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대 여배우 신트로이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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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여배우 신 트로이카'''
'''2세대 트로이카'''
1970년대에 데뷔하여 한국 연예계를 주도한 세 여배우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를 뜻하는 말. 1세대 트로이카의 다음 세대였다고 해서 2세대 트로이카라 불리기도 한다. 세 여배우가 TBC 드라마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1977년부터 정윤희가 은퇴하는 1984년까지 유지되었다. 사실 정윤희 때문에 트로이카 중에서는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2. 다른 트로이카와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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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남정임, 문희, 윤정희. 가운데 있는 남자는 배우 신성일이다.
신트로이카 체제 이전에 1960년대 후반 영화계를 주도했던 윤정희, 문희, 남정임이 1세대 트로이카이자 원조 트로이카로 있었다. 2세대 트로이카 이후에는 3세대 트로이카로서 원미경, 이미숙, 정애리가 있었지만 정애리의 영화 출연이 뜸하다보니 정애리 대신 이보희가 들어간 3세대 트로이카를 에로이카라고 부르며 3명 여배우 중심 체제가 1980년대 후반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3명의 인기를 살펴보면 1세대, 3세대 모두 3명이 공평하게 인기를 나눠 가졌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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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트로이카가 인기를 끌던 당시 이들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린 김지미(사진 왼쪽)
1세대의 경우 윤정희, 문희, 남정임이 모두 인기를 끌었지만 전성기 인기의 중심축은 윤정희와 문희였지 남정임은 이 2명에 비해 다소 인기에서 쳐졌다. 오히려 인기만 놓고 보자면 1세대 트로이카 이전의 김지미가 남정임보다 앞섰지 전체적으로는 윤정희와 문희가 1등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형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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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원미경, 이미숙, 정애리
3세대 트로이카의 경우 정애리가 들어간 트로이카 체제는 몰라도 이보희가 들어간 에로이카 체제의 경우 원미경과 이미숙이 인기의 중심 축이었지 이보희는 이들 2명보다 활동 매체의 범위에서도, 출연 장르에서도, 인기에서도 상대적으로 밀렸다. 일단 이보희는 영화에서만 활약했을 뿐 드라마에서는 몇차례 단역만 나왔기만 했다. 또한 이보희가 활약한 주장르는 에로물에만 한정되어 있어 에로물 이외에 다른 장르에서도 활동한 원미경, 이미숙보다 활동 범위가 좁았다.[1]
그러나 2세대 트로이카의 경우에는 총체적으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인기를 못누렸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3명이 서로 골고루 인기를 나눠가졌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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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애리의 은퇴로 정애리 대신 트로이카의 일원이 된 이보희. 그러나 이보희와 정애리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이보희의 인기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또한 1세대는 영화 말고 별다른 매체가 없었던지라 영화 말고는 딱히 자신의 끼를 발산하지 않은 반면 3세대의 경우에는 특정 인물이 하나의 매체에만 편중되어 활동했었다. 정애리의 경우 드라마에서만 한정되어 활동하였고 이보희의 경우 영화에만 주로 얼굴을 보여줬다. 그러나 2세대의 경우 영화, 드라마, 광고 등 왠만한 여배우들이 활약할 수 있는 매체에서 폭넓게 활동을 했다. 또한 이런 매체에서 셋 다 정점을 찍었기도 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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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하는 사람아에서 정윤희와 호흡을 맞추는 한진희. 한진희도 당대 유명 배우였지만 당대 유명 여배우인 정윤희와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이들만의 특징은 아니고 사실 3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최진실, 김희선까지 이어지는 흐름이지만 1세대와 비교하여 여배우의 위상이 남배우를 압도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1세대의 경우에는 넘사벽 신성일을 제외하고는 전설급 남자배우와 여자배우의 인기가 그럭저럭 엇비슷했지만 2세대의 경우에는 당대의 어느 유명 남자배우도 이들만큼의 출연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당시 이들에 비견하여 남자 배우의 경우 드라마에서는 박근형, 한진희, 노주현, 임채무 정도가 유명했지만 이들은 영화에서의 실적이 사실상 없다. 그나마 한진희가 주연급 조연으로 몇몇 영화를 흥행시켰으나 그것도 악역이 대부분이었다. 영화의 경우에는 1980년대에 들어 안성기가 압도적인 실적을 보여줬으나 드라마에서의 실적은 전무했다. 그래서 영화, 드라마 모두를 잡은 2세대 트로이카랑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나마 이영하 정도가 영화와 드라마 모두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총체적인 실적은 역시 2세대 트로이카에 비해 떨어지는 편. 남자배우가 압도적으로 유명한 2000년대 이후랑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3. 상세
'''외모의 정윤희, 인성의 유지인, 흥행의 장미희'''[4]
3.1. 장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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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카의 선봉대장'''
트로이카 여배우들 중에서 제일 먼저 정상에 오른 여배우가 장미희이다. 1976년에 영화 성춘향전으로 죽을 쒔지만 TBC 드라마 해녀 당실이 등에서 주목받은 다음 해에 겨울여자로 이전 별들의 고향의 최고 흥행 기록을 깨뜨리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다른 2명과 비교하면 영화 흥행에서 크게 앞선다. 장미희의 기록 1, 2, 3위의 기록 모두 다른 여배우의 최고 흥행 기록에서 크게 앞선다.[5]
신체 조건에서는 167cm로 키가 제일 컸다. 그러나 당시에는 키가 큰게 그렇게까지 장점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다른 트로이카 일원들과 비교해 정상에 올라가는 속도가 제일 빨랐다. 유지인의 경우 데뷔작인 그대의 찬손에서 그럭저럭 흥행에 성공했지만 이후 TBC의 드라마에서 흥하기 전에 몇년 동안 쥬단학화장품의 모델에만 머물렀다. 정윤희의 경우에는 정상에 오르기까지 오르는 시간이 더 늦었다. 처음에 출연한 영화 욕망은 물론이고 이후 기대를 품었던 청춘극장에서도 쓴물을 들이켰다. 청실홍실로 유명해지기 전에 해태제과 전속모델, 쇼쇼쇼의 메인 MC로 있었을 뿐 딱히 대표작을 내지도 못했다. 장미희도 데뷔작 성춘향전에서 죽을 쑤었지만 1년이 지나 겨울여자로 정상에 올랐으며, 이는 다른 트로이카 여배우과 비교해 굉장히 급성장한 것이다.
3.2. 유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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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카의 교양'''
유지인은 2명과 다르게 유일하게 활동할 시절에 대학 재학생이었다. 당시 연예계에서는 대학 출신 연예인이 드물다 보니 대학을 다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연예인 치고는 교양있어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6]
거기다가 유지인의 경우 다른 2명과 다르게 사생활이 깨끗한 편이었다. 장미희는 전두환 스캔들이나 방송중지, 촬영장에서의 여러 잡음, 학력 위조 등으로 뒷소문이 많았다. 정윤희는 백치미 있던 여성과 술집 여자역을 자주 맡았다는 점과 워낙에 3명 중에서 외모가 출중했던 이유로 단순한 질투에서 비롯되어 술집 출신이니, 중졸이니 심지어는 자식도 숨겼다는 루머에 휩싸이며 살았다. 당시 정윤희의 사생활을 캐려고 기자들이 목욕탕까지 따라왔다고 할 정도.
그러나 유지인은 아버지가 군인 출신이라 다른 남자 연예인들이 건드릴 엄두조차도 못내다 보니 스캔들이 생길 수가 없었고 촬영장에서 스텝들에게도 깍듯하게 인사할 정도로 예의가 발랐다.
외모에서도 정윤희만큼은 아니었지만 토끼같은 눈과 오똑한 코, 앵두같은 입술에 조막만한 턱으로 현대적이면서도 귀여운 미인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 사실 외모와 인기면에서 장미희보다도 정윤희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다.[7]
3.3. 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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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카의 최종보스'''
장미희만큼 관객을 동원하지도 못했고 성격 면에서도 유지인보다 깨끗하지는 못했지만[8] 트로이카 여배우들 중에 최고를 꼽으라고 하면 너나 할것 없이 정윤희를 꼽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는 외모에서 다른 2명을 크게 앞섰기 때문이다. 유지인의 경우에는 현대미에 치중되어 있지만 정윤희는 고전미와 현대미를 동시에 가진 배우이다. 큼지막하고 초롱초롱하며 당장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을 듯한 눈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섹시한 입술''', 당시로서는 이상적인 얼굴형을 가졌다.
몸매도 가장 우월한데 이는 김호선 감독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시 시대를 감탄케 했던 것은 정윤희가 맡은 배역이 이런 외모에 아주 어울리는 배역을 맡았다는 점에서 비롯되며 이는 남성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알맞은 키에 알맞은 가슴과 바가지 두 개를 엎어 놓은 것 같은 히프를 가진 여자. 360도 팬(회전)해 봐도 고르고 알맞게 살찐 여자. 어쩌면 작은 몸매에 그토록 알맞은 몸의 균형을 가지고 있을까? 대바구니에 담아도 담겨질 것 같은, 주머니에 넣어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않을 것만 같은 새 같은 여자다. 윤기 흐르는 까무잡잡한 피부는 블랙 올페의 연인을 연상케 하고 가늘고 긴 목과 작은 어깨는 연민의 정을 불러 일으킨다. 카메라가 그녀의 앞가슴을 열어젖히면 왼쪽 가슴에서부터 오른쪽 가슴으로 대각선을 이루며 흐르는 두 개의 점이 나타난다. 그 두 개의 점이 어쩌면 몸의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는지 다시 한번 경탄케 한다. 그 점을 떼어 몸의 각 부문의 무게 비례를 저울에 달아 본다면 아마도 정확한 평균치가 나올 것이다. 작은 공간에서는 한없이 작아 보이고 큰 공간에서는 한없이 커 보이는 여자.
- 김호선 감독
정윤희의 외모는 기본적으로는 귀엽지만 어린아이같이 성욕을 건드리지 않는 귀여움이 아니라 자세히 살펴보면 남자의 성욕을 자극할만한 요소를 고루고루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대 남자를 자극했던 요소는 '''입술'''. 도톰한 입술은 남자들의 성적 환상을 만족시켰다. 몸매도 앞에서 말했다시피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최상의 몸매에, 이것도 서구 여자들처럼 부담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볼륨감이 있었고 체구도 아담하다 보니 딱 남자들이 건드리고 싶은 그런 여성의 전형이었다.
이런 여자가 영화에서 순진하게 남자들한테 당하는 배역을 맡는다면 좋아하지 않을 남자가 없을 것이다. 정윤희는 이런 배역들을 충실히 맡았고, 무엇보다 잘 벗었다. 김태희나 수지가 벗는 장면이 있었던가?? 당시에는 호스티스물이 유행이다 보니 어느 정도는 노출 장면이 필요했고 정윤희는 이에 부응해 잘 벗어줬다.
4. 신트로이카 시대에도 살아남은 여배우
이들 여배우는 신트로이카가 방송을 휩쓸자 약간 위축된 감이 있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꿋꿋이 호조를 보여줬다. 이들은 트로이카 여배우들이 출연하기로 한 작품에 주연으로 나오지 못할 때 대타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겨우 대타인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부족한 트로이카의 자리를 메꿀 흥행성과 인기를 보장해 줬기 때문에 대타로 쓰였던 것이다. 또한 트로이카 여배우와 공동주연을 맡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유지인 주연의 청춘의 덫에 원미경이 공동주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4.1. 이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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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만큼은 유일하게 트로이카 여배우와 호각 이상의 경쟁을 벌였던 여배우이다. 사실 유신정권 체제 하였다는 것을 떠나서 1970년대 초중반은 이상하리만치 영화 여배우 복이 없었다. 윤여정, 안인숙 등은 몇 편의 흥행작을 냄으로써 대형 배우로서 클 싹이 있었지만 성공한지 얼마 안 돼 결혼으로 영화계를 떴고 또다른 유망주인 양정화는 성적 스캔들인 박동명 사건에 연루되어 치욕적으로 연예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영자의 전성시대로 유명한 염복순[9] 의 경우에는 영자의 인물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외에 드라마에서 인기를 끈 안방극장의 트로이카 등 수많은 여배우들이 영화계에 진출하려 했으나 성공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임예진은 풋풋한 소녀의 이미지를 넘지 못해 하이틴물로써 그녀의 커리어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영화 여배우계를 이끈 것은 이미 30대를 넘은 윤정희나 김지미와 같이 이전 60년대에 인기를 끈 여배우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이영옥은 꾸준히 흥행작을 내며 트로이카 시대에서도 살아남은 여배우가 이영옥이었다.
1975년에 서슬퍼런 유신독재 체제 하에서도 자유분방한 대학생들의 생활을 그린 바보들의 행진에서부터 하여 역시 대학생물인 병태와 영자에서 군지하는 남자친구를 보내주는 장면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녀 최고의 흥행작으로는 내가 버린 여자가 있다. 이 작품은 1978년 최고의 흥행작으로서 무려 3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그 해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다. 이 기록은 2세대 트로이카의 등장 이후 1984년 고래사냥의 등장 전까지 장미희의 겨울여자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흥행 기록이었다.
4.2. 김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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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옥하면 90년대 공주는 외로워나 2009년 지붕뚫고 하이킥에서의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당시에는 흥행보증배우였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70년대에 침체된 영화계에서 트로이카의 뒤를 이으려는 수많은 드라마 배우들이 은막에 올라왔지만 이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여배우가 김자옥이었다. 김자옥은 원래 안방극장의 트로이카로서 드라마 전담 배우였다.[10] 1970년대 초반부터 영화산업의 위축으로 인한 반사효과로 드라마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였고, 드라마 중심으로 활동하는 배우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며 김자옥은 드라마 배우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당시 유명 방송국이었던 KBS와 MBC의 사이를 넘나들며 같은 안방 트로이카로 유명했던 MBC 전속 여배우였던 김영애와 KBS의 한혜숙과 달리 활동의 폭이 넓었다.
그녀는 이후 영화계에서도 여러 호스티스물에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정윤희와 가을비 우산속에에 출연하여 흥행상으로는 정윤희에게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드라마와 영화 모두를 잡았다는 점에서 보면 사실 이와 비슷하게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2세대 트로이카의 원형라고도 볼 수 있다.
4.3. 김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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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배우만큼은 아니었지만 2세대 트로이카가 전성기를 누린 시점에 처녀의 성, 아스팔트 위의 여자 등의 흥행작을 내며 인기를 끌었다.[11] 이후 2세대 트로이카가 TBC의 폐국으로 주춤한 사이 미워도 다시 한번 '80으로 흥행 1위를 했다.
4.4. 원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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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셋과는 다르게 신인의 위치에서 트로이카와 호각의 경쟁을 벌인 경우이다. 원미경은 80년대 트로이카이지만 1978년 미스 롯데에서 최고 수상을 한 경력을 바탕삼아 70년대 후반부터 드라마, 영화 주연을 따내기도 했고 트로이카와 공동 주연을 맡는 등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특히 원미경의 위세는 80년대 초반에 그 절정을 이루었는데 당시 기존 신트로이카를 위협하는 신인으로 자리매김하여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수의 흥행작을 내었고 수많은 광고에 출연하여 풋풋하고 발랄한 모습을 보여주어 신트로이카 사이에서 그녀만의 개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82년도의 잇다른 스캔들로 인해 방송출연 금지 조치를 받으며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으며 신트로이카를 압도하는데에는 실패하며, 정윤희의 은퇴와 이미숙의 성장으로 그녀의 라이벌은 그 후 3세대 트로이카의 일원인 이미숙, 정애리로 결정되었다.
[1] 단 이보희는 에로물에서만 인기를 끈 것이 아니었다. 이장호의 외인구단과 같이 청순한 여자역도 소화하긴 했다.[2] 굳이 우열을 나누자면 정윤희가 외모를 무기로 2명을 크게 앞서나갔지만 여러 지표를 보면 정윤희가 2명에 비해 밀리는 지표도 적지 않다.[3] 물론 3세대의 경우 TV가 발달하다 보니 CF도 많이 찍었기는 했다.[4] 더 무서운건 셋 다 이 3개의 능력치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외모나 인성에서는 장미희가 2명보다 좀 낮은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5] 아래의 관객수를 보고 겨우 몇십만인가!!라며 가볍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 기록은 서울에서의 하나의 극장에서의 기록이다. 서울 전체로, 전국 전체로 확대하면 10배에서 15배까지 확대되며 당대 인구 비율까지 고려하면 겨울여자의 경우는 현대의 천만 관객에 비견된다고 한다.[6] 실제로 유지인은 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중앙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음으로써 석사여배우 2호로 불리기도 했다.[7] 사실 유지인-장미희, 정윤희-장미희 구도는 상당했지만 정윤희-유지인은 영화 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든 구도였다. 실제로 장미희는 80년대 초 약간 주춤할 때 다른 트로이카인 정윤희와 유지인의 서브 주연을 맡았지만 이들의 주인공을 하지 못했다.[8] 그렇다고 해서 인성 논란에 싸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냥 당시 기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장미희와 유지인의 중간 정도의 성품을 가졌다고.[9] 1952년 서울특별시 출생. 1970년 문화방송 공채 탤런트 3기로 선발되어 연예계에서 데뷔하였으며 이후 활동을 이어가다가 1987년에 미국으로 이민갔다.[10] 당시는 드라마 전담 배우와 영화배우의 역할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11]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한 한국여배우사전은 김영란에 대해 트로이카 배우들과 달리 영화출연을 부업과 같이 했다고 한다. 출연 편수만 봐도 트로이카에 비해 상당히 적은데다 1년에 많아야 2~3편 정도로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1977~1981년까지 꾸준히 영화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트로이카에 비해서는 아니지만 흥행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