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 리그/1993-94 시즌
1. 개요
프리미어 리그의 두 번째 시즌이다. 지난시즌 챔피언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타이틀을 방어하며 2연패에 성공했고 FA컵에서도 결승에서 첼시를 4-0으로 꺾고 리그-FA컵 더블에 성공했다.
2. 참가 클럽
2.1. 감독 교체
3. 순위
- 순위는 승점 > 득실차 > 다득점 순으로 결정된다.
3.1. 우승
3.2. 클럽별 리뷰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92-93 시즌 아스톤 빌라와 막판까지 우승경쟁 끝에 프리미어리그 초대 우승팀이 된 맨유는 1993-94 시즌에는 블랙번 로버스와 막바지까지 경쟁 끝에 타이틀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거기에 FA컵 결승전에서 첼시 FC를 상대로 4-0 대승을 거두며 클럽 역사상 처음이자 역대 잉글랜드 팀 중 6번째인[11] 리그-FA컵 더블에도 성공했다. 리그컵 결승전에서 아스톤 빌라에 패하지 않았다면 잉글랜드 역사상 첫 국내대회 트레블을 이룬 첫 팀이 될 수 있었다. 25년 만에 출전한 UEFA 챔피언스리그(전신 유로피언컵)에서는 2라운드에서 갈라타사라이 SK에 원정다득점 원칙으로 떨어지며 일찍 고배를 마셨다. 26년 만의 우승 후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쟁 끝에 강등된 노팅엄 포레스트로부터 지난 시즌 PFA 올해의 팀에 오른 유망주 미드필더 로이 킨을 당시 영국 레코드인 375만 파운드에 데려온 맨유는 초반부터 줄곧 1위를 질주했고 7라운드 첼시 원정 패배 이후에는 8연승을 질주, 1월 중순에는 2위 블랙번에 승점 16점 차이로 선두에 오르기도 했다. 1994년 1월 맷 버스비 전 감독이 타계하여 에버튼과의 홈경기에서 그를 추모하는 묵념이 있었다. 이 경기에서는 라이언 긱스가 결승골을 득점하며 1-0 승리를 거뒀다. 맨유는 2월까지 리그 29경기에서 단 1패만 당하며 순항했다. 그러다가 3월 리그 첫 경기였던 첼시와의 홈경기에서 리그 2번째 패배를 당하며[12]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이어진 찰튼 애슬레틱과의 FA컵 8강전에선 3-1 승리를 거뒀지만 피터 슈마이켈 골키퍼가 퇴장당해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컵 결승에 결장해야 했다. 리그로 돌아와 리그컵 준결승에서 만났던 강호 셰필드 웬즈데이에 홈에서 5-0 대승을 거두며 블랙번의 추격을 뿌리치는듯 했지만, 곧바로 꼴찌 스윈든 원정과 아스날 원정에서 2-2 무승부에 그치며 주춤거렸는데 문제는 에릭 칸토나가 두 경기에서 모두 퇴장당해 리그컵 결승에 출장정지 징계를 받아야했다. 결국 리그컵 결승에서 아스톤빌라에 1-2 패배로 준우승에 머문다. 안좋은 흐름은 계속 이어지며 4월 첫 경기 2위 블랙번과 승점 6점이 앞서있는 상황에서 블랙번 원정을 가게 되었는데 0-2 완패를 당하며 승점 3점 차이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올덤 애슬레틱과 웸블리에서 FA컵 준결승을 치르게 되는데 0-0으로 연장으로 이어지다가 연장전 먼저 실점하며 준결승에서 탈락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마크 휴즈가 연장전 종료 1분 전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리며 재경기로 끌고갔다. 3일 뒤 펼쳐진 재경기에서 4-1 대승을 거두며 FA컵 결승에 진출한 맨유는 에릭 칸토나가 5경기 출장정지 징계에서 복귀했고 복귀전인 맨체스터 더비에서 홀로 2골을 넣으며 완벽한 복귀를 알렸다. 칸토나의 복귀로 탄력을 받은 맨유는 막판 뒷심부족으로 승점을 잃기 시작한 블랙번을 결국 승점 8점 차이로 제치고 리그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그리고 FA컵 결승에서 첼시에 4-0 대승을 거두며 더블에도 성공했다. 에릭 칸토나는 시즌 25골을 득점하며(리그 18골12어시) 공격을 이끌었고 P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라이언 긱스와 리 샤프, 안드레이 칸첼스키스 역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칸토나를 보좌했다. 시즌 후, 13년간 맨유에서 활약했던 주장 브라이언 롭슨이 미들즈브러로 플레잉코치가 되어 떠났다. 그리고 클레이튼 블랙모어, 마이크 펠란, 디온 더블린 역시 팀을 떠났다. 그리고 블랙번으로부터 데이비드 메이를 영입했다.
- 블랙번 로버스
오프시즌 로이 킨 영입에 근접했으나 맨유에 하이재킹당하며 실패했다. 1월 한 시점에선 맨유에 승점 16점 차까지 벌어진 2위였으나 10월 리즈로부터 데이비드 배티, 11월 사우스햄튼으로부터 팀 플라워스를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던 블랙번은 12월~2월 리그에서 11경기 10승1무를 거두며[13] 맨유를 열심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3월 아스날 원정과 윔블던 원정에서 0-1, 1-4로 패하며 흔들렸지만 3월 들어 무패행진이 끊어지고 꼴찌 스윈든에 비기는 등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맨유와의 단두대매치를 앞두고 승점을 6점까지 좁혀졌다. 4월 2일 홈에서 열린 맨유와의 우승이 걸린 단두대매치에서 앨런 시어러가 2골을 득점하며 2-0 승리, 승점을 3점 차이로 좁혔다. 그러나 맨유는 올덤과의 FA컵 준결승을 기점으로 다시 원래의 폼으로 돌아갔고, 블랙번은 강등권 경쟁의 사우스햄튼에 1-3으로 지고 QPR과의 홈경기, 코번트리 원정에서 1-1 무승부 , 1-2 패배에 그쳐 우승경쟁에서 탈락하며 맨유와 승점 8점 차이 준우승으로 마쳤다. 그렇지만 UEFA컵 진출로 창단 첫 유럽대항전 출전이라는 값진 성과를 얻었다. 세계 최고 골키퍼 이적료의 팀 플라워스 골키퍼[14] 와 그레이엄 르 소, 데이비드 메이, 헤닝 베르그, 콜린 헨드리의 수비진으로 구성된 뒷문 역시 42경기에서 36실점만 허용하며 공수밸런스가 좋았다. 양 측면은 제이슨 윌콕스와 스튜어트 리플리가 맡았고 중원은 주장 팀 셔우드와 이적생 데이비드 배티로 구성되었다. 공격진은 앨런 시어러와 마이크 뉴웰로 구성되었는데 1992년 12월 장기부상을 당했던 앨런 시어러는 시즌 초반 부상에서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폼을 회복하며 31골을 득점, 리그 득점 2위에 오르며 맹활약을 펼쳤다. 리그 팀득점이 63골인 것을 감안하면 팀 득점의 절반을 책임진 셈. 그러나 시어러를 제외하면 시즌 10골 이상 넣은 선수가 없는 것이 약점이었고, 결국 시즌 종료 후 노리치의 간판 스트라이커 크리스 서튼을 데려오며 SAS 라인을 구성하게 된다.
- 뉴캐슬 유나이티드
케빈 키건의 지도 아래 4년 만에 1부리그로 돌아온 뉴캐슬은 에버튼으로부터 로컬보이였던 피터 비어슬리를 1.5M에 데려온다. 그리고 이 영입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1992-93 시즌 중반 브리스톨 시티로부터 영입되어 12경기 12골을 득점하며 뉴캐슬의 승격에 공을 세운 앤디 콜은 1993-94 시즌, 자신의 프리미어리그 데뷔 시즌에서 무려 34골을 득점하였고, 피터 비어슬리도 21골을 기록, 둘을 합쳐 55골이라는 가공할 만한 득점력을 과시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한 시즌 EPL 투톱 최다 골 기록이다. 무시무시한 투톱을 앞세운 막강한 공력을 가진 뉴캐슬은 팀득점 82점으로 93-94 시즌 전체 팀득점 1위를 기록하였고, 스윈던 타운과의 홈경기 7-1 승리로 93-94 시즌 전체 최다골차 경기의 승자가 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공격적인 팀컬러는 축구팬들을 매료시켰고 언론으로부터 엔터테이너라는 칭호를 받기에 이른다. 앤디 콜은 PFA 영플레이어 상을 수상했고, 뉴캐슬은 승격하자마자 3위를 기록하며 UEFA컵을 따냈다.
- 아스날
1992-93 시즌 두 개의 컵을 들어올렸으나 조지 그레이엄의 지루한 롱볼축구로 인해 리그에서는 40골에 그친 리그 최악의 득점력으로 10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긴 아스날은 1993-94 시즌 개막전 코번트리에 홈에서 0-3으로 어이없게 패했지만 곧바로 4연승을 기록하며 상위권으로 올라갔다. 지난 시즌과는 달리 컵대회에서는 리그컵과 FA컵 모두 4라운드에서 각각 아스톤 빌라[15] 2부리그 볼튼에 패해 일찍 떨어졌지만 리그에서는 꾸준히 3~4위권을 유지했다. 첼시 원정에서 1973-74 이후 20년 만에 승리를 거두기도 했고, 후반기에는 리그 19경기 무패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9승10무로 승리보다 무승부가 많은 것은 흠이었으나 데이비드 시먼 골키퍼를 필두로 나이젤 윈터번-토니 아담스-마틴 키언(스티브 볼드)-리 딕슨으로 구성된 철의 포백은 19경기에서 11실점만 허용하는 단단함을 과시했고 리그 전체에서 28실점만 허용, 리그 내 최소실점팀이 되었다. 이렇게 수비에서의 단단함은 또 한번 컵대회에서 우승하는데 기여했는데 바로 UEFA 컵 위너스컵이었다. 오덴세 BK-스탕다르 리에주-토리노 FC-파리 생제르맹-파르마 FC를 상대하며 9경기에서 허용한 실점은 단 3점이었다. 결국 아스날은 코펜하겐에서 열린 결승에서 디펜딩챔피언 파르마를 알란 스미스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며 23년 만의 유럽대항전 우승에 성공했다. 골게터 이안 라이트는 전체 대회에서 34골을 기록하며(리그 23골, 리그컵 6골, FA컵 1골, 위너스컵 4골) 변함없이 활약을 이어갔고[16] , 케빈 캠벨도 19골을 기록(리그 14골), 라이트를 도왔다.
- 리즈 유나이티드
1992-93 시즌 디비전 1의 마지막 우승팀이었던 리즈는 원정경기 21경기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며 17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마감했다. 이에 리즈는 또다시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에이스 브라이언 딘을 270만 파운드에, 시즌 중에는 맨체스터 시티로부터 데이비드 화이트를 2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리즈는 초반 5경기에서 1승1무3패로 불안하게 시작했지만 이후 14경기에서 9승5무의 무패행진으로 상위권으로 도약했고, 1993년 9월 11일, 사우스햄튼 원정에서 1992년 4월 이후 무려 24경기 만에 2-0 승리를 거두며 지긋지긋했던 원정무승의 고리를 끊어냈다. 브라이언 딘은 두 자릿수 득점-도움(11골11어시)를 기록하며 맹활약했고, 로드 월리스와 게리 스피드는 각각 17골과 10골을, 그리고 게리 맥알리스터는 8골을 득점했다. 후반기 맨시티에서 합류한 데이비드 화이트도 후반기에 5골을 득점했다. 65득점 39실점으로 각각 팀최다득점 4위, 팀최소실점 4위를 기록하며 괜찮은 공수 밸런스를 보였다.
- 윔블던
가장 작은 규모의 재정, 팬 베이스를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심지어 홈구장이 없이 크리스탈 팰리스의 홈구장 셀허스트 파크를 빌려쓰던 윔블던은 개막 후 9경기에서 1패만 허용하며 중상위권에서 초반을 보냈다. 그러면서 9월의 감독에 조 키니어 윔블던 감독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10경기에서 단 1승만 거두며 중위권과 하위권 추락의 위기에 놓였다가 3월에 들어서부터 무서운 상승세를 시작했다. 3월에 있던 6경기에서 상위권에 있던 노리치, 리즈, 블랙번을 꺾으며 4승2패를 거뒀고, 4월에 있던 7경기에서는 무려 5승2무라는 놀라운 성적을 보였다. 2무는 리버풀과 아스날을 상대로 한 것이었고, 5승의 제물 중에는 선두 맨유도 있었다. 3월 중순부터 7승2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고, 블랙번과 맨유, 리즈, 아스날 등 상위권 팀들의 발목을 줄줄이 잡으며 조 키니어 감독은 3월과 4월 이달의 감독상을 연이어 수상하게 되었다. 2월을 마치는 시점에서 윔블던은 9승10무10패로 14위에 있었으나 무서운 상승세로 시즌을 18승9무13패, 6위[17] 라는 놀라운 순위로 마감하게 되었다. 이는 빌라, 토트넘, 리버풀, 웬즈데이 등등 당시 이름을 날렸던 팀들보다도 높은 순위였다. 주장 비니 존스가 중원에서 중심을 잡고, 지난시즌 19골로 득점 3위에 올랐던 딘 홀즈워스는 17골로 제몫을 다했고 존 파샤누도 11골을 득점했다.
- 셰필드 웬즈데이
셰필드 웬즈데이는 1992-93 시즌과 마찬가지로 1993-94 시즌 역시 7위로 마쳤다. 주포 데이비드 허스트가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나오지 못했음에도 거둔 성적표였다. 신예 공격수 고든 왓슨은 12골을 득점하며 웬즈데이의 희망이 되었고, 노장 공격수 마크 브라이트는 19골을 득점하며 허스트의 공백을 메웠다. 리그컵에서는 준결승까지 올라갔지만 맨유에 홈어웨이 1-5로 밀리며 떨어졌다.
- 리버풀
시즌 전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의 아들인 공격수 나이젤 클러프와 수비수 닐 러독을 노팅엄과 토트넘에서 영입하고 개막 후 1달 후에는 웨스트햄과 데이비드 버로즈와 마이크 마쉬를 주는 조건으로 레프트백 줄리안을 데려온다. 개막 후 나이젤 클러프의 맹활약으로 3연승에 10득점으로 선두에 올랐으나 곧바로 6경기에서 5패를 당하며 중위권으로 내려앉았다. 에버튼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는 실점 후 브루스 그로벨라 골키퍼가 팀동료 스티브 맥마나만과 서로 언쟁을 벌이다가 과격한 행위로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러면서 13위로 내려앉았는데 리그컵에서는 리버풀 출신에 리버풀 유스에서 뛰던 18세의 로비 파울러가 등장했다. 파울러는 풀럼과의 리그컵 1차전에서 데뷔했는데 그 경기에서 데뷔골을 넣더니 2차전에서는 홀로 5골을 퍼부으며 리버풀 역사상 한경기 5골을 득점한 4번째 선수가 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파울러는 그 다음경기인 올덤과의 홈경기에서 0-1로 뒤진 후반 41분 리그 데뷔골을 동점골로 기록하며 2-1 역전승의 발판을 놓았고, 2주 뒤에는 사우스햄튼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러면서 파울러는 클러프의 자리를 먹으며 이안 러시와 짝을 이뤄 경기에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 파울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리버풀의 리그 순위는 1993년이 끝나는 시점에서도 7위~9위를 맴돌았고, 강등권의 셰필드 유나이티드와 스윈던 타운에도 승리하지 못하며 수네스에 대한 경질 압박은 커지기 시작했다. 리버풀은 1993년을 선두 맨유에 승점 20점이, 3위에 승점 6점이 뒤진 8위로 마쳤다. 1월 들어 리그에서 4경기 3승1무를 거두며 올라오는 듯 했다. 맨유와의 홈경기에서는 0-3으로 지는 경기를 3-3으로 비기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FA컵 첫 라운드에서 하부리그의 브리스톨 시티에 재경기 끝에 충격패를 당하며 광탈했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수네스 감독은 전격 사임했고 리버풀 선수 출신이자 오랫동안 코치직을 맡아온 로이 에반스가 신임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감독 교체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네스의 경질 시점에서 리버풀의 순위는 12승7무7패로 5위였으나 로이 에반스가 감독이 된 이후 5승2무9패에 그치며 8위까지 떨어지며 시즌을 마쳤다. 위안거리는 18세의 신예 스트라이커 로비 파울러가 리그 12골을 포함하여 총 18골을 넣으며 리버풀의 새 희망이 되었다는 것 빼곤 없었다. 8위는 1961/62 시즌 빌 샹클리 감독이 2부리그에서 우승하여 승격한 이래 리버풀이 거둔 최악의 순위표였다. 한편 리버풀의 명물인 스피언 콥 엔드가 전석 입석인 상태로 마지막으로 치러진 시즌이었는데, 테일러 리포트에 따른 전석 좌석으로 교체에 따라 1994년 4월 노리치 시티와의 홈경기를 마지막으로 입석 콥 엔드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시즌 종료 후에는 오랫동안 리버풀에서 활약해왔던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와 미드필더 로니 웰란이 팀을 떠났다.
- 퀸즈 파크 레인저스 -
레스 퍼디난드가 16골을 득점하며 공격을 이끌었고 9위로 마감했다.
- 아스톤 빌라
1992-93 시즌 준우승으로 마친 아스톤 빌라는 리그 컵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3-1로 꺾고 1976-77 시즌 이후 17년 만의 4번째 리그컵 우승에 성공했다. 이 우승으로 맨유의 국내 대회 트레블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리그에서는 리그컵 결승진출을 기점으로 전과 후과 극명하게 엇갈렸다. 3월 6일까지 빌라는 13승10무7패, 5위로 상위권에 있었으나, 그 이후 리그컵에 집중하면서 3연패를 당했고, 우승 이후에는 목표가 사라지며 11경기에서 1승에 그치게 된다. 그러면서 10위로 마감하게 되었다.
- 코번트리 시티
코번트리는 개막전 아스날 원정에서 믹키 퀸의 해트트릭으로 깜짝 3-0 승리를 거뒀고 3연승으로 기분좋게 시작했다. 그리고 9라운드에서야 패배를 하며 22개 팀 중 개막 후 가장 마지막으로 패배를 기록했다. 잘나가고 있었는데 바비 굴드 감독이 10월 갑자기 사임하고 3부리그 볼튼을 이끌던 필 닐이 새 감독이 되었다. 경험 부족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필 닐은 코번트리를 강등걱정 없이 11위로 무난하게 이끌며 시즌을 마쳤다.
- 노리치 시티
1992-93 시즌 강등후보였다가 시즌 내내 선두권에서 놀면서 3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UEFA컵까지 진출한 노리치는 1993-94 시즌 전반기에도 그 돌풍을 이어나갔다. 개막전 맨유와의 홈경기에서 0-2로 졌지만 그 다음경기에서 지난시즌 7-1 참패를 안겼던 블랙번 원정에서 3-2 승리를 거뒀고, 리즈와 에버튼 원정에서 4-0, 5-1 대승을 거두며 2년 연속 유럽대항전 진출을 노리게 되었다. 에반 에코쿠는 에버튼 원정에서 4골을 기록하며 프리미어리그 최초로 한 경기 4골을 넣은 선수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출전한 유럽대항전 UEFA컵에선 2라운드 독일의 거함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원정에서 2-1 승리를 거두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는 영국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 거둔 승리였다. 그들의 유럽대회에서의 선전은 3라운드 대회의 우승팀이 되는 인테르에 떨어지며 막을 내렸지만 노리치 팬들은 유럽 대회를 맛을 본 것 만으로도 행복했다. 전반기 리그에서 단 한 번의 연패도 허용하지 않으며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1994년 1월 4일 노리치의 돌풍을 이끌었던 마이크 워커가 공석인 에버튼의 감독직을 맡으면서 수석코치인 존 디핸이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디핸이 감독이 되자마자 리그에서 7연무를 기록했고 10경기 무승에 빠졌다. 이는 강등된 스윈던 타운의 15경기 다음인 최장시간 무승 2위의 기록이었다. 무승의 늪을 워커가 감독인 에버튼과의 홈경기에서 3-0 대승으로 끊었지만, 에버튼전 승리 이후에도 7경기 무승에 빠졌고 18경기에서 1승만을 거두는 게 되어버렸다. 여기에는 홈에서 사우스햄튼에 3-1, 4-3으로 이기고 있다가 추가시간 결승골을 얻어맞아 4-5로 대역전패를 당한 경기도 있었다.[18] 41라운드 리버풀 원정에서 1-0 승리를 거두며 그들의 스피언 콥 입석으로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재를 뿌리지만 이미 순위는 내려갈 대로 내려가 12위까지 내려앉은 상황이었고 결국 12위로 마쳤다. 홈에서 이상하리만큼 정말 약했는데 홈에서의 성적은 4승9무8패로 20위였다. 원정에서 8승8무5패로 4위에 오른 것과 대조적. 크리스 서튼은 25골로 리그 득점 순위 3위에 올랐고, 시즌 후 블랙번 로버스로 이적하여 SAS 트리오를 결성했다.
-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1992-93 시즌 디비전1 준우승으로 강등 1년 만에 승격한 웨스트햄은 개막 1달 만에 리버풀에 캡틴 레프트백 줄리안 딕스를 트레이드로 내줬지만 노장 듀오 트레버 몰리와 리 채프먼이 중요할 때 활약해주며 이렇다할 강등 걱정 없이 13위라는 무난한 순위로 마쳤다.
- 첼시
시즌을 앞두고 스윈던 타운을 승격시키며 한창 주가를 올리던 글렌 호들을 데려오며 지난시즌보다 나은 성적을 기대했지만 디펜딩챔피언 맨유에게 시즌 첫 패를 안겨주고 리버풀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6연패와 11경기 무승에 빠지며 박싱데이 시점에 강등권으로 추락해버렸다. 다행히 후반기에는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맨유 원정에서 전반기처럼 게빈 피콕의 결승골로 또 승리를 거두며 시즌 더블에 성공하지만 최종 순위는 14위로 지난 시즌보다 오히려 3계단 더 떨어졌다. 하지만 FA컵에서 바넷-셰필드 웬즈데이-옥스포드-울버햄튼-루튼타운을 제압하며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에서 맨유에 0-4로 대패하며 준우승했지만 맨유가 이미 리그 우승을 했기 때문에 준우승팀에게 UEFA 컵 위너스 컵 자격이 주어지며 20여년 만에 유럽대항전 진출에 성공했다.
- 토트넘 핫스퍼
풋볼 디렉터이자 전임 감독이었던 테리 베나블스를 짜르고 과거 토트넘 선수였던 오스발도 아르딜레스를 감독으로 선임하였는데 아르딜레스 감독은 공격에 5명의 선수를 배치하며 새로운 형태의 전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초반 10경기에서 5승3무2패를 거뒀으나 지난시즌 득점왕 테디 셰링엄의 부상 이후 성적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1993년 10월 3일 에버튼전 3-2 승리 이후 9경기에서 5무4패로 부진했고, 맨시티와 웨스트햄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그 이후 1993-94 시즌 모든 팀 중 최다 연패인 7연패를 포함 10경기 무승에 다시 빠지며 강등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다행히 셰링엄이 부상에서 돌아오며 8경기에서 4승을 거뒀고, 최종전이 치뤄지기 전에 잔류를 겨우 확정지었다. 홈에서 15경기 무승을 기록하기도 하며 단 4승만을 따내는 최악의 홈성적을 기록했고, 이는 전체 홈경기 성적 중 꼴찌에서 2번째였다. 리그 후반기 성적만 산정했을 땐 5승3무13패, 20위로 강등권.
- 맨체스터 시티
피터 리드 감독이 4경기 동안 승점 1점 만을 얻으며 경질, 시즌 1호 경질 감독이 되었고, 옥스포드의 브라이언 호튼이 신임 감독이 되었다. 맨시티는 팀득점이 경기당 1골도 안되는 38골 만을 득점하며 골가뭄으로 강등 걱정에 시달렸고, 시즌 6골 이상 득점한 선수가 없었다. 데이비드 화이트가 리즈로 떠나고 리즈에서 데이비드 로캐슬을 데려왔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9승으로 두 자릿수 승리에 실패하고 18무로 셰필드 유나이티드와 함께 리그에서 최다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시즌 막바지 3연승의 도움으로 1987년 강등 이후 최악의 성적인 1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 에버튼
개막 3연승에 초반 8경기 5승으로 상위권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노리치와의 홈경기에서 1-5 참패를 당하고 9경기에서 1승에 머물며 중위권으로 처졌다. 결국 하워드 켄달 감독은 12월 4일 사우스햄튼전을 끝으로 사임했다. 감독이 없는 상황에서 7경기 1무6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다가 지난시즌 노리치를 3위로 이끌고 뮌헨 원정에서 이기는 돌풍을 이끌었던 마이크 워커를 신임 감독에 임명했다. 에버튼 팬들은 워커가 다시 에버튼을 부흥시킬 것으로 기대했고 그는 리그 첫 경기에서 스윈던을 상대로 6-2 대승을 거고 6경기에서 3승2무1패를 거두며 기대에 부응시키는 듯 했다. 그러나 에버튼은 10경기에서 1승2무7패로 다시금 부진의 늪에 빠졌고, 최종전을 앞두고는 강등권인 20위까지 떨어졌다. 최종전 윔블던과의 홈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잔류하는 상황. 에버튼은 전반전 0-2로 끌려가며 강등되는 듯 했지만 후반전 3골을 넣어 역전승을 거두며 40년 만의 2부리그 강등을 피했다.
- 사우스햄튼
사우스햄튼은 시즌 첫 9경기에서 승격팀 스윈든에 5-1 대승을 거둔 경기를 빼곤 모두 지며 최악의 스타트를 끊었다. 이후 르 티시에의 활약으로 뉴캐슬-토트넘-빌라에 승리를 거두고 7경기에서 승점 11점을 따냈지만, 다시 5연패에 빠지며 강등권에 박히게 되었다. 결국 새해 첫 날 노리치에 홈에서 0-1 패배를 당한 뒤 이안 브랜풋 감독은 경질되고 앨런 볼이 다음 감독이 되었다. 볼 감독 부임 후 리그 5경기에서 4승을 거두며 강등권에서 탈출시켰다. 7경기 무승을 기록하며 다시 강등권으로 떨어졌지만 4월 9일 노리치 시티 원정에서 매튜 르 티시에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1-3, 3-4로 지던 경기를 5-4로 역전시키며 대역전승을 거뒀고, 리그 우승을 노리던 블랙번을 상대로는 홈에서 3-1 승리를 기록, 고춧가루를 선사했다. 사우스햄튼은 최종전을 앞두고 20위 에버튼에 승점 1점이 앞서있는 17위였는데 최종전에서 웨스트햄 원정에서 3-3 무승부를 거두었고, 셰필드 유나이티드와 입스위치가 동시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며 18위로 잔류를 간신히 확정지었다. 'Le God' 르 티시에는 25골을 득점, 득점 3위에 오르며 사우스햄튼의 잔류를 멱살잡고 이끌었다.
- 입스위치 타운
1992-93시즌 중반기까지 4위에 오르며 잘나가다가 기나긴 무승행진으로 간신히 잔류했던 입스위치는 이번에는 개막 3연승을 기록했고, 시즌 내내 중위권을 유지하며 무난하게 가는듯 했다. 그러나 마지막 11경기에서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했고, 최종전이 치러지기 전 골득실이 불리한 가운데 20위 에버튼에 승점 1점 앞선 19위까지 추락해버렸다. 최종전 준우승이 확정된 블랙번을 상대로 반드시 이겨야 잔류가 확정되는 상황. 비기거나 지면 사우스햄튼, 셰필드 유나이티드, 올덤, 에버튼의 경기결과를 지켜봐야했다. 입스위치는 블랙번 원정에서 0-0으로 비겼고, 전반전 0-2로 지던 에버튼이 3-2로 역전하고, 입스위치와 승점은 같은데 골득실은 높던 사우스햄튼과 셰필드 유나이티드가 동점 상태로 이어지며 강등당할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첼시가 셰필드 유나이티드 상대로 추가시간에 3-2로 앞서는 득점을 하며 입스위치는 간신히 19위로 살아남았다. 잔류한 것이 아니라 잔류당한 셈.
- 셰필드 유나이티드
1992-93 시즌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브라이언 딘을 리즈로 이적시켰고, 셰필드 유나이티드는 그의 공백을 체감하며 시즌 내내 득점력 부진에 시달렸다. 결국 최종전 첼시 원정에서 비기면 잔류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추가시간에 2-3 결승골을 헌납하며 강등되고 말았다.
- 올덤 애슬레틱
1992-93 시즌 최종전에서 사우스햄튼에 4-3 승리를 거두며 같은 시각 패한 팰리스를 골득실로 제치고 극적인 잔류에 성공했던 올덤은 개막전 입스위치와의 홈경기 0-3 패배를 시작으로 또 부진, 결국 초반부터 강등권 싸움을 시작했다. 팀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조 로일 감독을 경질하는 대신 신뢰하기로 결정하고 후반기 한 시점에서 9경기 5승3무1패로 강등권에서 탈출하며 잔류가 눈앞에 오는 듯 했다. FA컵에서도 준결승에 진출한 상황. FA컵 준결승 상대를 맨유였는데 맨유를 상대로 연장전 먼저 득점하며 결승 진출이 눈앞에 다가왔으나 종료 1분 전 마크 휴즈에 동점골을 허용했고, 결국 재경기에서 1-4로 패하며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제 FA컵에서 떨어졌으니 남은 리그 7경기에 올인하면 되는 상황이었으나 7경기에서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사우스햄튼과 셰필드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가 올라오며 다시 강등권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최종전에서 승리하면 타구장 경기 결과에 따라 잔류할 수 있는 여지는 있었으나 최종전 노리치 원정에서 1-1 무승부에 그치며 21위로 강등이 확정되었다.
- 스윈던 타운
글렌 호들 감독이 플레잉코치로 활동하며 1992-93 시즌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레스터를 꺾고 승격에 성공했으나 그 기쁨도 잠시 호들 감독이 첼시로 옮기며 수석코치인 존 고먼이 감독을 맡게 되었다. 개막하기 전부터 악재를 맞은 스윈던은 개막 4경기에서 내리 전패를 당했고, 무려 14실점이나 허용하며 프리미어리그의 수준을 체감하게 되었다. 결국 11월이 돼서야 QPR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16경기 만에야 첫 승을 거두었다.[19]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2-2 무승부를 거두고 맨유를 상대로 홈에서 2-2 무승부로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질때마다 7-1, 6-2, 5-0 등 대량실점을 자주했다. 결국 스윈던은 2월 5일 코번트리전 3-1 승리 이후 12경기 무승에 빠지며 다음시즌 강등이 확정된 첫 번째 팀이 되었다. 12경기 무승을 끊어낸 팀은 공교롭게도 첫승의 제물이던 QPR이었다. 시즌 5승 중 2승을 QPR 상대로 거두며 QPR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스윈던 기록을 깬 것도 덤이고. 그리고 100실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EPL 팀 한 시즌 최다실점이다.
3.3. 최종전 강등 경쟁
최종전 시작 전 강등권 순위이다. 스윈든 타운의 강등이 확정된 가운데 6팀이 최종전에서 강등권 남은 2자리를 피하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최종전에서 맨체스터 시티는 셰필드 웬즈데이 원정, 사우스햄튼은 웨스트햄 원정, 셰필드 유나이티드는 첼시 원정, 입스위치는 블랙번 원정, 올덤은 노리치 원정경기를 치렀고, 에버튼은 윔블던과의 홈경기를 가졌다.
- 전반 4분 - 셰필드 웬즈데이 0:0 맨시티, 웨스트햄 0:0 사우스햄튼, 첼시 0:0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0:1 윔블던, 노리치 0:0 올덤
- 전반 11분 - 셰필드 웬즈데이 0:0 맨시티, 웨스트햄 1:0 사우스햄튼, 첼시 0:0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0:1 윔블던, 노리치 0:0 올덤
- 전반 14분 - 셰필드 웬즈데이 0:0 맨시티, 웨스트햄 1:0 사우스햄튼, 첼시 0:0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0:1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전반 20분 - 셰필드 웬즈데이 0:0 맨시티, 웨스트햄 1:0 사우스햄튼, 첼시 0:0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0: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전반 24분 - 셰필드 웬즈데이 0:0 맨시티, 웨스트햄 1:0 사우스햄튼, 첼시 0:0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1: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전반 25분 - 셰필드 웬즈데이 1:0 맨시티, 웨스트햄 1:0 사우스햄튼, 첼시 0:0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1: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전반 29분 - 셰필드 웬즈데이 1:0 맨시티, 웨스트햄 1:0 사우스햄튼, 첼시 0:1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1: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전반 45분 - 셰필드 웬즈데이 1:0 맨시티, 웨스트햄 1:1 사우스햄튼, 첼시 0:1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1: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후반 3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1:1 사우스햄튼, 첼시 0:1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1: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후반 7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1:2 사우스햄튼, 첼시 0:1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1: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후반 13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1:2 사우스햄튼, 첼시 1:1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1: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후반 15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1:2 사우스햄튼, 첼시 1:2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1: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후반 17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2:2 사우스햄튼, 첼시 1:2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1: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후반 20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2:3 사우스햄튼, 첼시 1:2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1: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후반 22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2:3 사우스햄튼, 첼시 1:2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2:2 윔블던, 노리치 0:1 올덤
- 후반 27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2:3 사우스햄튼, 첼시 1:2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2:2 윔블던, 노리치 1:1 올덤
- 후반 31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2:3 사우스햄튼, 첼시 2:2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2:2 윔블던, 노리치 1:1 올덤
- 후반 36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2:3 사우스햄튼, 첼시 2:2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3:2 윔블던, 노리치 1:1 올덤
- 후반 44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3:3 사우스햄튼, 첼시 2:2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3:2 윔블던, 노리치 1:1 올덤
- 후반 45분 - 셰필드 웬즈데이 1:1 맨시티, 웨스트햄 3:3 사우스햄튼, 첼시 3:2 셰필드 유나이티드, 블랙번 0:0 입스위치, 에버튼 3:2 윔블던, 노리치 1:1 올덤
결국 마지막 순간에 실점한 셰필드 유나이티드가 강등되었다.
4. 개인 기록
4.1. 득점 순위
4.2. 도움 순위
4.3. 해트트릭
5. 개인 수상
5.1. 이 달의 감독상
5.2. 올해의 감독상
알렉스 퍼거슨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3. PFA 올해의 선수
에릭 칸토나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4. PFA 영플레이어
앤디 콜 - 뉴캐슬 유나이티드
5.5. FWA 올해의 선수
앨런 시어러 - 블랙번 로버스
5.6. PFA 올해의 팀
[1] 디비전1 우승 포함시 9회[2] 2003년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에티하드 스타디움)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된 38,419명 규모의 홈구장[3] 2006년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된 38,419명 규모의 홈구장[플레잉코치] A B [4] 원래 홈구장은 15,876명 규모의 플로 레인(Plough Lane)을 사용했었으나 1989년 힐즈브러 참사 이후 1990년에 모든 축구장을 좌석으로 바꾸라는 테일러 보고서의 발표가 있었는데 빈약한 재정 문제 때문에 구장 개조를 못하여 1991/91 시즌부터 플로 레인 대신 크리스탈 팰리스의 홈구장인 셀허스트 파크에서 홈경기를 치렀다.[5] 2005년 리코 아레나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23,489명 규모의 옛 홈구장[6] 세인트 메리즈 스타디움 개장 이전 2000/01시즌까지 사용했던 15,200명 수용인원의 옛 구장이다.[7] 2016년 런던 스타디움으로 이전하기 전 사용되었던 35,016명 규모의 홈구장[감독대행] A B C D E F [8] 1993-94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으로 디펜딩챔피언 자격으로 진출하게 되었다.[9] 1993-94 리그컵 우승으로 UEFA 컵 진출[10] FA컵 우승팀 맨유의 UEFA 챔피언스리그 참가로 FA컵 준우승팀 자격으로 진출[11] 1888-89 프레스턴 노스 엔드, 1896-97 아스톤 빌라, 1960-61 토트넘 핫스퍼, 1970-71 아스날 FC, 1985-86 리버풀 [12] 첼시와의 두 경기 모두 게빈 피콕에게 결승골을 허용했다.[13] 1993년 12월 26일 맨유 원정에서 종료 직전에 동점골을 허용하며 비기지 않았다면 11연승이었다.[14] 이적 전에는 보비 밈스가 출전[15] 대회 우승팀이 되었다.[16] 1994년 3월 입스위치 원정 5-1승, 사우스햄튼 원정 4-0승 경기에서 2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17] 윔블던이 처음 1부리그로 올라왔던 1986-87 시즌 6위와 같은 순위이다.[18] 이 경기는 2015/16 시즌 리버풀과의 홈경기에서 비슷하게 재현되게 된다.[19] 공교롭게도 스윈던에게 첫승을 헌납한 QPR이 2012-13 시즌 프리미어리그 개막 후 최다무승 기록을 갈아치웠다.[20] 4골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