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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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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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삼형제 때부터 이런 이미지가 친숙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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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에 한 미모 했던 배우다. 이목구비가 중국 미녀배우 공리와 묘하게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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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희의 어린 시절.
주로 공주병 아줌마나 푼수데기 조연, 혹은 사극에서 조연으로 많이 등장하는 배우지만, 그건 1990년대 이후 텔레비전 드라마에 주력하면서 생긴 이미지. 전성기인 1980년대엔 원미경, 이미숙과 더불어 80년대 3대 트로이카로 유명했으나, 2010년을 전후로 '멱살잡이를 즐기는 억척아줌마 배우로 유명'하며, '재밌는 배역명도 꽤 갖고있다.' 한국의 대표적 섹시스타로 유명해서 유명 에로영화였던 '무릎과 무릎 사이'라든지, ''''어우동''''하면 바로 떠오르는 배우였다. 특히 다리가 예쁜 걸로 유명해서, 서양권 여배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다리라는 찬사를 받았다.[3]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던 이장호 감독의 작품에 고정출연하다시피 했다. 애초에 조진원이라는 예명으로 무명 시절을 보낸 중, 감독 이장호의 눈에 띄어 '일송정 푸른 솔에'(1983)의 조연으로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이후 사회고발적인 성격으로 화제작이 된 이장호의 '바보선언(1983)'에서 가짜 여대생 역으로 유명해졌다. 이보희라는 예명도 이장호 감독이 자신의 성을 따서 지어 준 것이다.
아무래도 몸매가 좋다보니 '무릎과 무릎사이', '어우동', '달빛 사냥꾼' 등 여러 영화에서 정사신을 많이 연기했다. 그러다보니 '공포의 외인구단'을 이장호 감독이 영화화 하자 항상 그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맏던 이보희가 자동적으로 엄지 역을 맡은 것에 말이 많았다. 청순한 이미지의 엄지와 어우동 같은 성인영화의 주인공인 이보희의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4] 그래도 접시꽃 당신에서는 현모양처의 주인공 역을 소화하기도 했다.
의외로 사극에 많이 출연하는 배우이다. '용의 눈물'에서도 태종 이방원이 미모를 보고 마음에 들어 새로들인 이후 원경왕후(최명길 역)와 갈등을 일으키는 후궁 선빈 안씨역을 맡기도 했다. '여인천하'에선 중종의 모후 정현왕후(자순대비)역을 맡기도 했었다. '서궁'에선 주인공 격인 인목대비 역, KBS의 2002년작 '장희빈'에서는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 역도 맡은 바 있다. 시대극인 '서울 1945'에서도 아메 카오리 역을 맡았다.
1분부터. 원래 동영상의 오른쪽이 들리지 않는다.
KBO 리그와 얽힌 흑역사가 하나 있다. 김재박이 선수 시절인 1986년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시상자인 이보희가 '''김재박을 유격수 수상자 김재전이라고 부른 해프닝.''' 博을 傳으로 읽었다. 김재박 항목 참조. .
80년대 활동한 여성 연기자들 중에서 보면 최 전성기 기준으로 당대 최고로 평가받았으나, 전성기가 짧은 편. 1984년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주연을 맡아 영화 흥행을 이끌어 낸 후 1985년에 어우동에서 원탑 주연을 맡아 그해 깊고 푸른 밤 다음으로 한국영화 최고 흥행을 이루면서 전성기를 맞았고, 그뒤 88년 초반까지 영화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면서 백상예술대상을 비롯한 주요 영화제 상도 휩쓸면서 흥행과 연기력 양쪽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88년에 결혼 후 잠정 은퇴하면서 전성기가 순식간에 꺾였다. 그러나 전성기라고 해도 영화에 한정되어 있다 보니 대중성이 좋은 드라마까지 흥행시킨 원미경이나 이미숙, 드라마만 흥행시킨 정애리보다는 인기의 등급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함께 8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 소리를 들은 원미경이나 이미숙[5] 이 80년대 후반 이후에도 꾸준한 활동을 하고 3-40대 들어서도 주연 작품을 흥행시킨데 비해, 이보희는 잠정 은퇴 뒤 복귀 후 주연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중장년 조연급으로 밀려났다. 미모는 당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사실 연기로서는 동시대 배우 중에서 뛰어난 편이 아니었고, 가끔 발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연기보다는 미모와 섹시한 분위기 덕에 인기를 끌었고, 영화제 수상도 흥행 성적 덕이 있기도 했다.
같은 완도 출신 여성 중견 탤런트로는 배우 김창숙이 있다.
2. 사생활
1984년 '무릎과 무릎사이'의 흥행으로 영화제작사로부터 스텔라를 선물받았다. 1986년에도 차를 몬 기사가 있다.
1987년 8월에 LA 앙드레김 패션쇼에서 만난 재미교포 함윤식[6] 과 1988년에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그리고 1993년에는 아들을 데리고 영화활동에 복귀하였으나 아들은 다시 미국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함윤식과는 이혼하고 한의사와 건설업체를 겸직하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전 남편의 사업이 망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현 남편은 동료 영화배우 나영희[7] 가 소개해준 것이라고 한다. 이보희는 동료 여배우들과 골프 동호회 활동을 했는데, 골프를 통해 만나게 되었다고.
'달려라 울엄마' 촬영 시절에 촬영에 여유가 생기자 당시 신혼여행으로 현 남편과 파타야에 갔다고 한다.
3. 필모그래피[8]
3.1. 영화
3.2. 드라마
[1] #[2] 당시에는 하나의 서울 영화관 관객수만 기록하였으므로 표의 기록수의 10배 정도로 보면 현재의 관객수랑 얼추 비슷해진다고 한다.[3] 참고로 '무릎과 무릎사이'는 단순 에로영화가 아닌 여성이 性을 극복하는 과정을 잘 묘사했다는 평을 받는 수작이다.[4]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남주인공인 오혜성역의 최재성과의 나이 차이였다. 최재성은 1964년 생으로, 해당 항목의 영상을 보면, 반항기 있는 '''고등학생'''처럼 보여서 이보희와는 아무리 봐도 작품상의 동갑내기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도 이보희가 5살이나 연상이기도 하다.[5] 단 이미숙은 결혼으로 1987년부터 1990년대까지 잠시 은퇴했다.[6] 당시 뉴욕을 중심으로 자동차 판매업에 전념했다고 한다.[7] 1982년에 '낮은데로 임하소서', 1988년에 '매춘'으로 흥행하였다. 그리고 남편이 치과의사라고 한다.[8] 당시에는 하나의 서울 영화관 관객수만 기록하였으므로 표의 기록수의 10배 정도로 보면 현재의 관객수랑 얼추 비슷해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