하고, 베이루트와 베카 고원을 연결하는 군사도로를 건설한 LF에게 시리아가 공격을 가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전투기가 시리아 헬기를 격추시켰다. 시리아도 대응으로 지대공 미사일을 베카 고원에 전진 배치하는 등 군사행동에 나선다. 이로서 우리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베이루트 이북은 시리아가 베이루트 이남은 이스라엘이 먹죠라고 했던 '레드라인' 협정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1981년 7월 10일, 레바논 남부에서 교전이 벌어지자 이스라엘은 공습을 개시했고 5일 뒤에 PLO는 이스라엘 북부에 포격을 개시했다.
1981년 7월 17일, 이스라엘 공군이 베이루트 시내의 PLO본부와 남부 레바논의 PLO 거점에 대규모 공격을 실시하여 약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800명이 부상당했다. 국제사회가 개입하자 이스라엘군은 일단 철수했다.
1982년 4월 21일 자유레바논군의 포대를 방문한 이스라엘군 장교가 지뢰를 밟고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보복으로 PLO가 통제하고 있는 다무르의 항구마을을 공격하여 23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5월 9일 이스라엘 공군은 레바논을 재차 공격했다.
3.3. 이스라엘 군의 '갈릴리 평화' 작전 이후(1982년 6월 이후)
이때부터는 전쟁터만 레바논이지 사실상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전쟁이었다. 시리아와 레바논 이외의 다른 아랍 국가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PLO는 국가급 무장단체지 국가는 아니였으니까..
1982년 6월, 이스라엘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 직전에 PLO, 시리아군 전력은 다음과 같았다.
PLO는 정규훈련을 받은 병력 4,500명을 포함하여 6,000여명을 남부 레바논에 배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60대의 T-34/85와 T-54, 55 20여 대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130mm포와 155mm중포를 포함한 야포가 90문, 122mm 카추샤 다연장로켓 80문 및 120mm~160mm 박격포 200문으로 포병전력을 구성했다. 이 외에도 대공화기, 대전차 미사일 등을 장비하여 게릴라 조직의 수준을 넘어 준 정규군급의 무장을 장비했으며 이스라엘의 정보부가 분석한 바로는 1981년 6월에 약 80문이었던 야포와 로켓포의 수를 불과 1년 만에 3배인 250문으로 증강시킬 정도였다.
시리아군은 레바논 내전 개입 이후 항상 1개 사단전력을 레바논에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레바논의 시리아 주둔군은 베카계곡과 베이루트에 둘로 나뉘어 병력 3만에 전차 71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82년 6월 6일, 영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 테러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이스라엘은 ‘갈릴리 평화’ 작전을 개시한다. 이스라엘군은 약 6만~7만 8천의 병력을 이즈하크 모르드카이 소장의 서부군(지중해 방면)과 아미르 드로리 중장의 중부군(레바논 산지 서쪽 능선), 아비그도르 벤갈 소장의 동부군(베카 계곡과 헤르몬 산지), 3방향으로 레바논 영내로 진입한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군은 PLO가 장악하고 있는 뷰포트 성채(Beaufort Castle)에 골라니 여단 소속 2개 중대를 투입하여 갈고리를 이용해서 암벽을 기어 올랐고 PLO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백병전 끝에 요새를 점령했다.
1982년 6월 7일 이스라엘군은 공격을 재개해 티레를 고립시켰으며 북쪽의 시돈에 함포사격을 가하면서 특수부대를 상륙시키고 레바논 남부의 UNIFIL 지역을 돌파하고 각 거점을 우회하면서 빠르게 레바논으로 진격했지만 야간이 되자 정돈을 위해 잠시 후퇴했다.
1982년 6월 8일, 이스라엘군은 점차 PLO가 아니라 시리아군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스라엘 중부군의 선두 기동부대는 후속부대가 거점을 점령하도록 맡겨두고 베이루트를 향해 진격했다. 해안에서는 아침에 공중전이 벌어져 이스라엘 공군기가 시리아의 MiG 2기를 격추시켰고 티레가 함락되고 시돈이 포위되면서 베이루트 진입로에 장애물을 제거했다.
1982년 6월 9일, 이스라엘군은 테크니컬 새거 대전차 미사일(ATM) 팀에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보병, 포병, 기갑에 의한 연계와 반응장갑을 활용하여 공격에 대응해 나갔다. 이스라엘 지상군이 베카 고원의 입구인 Joub Jannine을 장악하면서 시리아는 베이루트 주둔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레바논 주둔군이 괴멸될 것을 우려한 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군의 지대공 미사일(SAM) 망을 베카 고원으로 전진배치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이미 무인정찰기(RPV)로 이 지역의 병력 이동을 낱낱히 관측했고 지상관측부대와 정찰기의 정보는 통신망을 관할하는 E-2C 호크아이 조기경보기에 전송되었다. 이런 압도적인 정보력을 바탕으로 이스라엘군은 전진배치된 SAM을 걷어내고 시리아 공군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6월 9일 오후 2시를 작전을 개기한다.
96기의 F-15, F-16, Kifr C-2S가 제공권을 장악한 가운데 RPV는 전파방해를 개시했고 F-4 전폭기들이 파상공세를 개시하자 전자장비가 마비된 시리아군 SAM기지는 혼란에 휩쌓였고 연이어 제2파 92기가 공격을 개시하고 지상군이 포격을 개시하자 SAM 포대들은 차례차례 전투불능이 됐다. 불과 1시간 만에 19개소의 SAM기지 중 17개소가 완파되었고 남은 기지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반면, 이스라엘의 전력손실은 A-4 1기와 F-4 1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스라엘군의 제2파가 공격을 개시하자 시리아 공군은 MiG-21, 23, 25 및 수호이 Su-7s을 대규모로 출격시켜 요격에 나섰으며 양측 합계 200기에 달하는 전투기들이 베카 계곡 상공에서 공중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은 시리아 공군의 접근을 조기경보기로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공군은 당대 최강의 제공전투기 F-15로 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리아 공군은 전적으로 지상 기지에서 관제를 받는 것을 전제로 훈련을 받았다.[2] 즉, 시리아 공군은 독립적인 방어체계가 아니라 지상 관제를 받는 대공방어망 역할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 관제를 해주어야 할 기지들이 이스라엘 공군의 전파방해(ECM)에 전혀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결국 시리아 공군은 베카 계곡에서 참패했다.
이 날 이스라엘군은 제1전에서만 29기의 MiG기를 격추시켰고 그날 밤까지 41기 이상의 시리아 공군기가 격추시켰다. 2차대전 이후 단일 교전 기준으로 공중전 최대규모 승리였다. 이스라엘기의 격추는 대부분 1976년에 도입한 신형 AIM-9L 사이드와인더에 의한 것으로 기체의 열을 감지하는 이 미사일은 적기를 HUD에 넣기만 하면 적기가 어떻게 회피해도 록온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시리아군의 경우에는 전반적으로 공대공 유도미사일에서 열세에 있었고 소련의 신형 공대공 미사일 Atoll도 성능에서 훨씬 뒤처져 있었다.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은 해안에서는 해군의 지원포화에 힘입어 다무르(Damour)를 점령했고 밤까지 해안의 이스라엘 군은 베이루트를 불과 10km 남겨둔 지점까지 전진했지만 중부집단과 합류를 위해 대기에 들어갔다. 한편 중부군은 베이루트-다마스커스간 고속도를 점령해 나갔으나 시리아군은 제진(Jezzine)북부의 술탄 야쿠브(Sultan Yakoub)에 1특공대대와 제58기계화 여단를 매목시킨 채로 이스라엘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982년 6월 10일 주간에 시리아군이 도로를 따라 맹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야간에 전진하던 이스라엘 군은 10일 밤 기습을 당했다. 시리아군이 포격을 가하자 흙먼지가 일어 시야에 제한을 받았고, 시야 확보를 위해 해치를 열고 몸을 내민 이스라엘군 전차장들은 시리아군 저격수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1982년 6월 11일 새벽까지 이스라엘군은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상황을 파악한 후방의 이스라엘 포병들이 지원포격을 실시하면서 상황이 호전되었고 해가 뜰 무렵에는 본격적인 전차전이 벌어졌다. 시리아군도 다마스커스-베이루트 고속도로를 통해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스라엘 공군이 지원하러 온 시리아군 제1기갑사단 전차 절반 이상을 이동 중에 파괴하여 지원을 차단했다. 6시간이 넘는 전차전 끝에 이스라엘은 베카-제닌을 잇는 도로를 완전히 장악한다.
당시 최신식이었던 메르카바 전차와 T-72 전차 간의 대결은 메르카바 전차의 완승으로 끝났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피해를 입은 시리아군은 결국 11일 정오 휴전에 합의했으며 PLO는 베이루트에서 절망적인 농성을 준비했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남부 4,500 ㎦를 점령했지만 이스라엘의 침공에 전 세계의 비난이 몰렸고 이미 시돈에서 격렬한 시가전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낸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에서도 격렬한 시가전을 무턱대고 시도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를 포위한 채 직접적인 시가전에 바로 들어가기 전에 확성기를 이용해서 항복을 권고했다. 그러자 PLO는 이스라엘 공군의 정밀폭격에 맞서 민간인을 지붕에 올려놓는 방법으로 응수했다.
PLO 지도자 아라파트는 결사항전을 부르짖었지만, 레바논 내에 이미 아군은 없었다. 레바논 최대의 파벌인 이슬람 시아파는 이제 골치거리가 되버린 PLO를 공격하는 이스라엘을 수수방관했고 마론파 기독교 민병대는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에 협력했다. PLO는 12살 소년병에게까지 RPG-7을 쥐어주면서 저항했지만 아랍권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성명을 발표할 뿐 어느 나라도 군사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시리아와 정전을 맺은 4일 후, 베이루트를 포위한 이스라엘군은 보병과 포병을 투입해서 시가전을 시작했다. PLO는 항복을 거부한 채 베이루트에서 저항했지만 외부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레바논 이슬람 세력까지 나서서 PLO에게 명예로운 후퇴를 요구하자 PLO는 눈물을 머금고 베이루트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7월 3일 아라파트는 PLO 지도부를 이끌고 레바논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미국 정부의 레바논 특사인 필립 하비브[3] 에게 전달한다.
1982년 8월 둘째주부터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UN 평화유지군의 호위를 받으며 베이루트에서 철수했다.
PLO와 시리아군 축출이라는 1차 목표를 달성한 이스라엘은 마론파 기독교 팔랑헤당의 젊은 지도자 바시르 제마엘을 내세워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정권을 수립하려고 시도했고, 1982년 8월 23일 바시르 제마엘은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지만 같은 해 9월 14일, 팔랑헤당 회합에 참석했다가 시리아의 비밀요원 하비브 사르투니에게 암살당했다.
1982년 9월 16일, 정치공작을 방해 받은 이스라엘군과 지도자를 잃은 기독교계 팔랑헤 민병대는 베이루트 외곽에 있는 두 개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진입한다. 이스라엘군은 난민촌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했고, 기독교계 팔랑헤당 민병대 200명은 난민촌에 숨어든 PLO 전사들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난민촌으로 들이닥쳤다.
지도자가 암살당해 눈이 뒤집어진 팔랑헤당 민병대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PLO 색출은 명분에 불과했고, 난민촌에 진입한 민병대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3일에 지나고 18일이 돼서야 민병대가 난민촌에서 철수했다. 그들이 철수한 난민촌에는 수백구가 넘는 시체가 널려 있었고, 여자와 어린이들의 시체도 36구나 확인됐다.
학살 사건의 희생자는 레바논 경찰이 460명 이상, 이스라엘은 800명 이상, PLO는 3,000명 이상이라고 각각 추정했다. 팔랑헤당 민병대가 증거인멸을 위해 시체를 고의적으로 훼손한 경우가 많아서 민간인이 정확하게 몇명이나 희생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스라엘군은 단순히 난민촌에서 외곽으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한 수준으로 방관만 한 게 아니었다. 팔랑헤당 민병대가 난민촌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중에 팔랑헤당 민병대를 위해 이스라엘군이 난민촌 상공에다 조명탄을 지원사격 하면서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를 '''사브라, 샤틸라 난민촌 학살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이 드러나면서 '''이스라엘 국내에서만 30만 명이 책임자 처벌을 외칠 정도로'''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고, 이로 인해서 책임자인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이 퇴임하였으며 이스라엘의 물가상승률은 크게 치솟아서 1983년에 191%, 1984년에 445%를 기록할 정도의 대타격을 입는다. 이는 이스라엘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내전 개입은 공식적으로 밝혀진 '''9.11 테러의 도화선'''이다. 빈 라덴이 이스라엘의 침공을 보고 격분해서 9.11 테러를 기획한 것이라고.
블랙 라군에서도 이에 관한 내용이 비슷하게나마 나오는데, 이때는 12화에 1987년 베이루트라 언급함으로써 연도가 바뀌었고 적십자 캠프라 나오긴 했지만 사브라, 샤틸라 난민촌 학살사건이 모티브임을 알 수 있다.
1983년 10월 16일 레바논 남부의 나바티야에서 이스라엘군이 시아파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군은 격렬한 저항에 시달렸다. 매복공격, 차량을 이용한 자살폭탄공격, 폭탄테러 등등 수단과 장소를 가리지 않은 테러 앞에 이스라엘 군은 끝없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때 이스라엘을 상대로 레바논 남부에서 게릴라 전에 나서면서 세력을 키운 단체가 있었으니, 그 단체가 바로 헤즈볼라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1990년 레바논 내전 종결 후, 16년 만에 제2라운드를 본격적으로 치룬다. 물론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이 중간에 16년 동안이나 안 싸우고 쉬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헤즈볼라는 1982년 창설 이래로 쉬지 않고 이스라엘을 목표로 테러와 게릴라 전을 벌렸다. 이스라엘도 지지 않고 대 테러 부대를 투입한 토벌 작전과 폭격, 암살 등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싸우던 양측의 분쟁이 전쟁급으로 확대 된 게 2006년...
이스라엘 군은 레바논에 정치공작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자 1983년 9월 말부터 국제여론의 악화를 핑계로 베이루트에서 철수해서 레바논 남부로 후퇴했다가 2000년 완전히 철수한다.
이스라엘군이 빠져나간 자리를 미국을 핵심으로 하는 프랑스, 이탈리아군이 평화유지 활동을 위해 들어왔다.
1983년 10월 23일, 헤즈볼라 조직원이 다이너마이트 수 톤을 실은 트럭으로 베이루트 미군 사령부에 돌진하여 자폭테러를 감행했다. 헤즈볼라 입장에서는 평화유지군이라면서 들어온 미군도 이스라엘군과 똑같이 서방세계에서 온 침략자였다. 이 자폭테러 한 방에 미군 241명, 프랑스군 58명이 폭사했고, 이후에도 평화유지군을 상대로 자살폭탄테러가 계속되자 미군은 결국 철수한다.
이후 레바논 정부는 유명 무실해지고 각 종파별 민병대가 레바논을 분할 통치하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된다. 나중에는 같은 종파 민병대 간에도 대립이 발생했다.
3.4. 시리아군 재개입 이후(1986년 이후)
1986년 이스라엘에게 패배해서 물러났던 시리아군이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다시 레바논에 개입한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로 물러서자 이스라엘 등쌀에 쫓겨났던 PLO 전사들도 레바논으로 돌아왔는데, 시리아 입장에서는 PLO도 껄끄러운 존재라 시리아군과 기독교계 아말 민병대가 PLO 소탕을 위해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를 공격했다. 시리아군이 협조하는 가운데 아말 민병대가 PLO 계열 난민 캠프를 포위한 뒤에 물과 식량 유입을 차단하고, 집요하게 총격전을 벌이자 다수의 팔레스타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1988년에 아민 제마이엘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되었지만 원래 이슬람교의 자리였던 수상직에 기독교계 마론파인 미셸 아운이 임명되었다. 그 직후 아민은 레바논에서 망명하여 미국으로 이주했다. 레바논은 일시적으로 대통령이 공석인 상황이 발생했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재로 내전 종결을 목표로 하는 타이프 합의가 채택되었다.
처음에 각 종파 민병지도자들과 시리아가 협상에 소극적이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설득으로 시리아는 찬성으로 돌아섰고, 각 종파별 민병대도 친 이란 파 헤즈볼라, 친 이스라엘파 남 레바논군, 반 시리아 파 아운파를 제외한 대부분 조직이 이 합의에 동의했다.
시리아는 반시리아파인 미셸 아운의 수상취임을 거부하여 전통적으로 수상을 배출했던 수니파에서 셀림 알 호스를 수상으로 취임시켰다. 그리고 시리아군 주둔지였던 베카 고원에서 사실상 휴면상태로 있던 라야크 공군기지에 국회의원을 소집시켜 명문가 출신 정치가였던 르네 무아와드를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그 결과, 반시리아의 아운 정권과 타이프 합의에 기치한 무아와드 대통령의 정권, 두 세력이 레바논 국내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립이 이어지던 와중에 아운파를 뒤에서 도와주던 이라크가 1990년 걸프 전쟁에 돌입하면서 아운파에 대한 지원을 끊자, 아운파는 레바논 내외에서 고립된다.
1990년 8월 집권하고 있던 기독교계 마론파가 기독교와 무슬림간의 국회 의석을 64:64로 하는 헌법 개정에 동의했다.
1990년 10월 13일 걸프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던 미국의 묵인 아래 시리아군이 대대적인 아운파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시리아군에 패한 아운파 지도자 미셸 아운이 파리로 망명하는 것으로 레바논 내전은 막을 내린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진 1차 레바논 내전은 추정 사망자 15만 명 이상, 중상자 10만 명 이상, 난민 90만 명 이상, 잿더미로 변한 수많은 건물과 망가져 버린 경제를 남기고 끝났다. 레바논의 인구가 겨우 수백만에 불과하고 국토 면적도 대한민국의 1/10 수준인 소국임을 감안하면... 누구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는 완전 거덜났다.
굳이 '''1차 레바논 내전의 책임 소재를 가린다면 프랑스,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미국, 러시아, 영국, 이란, 이라크, 오스만제국, 마론파, PLO, 팔레스타인 난민, 이슬람 원리주의자, 종파별 분리주의자 등등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리고...
파리로 망명한 미셸 아운은 1991년 10월, 내란, 반란 등의 혐의에 대해서 사면을 받았다. 2005년 2월 친 서방파인 라피크 바하 엘 딘 알 하리리 총리가 차량폭탄테러로 죽고, 암살 배후가 시리아라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레바논에서는 시위가 이어졌다. 2005년 4월 시리아군이 레바논에서 전면 철수했다. 2005년 5월, 시리아군이 철수하자 미셸 아운은 레바논으로 귀국한다. 2014년 5월 미셜 술라이만 대통령의 임기만료 후 29개월 동안 레바논 의회는 정파갈등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했다. 2016년 10월 31일, 미셸 아운은 127명의 국회의원 중 83명의 찬성으로 임기 6년의 제13대 레바논 대통령에서 선출됐다. 기독교계 마론파에서 배정되는 레바논 대통령 자리에 미셸 아운이 오른 이유는 그가 기독교도임에도 친 헤즈볼라 성향이라는 점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관점도 있다.
[1] 아무래도 무슬림보다는 기독교인들이 해외에 정착이 쉬웠다. 이민을 받는 나라들의 종교와 믿는 종교가 같으니까. 물론 무슬림 중에서도 이슬람교 소수종파를 믿는 이들은 다수인 수니파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수니파 무슬림 이민자에 비하면 해외에 적극적으로 정착한 편이다.[2] 이것은 시리아의 후원자였던 소련의 전술을 이식받은 것이다.[3] Philip Charles Habib. 레바논계 미국인으로 1970년대 초반 주한 미국 대사를 역임한 경력이 있다. 외교관으로 주로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하다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끝으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