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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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re-Dame de Paris / Médaille Miraculeuse
1830년 7월 18일, 프랑스 왕국 파리 뤼뒤박에서 가톨릭 수녀회 중 하나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1] 소속의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사건. '''기적의 패'''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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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7월 18일 밤,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저녁에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는 신비한 확신에 가득찬 채 마루에 있었다.[2] 잠든 지 2시간 정도 지난 11시 반 무렵, 카타리나 수녀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 목소리는 3번 정도 카타리나 수녀의 이름을 불렀다.
잠에서 깬 카타리나 수녀에게 어린 아이는 '성모님께서 계시니 성당으로 가 보라'고 말했고, 카타리나 수녀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도한 때가 다가왔다고 생각했으나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했다. 이에 어린 아이는 '이미 밤이 깊어 아무도 없으니 어서 성당으로 가서 성모님을 봬라'고 재촉했고, 카타리나 수녀는 성당으로 향했다.
잠긴 성당 문은 그저 손을 대기만 했는데 알아서 열렸다.안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샹들리에와 제대에도 전부 불이 켜져 있었다. 어린 아이는 안으로 들어갔고 카타리나 수녀도 아이를 따라 들어갔다. 아이가 제단 계단 옆 의자에 앉자 수녀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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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카타리나 수녀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제대의 계단을 내려오시는 성모 마리아를 발견했다.
성모 마리아께선 의자에 앉으셨고, 그녀의 손에선 반지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카타리나 수녀는 하얀 옷의 어린 아이가 자신의 수호천사임을 깨달았다. 수호천사는 그녀에게 이 분이 성모님이심을 한번 더 확인시켜주었다.
성모 마리아께선 카타리나 수녀에게 프랑스에 닥쳐올 위험과 그로 인해 또 다시 십자가와 신앙이 모독을 당하고 파리의 대주교가 고통을 당할 것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40년 후인 1870년에 프랑스에서 일어날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성모 마리아가 예언하신듯 보였다. 그리고 성모의 모습은 고요히 사라져 갔다. 이로써 첫 번째 발현이 끝났다.
성모님께서 그날 밤 하신 예언은, 1주일 후 일부분이 실현되었다. 1830년 7월 27일, 흔히 말하는 7월 혁명(La Révolution de Juillet)[3] 이 발발하여, 파리의 도로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머스킷 소총대의 총성이 마구 울려댔다. 사망자들은 방치됐고, 죽음의 숨결이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 속을 드나들었다.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는 왕위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도피했다. 많은 주교들이나 신부들, 수도자들이 투옥되고 살해당했다. 교회는 신성함을 모독당하고, 성상(聖像)들은 넘어뜨려졌으며, 십자가는 짓밟혀졌다.[4]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자신의 고해 신부인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 발현과 성모의 메시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것은 믿기 힘든 내용이었으나 카타리나 수녀가 언급한 내용이 실제로 일어난 듯 보였고, 알라델 신부는 이 젊은 수련 수녀가 실제로 성모님의 환시를 본 것인지 아닌지 분별해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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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현이 있고 4개월이 지난 1830년 11월 27일 토요일 저녁 5시 30분 무렵이었다. 나자렛의 성 요셉의 상본이 모셔져 있는 곳 부근에 있던 주교좌(主敎座)에서 첫 발현 때 들었던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난 뒤, 새하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성모 마리아는 작은 금빛 십자가가 꼭대기에 달린 금빛 지구를 손에 들고 있었고, 양쪽 손가락에는 3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며, 그 반지에선 눈부신 빛들이 반짝였다. 또 하얀 지구의 위에 서 있었고, 발밑에는 금빛의 반점(斑點)이 있는 초록빛 뱀이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카타리나 수녀는 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손에 있던 금빛 지구가 사라지고, 양손에서 어머니의 배려하는 마음 같은 모습이 넓게 펼쳐졌다. 성모님께서 손가락에 끼우고 계셨던 반지의 보석에서 발 아래 있었던 지구 위로 빛줄기가 흘러나왔다. 알의 형태를 한 둥근 테두리가 성모님의 주위를 둘러쌌는데, 그 안쪽으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님,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금빛 글자가 씌어졌다.
성모님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그 그림이 뒤집혀져서 뒤쪽이 나타났다. 커다란 M글자 위에 옆쪽 막대기가 있었고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M글자 아래에는 예수 성심(聖心)과 성모 성심을 상징하는 두 새의 심장이 있었다. 예수 성심은 가시관이 둘러쳐져 있었고 성모 성심은 칼로 꿰찔려져 있었으며, 12개의 별이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환시는 이것으로 끝났다.
카타리나 수녀는 젊은 고해사제였던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 발현과 메달 주조(鑄造)에 관해 전달했지만, 알라델 신부는 그녀의 상상이리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카타리나 수녀는 그것을 성모 마리아께 말씀드렸지만, 성모 마리아께선 인내하며 기다려줄 것을 요청하셨다.
카타리나 수녀의 인내심이 결실을 맺어, 드디어 알라델 신부는 동료 에티엔 신부를 매개로, 당시 파리 대주교였던 드 켈렝 몬시뇰에게 메달 주조의 허락을 얻기 위해 움직였다.
대주교는 발현 중에 메달 주조를 요청한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에 관해, 교회의 신앙이나 신자들의 신심과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주교는 주조를 인준하고, 최초로 메달을 걸어보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대주교의 '성모님의 원죄없으신 잉태(Immaculata Conceptio)'에 대한 신심은 아주 특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원죄없으신 잉태의 메달 주조를 곧바로 인준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요청할만한 자격이 있었다.
1832년 6월 30일, '원죄없으신 잉태의 메달' 2,000개가 최초로 만들어졌다.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알라델 신부로부터 이 메달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이 최초로 주조된 메달을 몇 개 갖고 있었다. 그 중 10개는 파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본원의 보관창고에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메달 보급은 급속한 성과를 거두면서 메달 그 자체가 기적이 되어갔고, 4년 후인 1836년까지 200만 개의 메달들이 주조되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5] 는 메달을 책상 위의 십자가 아래에 두기도 했다.
이 메달이 이룬 기적적인 움직임에 대해 알라델 신부가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이 신성한 메달로 인해서 모든 환자들이 치유됐고, 다양한 사람들의 회개와 전쟁, 사고 등에서의 보호가 일어났다. 이 기적들에 의해 메달은 곧바로 초창기 무렵부터 정식 명칭이었던 '원죄없으신 잉태의 메달'이라고 불리지 않고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며 신자들에게 존엄하게 여겨지며 애용되었다. 메달 보급의 빠른 확산도 신기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메달이 일으킨 기적들이 더 신비했기 때문이다.
이 메달은 묵주기도의 위력에 필적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준성사로써 가톨릭 신앙을 믿는 곳곳에 커다란 충격을 불러왔다.
기적의 당사자인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의외로 오랜 시간 이 기적의 당사자로 알려지지 않고 조용한 수도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카타리나 수녀가 고해 신부인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 발현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했을 때, 절대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훗날 가톨릭교회의 정식 조사 때에 발현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증언하도록 요청을 받았지만, 기억 상실을 이유로 증언하지 않았다. 한 때 11년 연상의 언니인 루이즈 드 마리약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에서 환속해서 카타리나 수녀는 속을 태웠으나, 루이즈는 끊임없는 편지와 설득을 통해 10년 후 다시 수도회로 돌아왔다.
카타리나 수녀는 1835년 5월 1일에 첫 서원[6] 을 했고, 다음 해 1836년에 카타리나 수녀가 30살이 되었을 때 파리 근교 앙쟝의 호스피스 소임을 맡게 되었다. 농장이 딸려 있었고 닭이나 젖소를 돌볼 수 있는 할아버님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옷을 만들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간병하고, 노인들이 임종할 때까지 보살폈다.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의 선종 후 57년 뒤인 1933년, 교황 비오 11세 때 시복을 위해 시신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때 의학 검사에 의해 카타리나 수녀의 눈은 아직 푸른 빛깔을 보존하고 있었고 유해도 부패되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 보통 눈은 죽은 후 급속히 암흑 빛깔로 변하고 함몰하여 부패된다.
카타리나 수녀의 시신은 유리관에 보관되어 얼마 안 돼서 뤼뒤박의 기적의 성모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모 발현 장소에 만들어진 제단 아래에 안치되었으며 매일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몰려오고 있다. 카타리나 수녀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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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현으로 만들어진 성물이 앞에 설명한 '''기적의 메달'''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이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소위 '''기적의 패'''라고 하여 목에 거는 사람들도 많고 묵주에는 거의 필히 다는 성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신자들의 묵주 첫 단에 뭔가 타원형의 메달이 달려 있다면 99%는 이 기적의 메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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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러 모습의 성모상 중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의 모습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성모상은 여러 모양으로 조각되는데 아무래도 가톨릭교회의 공식 인정이 된 모습으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며, 그 3강(...)이 파티마의 성모, 루르드의 성모 그리고 파리의 성모이다. 각 성모상은 특색이 존재하는데 만약 구름 위에 성모 마리아가 서 있고 머리에 왕관을 썼다면 파티마, 6단 묵주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모습이라면 루르드,[7] 그리고 양손을 아래로 내리고 무언가 빛이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에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이라면 바로 파리의 성모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모 신심의 끝판왕(...)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의 주회합에 공식적으로 모시는 성모상은 바로 이 파리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이다.
Notre-Dame de Paris / Médaille Miraculeuse
1. 개요
1830년 7월 18일, 프랑스 왕국 파리 뤼뒤박에서 가톨릭 수녀회 중 하나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1] 소속의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사건. '''기적의 패'''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2. 첫 발현: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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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7월 18일 밤,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저녁에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는 신비한 확신에 가득찬 채 마루에 있었다.[2] 잠든 지 2시간 정도 지난 11시 반 무렵, 카타리나 수녀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 목소리는 3번 정도 카타리나 수녀의 이름을 불렀다.
잠에서 깬 카타리나 수녀에게 어린 아이는 '성모님께서 계시니 성당으로 가 보라'고 말했고, 카타리나 수녀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도한 때가 다가왔다고 생각했으나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했다. 이에 어린 아이는 '이미 밤이 깊어 아무도 없으니 어서 성당으로 가서 성모님을 봬라'고 재촉했고, 카타리나 수녀는 성당으로 향했다.
잠긴 성당 문은 그저 손을 대기만 했는데 알아서 열렸다.안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샹들리에와 제대에도 전부 불이 켜져 있었다. 어린 아이는 안으로 들어갔고 카타리나 수녀도 아이를 따라 들어갔다. 아이가 제단 계단 옆 의자에 앉자 수녀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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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카타리나 수녀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제대의 계단을 내려오시는 성모 마리아를 발견했다.
성모 마리아께선 의자에 앉으셨고, 그녀의 손에선 반지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카타리나 수녀는 하얀 옷의 어린 아이가 자신의 수호천사임을 깨달았다. 수호천사는 그녀에게 이 분이 성모님이심을 한번 더 확인시켜주었다.
성모 마리아께선 카타리나 수녀에게 프랑스에 닥쳐올 위험과 그로 인해 또 다시 십자가와 신앙이 모독을 당하고 파리의 대주교가 고통을 당할 것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40년 후인 1870년에 프랑스에서 일어날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성모 마리아가 예언하신듯 보였다. 그리고 성모의 모습은 고요히 사라져 갔다. 이로써 첫 번째 발현이 끝났다.
성모님께서 그날 밤 하신 예언은, 1주일 후 일부분이 실현되었다. 1830년 7월 27일, 흔히 말하는 7월 혁명(La Révolution de Juillet)[3] 이 발발하여, 파리의 도로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머스킷 소총대의 총성이 마구 울려댔다. 사망자들은 방치됐고, 죽음의 숨결이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 속을 드나들었다.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는 왕위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도피했다. 많은 주교들이나 신부들, 수도자들이 투옥되고 살해당했다. 교회는 신성함을 모독당하고, 성상(聖像)들은 넘어뜨려졌으며, 십자가는 짓밟혀졌다.[4]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자신의 고해 신부인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 발현과 성모의 메시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것은 믿기 힘든 내용이었으나 카타리나 수녀가 언급한 내용이 실제로 일어난 듯 보였고, 알라델 신부는 이 젊은 수련 수녀가 실제로 성모님의 환시를 본 것인지 아닌지 분별해 내야 했다.
3. 2번째 발현: 기적의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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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현이 있고 4개월이 지난 1830년 11월 27일 토요일 저녁 5시 30분 무렵이었다. 나자렛의 성 요셉의 상본이 모셔져 있는 곳 부근에 있던 주교좌(主敎座)에서 첫 발현 때 들었던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난 뒤, 새하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성모 마리아는 작은 금빛 십자가가 꼭대기에 달린 금빛 지구를 손에 들고 있었고, 양쪽 손가락에는 3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며, 그 반지에선 눈부신 빛들이 반짝였다. 또 하얀 지구의 위에 서 있었고, 발밑에는 금빛의 반점(斑點)이 있는 초록빛 뱀이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카타리나 수녀는 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네가 보고 있는 이 둥근 지구는 전 세계, 특히 프랑스를, 그리고 또 1명의 사람을 나타내고 있단다. 이 빛들은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쏟아부어 주는 은총을 상징한단다.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 보석은 영혼들이 간청하고 있는 것을 잊고 있는 은총이란다.
성모 마리아의 손에 있던 금빛 지구가 사라지고, 양손에서 어머니의 배려하는 마음 같은 모습이 넓게 펼쳐졌다. 성모님께서 손가락에 끼우고 계셨던 반지의 보석에서 발 아래 있었던 지구 위로 빛줄기가 흘러나왔다. 알의 형태를 한 둥근 테두리가 성모님의 주위를 둘러쌌는데, 그 안쪽으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님,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금빛 글자가 씌어졌다.
이 모형으로 메달을 만들거라. 그 메달을 몸에 거는 사람들 모두에게 은총이 내려질 것이다. 메달은 목에 걸면 된다. 신뢰를 갖고 메달을 거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많이 있을 것이다.
성모님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그 그림이 뒤집혀져서 뒤쪽이 나타났다. 커다란 M글자 위에 옆쪽 막대기가 있었고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M글자 아래에는 예수 성심(聖心)과 성모 성심을 상징하는 두 새의 심장이 있었다. 예수 성심은 가시관이 둘러쳐져 있었고 성모 성심은 칼로 꿰찔려져 있었으며, 12개의 별이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환시는 이것으로 끝났다.
카타리나 수녀는 젊은 고해사제였던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 발현과 메달 주조(鑄造)에 관해 전달했지만, 알라델 신부는 그녀의 상상이리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카타리나 수녀는 그것을 성모 마리아께 말씀드렸지만, 성모 마리아께선 인내하며 기다려줄 것을 요청하셨다.
때가 온다면, 그는 내가 희망하는 대로 따르게 될 것이다. 그는 나의 종이기 때문에, 그를 슬퍼하게 해서는 안 된단다.
카타리나 수녀의 인내심이 결실을 맺어, 드디어 알라델 신부는 동료 에티엔 신부를 매개로, 당시 파리 대주교였던 드 켈렝 몬시뇰에게 메달 주조의 허락을 얻기 위해 움직였다.
대주교는 발현 중에 메달 주조를 요청한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에 관해, 교회의 신앙이나 신자들의 신심과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주교는 주조를 인준하고, 최초로 메달을 걸어보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대주교의 '성모님의 원죄없으신 잉태(Immaculata Conceptio)'에 대한 신심은 아주 특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원죄없으신 잉태의 메달 주조를 곧바로 인준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요청할만한 자격이 있었다.
1832년 6월 30일, '원죄없으신 잉태의 메달' 2,000개가 최초로 만들어졌다.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알라델 신부로부터 이 메달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이것을 퍼뜨려야 합니다.
그녀는 이 최초로 주조된 메달을 몇 개 갖고 있었다. 그 중 10개는 파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본원의 보관창고에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메달 보급은 급속한 성과를 거두면서 메달 그 자체가 기적이 되어갔고, 4년 후인 1836년까지 200만 개의 메달들이 주조되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5] 는 메달을 책상 위의 십자가 아래에 두기도 했다.
이 메달이 이룬 기적적인 움직임에 대해 알라델 신부가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이 신성한 메달로 인해서 모든 환자들이 치유됐고, 다양한 사람들의 회개와 전쟁, 사고 등에서의 보호가 일어났다. 이 기적들에 의해 메달은 곧바로 초창기 무렵부터 정식 명칭이었던 '원죄없으신 잉태의 메달'이라고 불리지 않고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며 신자들에게 존엄하게 여겨지며 애용되었다. 메달 보급의 빠른 확산도 신기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메달이 일으킨 기적들이 더 신비했기 때문이다.
이 메달은 묵주기도의 위력에 필적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준성사로써 가톨릭 신앙을 믿는 곳곳에 커다란 충격을 불러왔다.
4. 그 외
4.1.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
기적의 당사자인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의외로 오랜 시간 이 기적의 당사자로 알려지지 않고 조용한 수도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카타리나 수녀가 고해 신부인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 발현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했을 때, 절대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훗날 가톨릭교회의 정식 조사 때에 발현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증언하도록 요청을 받았지만, 기억 상실을 이유로 증언하지 않았다. 한 때 11년 연상의 언니인 루이즈 드 마리약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에서 환속해서 카타리나 수녀는 속을 태웠으나, 루이즈는 끊임없는 편지와 설득을 통해 10년 후 다시 수도회로 돌아왔다.
카타리나 수녀는 1835년 5월 1일에 첫 서원[6] 을 했고, 다음 해 1836년에 카타리나 수녀가 30살이 되었을 때 파리 근교 앙쟝의 호스피스 소임을 맡게 되었다. 농장이 딸려 있었고 닭이나 젖소를 돌볼 수 있는 할아버님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옷을 만들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간병하고, 노인들이 임종할 때까지 보살폈다.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의 선종 후 57년 뒤인 1933년, 교황 비오 11세 때 시복을 위해 시신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때 의학 검사에 의해 카타리나 수녀의 눈은 아직 푸른 빛깔을 보존하고 있었고 유해도 부패되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 보통 눈은 죽은 후 급속히 암흑 빛깔로 변하고 함몰하여 부패된다.
카타리나 수녀의 시신은 유리관에 보관되어 얼마 안 돼서 뤼뒤박의 기적의 성모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모 발현 장소에 만들어진 제단 아래에 안치되었으며 매일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몰려오고 있다. 카타리나 수녀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4.2. 성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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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현으로 만들어진 성물이 앞에 설명한 '''기적의 메달'''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이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소위 '''기적의 패'''라고 하여 목에 거는 사람들도 많고 묵주에는 거의 필히 다는 성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신자들의 묵주 첫 단에 뭔가 타원형의 메달이 달려 있다면 99%는 이 기적의 메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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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러 모습의 성모상 중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의 모습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성모상은 여러 모양으로 조각되는데 아무래도 가톨릭교회의 공식 인정이 된 모습으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며, 그 3강(...)이 파티마의 성모, 루르드의 성모 그리고 파리의 성모이다. 각 성모상은 특색이 존재하는데 만약 구름 위에 성모 마리아가 서 있고 머리에 왕관을 썼다면 파티마, 6단 묵주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모습이라면 루르드,[7] 그리고 양손을 아래로 내리고 무언가 빛이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에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이라면 바로 파리의 성모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모 신심의 끝판왕(...)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의 주회합에 공식적으로 모시는 성모상은 바로 이 파리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이다.
[1] 한국관구 본원은 경기도 군포시에 있다.[2]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이전부터 이미 기도 중 여러 번 환시를 본 경험이 있었다.[3] 흔히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알려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마리안'''이라는 그림으로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가 묘사한 그 혁명이다. 세속주의(=라이시테)적인 혁명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재앙이 닥친 것.[4] 물론 세속주의자들이 저지른 것이다. 이 당시에 위그노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5] 1839년 9월 9일, 북경교구에서 조선을 분리시켜 조선교구를 설정한 교황.[6] 수도자로 살겠다는 약속. 수도회마다 각 단계의 기간은 조금씩 다르지만, 입회하면 지원기(약 1년) → 청원기(약 1년) → 수련기(약 2년)를 거쳐 첫 서원을 한다. 몇 년 단위의 기한이 정해져 있는 유기서원(약 4~5년)을 거쳐, 평생 수도자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한다. 종신서원까지는 대략 10년 가까이 걸린다.[7] 한국 가톨릭에서 제작한 성모상은 대부분 5단 묵주로 조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