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파운더

 

1. 2파운더 대전차포
1.1. 제원
1.2. 개요
1.3. 개발
1.4. 문제점
1.5. 말로
1.6. 기타
1.7. 평가
2. 2파운더 대공포


1. 2파운더 대전차포





1.1. 제원


[image]
중량
814kg
구경
40mm
포신
2.08m (L/52)
포탄
40×304 mm. R
탄종
철갑탄, 고속철갑탄, 철갑유탄, 피모철갑탄, 구경감소탄[1], 고폭탄
폐쇄기
반자동 수직블록
완충기
수압스프링
거치대
삼각 플랫폼
상하각도
-13° 에서 +15°
좌우각도
360° 완전선회가능
발사속도
분당 22발
포구초속
792 m/s (철갑탄, 철갑유탄, 피모철갑탄, 고폭탄), 853 m/s (고속철갑탄), 1280 m/s (구경감소탄 Mk. 1), 1189 m/s (구경감소탄 Mk. 2)
유효사정거리
914m
조준기
No.24b

1.2. 개요



Ordnance QF 2 Pounder.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의 초기 대전차포. 같은 시기에 출현한 동급의 대전차포중에서 가장 관통력이 높았지만,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인하여 6파운더로 제때 대체되지 못하여 대전초반의 활약이 묻힌 비운의 병기.

1.3. 개발


2파운더는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에 영국에서 순항전차 Mk.1의 주포로 빅커스 사에서 개발되었다.

구경 40mm의 전차포로 영국의 전통에 따라서 구경이 아닌 포탄의 중량을 명칭으로 사용했다. 1934년 전차의 주포로 처음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36년 견인식 대전차포 버전이 개발되어 보병의 대전차 대대에서 운용했다.

2파운드 전차포 및 대전차포는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37mm급 대전차포보다도 약간 위력이 높았다.
또한 분당 22발이라는 높은 속사성도 가지고 있었고, 중량이 다른 37mm급 대전차포보다는 무겁지만 그래도 814Kg 밖에 안돼서 휴대 및 이동이 간편하며, 마치 88mm 대공포처럼 차륜을 바깥으로 빼내어 자세를 낮추고 360도 선회가능한 포가를 장착했다. 덕분에 방열과정에서 약간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한번 방열하면 적 전차가 사방에서 몰려오더라도 빠르게 대응이 가능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동급의 대전차포중에서 가장 준수하게 보이지만, 작은 구경에서 오는 한계가 있었다.

1.4. 문제점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하자마자 문제점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다.
  • 2차대전 초기에 생산되고 있던 탄종이 철갑탄 뿐이었다. 그것도 철갑유탄같이 내부에 화약이 있는 녀석이 아니라 쇳덩어리 그 자체였다. 실은 2파운더용으로 최초로 개발된 철갑탄은 1936년에 개발된 철갑유탄 Shell, Q.F., 2-pr, A.P./T., Mk. 1이었는데,[2] 문제는 영국군은 철갑탄 내에 들어가는 작약량에 따라 신뢰성, 관통력, 파괴력 등을 잘 타협해야 하는데 작은 작약량과 Shell Mk. I 철갑유탄의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관통력과 신뢰성으로[3] 인하여 아예 1938년에 생산중지를 시키는 병크를 일으킨다. 덕분에 철갑유탄 재고량이 적으니 전차같은 중장갑목표물 이외엔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물론 철갑탄을 쇳덩어리 그 자체로 만들면 관통력은 올라가지만, 이런 탄환을 트럭같은 비장갑목표물이나 장갑차 같은 경장갑목표물에 쏘면 그냥 구멍만 두개 뚫리고 끝. 보병의 경우라도 정확히 명중시키지 못하면 그냥 돌덩어리 한개 던진 것에 불과했다. 본디 전차는 포탄이 장갑을 뚫는걸로 끝나지 않는다. 관통이후 내부를 얼마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가가 중요한 점인데, 통짜 쇳덩이인 2파운더 철갑탄은 심각할 정도로 파편발생이 생기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그마저도 파편이 발생해도 질량이 가벼워 적을 무력화시키는 효과도 약했다. 그나마 후방인 북아프리카전선에는 구식 철갑유탄이 쌓여있었는데, 현지에서 노획한 이탈리아군 M13/40을 상대로 테스트한 결과 900야드 거리에서도 관통하는 것은 물론 파편까지 꽤 뿌렸기에 잘 써가며 Shell AP/T Mk. 1의 생산재개를 요청하였으나 높으신 분들에 의하여 거절당했다.
원래 보병이 운용하는 대전차포는 전차 이외에도 보병의 진격을 지원하거나 벙커 등을 사격해서 무력화시키는 데 사용하는 일이 많은데, 2파운더는 이런 경우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큰 문제점이었다. 해당 포를 탑재한 전차의 경우에도 적의 대전차포를 제압하지 못해서 동축기관총의 사정거리까지 억지로 진격하다가 불덩어리가 되는 사태가 많이 발생했다. 반대로 독일의 도어 노커인 37mm PaK 36의 경우, 고폭탄수류탄급 위력이라는 불평이 있었지만, 이런 보조 임무는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장갑관통력이 떨어져서 2선급 무기가 된 후에도 완전히 퇴물이 되진 않았다.[4] 결국 고폭탄인 Shell, Q.F., 2-pr, H.E./T., Mk. 2가 대전중반에 개발되게 된다.
  • 이미 2차대전 초기부터 슬슬 관통력에도 한계점이 오기 시작했다. 사실 37mm급 대전차포 자체가 대전 전에 개발된 것이라서 위력부족이었으며, 그 중에서 관통력이 높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였다.
  • 2파운더에 채용한 통상철갑탄의 경우, 독일 전차의 표면경화장갑에 명중한 경우, 탄환이 부스러지면서 관통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2파운더용 APCBC(피모철갑탄)이 개발되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샤르 B1 bis소뮤아 S-35같이 장갑이 두꺼운 전차를 많이 노획했기 때문에 2파운더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사실 2파운더의 진짜 문제는 관통력이 아니었으므로 조금 걸러 듣는 편이 낫다.
  • 전차포의 경우, 사수의 어깨에 받쳐서 사격해야 했다. 보통 전차포는 크랭크를 돌리거나 발판을 이용하여 선회하였는데, 영국군은 근중거리에서 이동중 사격에 이상하게 집착을 해서 사수가 직접 조준을 하게 하였다. 이러면 사수의 실력에 명중율이 크게 좌우되고, 심지어 방아쇠압력이 높아서 사격하는 순간 조준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참고로 2파운더 철갑탄은 60도 강판 기준으로 500야드에서 37mm를 뚫을 수 있고 고속철갑탄(HVAP가 아니라 APHV로 후기형 2파운더를 위해 만든 신형탄이다) 54mm를 뚫을 수 있으며 피모철갑탄을 사용해도 거의 동일한 관통력을 보장한다. 다만 가벼운 탄을 날리는 포라 경사장갑에 취약해 소뮤아 S-35는 충분히 관통 가능하지만 B1은 좀 힘들다. 다만 수직장갑인 3호 전차4호 전차 후기형은 관통가능하다는 점을 보면 관통력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적 전차를 한번에 제압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제일 큰 단점인 것이다.

1.5. 말로


결국 보다 위력이 강한 6파운더가 등장하자 여기에 밀려나...는게 정상이었던 2파운더지만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주요 장비들을 모두 버리고 탈출한 뒤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독일군의 본토 상륙이 멀지 않았다고 느끼고 생산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6파운더의 양산을 보류하고 생산설비가 일단 잘 돌아가는 2파운더를 증산해서 배치하는 삽질을 시전한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이탈리아군의 기갑전력은 M11/39같은 빈약한 전차로 구성한 상태였으며, 전쟁 초기에 아프리카 군단이 끌고온 전차들도 대부분은 당시 독일군 기준으로도 상당히 뒤쳐지는 1호 전차2호 전차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나마도 부족한 실정이었으므로 여전히 2파운더로 충분히 파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얼마간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도 곧 M13/40처럼 공격력과 방어력을 업그레이드한 전차를 투입하기 시작하면서 [5] 영국군의 순항전차를 위협하였으며, 독일군의 경우에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장갑을 강화한 3호 전차4호 전차가 등장하면서 2파운더의 효용이 바닥을 쳤다. '''더구나 티거가 오면서부터 이 효용이 땅을 뚫고 떨어졌다.''' 이 때문에 신형 6파운더 대전차포가 배치되기 전까지는 25파운더 야포를 끌어와 대전차포 역할을 떠 맡기기도 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영국군이 담당한 버마 등지에선 일본군의 전차가 M3 37mm 대전차포에도 숭숭 뚫리는 97식 전차 치하처럼 장갑이 얇고 품질이 조악했기 때문에 현지에선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당장 태평양 전쟁 초반 시기에 일본이 자랑하는 소위 '''말레이 반도 전격전'''인 싱가포르 전투에서도 길가에 매복한 영국군 대전차포들에게 일본군 기갑부대가 전멸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완전히 퇴역하는 시점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이었다. 이 탓에 태평양 전선에는 17파운더가 배치되지 않았다. 닭잡는데 소잡는 칼이 필요 없으니 말이다.

1.6. 기타


구경감소탄을 발사할 수 있게 해주는 리틀존 어댑터(Littlejohn[6] Adaptor)라는 장치를 장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2파운더 고폭탄은 존재했다. 앤서니 G. 윌리엄(Anthony G. William)[7]에 따르면 영국의 노즈타입 퓨즈의 고폭탄과 호주의 베이스타입 퓨즈의 고폭탄이 있었다고 한다. 전자는 장갑차에 주로 사용되었고, 후자는 벙커를 날리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Jentz에 의하면 전차포로 가장 크게 활약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사용된 바가 전혀 없다고 한다.[8]

1.7. 평가


종합하자면, 제때 대체되지 못하여 2차대전 당시의 엄청난 전차 장갑 강화속도에 뒤처진 아쉬운 병기이다.
걔다가 상부의 판단착오로 인하여 철갑유탄을 생산중지하고 대전중반까지 쇳덩어리 철갑탄 및 그 변종만이 보급되어서[9][10] 안 그래도 도태되어가고 있던 구식 장비가 노인학대까지 당하여 욕을 더 먹게 되었다.
독일군의 장갑강화로 인하여 상상외로 빨리 유럽 전선에서는 퇴물이 되었고 심지어 후속장비인 6파운더의 생산이 늦어져서 문제가 많았지만, 태평양 전선에서는 그나마 일본 전차의 약한 장갑과 뒤늦은 고폭탄의 도입으로 계속 활약하게 된다.

2. 2파운더 대공포


QF 2-pounder naval gun. 영국의 '폼폼 포'라고 불리는 대공포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

[1] 영국에서는 APCNR 즉 Armour-piercing, composite non-rigid라고 불렀다[2] Shot은 통짜 철갑탄, Shell은 고폭탄이나 철갑유탄 등 작약이 있는 놈이었다.[3] 이 둘을 가장 중요시했다.[4] 다만 PaK 36은 총류탄처럼 성형작약탄을 발사하는 새로운 용도를 발견해서 대전차전 능력이 잠시 늘어나기도 했다.[5] M13/40은 의외로 장거리에서도 쉽게 뚫렸다. 문제는 영국군 순항전차도 장갑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는 것. 물론 이탈리아군이나 일본군보다는 나았지만.[6] 여담으로 여기서 '존'이란 거시기를 뜻하는 속어. [7] 탄약전문가다. http://www.quarryhs.co.uk/[8] Tank Combat in North Africa, Thomas L. Jentz, 1998, p.14[9] 심지어 그나마 개전 전부터 생산했던 철갑유탄 일부는 작약을 빼고 모래로 치우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10] 오로지 대전차전'''만''' 상정했다. 북아프리카의 할파야 고개에 배치된 독일군 88mm 대공포에게 중장갑의 마틸다 보병전차들이 털려나간 것도 철갑탄 뿐이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