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선수 경력

 


1. 실업 농구 시절
2. KBL 출범 후
3. 은퇴
4. 국제 대회에서의 허재
5. 선수로서의 특징
6. 선수로서의 평가


1. 실업 농구 시절


당시 실업팀들은 계약금으로 몇 억씩을 불러대며 허재[1]를 자신들의 팀으로 스카우트하려 했으나, 허재는 정봉섭 감독의 영향 하에 대학 선배인 김유택과 한기범이 있던 기아자동차에 입단했다. 당시 기아는 이미 연세대와 중앙대의 특급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유재학, 정덕화, 한기범, 김유택이란 막강한 선수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허재가 합류하면서 화룡점정이 되었고, 그 해 농구대잔치에서 기아는 첫 패권을 차지하며 그야말로 무적의 팀으로 군림했다. 허재 역시 그렇지 않아도 높던 인기가 폭발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 되었다.[2]
1989년, 1990년, 1991년 기아자동차와 허재의 무적시대는 계속되었다. 1990년에 굴지의 가드 유재학이 은퇴로 팀을 떠났으나 가 빈 자리를 더욱 잘 메우면서 이른바 허동택 트리오를 결성해 기아는 더욱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990년 무렵부터 허재는 매너리즘에 빠진 채 안티 팬들의 어그로를 끌기 좋은 모습들을 계속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연세대, 고려대, 현대, 삼성이라는 전통적인 농구 구도에 갑툭튀한 존재라며 허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거기다 허재의 개인기를 이용한 공격에 대해 '저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면서 반감을 표출하는 해설이 있을 정도로 허재의 농구 스타일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1990년 무렵부터 허재는 XX은행 등의 이름들을 가진 금융권에 속한 약팀들을 상대로 전날 먹은 이 덜 깬 것인지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경기에 임한 모습을 종종 보이면서 골수 농구 팬들의 반감을 이끌어냈고, 그러다가 허재가 있는 팀이 졌으면 차라리 속이라도 시원했을 텐데 흐리멍텅하게 뛰다가 경기 막판에서야 이 깼는지 정신차리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경기력으로 역전승을 거두었고 상대팀은 분한 마음으로 눈물을 삼키고 코트에서 물러나는 양상이 자주 벌어졌으니 응원하는 골수 팬들은 더더욱 열이 오르게 되었다.
거기다 심심할 때마다 음주사고, 특히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켜 경찰 신세를 지며 언론에 실리기도 했고, 1990년에는 태업과 항명 파동으로 당시 기아자동차의 감독이던 방열을 팀에서 떠나게 만들었으며,[3] 1993년에는 훈련에 임하는 자세와 사생활이 불량하다며 국가대표에서 제외되는 일까지 생기며 더더욱 안티 팬들이 증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시기 허재는 그야말로 "저 개잡놈이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농구 선수에요."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허재 선수의 이 시절에 대해서 변명을 해보자면,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라이벌이 없었다. 대부분의 국내 선수보다 한두단계 위였고, 게다가 국내 최고의 가드 와 (서장훈 등장 이전까진) 독보적인 국내 최고 센터 김유택마저도 그의 팀 동료였다. 그야말로 밤새 퍼먹고 와서 대충 해도 웬만한 팀은 이기는 시절이었고, 우승도 밥먹듯이 하면서 목표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냥 놀아버렸다.
'''유일하게 그를 막을 수 있을 만한 가 팀 동료였던 게 허재에겐 가장 불행이었다'''고 평가하는 기자도 있다. 가 허재와 같은 팀이 아니라 다른 팀에 있었다면 한국 농구의 역사가 대단히 달라졌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허재는 공식 경기보다도 와 맞붙는 '''팀 내 연습경기에서 대단한 집중력을 보였다고 한다.''' 자신과 비슷한 선수들이 즐비한 국제대회에선 그야말로 타올랐다는 걸 보아도 그렇다.
물론 그런 점을 감안한다 쳐도 술 먹고 사고를, 그것도 음주운전을 상습적으로 저질렀다는 점에선 막장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다. 사생활 관리는 실력에 비하면 많이 아쉬웠다. 물론 결혼 후에는 훨씬 나아졌지만.
최전성기였던 시절은 허재에게 슬슬 위기가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기아자동차 팀 내에서 연세대 출신과 중앙대 출신 간에 갈등이 생겨나면서 기아는 제대로 된 선수 수급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기아자동차의 창단 멤버들이 은퇴해 나가자 전력 보충이 안 되어 허재를 비롯한 베스트 멤버 이외엔 믿을 만한 선수가 없어졌고, 결국 주전 멤버들에게 지나친 체력 부담이 가해졌다. 거기다 김유택이나 한기범은 부상 속에 1990년을 기점으로 크게 내리막길을 쳤고, 허재 역시 1991년 무렵 무릎 부상을 당하며 운동능력을 어느 정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거기다 전체적으로 선수 관리가 부실하던 실업 농구 시대만 해도 한국 나이로 30은 은퇴의 갈림길로 인식되었고, 허재는 그 때 기준으로 슬슬 노장 축에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은 1993-94 농구대잔치 시기에 허재와 기아자동차는 팀 동료이던 강정수가 감독을 맡은 모교 중앙대 농구부에게 8강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는 굴욕을 겪고 만다. 당시 대회 전 국제대회에서 허동택 트리오가 혹사한 여파가 컸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들이 처음 대중에게 노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체력적인 문제를 드러낸게 이 대회였다. 이때 그야말로 연세대 못지않은 양궁부대가 중앙대였는데, 강정수 감독은 김유택이 버티는 포스트에 조동기를 전담 마크시키고 철저하게 김영만-양경민-홍사붕-김승기를 활용해 양궁농구를 펼쳤다. 이들이 그야말로 정신없이 장사정포를 꽂아대는 통에 허동택 트리오는 그야말로 커리어에서 첫 대망신을 겪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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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위기 상황이 오자 허재는 정신을 좀 차리기 시작했고, 결혼을 통해 정신적인 안정을 얻은 것도 허재가 자신의 농구를 추스르는 데 한 몫을 했다. 결국 허재는 1994-95 농구대잔치에서 맹활약을 통해 당시 사기에 준하는 주전 라인을 꾸린 고려대를 꺾고 김현준이 최후의 불꽃을 태우던 삼성과 결승에서 상대하게 되었다. 김유택, 가 돌아가며 좌중을 압도한 개인기(3분간 홀로 17득점)로 격파하면서 팀은 우승했고 허재는 MVP를 수상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능력이 대단함을 입증했다. 허동택 트리오의 위용을 다시 회복한 대회였는데, NBA에 마이클 조던이 복귀한 시카고 불스가 다시 우승하기 시작한 것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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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6 농구대잔치는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나는가라고 농구팬들이 생각했던 시즌이었다.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전희철이 이끄는 고려대가 올스타 라인업을 만들어 농구대잔치 정규시즌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상무는 이상민을 필두로 대거 입대한 스타 선수들로 역대 최고 수준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4] 상대적으로 적은 스포트라이트 속에 기아에는 기존의 허동택 트리오 외에 김영만이 새로이 합류했고, 멤버들의 부상과 체력저하에도 불구하고 리그 3위권을 유지하며 조용히 플레이오프를 기다리며 역시 강팀의 위용을 드러냈다. 김유택의 주도로 팀 전원이 머리를 짧게 깎으며 정신을 다잡은 상황에서 허재는 플레이오프 8강 2차전에서 SBS를 상대로 50점을 몰아넣으며 자신의 위력을 재차 보여주기 시작했고, 4강에선 정규시즌 전승을 거둔 고려대를 격파,[5] 결승에선 이상민이 이끄는 상무까지 격파하며 다시 한번 우승을 거두었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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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승세가 독이 되었을까, 1996년 허재는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상태에서 또 다시 무면허 음주 운전을 저질러 체포 후 포승줄에 묶이는 꼴을 겪었다. 직전에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음주 파동을 일으켜서 6개월 자격정지를 당한 상태에서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허재는 선수자격정지 및 국가대표자격 영구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당했고, KBL 출범 전 자신이 최후로 출전할 수 있었던 1996-97 농구대잔치에 출전하지 못했다.[8] 영구징계가 몇 년 후 풀리면서 허재는 1999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는 하지만.
하지만 선수자격 정지는 아마농구 선수로서의 자격 정지였기에 프로농구 선수로서는 그냥 뛸 수 있었다.

2. KBL 출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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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프로 원년, 허재는 프로 원년에[9] 포인트가드부터 스몰포워드 역할까지 해내고 외국인 선수를 상대로도 개인기로 농락하는 모습까지 보이며 활약했다. 하지만 팀 내에서 허재는 더 이상 예전같은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기아의 감독인 최인선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드로서 패스를 해줄 선수로는 가 있었고, 주요 득점원으로는 김영만이 있었고, 인사이드 득점원으로는 클리프 리드를 비롯한 외국인 선수들이 있었다. 즉 실업 시절처럼 허재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허재는 자신의 비중이 줄어드는 데 반발했지만, 최인선은 프로농구 원년 챔피언결정전 최종전에서 허재를 전혀 기용하지 않고도 팀을 승리로 이끌어 내며 허재가 팀 내에서 잉여물임을 증명해냈고, 최종 결정전에서 관중들은 허재를 연호했으나 허재는 '''단 1초도 코트 위에 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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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8 시즌, 허재는 기아자동차를 떠나기로 맘먹고 그 이전에 자신의 힘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 명예롭게 떠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챔피언결정전 상대인 --트리오와 조니 맥도웰이 버틴 현대는 사람들이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했고, 기아는 외국인 선수 저스틴 피닉스의 태업으로 인해 인사이드에서 절대 열세에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허재는 플레이오프에서 오른손 손등이 부러지는 부상까지 당했다. 기아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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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 스스로가 이 이상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의 결승전에서, 허재는 자신이 왜 농구 대통령이란 소리까지 들었는지를 증명했다. 인사이드에서 절대 우세에 있는 현대가 허재 단 한 사람에게 휘둘리며 패배를 거듭했고,[10] 오른손에 깁스를 하고 눈덩이가 찢어져도[11] 코트에서 달리고 득점하는 허재를 보고 허재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말을 잃을 정도였고, 기아의 팬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12][13] 결국 7차전에 이르면서 허재가 자신의 모든 걸 짜내는 데도 한계가 왔고, 팀을 우승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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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챔피언결정전 MVP는 우승팀의 선수가 아니라 허재였다. KBL에서 챔피언 결정전 MVP가 준우승팀 선수 중 나온 일은 이 때가 유일하다.[14][15]
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허재가 올린 스탯은 다음과 같다.
경기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1차전
29
5
6
5
2차전
30
2
11
5
3차전
21
3
5
0
4차전
27
3
1
5
5차전
17
8
3
2
6차전
22
3
6
4
7차전
15
6
13
4
허재는 한국 나이 34살, 전성기가 지나 은퇴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던 나이에 이런 기록을 올렸다. 어떤 신문 기사에서는 이런 허재의 모습을 보고선 '마치 상처입은 사자가, 다른 맹수에 포위당한 채 공격을 당하면서도 결연하게 싸워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라고 썼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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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후 허재는 정인교와 트레이드되어 나래 블루버드로 팀을 옮겼고,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면서 활약을 펼쳤다. 누가 막아도 상대가 어느 팀이라도 허재 단 한 명의 힘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지만, 이미 허재는 시즌 내내 그런 활약을 펼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패배가 쌓여가면서도 허재는 자신의 힘으로 이룬 우승을 맛보겠다며 코트 위에서 버텨 나갔고, 코트 위 최고의 노장이 되어가면서도 자기 관리 속에 활약을 하고 자신이 부족해진 걸 인정하며 팀의 요구에 허재는 자신을 맞추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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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끝에 마침내 김주성의 드래프트로 입단과 데이비드 잭슨이 팀에 합류했고, 허재는 공격기술이 부족한 김주성에게 포인트 가드로서 최고의 패스를 공급하고 데이비드 잭슨을 어르고 달래며 팀을 승리로 이끌어갔다. 김승현마르커스 힉스가 있는 전 시즌의 우승팀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상대로 5차전에서 갈비뼈 부상[16]으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 상태에서 가슴에 붕대를 감고 벤치로 돌아간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포착되자 그 충격으로 팬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6차전에서 갈비뼈 부상때문에 벤치에만 있었다가 경기종료 몇 초를 남기고 팬들의 "허재" 연호 속에 마침내 우승을 맞이했다.[17][18] 그 덕분에 시상식에서 트로피, 상금 2백만원, 백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부상으로 받았고, 대상을 수상하였다.
우승 직후, 구단의 만류로 연봉 1억 6천만원에 1년 계약을 연장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19]

3.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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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8일, 하루 전에 진행되었던 인천 전자랜드와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휴가로 골프를 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던 중이었다.[20] 그러던 중, 아침부터 갑작스럽게 구단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오자마자 황급히 골프 예약을 취소하고 KBL 회관을 찾은 뒤 기자회견장에서 플레이오프가 끝나면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으러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21] 기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모른 채 내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갑작스런 은퇴 발표에 아쉬우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고, 평소에 자신만만하고 여유가 넘쳤던 모습은 없었던데다 지켜본 농구팬들은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22]
플레이오프 4강전에서 인천 전자랜드를 상대로 1차전에서 득점 없이 3리바운드, 3어시스트, 1스틸의 활약을 보였지만, 2차전에서는 2쿼터 6분 8초를 남기고 정훈[23]의 교체멤버로 들어와 신기성과 투 가드 시스템으로 활용하며 자유투와 미들슛 성공으로 공격의 활로를 뚫었고, 막혔던 공의 흐름도 좋아진데다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또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기록은 6득점, 2어시스트.
부천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된 3차전에서는 2쿼터부터 눈부신 활약과 동시에 코트 내외곽을 누비며 노련한 솜씨로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와 고감도 슛 감각을 과시했다. 비록 4쿼터 5분 6초를 남기고 5반칙으로 퇴장당했지만 14점(3점슛 2개), 2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다.
챔피언 결정전 상대 팀은 전주 KCC 이지스. 부산 기아 시절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은 트리오와 6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1차전에서는 3점슛 3개를 포함해 14득점을 기록하는 등 조율한 경기를 펼쳤고 신기성이 4반칙에도 3쿼터에서 혼자 주전을 꿰 찼으나 KCC의 3점포에다 끈끈한 수비와 공격 포인트로 경기 부담을 가지며 패했다.[24] 게다가 2차전에서는 점수차가 유리한 상황에서 식스맨 최민규가 허재의 공격과 수비를 차단시키는 등 점수차가 더 벌어졌고, TG삼보의 나머지 선수들도 잦은 패스 미스와 턴오버로 2연패에 빠지면서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25]
하지만 선발로 기용된 3차전[26]에서 16분 동안 2득점, 2어시스트를 기록했고, 4차전에서는 12분 동안 무득점으로 그쳤지만 의 3점포 등으로 맹활약하며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이후 5차전에서 3점슛 2개를 포함해 14득점을 기록했음에도 전주 KCC가 후반전에 찰스 민렌드조성원, 추승균이 잇따라 터진 슛 등 무서운 집중력을 앞세우며 역전패를 당했지만, 6차전에서는 벤치에서 선수들을 격려하며 3쿼터 막판에 신기성, 홀의 3점포로 전세를 뒤집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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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9번, TG삼보에서 영구결번되었다.'''[27][28]
그리고 4월 10일에 있었던 운명의 7차전을 앞둔 가운데 은퇴 소식에 눈물을 흘린 팬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았고, 프로에선 세번째로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전[29]으로 11분을 뛰면서 4득점, 2리바운드, 1어시스트로 마지막까지 힘을 다 쏟아 부었지만 경기 막판에 점수차가 전주 KCC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끝내 통합우승을 하지 못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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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허재”'''
2004년 5월 2일, 한국 농구역사상 처음으로 허재의 은퇴경기가 치악체육관에서 열렸다.[31] 체육관 주변은 마지막 무대를 보려는 기다림에 은퇴를 아쉬워하거나 축하 글귀들이 담긴 팬들의 플래카드가 분위기를 더욱 더 한껏 고조시켰고, 체육관 스탠드에는 3천여석이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꽉 찬 가운데 한국 농구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영웅의 아름다운 퇴장을 지켜보기 위한 열기도 엄청 뜨거웠다. 장윤창, 여홍철, 이진택 등 각계 각종 스포츠인들과 용산고-중앙대 동기인 영화배우 박중훈[32], 감독이었던 최명룡, 신선우 등도 관전한 이날 경기에서 화이트팀은 중앙대 정봉섭 전 감독이, 블루팀은 용산중고 양문의 전 코치가 감독을 맡았다. 전반에 화이트팀, 후반에 블루팀 유니폼을 입고 풀타임을 소화한 허재는 땀이 맺히고 턱밑까지 숨이 차올랐지만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며 '''52득점(3점슛 10개 포함), 4어시스트, 1리바운드'''를 기록했다.[33] 경기가 끝나자 관중석에서 종이비행기가 축포처럼 날아들어왔고, 후배들의 헹가래를 받은 뒤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가운데 허재를 오랫동안 보고 싶어했던 수많은 팬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행복하면서도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며 30년간의 농구생활을 끝으로 코트와 이별을 고했지만 허재라는 이름은 팬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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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지 하루 뒤, 팬클럽 차원이 아닌 개인 팬들이 열심히 모은 돈으로 은퇴 축하보다 선수 생활을 마친 허재를 위해 일간스포츠에 전면광고를 게재하기로 했다. 신문에는 농구 골대 그물 커팅 사진[34]이 실렸고 광고비 모금에 참여한 회원들의 이름이 실린 '''"안녕, 나의 영웅"'''[35]은 '''"고맙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시간들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농구를 사랑한 만큼, 나도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제, 다시 돌아올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에게서 들어야 할 신화(神話)는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문구가 화려함이 아닌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4. 국제 대회에서의 허재


대학생 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 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국가대표 포인트가드를 맡았다. 포인트가드를 맡는 한편 상황에 따라 파워 포워드까지 맡기도 했으며, 장신인 팀을 상대로도 위력적인 돌파를 잘 선보였다. 이충희와 함께 88 올림픽 당시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활약한 건 당시 활약이 동영상으로 돌면서 나름 농구팬들 사이에 알려진 편.
하지만 포인트가드를 맡았으면서 다른 팀원의 공격보다 자신의 공격을 우선시해 팀을 패배하게 한 일도 있다고 비판도 받았는데, 이충희가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경기 도중 자신에게 공격 기회가 왔는데 허재가 그걸 무시하고 자기 공격을 하다 실패했고 결국 중국에게 졌다며 허재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가 국가대표가 된 이후로는 슈팅가드 자리에서 뛰었다.
허재는 아시아 대회에서 맹활약한 선수지만, 중국에게는 성적이 좋지 못했다. 85 ABC 대회와 88 올림픽 대회를 제외하고는 맞붙는 족족 모조리 패배를 거듭했을 정도이니 말 다한 셈. 그렇다고 허재의 실력이 폄하받을 정도는 아닌 것이 허재만 중국에게 고전한 게 아니라 아시아 최강인 중국을 상대로 한국의 승률 자체가 원래 높지 못했다. 국가대표로서 중국과의 경기에서 2승 이상 거둔 선수는 근 30년 동안 통틀어봐도 많지 않고, 허재가 뛰었던 85 ABC 및 88 올림픽에서는 중국에게 2승을 거뒀는데, 특히 85 ABC 준결승전은 역대 중국전 승리 중 전후반 개별스코어 모두 앞선 완벽한 승리로 평가받으며 중국을 꺾고 올라간 85 ABC 결승전의 경우 당시 상대였던 필리핀은 미국 흑인 용병 둘을 포함시킨 변칙적인 팀이었다. 그런 미국 흑인 용병 둘이 모두 뛰던 필리핀을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분패했던 것.
아시아 대회에서의 활약상에는 못 미치지만 세계 대회에서도 괜찮은 모습을 보인 편인데 허재의 세계 대회 스탯을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 (비록 허재의 스탯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제외한다면 전체적으로 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기록들을 남겼고 94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당시 미국 NBA 오퍼를 받기도 했다. 해당 기사 물론 NBA 오퍼를 받은 것과 NBA에서 적응을 잘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만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
그리고 1990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FIBA 농구 월드컵 순위 결정전에서 이집트를 상대로 54점을 올린 기록은 FIBA 농구 월드컵 역사상 개인 경기 득점 기록 중 1위로 현재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자료 1 자료 2 자료 3
하지만 1990년 FIBA 농구 월드컵에서 팀의 주 득점원임에도 미국 상대로 단 9점에 그치며 67-146 대참패의 원흉 중 한 명이 되는 등 부진했던 경기도 많았다. 그래서 단편적인 몇몇 기록만 가지고 허재가 세계구급 선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띄우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다만 허재의 54점 기록 덕분에 그나마도 1990년 대회에서 한국은 이집트를 117-115로 이기며 '''겨우 1승이라도 거두고 이집트를 제치며 15위를 기록하면서 꼴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세계 대회에서는 한국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도 늘 패배를 거듭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심지어 매번 허재와 한국에게 패배를 안겼던 중국도 90년 월드컵 조별 예선 및 순위 결정전에서 호주와 유럽, 베네수엘라에게 두들겨 맞고 겨우 이집트와 한국을 이기며 한국 다음인 14위를 차지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허재 이후, 국제 대회에서 정영삼의 반짝 활약 외엔 허재만큼 위력적인 돌파로 팀의 숨통을 열어준 선수가 없었다. 1994년 월드컵 대회에서 한국은 이집트와 앙골라를 이겨본 뒤로 1998년, 2014년 대회에서 전패를 기록하면서 1승을 거두고 있지 못하고 있다. 만만해보이던 앙골라에게도 2014년 참패를 당했을 정도이니 반대로 말하자면, 한국 농구의 수준이 갈 길이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김선형이 국제무대에서 특유의 스텝과 속도를 이용한 돌파로 톡톡한 역할을 해줬고, 연차가 쌓인 후에는 주전 가드로 경기조율을 하면서도 슬래셔 역할을 해내고 있다.

5. 선수로서의 특징



기본기에 충실한 드리블부터 페이크 동작을 섞은 화려한 드리블까지,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유로스텝이라고도 하는 지그재그 드리블에 순간적인 스핀 무브에 크로스오버까지 온갖 드리블 기술을 능숙하게 썼다.
왼손잡이임에도 오른손잡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오른손을 잘 썼고,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좌우 어디로도 돌파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돌파한 후 양손을 사용해 어느 방향으로든 레이업을 올려 넣었으며, 높은 점프 후 체공 시간을 이용한 더블 클러치는 그만의 특기. 비슷한 수준으로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선수를 한국 내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다.
드리블과 스피드를 살려 볼을 잡자마자 순간 단독 속공으로 치고나가면 두세명의 수비수가 있어도 상대 팀은 파울이 아니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패스의 경우 돌파 능력과 연계해 수비수를 모은 후 밖으로 빼주는 패스부터 해서, 인사이드로 안정적으로 넣어주는 엔트리 패스, 감각적인 노룩패스, 속공 상황에서 빠르게 앞으로 찔러주는 패스까지 각종 패스도 훌륭했다. 특히 운동능력과 농구 센스가 좋은 동료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 거기 딱 맞춰서 빈 공간에 빠르게 넣어주는 패스가 일품.
이런 패스와 드리블 능력 때문에 슈팅가드로서가 아니라 포인트가드로서의 허재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허재가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서 허재의 이러한 패스 능력은 더욱 빛을 발했고, 은퇴 직전까지도 팀 내에서 가장 패스 잘 하는 선수는 허재였다.
한편 운동 능력을 살려 위로 확 솟구치는 듯이 쏘는 점프슛부터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 풀업 점퍼 등 각종 슛에서도 출중했다. 물론 슛 정확도로 치면 이충희같은 괴수보다는 밀렸지만.
역대 가드 포지션의 선수들 중 최고의 포스트업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스트업 기술이 웬만한 센터보다도 좋았을 정도. 은퇴 직전에 이르러서도 포스트업으로 손쉽게 득점을 해내기도 했다. 은퇴 직전 즈음 되면 계속 포스트업을 할 체력이 없는 게 문제였지만 나이를 먹었으니….
거기다 공을 가진 상태에서의 공격만이 아니라 공이 없는 상태에서의 움직임도 탁월했고, 항상 호흡을 맞춰 온 와 김유택이 찔러 준 패스를 받아 백도어 플레이를 해내거나 같은 팀의 스크린을 이용해 빠져나온 후 슛을 넣는 전형적인 슈터 플레이에도 능했다.
일대일 수비와 상대 패스의 맥을 읽고 중간에 끊어내는 스틸에도 능했고, 특히 스틸은 역대 최고 수준.
이런 기술들을 떠받친 게 허재의 신체 조건이었다. 188이란 키는 2000년대 기준으로도 슈팅가드로서 작다 할 수가 없었는데 허재가 대학 다녔을 무렵만 해도 180대 후반의 인사이더가 흔했다. 즉 허재의 대학 시절로 치면 센터를 봐도 되는 키였던 셈.
물론 허재 이전에도 신동찬이란 190대 포인트가드가 한국에 있었고 허재 이후에도 일단 은희석이나 기타 몇몇 선수 등 포인트가드에서 슈팅가드에 걸쳐 허재급의 키를 가진 선수가 없었던 건 아니나, 허재는 비슷한 덩치의 선수들을 압도하는 스피드와 점프력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다.[36] 거기다 원래 탄탄했던 몸에 계속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더 붙여서 힘까지 좋았다. 그런데도 유연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물론 지나친 술, 담배로 인하여 30대 중반부터는 운동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기는 했었다.
운동능력만 치면 허재 이상의 선수들이 있고 키만 치면 허재급의 키를 가진 선수가 여럿 있는데, 키와 운동능력과 힘의 조화로는 허재가 성인 농구계에 등장한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이후 허재급이라 할 만한 선수가 거의 없다. 그런 하드웨어에 최고의 기술이 겸비되었으니 저런 활약을 했던 것.
거기다 위기에 몰릴수록 강해지는 정신력이 몸과 기술을 이끌었다. 권투선수 생활을 한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스파르타식 단련을 받은 탓에 마치 헝그리 복서같은 정신력과 독기가 길러졌고,[37][38] 패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독기는 허재가 선수 생활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헤쳐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90년대 초의 나태함 이전에는 연습벌레로도 유명했다. 양손 드리블을 제대로 하겠다고 한쪽 손을 묶어놓고 연습을 하는 기행에 가까운 연습도 했고, 스스로 머리를 삭발하고 연습만 하기도 했다. 술먹고 들어오든 놀다 들어오든 그날 분 연습은 꼭 해야 잠이 오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각종 기술들도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 NBA 비디오 등을 참고하며 자신만의 연습으로 만들어 나갔고, 그외 여러 기술들도 누군가의 가르침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 익혀나간 게 많았다. 그야말로 천재란 별명에 걸맞은 모습.
비슷한 유형의 선수로 국내 농구는 아니지만 슬로베니아의 에이스이자 NBA 마이애미 히트의 주전 포인트 가드 고란 드라기치가 허재의 플레이스타일, 신장, 몸무게 그리고 왼손잡이인 것까지 나름 유사했다.

6. 선수로서의 평가


허재는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중 하나'''[39]였다. 이미 중앙대 시절부터 농구계 최고의 인기 스타이자 신동파-이충희, 김현준의 뒤를 이은 '''한국 농구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중앙대의 농구대잔치 준우승, 기아 왕조를 이끌며 80년대와 90년대를 지배한 최고의 선수였다.
허재의 상징성이라면 사실상 마지막인 '''한국 농구 대표팀의 에이스 스코어러''', 허재를 끝으로 용병들이 등장하는 KBL무대에서 한국 선수들은 국제무대에 내세울만한 국내 선수가 사라졌다. 물론 잠깐 정영삼, 김민구, 방성윤과 같은 선수들이 등장하며 이목을 끌었지만 말그대로 잠깐이었다. 허재와 같이 십여년 동안 중국과 같은 아시아 강팀들의 집중견제를 받는 에이스는 허재 이후에 사실상 없다.[40]
물론 90년대 본인의 행실 문제로 크게 비판을 받았었고, 그 시절을 미화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연세대의 돌풍과 용병의 등장이 연거푸 이어진 선수 말년에 다시금 기아를 우승으로 이끌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보여준 투혼과 TG시절에 보여주었던 퍼포먼스는 말년의 노장이라기에는 의심이 갈만한 활약을 보여주면서 본인의 평가를 다시금 뒤집어 내었다. 스포츠서울, 중앙일보 기자를 지낸 허진석은 허재를 가리켜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이자 악동'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허재의 농구 인생에 이만큼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현재 허재는 한국 농구에서 '''유이하게 농구를 모르는 인물도 알만한 인물이다.''' 허재를 제외하면 서장훈, 이상민 정도가 저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말로는 현재 한국 농구의 스타라고 부를 인지도를 지닌 인물은 없지만, 허재의 평가에는 농구를 모르는 인물이라도 알만한 인지도와 커리어를 지닌 한국 농구의 유이한 선수였다.[41]
[1] 1983년 아시아 청소년 농구대회 우승으로 병역특례까지 받아 군 문제도 깔끔했던 탓에 인기가 더 좋았다.[2] 밴드 백두산 항목에 있는 동영상을 보면 하희라와 함께 국어책 읽기로 MC를 보는 모습이 나오고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남자 선수 대표로서 선수 선서를 하는 등의 것들이 그런 인기를 보여주는 예.[3] 항명 파동이 벌어진 코리안리그 대회 자체는 당시 허재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고 김유택은 간통 사건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등, 당시 기아자동차 선수들이 일부러 태업했다거나 허재가 태업을 주도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허재가 선배들도 많은데 자신이 항명을 이끌 위치도 아니었다라고 말을 한 일도 있다. 그러나 항명 파동과는 별개로 허재가 방열 감독에 대한 팀 내 불만을 주도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있으며, 방열 前 감독도 허재가 자신에게 반항했다는 뉘앙스로 인터뷰를 한 일이 있다. 1988-89 농구대잔치에서 유재학이 MVP를 받은 일로 비롯된 기아자동차 내의 연세대와 중앙대 파벌 싸움의 결과물이라 보는 사람도 있다. 허재는 어쨌든 팀의 에이스였기 때문에 이에 자유로울 수 없었을 수도 있다.[4] 당시 고려대와 상무의 기세가 워낙 강하다 보니 기아가 살아남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5] 오히려 전 시즌인 94-95 4강전에서 고려대는 기아와 매경기 일보일퇴의 접전을 벌였으나, 이 해에는 3차전은 너무 일방적으로 기아에 참교육을 당하며 무너져 정규시즌 1위의 실적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6] 1차전은 그야말로 참교육의 끝판이었는데, 전반 초반 30점차까지 벌어지기도 했다.[7] 이 대회는 유독 플레이오프에 들어가자 허동택 트리오 모두 체력 문제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펄펄 날아다녔다. 허재는 4차전에서 우승 축포로 하프라인에서 버저비터까지 넣었다.[8] 여기에다 김영만의 부상 등,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기아는 0승 7패로 창단 후, 처음으로 꼴찌를 기록했다.[9] 여담인데 기아팀은 프로농구 개막 전 마지막 농구대잔치 리그에서는 7게임을 전패하기도 했다.[10] 물론 허재가 독보적이었다뿐이지 다른 선수들도 자기 역할을 다 해주었다. 예를 들어 김영만은 꾸준히 20점 넘게 득점하여 허재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골밑도 클리프 리드와 김유택이 분전하여 열세이긴 해도 완전히 밀리지는 않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다.[11] 맥도웰의 팔에 부딪혀 부상당했다.[12] 오죽하면 허재가 오른손에 한 깁스가 정말 부상당한 게 아니라 페이크로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허재는 당시 챔피언 결정전이 끝나고 장기간 병원 치료를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거기다 페이크고 아니고를 떠나서 깁스를 하면 당연히 맨손보다 공 다루기가 크게 불편해진다.[13] 이 당시 IMF사태가 터져 기아자동차가 오늘 망하나 내일 망하나 하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농구단이 이렇게 대박을 터뜨려줘서 기아자동차 임직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그리고 당연히 경기장은 연속매진. 언론보도의 비중도 농구가 야구보다 많았던 몇 안되는 사례다.[14] 여담으로 NBA에서도 파이널 MVP가 준우승 팀에 나온 경우는 1969년 제리 웨스트 이외에는 단 한명도 없다. 더욱이 NBA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기에 KBL보다 훨씬 더 길다. 2014-15년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거론되기는 했었으나 역시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준우승팀에서 결승전 MVP가 나오는건 드문 경우다. 여자농구에서는 WKBL 출범 이전 농구대잔치 시절 정은순이 결승전 팀 패배에도 불구하고 MVP를 받은 적이 있다. 종목은 다르지만 K리그에서 준우승팀 출신의 MVP는 안정환이 있긴한데 이 경우는 우승팀 수원의 핵심 공격수인 샤샤가 결승전에서 핸드볼로 골을 넣었기 때문이다.[15] 2021년 1월 5일에 방송된 MBC 에브리원 비디오 스타에서 KBL 최초로 준우승한 팀에서 MVP를 받았음에도 기쁘지 않은 나머지 MVP 트로피와 꽃다발을 경기장에 둔 채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이 되서야 트로피를 간신히 찾았다는 말로 웃음을 자아냈다.[16] 갈비뼈를 지탱하는 연골이 부러졌다.[17] 이 우승은 오리온스 입장에선 계시기 작동 오류로(일명 잃어버린 15초) 승리를 도둑맞은 천추의 한이 남는 경기이기도 하다.[18] 당시 6차전 경기에서 1쿼터를 24:3으로 뒤지며 말도 안 되게 몰리자 갈비뼈 골절에 등에 구멍을 뚫고 진통제를 맞은 상태로 벤치에 있던 허재가 나가겠다며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자 전창진 감독이 조금만 참으라고 말렸다고 했다.[19] 당시 최형길 원주 TG 부단장은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한 직후 허재에게 1년 더 선수생활을 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20] 원래 정규리그가 끝나면 모든 팀이 3~4일에서 길어도 1주일 정도 휴식기에 들어가 모든 선수들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뒤 팀에 합류해 시즌 마무리 훈련이나 플레이오프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을 한다.[21] 하지만 이를 두고 은퇴를 기획했다는 지적이 나왔는데,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인 전자랜드전에서 문경은의 3점슛 밀어주기에 일조했다는 비판여론이 나오면서 이를 모면하기 위해 허재의 은퇴를 기획했다고 주장했으나, 일부 언론은 은퇴 제기에 말이 안된다고 부정했다.[22] 하지만 스포츠 스타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국내 프로 스포츠계가 한쪽으로만 기울어지면서 마지막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 것도 문제였다. 은퇴 기자 회견이 끝난지 하루 뒤에 나온 신문 기사에서 허재가 이번 시즌 끝으로 은퇴한다는 것이 농구계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그때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고, 구체적으로 허재가 언제 은퇴를 하고 나서 향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도 자세하게 알려지지도 않았다.[23] 정훈의 높이 우위를 지켜보았던 전창진 감독의 의도가 제대로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24] 게다가 전창진 감독이 나머지 선수들에게 급하게 하지말라는 당부를 지키지 못한 것도 패배의 원인이었다.[25] 1, 2차전에서 볼을 오래 끌어 빠른 경기 흐름 방해로 패배를 자초했다는 혹평을 들었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허재가 뛰면 상대팀에 유리하다는 지적까지 나왔다.[26] 1, 2차전 홈에서 앤트완 홀이 극도의 부진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4쿼터에는 출전하지 않았다.[27] 허재를 프로농구 현역 선수 중 첫 영구 결번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프로농구에서 현역 생활을 하고 처음으로 영구결번이 된 선수는 김유택이고, 두번째는 김현준이다.[28] 전주 KCC의 이상민은 경기 전 영구결번이 되는 걸 보고 마음이 착잡한 선배 허재에게 우승을 줘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29] 원래는 앤트완 홀이었으나, 전창진 감독의 배려로 출전했다.[30] 이미 승부가 결정났는데도 경기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리기도 전에 벤치를 떠나 라커룸에서 담배를 피웠고, 회식이 끝난 뒤에는 우승을 챙기지 못한 채 서운해 하는 후배들로부터 작별의 헹가래를 받고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31] 당시 처음에는 허재의 지명도를 감안하기 위해 잠실실내체육관을 고려했다. #[32] 하프타임에서 항상 단축수업을 하다 장충체육관에 가서 응원할 수 있었다는 폭소를 자아냈고, 자신의 모교가 항상 우승만 하는 줄 알았다고 덧붙였다. 또 자유투는 어색한 폼으로 시도했지만 2차 시도는 성공하면서 오랜 친구다운 면모를 과시했다.[33] 특히 경기 종료 버저가 울리기 전 후배인 서장훈, 김주성, 김영만의 도움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덩크슛을 꽂아 넣었다.[34] 제작 당시 허재의 사진 선정을 놓고 상당히 고민을 했는데, 팬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허재가 코트에서 팬들에게 손을 흔드는 사진이나 2002~2003 시즌 챔피언 결정 최종 6차전에서 우승이 확정되기 직전 코트에 들어온 허재가 갈비뼈 통증을 참으며 미소를 띠는 모습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은퇴하기 전 우승한 뒤에 미소를 지으며 그물을 자르는 게 화려하고 파란만장했던 농구인생의 대미를 장식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는 이유로 그물 커팅으로 결정되었다.[35] 이 광고에 감동을 받자 점프볼에 답 광고를 싣기도 했다. 한국 농구사에 선수와 팬의 아름다운 스토리로 남아 있고, 다른 운동과는 사뭇 다른 농구팬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36] 운동능력 덕에 대학 때만 해도 경기중 덩크를 했는데, 운동능력 떨어진 90년대에 와선 대표팀에 소집되어 훈련 중 덩크 연습을 한 후배들 앞에서 덩크 시범을 보이겠다고 했다가 부상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참고로 농덕 사이에서는 허재가 덩크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로 말이 많은데, 대학 시절에는 분명히 가능했고 사진도 있다. 단, 그게 중앙대 학보라 도서관까지 가야만 확인 가능하지만...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농구 대통령 소리 듣는 사람이 젊었을 때 덩크가 안 될 정도의 피지컬이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37] 이후에도 중앙대 시절 때 경기에서 질 때마다 의기소침해 있던 허재를 중앙대 선배들에 예전에 졸업한 중앙대 출신 OB들에 심지어 연, 고대 제외 타 대학 선배들까지 몰려와서(...) "진 게 문제가 아니라 져서 기죽어있는 게 보기가 싫다"라며 마구 갈궈댄 게 독기를 제대로 길러냈다.[38] 중앙대야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대학 선배들까지 왜 갈구는 거냐고 하겠지만 당시 반 연, 고대정서가 팽배했던 농구판에 허재는 그 연, 고대 구도를 박살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던 유망주였다. 그래서 허재가 활약해서 중대가 연대나 고대를 이기면 타 대학선수들이나 그 출신 농구인들이 굉장히 기뻐했을 정도.[39] 물론 중 하나라는 주석을 달았지만 허재의 선수시절을 견줄 한국 선수는 서장훈 정도뿐이다.[40] KBL 초창기 시절, NBA 도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제럴드 워커에게 기자들이 ‘한국 선수중 NBA에서 뛸만한 선수가 있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 ‘아무도 없다. 그나마 기술적으로는 허재뿐이다’였다[41] 하지만 선수 시절 당시 허재만큼의 찬사를 받던 선수는 없다. 서장훈 조차도 경기 방식의 비난을 받았지만 허재는 최소한 경기내에서의 모습으로 비판 받은적 없던 완전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