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맥그레디
1. 개요
前 미국의 농구 선수. 올랜도 매직 시절에는 '''동티맥 / 서코비'''라 칭할 정도로 '''한때 NBA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었으나, 계속된 부상과 워크에틱 문제로 전성기가 길지 못했던 비운의 선수. 뛰어난 운동능력, 슈팅가드 포지션 대비 큰 키와 219cm로 엄청나게 긴 윙스팬을 활용한 높은 타점에서 나오는 점프슛을 주무기로 사용하였으며 마이클 조던급 퍼스트 스텝과 풋워크를 가지고 있어 이에서 파생된 풀업 점퍼, 포스트 무브 등 공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매우 많았다.
국내 일부 팬들 한정으로 수비가 약하다는 오해가 있는데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코비에 비교해서''' 안좋은것이다. . 북미에서도 팬포럼에서 '코비보다 수비를 못하기 때문에 아래다' 라는 비교는 굉장히 흔했지만 절대적인 수비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대다수에게 들은적은 한번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뛰어난 신체조건과 운동능력, 농구센스가 있었기 때문에 수비에 힘을 쏟을 때는 수비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대표적으로 토론토 랩터스에서 수준급 선수로 성장하던 99-00시즌에는 올디펜스팀급은 아니라도 그에 버금가는 뛰어난 수비수였다. (퍼스트팀 선수들이 워낙 특출난것이지 디퍼스트에 꼽히지 않더라도 좋은 수비수였다고 평가를 받는 선수는 무수히많다) 이후 지나친 공격부담 때문에 전성기인 올랜도 때는 수비에 많은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지만, 휴스턴 2년차까지는 클러치때 락다운 디펜더로 훌륭한 모습을 시즌중에 자주 보여줬었다. 물론 허리가 완전히 맛이가고 전성기가 지난 이후엔 운동능력이 떨어져서 더이상 좋은 수비수라고 할수는 없었다..
호리호리한 체형과 매력적인 얼굴, 그리고 굉장히 멋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 아이버슨급 간지로 인기가 엄청났다. 별명은 자신의 이름과 성을 조합한 '''T-MAC'''
2. NBA 드래프트 이전
플로리다 발토 태생인 맥그레디는 원래는 야구선수가 꿈이었다. 집은 매우 가난했지만 그는 매일 공을 던지며, 가난과 배고픔의 설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TV에서 페니 하더웨이의 경기를 보며 농구선수로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오번데일 고등학교로 진학해서는 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학교 교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마운트 지온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마운트 지온 고등학교에서 활약했을 당시 97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뛰고 있는 고교선수중 최고라는 평을 받았고, 많은 대학에서 그를 탐냈지만, 가정의 생계를 위해서 맥그레디는 NBA 드래프트에 참가신청을 낸다.
3. NBA 커리어
3.1. 토론토 랩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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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그레디는 9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9순위로 토론토에 지명을 받게 된다. 팬들과 전문가들은 당시 팀의 GM이었던 아이재이야 토마스의 선택에 관심을 드러냈는데, 토마스는 인터뷰에서 "아직 맥그레디는 모든것이 부족하지만 몇년후에는 엄청난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하지만 루키시즌에 그는 많은 출전시간을 받지 못했다. 솔직히 아무리 고등학교에서 날라다니는 선수였다고 해도, 프로는 엄연히 무대가 달랐고, 당시 팀의 백코트 주전중 하나인 덕 크리스티가 잘해주었기 때문에 맥그레디를 굳이 종용할 이유는 없어보였다. 맥그레디는 뛰지 못한다는 생각에 오죽했으면, '''"농구가 재미없다."'''라고 발언했을 정도. 그러나 당시 팀 감독이었던 다렐 워커가 성적부진으로 해고되고 부치 카터가 부임하면서 맥그레디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부치 카터는 맥그레디의 성장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고, 맥그레디를 위해 자유투 코치와 인터뷰 카운슬러까지 붙여줄 정도였으니. 티맥 역시 부치 카터를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많이 따랐다고 한다. 물론 부치 카터도 성적부진으로 해고되면서 둘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게 맥그레디는 조금씩 성장해 갔고, 99-00시즌 종료 2달전에는 붙박이 주전으로서 활약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3경기동안 두자리 수 득점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당시 토론토는 누가 뭐래도 빈스 카터의 팀이었다. 사촌인 빈스 카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그는 3년간의 토론토 생활을 끝내고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한다. 맥그레디는 3년의 루키계약의 짧은 3시즌 이였지만 카터가 들어은 98-99시즌 부터 엄청난 덩크와 하이라이트를 만들어냈다.
3.2. 올랜도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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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브론 제임스나 래리 버드가 와도 이보다 처절하게 농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올랜도 매직은 99-00시즌에 팀 베스트5중 3명이 드래프트도 받지 못한 선수들로 이뤄진 그야말로 외인구단이었지만 닥 리버스 감독의 형님리더쉽과 뛰어난 지휘능력으로 5할승률을 기록해 작은 돌풍을 일으켰다. 올랜도는 과거 샤크-페니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는지, 트레이시 맥그레디와 그랜트 힐을 영입했다. 팬들은 이 둘이 펼칠 콤비플레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그랜트 힐이 발목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맥그레디는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올랜도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그해 맥그레디는 기량발전상을 수상했다.
23살이 된 맥그레디는 02-03시즌에는 경기당 32득점에 팀내 카테고리 전부문 1위, PER 30.3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하고 득점왕까지 차지하면서, 당시 기준 역대 최연소 득점왕 타이틀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해 플레이오프에는 디트로이트를 3승 1패로 탈락직전까지 몰고 갔으나[5] 디트로이트가 천시 빌럽스를 중심으로 공격 맞불을 놓는 바람에 후반부에 가서는 방전되어 원맨팀의 한계를 드러내며 내리 3연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2003년 여름에는 FIBA 아메리카 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서 미국팀의 금메달에 기여하기도 했다.[6]
03-04시즌에는 커리어 최고득점인 62득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득점왕에 올랐지만, 당시 팀의 상태는 장난이 아니었고, 개막전 승리 후 내리 19연패를 기록하는 매우 막장상태였다. 플레이오프는 당연히 남의 잔치. 이때 팀에게 서서히 애정이 식어가던 중 휴스턴과 올랜도의 트레이드로 맥그레디는 휴스턴 로키츠로 이적하게 된다.
03-04시즌 종료 후 매직은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여 04년 드래프트에서 드와이트 하워드를 뽑았으나 당시 맥그레디는 이런 결정에 상당히 실망했다. 당장 강팀전력을 원했던 티맥은 자신과 같은 고졸출신 보다는 NCAA를 평정하며 검증된 에메카 오카포[7] 와 같이 뛰고 싶어했고 결국 휴스턴으로 프랜시스[8] , 커티노 모블리와 트레이드 되었다. 하지만 하워드는 루키 시즌부터 좋은 활약을 펼쳤으니 맥그레디의 성급함이 본인 커리어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위 올랜도 시절은 그야말로 맥그레디의 최전성기 시절이었다. NBA 최고의 스윙맨으로 그때 당시 포스는 장난이 아니었으나 그랜트 힐[9] 의 기약없는 부상결장 때문에 거의 팀에서 원맨쇼를 하다보니 온갖 잔부상을 많이 당해야 했다.
설사 04-05시즌 팀에 잔류하여 하워드와 원투 펀치를 구성했고 매직에 계속 잔류 했어도 동부 결승까지는 결국 무리였을 것이다. 실력과 스타성이야 리그 최고였어도 03-04시즌 티맥이 보여준 리더십은 그야말로 최악이였다. 팀 성적이 바닥을 치자 시즌 초반 부터 불평, 불만을 입을 달고 다녔고 정규시즌 내내 이런 모습은 전혀 바뀌지 않았고 팀 분위기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따라서 매직 말년 시즌 보인 하워드의 행보 및 티맥과 비슷한 공 점유율을 가진 코비, 하든 등 흔히 말하는 '''에이스'''류 선수들과 그리 좋지 못한 호흡을 보인 하워드와 원투 펀치를 보일리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하워드 역시 본인이 에이스이자 주목을 원하는 기질이 넘치는 선수이기에 이 조합은 그 결과가 분명 좋지 않았을 것 이다.[10]
3.3. 휴스턴 로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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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로키츠는 야오밍이 버티고 있는 팀이었다. 로키츠는 맥그레디가 야오밍과 함께 호흡 을 맞추며 그가 휴스턴의 옛영광을 재현해주기를 기대했다. 티맥과 3년연장계약도 맺음으로서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04-05시즌에 맥그레디는 개인기록이 많이 줄었지만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센터와 호흡을 맞추면서 여러가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시즌이 흐르면서 둘의 2대2 플레이는 빛을 내기 시작했고, 맥그레디 본인도 승부처에서 과감하게 슛을 던지는 등 새로운 해결사로써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2004년 12월 9일 샌안토니오를 상대로 보여준 '''33초동안 13점 넣기'''는 현재까지도 티맥하면 떠오르는 플레이 중 하나.[12]
이게 바로 그플레이. 사실 저 '''티맥타임'''이 펼쳐지기전까지 티맥의 스탯은 야투 8/25에 3점 1/8로 좋지 않은 상태였던게 아이러니.[13] 또한 상대팀 샌안토니오는 수비도 최선을 다했고(중간에 던컨이 훼이크에 속아서 추가로 4점플레이를 내준건 아쉬울 수 있을지언정 아무도 큰 잘못이라고 생각을 안했고 안한다) 파울작전으로 얻은 자유투들을 데빈 브라운과 팀 던컨이 4개 모두 착실하게 성공시키면서 딱히 잘못한게 없었다. 막판 그 데빈 브라운의 결정적인 턴오버를 제외하곤...(그 실책만 없었더라도 평소에 식스맨으로 주로 나오다 이날 20점에 자유투 8개를 모두 성공시킨 데빈 브라운의 그날 활약은 던컨에 버금가는 활약이었다. 하지만 그 턴오버로 명경기의 희생양이자 역적이 되어버렸다)
07-08시즌에는 팀의 22연승에 선봉장이었다. 이때 당시 휴스턴은 야오밍이 시즌아웃을 당한 상태였고, 티맥 역시 부상에서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던 탓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맥그레디는 팀의 22연승에 중심에 있으면서 맹활약했다. 저 연승기간동안 거의 혹사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시간을 뛰었고 어떤 경기에서는 아예 쉬지도 못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휴스턴에서도 맥그레디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 이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불운이라고 하면 또 불운. 여기에 자신이 시즌아웃 당한 08-09시즌에는 팀이 2라운드 진출에 성공한것도 본인에게는 그리 좋게만 보일일도 아닌 듯 보인다.
얼마나 무릎이 좋지 않았는지 그는 마이크로 프랙쳐 수술을 받기에 이른다. 이 수술은 무릎연골의 재생을 돕는 수술인데, 이 수술을 받은 사람으로는 페니 하더웨이가 있는데 하지만 하더웨이는 당시 이 수술을 받고도 기량을 회복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경우 이 수술을 받고도 2016년까지 nba에서 뛰었다.
이 수술을 받고 재활을 통해 09-10시즌에 복귀를 했으나 당시 감독이었던 릭 아델만은 맥그레디의 건강에 의구심을 품고 그에게 많은 출전시간을 주지 않았다. 6경기동안 10분도 안되는 출전시간이었으니. 맥그레디는 팀에 불만을 느꼈고, 휴스턴 역시 맥그레디의 2천3백만 달러에 달하는 만기계약을 처분하고 싶어했다. 그때 뉴욕이 협상을 제의했고, 휴스턴은 맥그레디를 트레이드 했다.
3.4. 뉴욕 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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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닉스 팬들은 오랜만에 슈퍼스타급의 선수가 온것을 환영했다. 맥그레디는 2010년 2월10일에 뉴욕 닉스 소속으로서 데뷔전을 치뤘다. 당시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홈경기였는데, 관중들은 '''"We Want T-Mac"'''이라고 외치며 그를 환영해주었다. 이 경기에서 티맥은 32분간 뛰면서, 26득점 4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오랜만에 전성기시절에 버금가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간혹 20득점을 올리기도 했지만 오랜기간 경기를 뛰지 않아서 실전감각이 무뎌졌는지 나머지 경기에서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중동원능력은 여전했으나, 뉴욕 닉스는 애초에 티맥을 오래붙들 마음도 없었다. 당시 뉴욕 닉스의 목적은 오로지 닥치고 르브론 제임스 모셔오기 뿐. 티맥은 그저 만기계약 카드일 뿐이었다.
시즌 종료후 FA가 되었지만 이미 예전의 기량을 보여줄수가 없게 된 티맥에 관심을 보이는 팀은 없었다. 시카고 불스에서 그에게 1년단기 계약에 백업 역할을 제안했을때 티맥을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아쉬울게 없다는 듯 시카고 불스는 협상을 종료했고, 그 후 어느팀도 티맥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급박했는지 맥그레디는 스스로 '''여러팀을 돌아다니며 워크아웃을 봐야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이 워크아웃이라는 것이 일반직장으로 얘기하면 면접시험과도 같은것인데, 맥그레디가 굴욕을 감수하고 이걸 했던것. 그래도 NBA구단측에서 별로 반응이 없다가 간신히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1년 계약을 맺게 된다.
3.5.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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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유니폼을 입은 티맥.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의 티맥은 과거 동부지구를 개발살냈던 포스의 그 티맥이 아니었다. 하지만 짬밥을 콧구멍으로 먹은것은 아니었는지, 그 특유의 농구센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주로 백업 포인트 가드 및 주전 슈팅 가드로 뛰면서 게임 리딩과 볼 배급을 맡으면서 디트로이트의 공격을 이끌었다. 그리고 몇몇경기에서는 덩크슛도 성공시키면서 어느정도 예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활약을 하긴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상의 여파는 남았는지 디트로이트 시절에도 10게임 정도를 결장했고, 당시 디트로이트의 상황은 티맥이 그래도 어느정도 뛸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 팀의 백코트가 부상병동으로서 그야말로 제대로 돌아간 적이 거의 없었다. 올해 디트로이트와의 계약이 종료되었는데, 과연 그가 다른팀의 부름을 받을수 있을지 팬들이 주목하고 있다.
3.6. 애틀란타 호크스
한동안 조용하다가 애틀란타 호크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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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란타 호크스 시절.
디트로이트 시절과 비슷한 역할이었으나 호크스에서 그의 역할은 벤치 멤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결국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자유계약선수가 되었으나 전과 마찬가지로 어느팀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티맥은 방향을 틀어 중국프로리그팀인 칭다오 더블스타 이글스와 1년계약을 맺게 되었다.
3.7. 칭다오 더블스타 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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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A 칭다오 더블스타 이글스에서의 티맥
2012-2013시즌에 31.6분이라는 그리 길지않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32경기(1경기는 출장정지)평균 25점. 7.2 리바운드, 5.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건재한 모습을 어느정도는 보여주었지만 소속팀 칭다오는 해당시즌에 8승 24패로 최하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더군다나 그의 개인기록도 현재 CBA의 개인기록 상위랭커들은 전부 전직 NBA리거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딱히 큰 의미는 없다고 봐도 무방.
3.8. 샌안토니오 스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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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월 17일 이후에도 무적선수로 있다가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발표되면서 1년만에 NBA에 복귀하게 되었다. 규정상 3월 1일까지 NBA와 계약한 적이 없는 외국리그 선수는 플레이오프 출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카와이 레너드의 백업 스몰포워드로 플레이오프 출전하게 되었는데, 가비지 타임에나 나와서 득점 없이 시간만 때우는 신세. 그래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는 돌파했고, 팀은 계속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커리어 처음으로 파이널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7차전까지 간 접전 끝에 스퍼스는 마이애미 히트에 패하며 준우승했고 티맥은 8월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결국 무관으로 NBA를 떠났다.
4.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관계
코비 브라이언트가 2013년 8월 TV 토크쇼 미국의 코미디언 지미 키멜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로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라고 언급했다. 206cm(공식 신장은 203cm)의 키로 엄청난 운동능력과 모든 기술을 다 갖췄기 때문"이라는 것이 NBA데뷔 이전부터 코비와 티맥은 서로 알고 지냈던 절친이었는데. 2013년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은퇴했었을때 자신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선수로 역시 코비 브라이언트로 뽑았는데 인터뷰 비디오에서 그의 표정을 보면 [14] 자신을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라고 전에 말한 브라이언트를 위해 그냥 말한거 같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표정과 목소리하고 다른 것을 [15] 보면 선수시절 진짜 상대하기 까다로웠던거 같다. 그것도 스테판 마버리, 길버트 아레나스, 앨런 아이버슨, 카멜로 앤서니, 케빈 듀란트를 모두 언급하면서 마지막에 제일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라고 맥그레이디라고 언급을 했는데 한국에서는 브라이언트하고 레이커스의 인기가 엄청나고 맥그레이디는 하락세와 은퇴를 했었기 때문에 한국 뉴스에는 크게 나오지 않았다.“The guy that always gave me the most problems was Tracy McGrady. He had all the skills and all the athleticism, but he was 6’9 and he was very tough to figure out.”
“항상 나에게 가장 많은 문제를 준 사람은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였습니다. 그는 모든 기술과 엄청난 운동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키가 6피트 9인치이었고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위의 동영상 29:44부터 31:05에 나온다.
페이스북 동영상은 여기를 볼것 https://www.facebook.com/watch/?v=1756344331125581
한국어로 말하듯이 번역하면 “앨런 아이버슨이 정말 막기 어려웠다. 필라델피아에서 날 상대로 44점을 넣었던 경기가 생각난다. 스테판 마버리도 나와 할 때 50점을 넣었고, 길버트 아레나스는 60점을 넣은 적도 있었다. 카멜로 앤서니는 항상 막기 어렵다. 케빈 듀런트도 힘들다. 정말 많은 선수들이 있었다 그런데 내게 정말로 가장 큰 문제는 안겼던 선수는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였다. [16] 그는 모든 기술을 다 갖추고 있는데다 엄청난 운동능력까지 다 좋았다. 키도 206cm로 커서 정말 곤란했다.
NBA 데뷔 전부터 둘은 친한 친구였는데 당시 2000년대에 서코비, 동티맥이라고 불리면서 최고의 슈팅가드로 군림하던 시절 서로 경쟁하던 라이벌이었지만 서로 그런 라이벌 관계가 자신들을 계속 훈련하면서 서로 위대한 선수로 이름들로 NBA 역사에 기록하게 되었다. 2020년 코비가 죽었을때 티맥은 인터뷰에서 슬피 울었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NBA 선수들 사진을 찍던 Andrew D. Bernstein과 함께 그의 NBA 선수시절 여러 사진과 글로 "The Mamba Mentality: How I Play" (맘바의 정신: 어떻게 내가 경기하나) 책을 2013년에 출판했는데 그 책을 보면 브라이언트가 선수시절 상대하던 선수들이 있는데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도 있다. 챕터 이름은 "Tracy McGrady Had Some Magic to his Game." 한글로 번역하면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그의 경기에 마술을 가졌었다."
5. 이것저것
어린 시절을 주로 할머니의 손에 의해 키워졌다. 근데 이것이 때로 티맥을 비난하는 요소로 잘 쓰였다. 03-04시즌에 올랜도가 거의 막장으로 치달았을때 티맥이 은퇴 발언까지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미국 내에서는 '''"할머니 손에서 자라더니만 사내놈이 아주 시끄럽게 징징댄다."'''라고 까였다.
실제로 토론토에서 뛴 루키시즌에도 출전시간을 받지 못하자 '''"농구가 재미없다."'''고 발언하기도 하는 등 좀 성숙하지 못한 언행을 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출전시간 달라고 떼를 쓰다가 팀 내 베테랑에게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짜샤!!"'''라고 갈굼만 받기도.
참고로 빈스 카터와 사촌이다. 카터가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2000년 슬램덩크 대회에서 같이 경쟁했고 나름대로도 흠좀무한 덩크를 보여줬지만 카터의 임팩트가 정말 무지막지했기 때문에 누구도 티맥의 덩크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안습. 그래도 카터와 함께 길이길이 남...긴 했다. 카터가 팀원과 함께 하는 덩크 과제에서 티맥 뛰어넘기를 한 덕분에(...).
위에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근육질이긴 하지만 약간 마른 몸매 덕분인지 유니폼빨이 정말 잘 받는 선수 중 한명이다. 당시 최악의 유니폼 중 하나로 손꼽히는 토론토 랩터스의 초창기 유니폼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어울리는 편.
우리나라에는 2006년 8월에 방문해, 농구클리닉을 통해 국내 유망주들을 지도해주기도 했다.
은퇴 뒤 독립리그에 도전하고 있다. 농구말고 야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스카우트와 훈련 중이며, 로저 클레멘스도 그의 훈련을 도와줬다고 한다. 구속은 85~86마일(136~8km/h 가량) 정도 나오고 슬라이더가 좋다고 한다. 클레멘스의 평에 따르면 제구도 나름 괜찮은 편이지만 타자를 세워 놓고 해봐야 견적이 나올 것 같다고. 그리고 독립리그 구단인 슈가랜드 스키터스에 입단했으나 결국 독립리그에서도 썩 좋은 성적을 내지 못 하였다. 그러나 인기 덕분에 독립리그 올스타전에도 출전했고, 결국 2014년 7월 17일에 짧았던 독립 리그 선수 생활을 마치고 야구계에서도 은퇴했다. 통산 기록은 4차례 선발등판에 0승 2패 6.2이닝(...) 10볼넷 0삼진(...). [17]
1997년 드래프트 당시 시카고는 연봉에 큰 불만이 있던 스카티 피펜을 토론토로 보내고 맥그레디를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이 사실은 안 조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데뷔 시절 부터 아디다스 협찬을 받았고 시그니처는 01/02시즌부터 나왔는데 맥그레디가 최전성기(02/03)에 신은 티맥 2 는 나이키 위주의 농구화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킬 정도였으니 당시 맥그레디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6. 플레이스타일
착화신장 6 ft 8에 윙스팬또한 길어 2-3번 포지션 대비 우월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커리어 평균 경기당 턴오버가 3개가 되지 않을 정도의 볼핸들링과 매 경기 5-6 개 정도의 어시스트를 적립할 정도의 리딩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패싱 센스또한 뛰어나서 역대 스윙맨 최고의 패서중 한 명이었고, 하여튼 2미터 넘는 스윙맨이 어지간한 포인트가드들보다 공을 훨씬 잘 다뤘다. 젊었을 시절에는 여기에 어마어마한 가속능력과 역대최고로 평가받는 퍼스트스텝(그의 긴 다리길이에 기인한다)을 바탕으로 3점라인 근처에서부터 상대 수비를 한순간에 찢고 들어가 덩크나 레이업으로 마무리했다.(드리블시 자세가 키에 비해 매우 낮다) 이런 신체능력에 더해 그를 NBA 2회 득점왕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은 바로 점프 슛이었다. 돌파시 최고의 무기를 갖췄음에도 그는 커리어 내내 점프 슛을 우선하는 선수였는데, 수준급의 점프력에 길쭉한 키와 팔을 이용해 쏘는 어마어마한 타점의 점프 슛은 미드레인지와 3점라인 바깥 모두에서 상대의 림을 폭격했으며, 여기에 특유의 퍼스트스텝이 더해지자 조던 이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풀업점퍼가 완성되었다. 상대 입장에서는 떨어지면 페이크후 백스텝 풀업점퍼를 쏘고, 붙으면 바로 돌파하고 들어가니 미칠 노릇이었다. 동시대의 코비가 특유의 유연성과 볼핸들링을 바탕으로 온갖 드리블 스킬을 마스터해 상대를 농락했다면, 그는 보다 더 시원시원하고 직선적인 플레이를 즐겼다고 볼 수 있다. 멋짐은 덤. 그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농구키드들이 모두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괜히 코비가 인터뷰에서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큰 키와 엄청난 운동능력과 모든 기술을 다 갖췄기 때문에 현역시절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로 말한것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한다라는 가정은 의미 없지만 티맥이 농구에 대한 자세나 마음가짐이 레이 알렌, 코비 브라이언트, 폴 피어스같았다면 분명 맥그레디의 위상은 지금의 코비 못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전성기에도 프레임이 전반적으로 얇은 편이었기 때문에 림어택의 비중이나 성공률이 S급까지는 아니었다. 거기에 올랜도 - 휴스턴 시절 혹사를 통해 온갖 잔부상이 축적되었고 결국 그의 등과 무릎은 그의 퍼스트스텝과 키에 비해 유독 낮았던 드리블 자세, 순간의 민첩한 움직임들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03-04 이후로 야투율이 현격히 떨어졌던 것도 바로 이런 부상으로 인한 운동능력 악화[18] 에 있다. 그리고 자기관리가 다른 6성 슈가들에 비해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빨리 져버리는 원인이 되었다..
롱2가 상당히 많았다. 즉 3점 바로 앞이나 근처에서 슛비중이 높았고 단순한 캐치 앤 슛 보다 공을 가진 상태에서 1대 1 비중이 높고 비슷한 시기 앨런 아이버슨, 코비, 카터, 피어스 모두 이런 류의 공격스타일이 상당히 많았다. 티맥은 오히려 얇은 프레임속에서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발휘하여 많은 인기를 얻은 선수였다.
폴 조지의 미들레인지 능력에 르브론 제임스의 운동능력과 림 어택이 적절하게 결합된 선수가 트레이시 맥그레디라고 보면 된다. 시대의 흐름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근 NBA에서 마이클 조던, 클라이드 드렉슬러, 코비 브라이언트, 트레이시 맥그레디와 같은 선수 유형은 없다. 즉 뛰어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멋들어짐까지 더해진 에이스 GO(30득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스타일 유형인 선수(잭 라빈?)들인데 현역 SG 중 그나마 지미 버틀러가 비슷하지만 저 네 명의 선수가 보여준 어마어마한 운동능력과 돌파력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버틀러는 신기할 정도로 비이기적인 선수고, 슛 시도 자체가 적다.[19]
7. 관련 문서
[1] 1997년 드래프트 측정 결과 맨발 신장 6' 7" = 201cm / 착화신장 6' 8" = 203cm[2]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바로 NBA 드래프트를 신청 하였기에 지금은 신장이 더 클 것이다.[3] 주로 슈팅 가드로 출전 하였다.[4] 중국 CBA 소속팀.[5] 티맥에게 안타까운 사실은 02-03시즌부터 플옵 1라운드가 5전 3선승제에서 7전 4선승제로 확대된 것....다시 말해 1년전이었다면 3승1패가 된 시점에서 1라운드 통과하고 2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다.[6] 03년 대표팀이 사실상 2004년 드림팀 로스터를 구성해야 하는데 아이버슨, 던컨만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했고 나머지 선수들은 불참. 결국 동메달에 그쳤다.[7] 2019-20 시즌에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에서 잠시 뛰었던 그 선수 맞다.[8] 당시 스티브 프랜시스도 휴스턴에서 야오밍과 합이 굉장히 좋았고 올스타주전으로 뽑히는 등 전성기에 돌입하는 시기였다.[9] 매직은 힐, 티맥 영입 당시 팀의 운명을 걸 정도 였다. 하지만 힐이 장기 부상으로 시즌아웃급이 3시즌이였고 힐에게 들어가는 연봉값이 샐러리캡에 많은 비중을 차지했기에 전력강화가 쉽지 않았고 결국 티맥 원맨팀에 그쳤으며, 매번 동부 하위 시드PO 턱걸이로 합류하여 항상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10] 하워드는 이후 레이커스, 로케츠, 호크스, 호네츠로 거의 매시즌 팀을 옮기는 중인데 개인 스탯은 여전히 좋은 수치를 보이고 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본인 자리를 디조던, 고베어, 드루먼드, 카펠라에게 넘기고 있으며 2010년 대 이후 드마커스 커즌스, KAT, 엠비드 등 20득점, 10리바운드와 동시에 기록하는 선수들이 등장하여 마침내 센터 기근의 시대에 막을 내렸다. 이 후 2018년 여름 시장에서 다시 한 번 위저즈로 이적 했는데 2대 2 게임을 즐기는 존 월과 그것을 가장 약점인 하워드가 과연 어떤 조합을 보일지도 기대된다.[11] TNT의 농구 간판 캐스터[12] 참고로 이경기에서는 35초를 남겨두고 스퍼스가 거의 10점정도 앞서고 있었다.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플레이오프라면 몰라도 정규시즌 게임에서 이 정도 점수차면 사실상 거의 끝난 경기라 해설자인 마브 알버트[11] 와 스티브 커(시카고 왕조의 3점 스페셜리스트였고, 현재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인 그 커 맞다)는 마무리멘트를 하고 있었고 관중들도 절반 정도 경기장을 떠난 상황이었다.(경기장을 자주 가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수천, 수만명이 한꺼번에 퇴장하면 장난아니게 혼잡하기 때문에 사실상 승부가 끝난 시합에서는 관중들이 일찍 퇴장한다) 그런데 갑작스레 벌어진 이 사태(?) 때문에 지루해죽던(그전까지 로켓츠는 졸전을 펼치고 있었다) 관중들이 흥분하고 나가던 사람들은 들어와서 서서 구경하고 있고, 해설자까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커는 "미리 나가신 그 많은 분들은 지금 차안에서 (중계를 들으며) '우리가 무슨 짓을 한거지??'라도 하실 겁니다"라며 미리 퇴장한 팬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13] 경기 끝나기 전 집에 가는 홈팬들이 중계영상에 잡힐 정도로 승부는 누가 봐도 뻔한 상황이었다.[14] 맥그레이디가 공항 인터뷰 영상이 있는데 지금은 찾기 힘들다. 찾을 수 있는분은 업로드 추가[15] 동영상 30:50-53을 보면 Yea yea ohhh Tracy McGrady man.. 번역하면 맞아 맞아 이야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진짜[16] 사이에 있는 말들은 맞아 맞아 이야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진짜[17] 실제로 조던이 보여준 기량은 평범한 마이너리거의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야구로 밥벌어먹고 살만한 더블A 선수급은 되었다. 조던의 스포츠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프로선수가 다른 스포츠에 도전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다만 조던은 운동능력이 아직 빵빵하던 30세였고 티맥은 35세에 가까운데다가 부상으로 운동능력을 많이 잃었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18] 그래도 휴스턴 시절까지는 all nba선수[19] 아이버슨 스타일은 어느덧 리그 대세가 되었고 스트레치 빅맨들이 높은 가치를 보이는데 반해 사실상 드웨인 웨이드, 버틀러, 더마 드로잔 이후 운동능력 있는 SG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선수들도 전형적인 조던 스타일 선수들은 아니고 파생된 유형스타일 인데 오히려 웨이드는 조던과 아이버슨을 적절히 합체한 유형에 가깝고 버틀러는 화려함 보다는 좀 더 다부지고 단단한 느낌을 주는 선수이며, 드로잔 역시 저 네명과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여전히 하위호환 느낌과 '''스타성'''에서 큰 격차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