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생애

 


1. 프로 이전
3. 감독 시절
3.1. 감독 이전
3.2. 전주 KCC 이지스
3.3.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3.4. 감독으로서의 특징


1. 프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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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허재. 가운데 쪽에 있다.[1]
강원도 춘천시에서 군인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서울로 이사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동북초등학교 3학년 때 특별 활동으로 농구를 시작해 악착같은 성격과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금세 재미를 붙였지만 불과 1년만에 농구부가 해체되자, 그의 기질을 발견한 이철호 선생의 스카우트를 받고 상명초등학교로 전학간 이후부터 농구와의 인연을 끊지 않고 공이 찢어질 때까지 연습을 했다. 특히 반포초등학교와의 전국초등학교농구대회 결승전에서 경기 종료 2초를 남기고 생애 첫 결승 버저비터를 터뜨려 역전승을 거두는 활약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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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양문의 감독[2]이 이끈 농구 명문 용산중학교에서 주전으로 기용[3]되어 1학년 때에는 전승, 2학년 때에는 판정분규로 인한 몰수게임으로 2관왕, 3학년 때에는 전승을 거두었다. 용산고등학교에서는 3년 동안 차세대 특급 가드로 주목받으며 1학년 때 유재학이 버틴 경복고등학교와의 종별선수권에서 팀을 첫 우승으로 이끌었고,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는 제18회 쌍용기 대회 결승전에서 휘문고등학교를 상대로 뛰어난 득점력과 어시스트에 힘입어 예선 패배를 설욕한 끝에 3관왕을 달성함과 동시에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2년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7회 아시아 청소년 농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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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등 각 대학에서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이 있었으나, 정봉섭 감독[5]이 허재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상당한 친분을 쌓았고, 아버지의 의사로 중앙대학교에 입학했다.[6][7]
연세대나 고려대보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팀 분위기 속에서 온갖 테크닉을 익히고 만들어냈고 이렇게 쌓아올린 것들은 농구대잔치에서 터져 나오게 된다.[8] 당시 1984-85 농구대잔치에 처음 참가한 허재는 1학년으로서 팀의 포인트가드를 맡아 경기당 39분 30초를 뛰면서 평균 24득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여러모로 놀라운 활약을 했고,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을 모조리 휩쓸었다.
1985-86 농구대잔치에서는 성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실업팀들을 제치고 김유택, 한기범과 함께 결승전까지 이끌고 현대전자를 상대로 26득점 17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한국 선수 최초로 트리플 더블을 달성'''[9]했지만, 슛도사 이충희의 가공할 득점포와 현대 선수들의 폭력수비와 편파 판정이 더해지며 중앙대는 결승에서 현대에게 격파당했다.[10] 1986-87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신입생 가 입학하면서 김유택과 함께 이른바 허동택 트리오가 결성되었고, 슈팅가드 쪽으로 바꾸며 다시 한번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또 다시 현대에게 패배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대학 4학년 때는 김유택도 없고 한기범도 없는 팀 상황에서 센터 역할까지 하며 대학농구 대회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전반에만 팀 전체 득점인 54점, 최종적으로 75점을 넣는 기록을 올렸다. 하지만 4학년 시즌에는 중앙대가 선수들의 부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며 농구대잔치 출장을 거부했었고 이로 인해 그는 농구대잔치에서의 활약은 거의 없었지만 '허재가 없는 농구대잔치는 관중이 줄었다' 는 말이 나올 만큼 인기가 어마어마했던 점은 사실이었기에 실력 못지않게 인기가 많았던 부분은 반박할 수 없다.

2. 프로 선수 시절


'''실업 농구부터 KBL 출범까지 모든 것을 이루어 낸 허재의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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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독 시절



3.1. 감독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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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의 선수생활을 마친 뒤, 이인표 전 KBL 경기위원장의 소개로 2년 동안 미국으로 건너가 폴 웨스트팔[11]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페퍼다인 대학교에서 객원코치로 지도자 연수를 받았고, 2년 연속으로 결승에 진출한 TG삼보를 응원하기 위해 일시 귀국해 통합우승이 확정된 뒤에도 선수들을 기뻐해 주었다.[12]

3.2. 전주 KCC 이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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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결국 지도자 연수를 포기하고 2005-06 시즌부터 전주 KCC 이지스의 감독[13]에 취임하면서 KBL 출범 후 감독이 된 최초의 농구인이 되었다. 첫 해부터 팀을 플레이오프까지 이끄는 데는 성공했으나 허재가 감독을 잘해서라기보단 이상민을 비롯한 팀내 고참들의 힘이 더 컸다는 의견이 많았고, 조성원이 은퇴한 다음 시즌에 기어이 팀을 정규리그 꼴지라는 나락에 빠트리며 역시 초보감독이란 말을 들었다. 07-08 시즌 직전에는 이상민을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삼성 썬더스로 보내면서 모든 팬들을 실망시키게 만들어 버렸고, 서장훈임재현을 영입해 두 선수가 자동으로 보호선수가 되면서 팬들에게 무지막지하게 까였다.[14] 그 뒤, 팀은 정규시즌 2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0:3으로 탈락해 선수 덕만 보는 모자란 감독이란 말만 더욱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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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으로 빠졌던 시즌에 얻은 픽으로 하승진을 뽑는 희대의 운으로 감독 수명을 연장한 허재는 하승진과 서장훈의 로테이션을 꿈꿨으나, 포지션이 겹쳐 출전시간이 줄어든 서장훈은 팀에 불만이 쌓였고, 하승진의 능력 부족과 부상이 이어지면서 팀은 또 다시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들었다. KCC 이지스는 패배를 거듭했고, 이때 팬들은 허재의 감독 커리어가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허재는 서장훈과의 트레이드로 강병현을 얻어오고 신명호를 적극 기용하면서 앞선 압박과 속공으로 시즌 중에 극적으로 팀 컬러를 변화시키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 성공하더니, 구슬리고 관리해 낸 하승진까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것도 KBL 출범 후 선수-감독으로서는 최초였다.
그리고 대망의 2009-10 시즌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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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빨 종결자.jpgee'''[15]
2009-10 시즌에는 혼혈 선수 드래프트에서 1순위를 잡는데 성공하며 1순위로 전태풍을 뽑아 팀을 강화했다. 하지만 전태풍과 전체적인 팀이 겉돌면서 시즌 초 팀은 침체에 빠졌으나, 성격 더럽고 실력 좋은 외국인 선수 아이반 존슨을 어떻게든 활약하게 하고 레더까지 트레이드로 영입해 활용, 거기다 전체적인 팀워크까지 점점 좋아지면서 하승진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아이반 존슨이 심판에게 손가락 욕설을 하며 영구제명이 된 상황에서도 팀을 준우승까지 이끌어 냈다.
2010-11 시즌, 시즌 초 KCC는 하위권을 맴돌았으나, 시즌 중반이 되어 가면서 시즌 초의 성적이 거짓말인 것처럼 성적이 반등, 허재는 다시 한번 감독으로서 우승을 맛보는데 성공했다.
KBL 우승팀이 대표팀 감독을 맡는다는 암묵적인 룰에 따라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2011년 아시아선수권 국가대표 농구팀 감독을 맡았다. 중국전에 패배하는 등 여러 모로 아쉬운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일단 아시아선수권 3위를 하면서 올림픽 최종 예선을 통한 본선 진출이라는 희망은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2011-12 시즌은 정규리그 4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울산 모비스 피버스에게 6강 플레이오프에서 0:3으로 떡실신.
2012년 7월 27일 '''또다시''' 허재의 복코가 빛을 발했다. '''1.5%의 확률을 뚫고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1순위'''를 따낸 것. 그리고 코트니 심스를 지명했다.
2012-13 시즌에는 하승진의 공익 입대와 전태풍고양 오리온스 이적, 추승균의 은퇴 등으로 팀 전력이 심하게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코트니 심스, 김태홍, 장민국 등등이 부상으로 드러누웠다. 심스는 그래도 빨리 복귀했지만, 결국 부상으로 얇아진 팀 뎁스 강화를 위해 서울 SK 나이츠로 트레이드되었다. 사실상 리빌딩 시즌으로, 결국 꼴찌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래도 커트니 심스를 서울 SK 나이츠에게 내주고 대신 데려온 김효범이 득점원이 되어주고 박경상이 성장하는 등의 성과는 있었다. 강병현도 제대 후 5라운드에서 5승4패를 하면서(4패는 상위3팀과 동부)복귀하여 팀에 청량감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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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30일 이루어진 신인드래프트에서는 2순위로 경희대 빅3 중 한 명인 김민구를 지명했다. 내심 원하던 김종규는 1순위 지명권을 쥔 창원 LG 세이커스가 가져갔다. 대신 삼성이 1.5%를 뚫고 KT를 밀어내고 4순위가 되었다.
2014-15 시즌 도중인 2015년 2월 9일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자진사퇴 한다"고 밝혔다. 사실 시즌 초반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흰머리와 주름, 힘겨워 보이는 듯한 모습이 많았다. 선수들의 실책이 쏟아지면 레이저를 쏘면서 불호령으로 선수들을 다잡고, 심판과도 맞장을 뜨면서 각을 세우던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선수들을 나긋나긋하게 달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여러모로 허재 감독이 지쳐보인다는 평가가 많았다.

3.3.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KCC 감독직을 사퇴한 이후 머지않아 다른 팀 감독으로 갈 거란 소문도 있었으나, 8년만에 전임감독제로 바뀐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직 공모에 지원, 또다른 후보인 이상범 전 KGC 감독과 경합 끝에 감독으로 최종 선임되었다. 원래 계약기간은 2019년 2월달까지였으나 국가대표 감독으로서는 상당히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농구에서 아들들의 선발 논란과 더불어 라건아에게 몰빵하다시피한 무전술로 인해 4강에서 이란에게 패배하는 바람에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면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2018년 9월 5일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사직하였다.[16]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행보는 허재호 문서를 참조.

3.4. 감독으로서의 특징


당시 08-09 시즌 중반까지는 고등학교 인맥으로 감독 자리에 앉았다거나, 훌륭한 선수가 훌륭한 감독이 되지 못하는 좋은 예 중 하나라는 등의 말을 들으며 여러모로 욕을 먹었고, 작전타임에도 자신의 선수 시절만 생각하며 성질만 부리는 모습을 보였다가 시즌 중반에 대변신 후 팀을 우승시키고는 그 뒤 한 번의 준우승과 또 한 번의 우승까지 거두고, 하승진을 관리하면서 감독으로서의 평가가 상당히 높아졌다.
앞선 가드들의 압박과 변칙적이기까지 한 수비 변화를 잘 쓰고 이렇게 잘 짜인 수비로 상당한 재미를 보는 편. 다른 건 몰라도 허재의 수비 작전 하나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는 수비 작전은 허재가 아니라 다 외국인 코치가 짜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공격작전 면에선 딱히 좋은 작전을 보이는 건 아니지만, 국내 선수라 해도 1대1 공격을 맡기는 등 선수들에게 자신감 있고 적극적인 공격을 주문하는 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극단적인 단신 라인업을 쓰는 한편 하승진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장신 라인업으로 선수를 기용하는 일도 많은 편. 슈팅 가드나 포워드 보는 선수에게 인사이드 수비를 맡기는가 하면 센터 포지션의 선수를 스몰포워드로 돌리기도 했다. 이런 성향은 계속해서 신장이 높아지고 있는 농구 국제 경쟁력 부분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졌거나 무명이라 하더라도 자신있게 계속 뛰라며 밀어주고, 그렇게 해서 선수들의 활약을 이끌어낸 일이 많다. KCC가 시즌 초반에는 하위권을 맴돌다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는 패턴을 반복해서 보여준 데는 허재가 저런 식으로 선수들을 이끈 덕이 크다.
허재의 드래프트 실패작이라는 말까지 듣던 신명호는 허재의 밀어주기로 성장한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고, 데뷔 초기 키 큰 일반인 소리까지 듣던 하승진이 제몫을 하게 된 데도 이런 선수 기 살리기가 한 몫 했다. 대학교 후배 밀어주기냐는 비아냥을 듣던 이중원을 쏠쏠히 써먹거나, 강병현 트레이드의 잉여물 취급을 당하던 정선규도 활용해내는 등 보기보다 선수의 활용폭이 넓은 편이다.
하지만, 일단 눈 밖에 나면 완전히 외면하기도 하고, 공격에서 적극성을 보이는 정도를 넘어서 지나치게 팀을 해치는 플레이를 하면 벤치에 주저앉히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이런 저런 경기 중 돌발 상황에서 작전 타임동안 작전을 짜내 써먹는 데는 아주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감독으로서의 경력이 몇 년 쌓이면서 이런 면에서도 초기에 비하면 준수해졌다.
감독 자리에서 잘릴 뻔한 몇 번의 위기를 넘기고 성장한 건 결국 KCC 구단이 고등학교 학연으로 허재를 밀어준 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감독은 선수에게 이기는 게 아니라, 선수에게 맞추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잘났다고 하면 안 된다고 우승 후 인터뷰에서 말을 했다. 참고로 이때 같이 인터뷰를 한 는 "난 이전부터 다 맞추면서 살았잖아요. 형은 누구를 위해 기분을 맞추고 상대의 감정을 읽으려 한 적이 없었어요. 왜냐고? 농구 대통령이었으니까. 난 2인자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맞춰가는 데에 익숙한 편이에요." 라고 했는데 의 발언이야 말로 현역 시절의 허재를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한 마디라고 할 수 있다.
상당한 츤데레로 선수들을 혼낼 때는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혼내지만, 챙겨줄 때는 정말 모르게 챙겨주다가 알려지는 츤데레같은 일화도 많다. 김민구의 교통사고 때 김민구를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화를 냈다가도, 고관절에 좋은 보약을 지어 보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17]
하지만 그도 한국 농구의 틀은 벗어나지 못했었는데, 전태풍이 밝히길 플로터 쏘기, 속공 상황에서 3점슛 던지기 등을 상당히 반대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저것은 뭐라 할 수가 없는 것이, 플로터나 속공 3점은 기본적으로 성공률이 떨어진다. 커리, 듀란트처럼 다섯 번 쏴서 세 번 이상 성공시키면 하지 말라는 감독도 없겠지만. 물론 2018년이 지나고서는 플로터는 기술이 아니라 가드가 익혀야 할 '''기본기'''라 하고 있으며 속공에서의 3점슛은 일단 오픈 찬스일 확률이 높고 공격 리바운드를 가져갈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당연히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 여기고 있었다.
또한 그는 판정 항의가 다른 감독들에 비해 전창진 감독과 더불어 매우 거친 것으로도 유명했다. 오죽했으면 지난 2013년 10월 15일 울산 모비스와의 홈 경기에서 상대편 선수가 슛을 쏠 때 팔을 쳤는데도 심판이 파울을 불지 않고 블록으로 인정하여 경기를 계속 진행하자 '''"이게 블락이야? 이게 블락이냐고! 이게 블락으로 보여?! 이게 파울이 아니야?! 그렇게 보여? 이게?! 이 각도에서?!"''' 라고 강하게 항의했는데,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허 감독의 항의 과정 중 어눌한 발음을 빗대어 '''"불낙'''"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패러디는 지금도 팬들 사이에서 심심하면 나오는 편인데, 피자 광고까지 찍었다.[18] 자세한 내용은 이게 불낙이야?를 참조.
특히, 가족을 선발한 점에 대해서 말이 많은 상황인데 참고로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야구에 출전한 이정후이종범 코치의 아들이지만, 국가대표로 선발이 될 만한 실력을 충분히 보여줬고 확실한 활약을 보여줬었다. 게다가, 이정후는 인맥 논란이 아니었더라도 준수한 스탯과 활약이 있었기 때문에 '''"이정후는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국가대표로 뽑혔냐?"'''같은 반응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나왔을 정도로 국가대표에서 주전으로 선발될 수 있는 역량과 자격이 충분했으며 오히려 선발이 되지 않았을 때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감독과 코치는 아무래도 영향력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1] 여담으로 아버지가 엄청 키가 크다. 나중에 허재 선수 시절에 같이 찍은 투샷 보면 허재가 크지만 키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 확실히 180 이상은 됐던듯 하다.[2] 허재가 용산중고 재학 당시 지도했던 은사였다. 이후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중앙대학교 농구부 감독을 지냈다.[3]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으며 1학년 때는 유재학전창진이 주전으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교체선수로 출전했다.[4] 당시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는 한기범, 김성욱, 김유택 등이었다.[5] 중앙대학교 농구부의 대부이자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1980년대 초중반 중앙대가 전성기를 달린 데에는 그의 역할이 매우 컸다. 불 같은 성격 때문에 자주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1992년 추계연맹전을 마친 뒤 강정수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 중앙대 운동부를 총괄하는 체육부장을 맡으면서 다소 이른 나이에 일선에서 물러났다.[6] 당시 중앙대학교에는 연습장이 없어 용산고등학교 체육관을 사용했었다.[7] 아는 형님에서 밝힌 바로는 대학 입학할 당시 어디 학과를 선택할지 고민했다가. 연극영화과로 진학하려 했으나 연극영화과에 문전박대를 당하고 체육교육과로 진학했다. 당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는 안성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8] 중앙대 농구부는 허재를 위해, 그가 입학할 무렵 저학년은 팀 연습 끝난 후 개인연습을 하고 고학년이 뒷정리를 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이는 계속해서 중앙대 농구부의 전통이 되었다. [9] 이 허재의 트리플더블 기록은 완전히 잊혀져 있다가 2012년 들어 대한농구협회가 지난 시절의 기록들을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10] 한편 이 결승은 이충희의 가공할 득점포가 최고 승리 원인이긴 해도 현대 선수들의 폭력을 동반한 수비와 신경전, 그런 폭력을 묵인한 편파 판정이 상당한 물의를 빚은 경기이기도 하다. 당시 중앙대 측이 너무한 판정에 항의하며 경기 막판에 우두커니 서서 경기를 포기하기까지 했으니.[11] 피닉스 선즈 시절 1993 NBA 파이널에 진출시켰으며 2021년 1월 2일 뇌종양으로 별세했다.[12] 1차전은 귀국 시간이 늦어져 TV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TG삼보가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2차전부터 관전했다.[13] 팬들은 허재가 원주 TG에서 코치를 밟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의외였던 사건. 이렇게 감독을 맡게 된 데는 은퇴 과정에서 TG 측에 안 좋은 감정이 생겼고 KCC 팀의 프론트가 허재의 용산고 선배란 점 때문이 아닌가 하는 말이 있다. KCC 구단주인 정몽익 사장이 용산고 출신이라서 아마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추측되었다.[14] 이상민이 KCC를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한 유명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허재퇴출이라는 실시간 검색어가 나오게 되면서 감독 사임을 요구하라는 말만 나왔을 뿐이지 사임 같은건 없었다.[15] 2009-10 시즌 혼혈 선수 드래프트에서 일어난 장면. 뽑는 순서가 제일 마지막이었는데, 앞의 9개 구단이 모두 1순위가 걸리지 않는 희대의 상황이 연출되며, 뽑기 한 번 안 하고 1순위를 차지했다. 옆에서 함께 즐거워 하는 사람은 김광 前 kcc 코치. 눈앞에서 좌절하는 사람은 김상식 당시 오리온스 감독이다.[16] 당시 김민구의 부상으로 제일 필요했던 허웅을 뽑을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지만, 2018 아시안게임 병역면제를 얻기 위해, 2018년 현재, 자기 포지션에서 1~2위도 아니고, 실력이 부족했던 두 아들 허웅과 허훈을 국가대표팀으로 선발. 그러나, 허훈은 가장 중요한 4강전에 1분도 못 나왔고, 허웅도 부진했다. 유재학 기술위원장 등 많은 사람들이 허웅, 허훈 선발을 반대했었는데도, 오히려 '내 아들들이라서 실력보다 낮게 평가를 받고 있다'며 둘 다 선발. 이런 문제 때문에 국가대표팀에서 아들들과 함께 짤려버렸다.[17] 그러나 허재도 선수들 음주운전과 관련해서는 제자들에게 전혀 할 말 없는 인물이다. 본인부터가 무려 5번이나 전과가 있는 데다가 술을 끊었으면 모를까 아직도 술을 못 끊었으니... 즉, 화낼 자격조차 없었지만 본인이 어떻게 욕을 먹었는지 알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에 크게 화를 낸 듯하다.[18] 화면에서 항의를 받고있는 홍기환 KBL 심판부장은 63년생으로 '''허재 감독보다 2년 선배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사적으로 매우 친한 관계로 홍심판이 대학 선수 시절에 고등학생인 허재와 여러번 경기를 가졌었다고 한다. 당시 불낙 항의를 한 직후에 바로 "형 왜그랬어!"라고 하며 금방 화해했다고... 이후 KBL 공식 유튜브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허재가 마음이 약하다. 금방 화를 내다가도 조금 시간 지나면 '아, 형 왜 그랬어....?' 하면서 누그러진다." 고하며 허재를 변호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