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image]

1. 개요


玄明官
1941년 9월 2일 ~
대한민국공무원, 기업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연주(延州).
1941년 전라남도 제주도 성산면 온평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1]#에서 태어났다. 제주제일중학교,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 게이오기주쿠대학 대학원 경제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1965년 제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감사원에서 근무하였다.

2. 삼성에 입사하다.



2.1. 한솔그룹


그러다 1978년부터 기업인으로 활동하여 전주제지에 입사한다.
전주제지는 범 삼성가이인희[2]의 한솔그룹의 계열사로, 78년 총무부장을 역임한후 80년 관리부장으로 승진한 후 1981년 호텔신라의 이사로 삼성그룹의 임원이 된다.

2.2. 신라호텔


그리고 당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에게 신뢰를 얻게되는 일이 있었으니, 신라호텔 만두 사건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신라호텔에 대해 '''다른 호텔에 비해 중식 만두가 맛이 없다.'''라는 평가를 했었고, 그룹 회장의 한 마디에 혼비백산이 된 신라호텔 임직원들 사이에서 현명관은 호텔의 수석 셰프와 함께 만두를 가져와서 반으로 갈라 그 안에 소는 얼마나 되고, 기름과 고기의 비율은 어떻고, 피의 무게는 어떤가? 식으로 아예 해부를 해서 작업했다고 한다.[3]
핀셋으로 직접 나물을 골라내서 비율을 알아내고, 만두피의 무게는 몇 그램인가를 알게 되어 다시 만든 만두는 이병철 입에서 '맛이 괜찮다.' 라는 평가를 받고 그때 이병철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삼성그룹은 신라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사장단 회의를 했다고 하는데, 그때 만두 사건의 현명관을 알아본 이병철 회장이 일하기 어떻냐고 묻고, '일이 재밌는것 같습니다.' 라는 대답을 해서 눈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두 이후로도 삼성가 내에서는 신라호텔을 이용하면서 맛에 대한 지적을 많이 했고[4][5], 초밥에 대해서 회와 밥에 대한 비율로 지적을 받자 오기가 생긴 현명관은 아예 일본 오쿠라 호텔 등의 유명 호텔 일식집을 탐방하고 신라호텔에 입사하는 요리사들에게는 1.2.3개월 별로 일본의 유수한 초밥집들 연수를 다녀오게 지시했다.
음식에 대한 평가를 겨우 오너 일가에게 인정받자 다음에는 직원들에 대한 서비스 정신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매일 5시에 출근해서 포스트잇으로 '여기 청소가 덜 됐다.' 주방에 가서 '행주가 더럽다.' '수도 위생이 안좋은 것 같다.' '회계문서가 종류별로 정리가 안된거 같다.' '소화기 안전상태 확인해라.' 등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관여해서 지적사항을 붙이고 다녔다고 한다. 호텔 부서에는 저런 현명관의 꼼꼼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6]
그 뒤로 내건 슬로건은 비포 서비스 라는 것으로, 손님이 직원에게 주문을 요청하는 애프터 서비스를 앞서 먼저 다가가서 제공한다는 방식으로 고객에게 자신이 대접받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건데, 이건 딱 단골고객을 위한 서비스라고 할수 있다.
또한 손님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먼저 알아야된다는 마인드로 신라호텔 사내에서는 차량번호 맞추기 대회가 있다고 한다.
여러장의 사진을 놓고 김사장의 차는 여기서 몇 번이냐? 해서 알아맞추면 상금을 주는 문화였다고 한다. [7]
그러나 이병철의 뒤에 이어 삼성그룹 회장이 된 이건희는 현명관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하는데[8] 한번은 지방으로 출장을 와 임원진들과 경영 회의를 준비하고 있는데 새벽2시에 이건희가 전화를 해서 지금 당장 서울로 올라오라는 말에 부아가 치밀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현명관을 부른 이건희는 '호텔 내 직원들을 죄다 힐튼에 빼앗겼다.[9], 인력관리를 어떻게 하는거냐, 돈을 그렇게 처발랐으면서 어떻게 할 거냐?' 는 등으로 마구 갈궜다고 한다. 그 속에서 현명관이 '회사채를 발행하고, 신라호텔을 상장하겠다'는 해결책을 내놓아 1991년에 신라호텔을 주식상장시킨다.
신라호텔 재직시절 흑역사가 하나 있는데 불도장사건이었다.
호텔 내에 신메뉴를 만들어보라는 이건희의 지시로 후덕죽[10]셰프와 같이 중국 광동 요리인 불도장을 국내에 선보였고, 이건희의 극찬까지 받았지만, 생소한 음식에 대한 광고를 재밌게 내겠답시고 '''수행을 하는 스님이 그 냄새를 맡고 파계승이 되었다는 유래의 불도장.'''이라는 신문광고를 올려버렸고, 조계종의 항의를 받아서 불교신문에 직접 삼성의 이름으로 사과광고를 내었다고 한다.

2.3. 삼성그룹내로 들어오다.


호텔신라 이후 이건희는 현명관을 삼성시계[11] 대표로 보내는데, 이건 좌천이었다.
삼성시계 대표로 임명된 현명관은 태평로에 있는 삼성그룹 사옥 내에서 삼성시계 본사를 성남으로 옮기고, 구미사업장 역시도 같이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장 월급을 자진삭감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하여 재무구조를 좋게 만들었지만, 세이코와의 기술제휴 문제에서 관계를 개선하자고 제안하여서 처음으로 이건희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3년 이건희는 그룹 내에 중요 사장단을 모두 LA로 호출하게 되는데,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전에 있었던 LA 가전제품 비교였다.[12] 이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면서 이건희의 지시사항으로 사장단에게 녹음 파일을 전당했는데, 그게 바로 '''티스푼 사건''''(...) 이건희가 품질경영을 주장했을때, 당시 비서실장이던 이수빈이 '질적 품질성장도 중요하지만, 양과 질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라는 말에 현명관을 포함해 다른 사장단들도 '''아 비서실장이 정말 충언을 하는구나. 그래 저런 말을 해야지.'''라고 이수빈을 칭찬할때, 이건희가 격노해서 티스푼을 던져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그대로 녹음됐다고...[13]
그리고 자신이 칭찬하던 이수빈 비서실장이 좌천된 이후 역으로 현명관 본인이 이수빈의 후임으로 삼성그룹 비서실장 자리에 임명됐다고 한다.(...)[14]
3년간 비서실에서 근무한 뒤 후임인 이학수에게 비서실장 자리를 넘기고,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의 자리에 앉게된다.
삼성 내에서 오너 일가를 제외하고는 이수빈,권오현에 이은 몇 안되는 회장 직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2001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에 구단주 대행을 하다가, 김응용을 영입하고, 드라마틱한 준우승(...)으로 이젠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역으로 이건희는 정식 구단주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2년에 드디어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우승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2008년 삼성그룹 이건희 비자금 문제에서, 자신이 이건희의 개인 비자금으로 삼성생명 28만주에 대한 존재를 검찰조사에서 실토하고, 고문 활동을 하다가 2010년 자신이 몸담은 삼성을 떠나게 된다.

2.4. 이후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현직 도지사인 김태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친여 무소속 후보로[15]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친야 무소속 우근민 후보[16]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3년부터 2016년 12월 까지 한국마사회 회장이었다.


[1] 인근의 시흥리와 함께 연주 현씨 집성촌이다. 강기권남제주군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이건희, 이맹희의 누나.[3] 물론 자회사의 만두뿐만 아니라 프라자호텔이나 하얏트 호텔에서도 중식만두를 공수해 와서 똑같이 해체해보고 평가했다고 한다.[4] 오너 일가가 수시로 음식을 먹으며 이음식의 맛은 어떻고, 저건 어떻다. 식의 상이한 결과가 나와서 하나로 맛을 통일하기가 정말 어려웠다고 한다.[5] 삼성가는 다른 재벌가에 비해 먹는것에 대해 굉장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는데, 이건희 역시도 평소에 먹던 초코쿠키가 조금 눅눅해진거 같다는 이야기를 바로 헤드쉐프에게 알릴 정도였다고 한다.[6] 위의 만두 일화도 보면 알겠지만,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세밀하게 분석해서 파고드는 것이 자신의 경영 철학이라고 한다.[7] 그래서 신라호텔의 OB들은 한번에 1000대의 차량을 보고서 누구 차인지 바로 외울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8] 소병해 비서실장 숙청건도 그렇고, 이건희는 그룹 내에서 삼성전자와 관련이 없고, 선대 이병철의 가신이었던 임원들을 사장단 회의에서 상당히 질책하고,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9] 당시 힐튼호텔은 국내에서 대우그룹의 김우중과 제휴관계를 맺고 있었다.[10] 화교 출신 요리사로 호텔 조리사 출신으로 삼성그룹 내 임원대우를 받은 셰프이다.[11] 일본 세이코와 합작으로 나름 국내 손목시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적도 있으나 해외 브랜드에 밀리고 당시 30개 계열사중에 매출 꼴찌로 1997년 외환위기때 계열사에서 분리되어 현재는 SWC라는 기업으로 독립경영을 한다.[12] 미국에 출장갔던 이건희가 도시바나 소니등의 제품은 잘팔리는데, 삼성제품은 구석에 먼지쌓이는 곳이 있다 해서 빡쳐서 사장단을 모두 호출해서 직접 비교하라고 시킨 일이다.[13] 이전까지 이건희 티스푼 사건은 그냥 언론사에서 떠드는 이야기라는 말이 많았는데, 직접 들은 사장단들이 인정한 사실이었다고 한다.[14] 본인의 생각으로는 삼성그룹의 공채가 아닌 타 출신이니 이리저리 인맥에 휘둘리지 않으니 그 자리에 임명한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15] 원래는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의 공천을 또 받았으나, '''동생의 수뢰 혐의'''로 인해 공천이 박탈되었다.[16] 역시 당시 야당인 민주당 공천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성희롱 논란'''으로 인해 고희범 전 한겨레신문 대표이사가 공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