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파운더

 



1. 제원
2. 개요
3. 개발
4. 특징
5. 평가
6. 대전 이후
7. 관련 문서


1. 제원


[image]
'''Ordnance QF 17 pounder'''
  • 중량 : 3,048kg
  • 포탄 : 76.2×583 mm. R
  • 구경 : 3 inches (76.2 mm)
  • 포신 : 4.191 m (55 구경장)
  • 상하각도 : -6° 에서 +16.5°
  • 좌우각도 : 60°
  • 포구초속 : 884 m/s (고폭탄, 대전차고폭탄), 1,204 m/s (분리철갑탄)[1]

2.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이 보유한 최강의 대전차포.

3. 개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 육군은 2파운더6파운더로는 계속 발전해가는 독일군의 전차에 대항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1940년 말부터 고성능의 대전차포 개발에 착수했다. 이에 신형의 17파운더가 1941년 말에 완성되어 1942년 봄에 양산이 시작되었다.
포 본체는 개발이 쉬웠지만 포가의 개발은 진척이 지지부진했는데 그 이유는 대전차포의 특성상 포가 자체가 낮고 가벼우며, 신속한 선회가 가능해야 하지만, 76.2mm 라는 구경은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시의 경야포의 구경과 같을 정도로 커서 쉽사리 포가를 축소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러다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군이 6호 전차 티거를 투입하자 황급해진 영국군은 이를 격파가능한 17파운더를 빨리 전선으로 보내기 위해 25파운더 견인포의 포가를 이용하여 조립해서 25/17파운더로 제식화해 급조 후 1943년 2월에 실전에 투입했다. 이럴 경우 야포의 포가를 이용했기 때문에 크고 무거우며 은엄폐가 불가능해서 이걸 사용하는 사람의 애로사항을 꽃피게 만들어주는데, 그런 것을 모두 감수하고도 당장 쓸만한 대전차포가 필요한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 때 얼마나 급했는지 완성되는대로 보내는 바람에 최초 실전 투입인 튀니지 전선의 마레트 방어선 공략에서는 '''단 1문'''의 17파운더만 투입되었다.
후에 17파운더의 전용포가가 완성되어 이를 조합한 완성형 17파운더는 이탈리아 전선 및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서부전선의 유럽부대에 우선적으로 배치되어 실전에 투입되었다. 버마전선 등 아시아에서는 정글이나 늪지대가 많아 중량이 큰 화포의 이동은 불리한 점과, 일본군의 전차는 97식 전차처럼 너무 장갑이 부실하여, 작약이 없는 철갑탄 대전차포인 2파운더로도 손쉽게 잡히기 때문에 굳이 무겁고 커서 기동이 용이하지 않은 17파운더를 동원해서 박살낼 필요가 없었기에 배치되지 않았다.
종전후 17파운더는 한국전쟁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대전차포 뿐만 아니라 적의 토치카나 벙커를 포격하는 직접화력지원에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전차나 장갑차량에 탑재하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다. 대강 몇가지 예시만 들어도, 발렌타인 보병전차의 차체 위에 17파운더를 장착한 아처 대전차 자주포 및 미국에서 원조받은 M10 울버린의 3인치 주포를 철거하고 이를 탑재한 아킬레스 대전차 자주포, M4 셔먼 전차를 개조한 셔먼 파이어플라이, 크롬웰 전차을 개조한 챌린저, 처칠 전차를 개조한 블랙 프린스, 전설의 초중전차 TOG, 17파운더를 약화시킨 포를 단 코멧, 심지어는 전후 1세대 전차로 평가받는 센추리온 전차에도 초기형은 17파운더가 장착되었다.
하지만 이 중 2차대전 중에 제대로 완성돼서 활약한 것은 미국제 셔먼 전차와 울버린 전차의 차체를 이용한 파이어플라이와 아킬레스, 아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위력이 강한 만큼, 기존의 다른 영국제 주포들에 비해 반동도 심하고 중량도 상당해서 이를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설계와 넉넉한 포탑용적의 전차가 필요했다. 문제는 당시 영국군이 운용하던 순항전차/보병전차들의 베이스 플랫폼들은 이런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고, 대전 발발 전후로 다른 곳에 나갈 비용이 넘처나던[2] 상황에서 영국군 입장에서 차세대 플랫폼을 당장에 준비하기에는 자금과 시간에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전쟁 중기, 순항전차 크롬웰과 보병전차 처칠이라는 두 플랫폼에 17파운더를 이식하려는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고[3], 유럽 전선이 본격화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은 그나마 17파운더 장착이 가능했던 캐나다제 혹은 미제 셔먼 전차에 17파운더를 장착해 사용했다.
이런 기존 플랫폼의 한계를 느꼈던 영국군은 1943년 순항전차와 보병전차를 통합하며, 미래에 있을 추가적인 개수가 가능하도록 뛰어난 확장성을 지닌 새로운 플랫폼의 개발을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그 결과 나온 것이 최초의 MBT 중 하나라고 불리는 센추리온 전차였다.

4. 특징


컨셉은 '운동에너지는 질량과 속력의 제곱에 비례하니까 장약을 많이 넣어서 탄속을 끌어올리면 관통력이 엄청 올라가겠지?'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관통력만큼은 엄청난 수준이어서 실험에서 비교적 관통력이 떨어지는 APCBC가 500m에서 163mm, 1000m에서 150mm, 1500m에서 137mm를 관통할 수 있으며 3000m에서도 107mm를 관통할 수 있는 수준이다. 포신이 1m 정도는 더 긴 판터의 주포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리고 APDS를 사용하면 관통력이 더 증가해서 500m에서 256mm, 1000m에서 233mm의 관통력을 가지며 3000m에서도 162mm의 관통력이다. 단 도입 초창기에는 APDS가 아닌 SVDS(Super-Velocity Discarding Sabot)이라고 불렀다.
17파운더의 관통력은 티거나 판터의 주포와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데 티거의 주포(88mm KwK 36)가 500m에서 151mm, 1000m에서 138mm, 1500m에서 126mm의 관통력을 가지며 판터의 경우(75mm Kwk 42) 500m에서 168mm, 1000m에서 149mm, 1500m에서 132mm의 관통력을 가진다. 둘 다 APCBC를 사용한 결과이며 동일하게 APCBC를 사용한 17파운더의 관통력은 판터에게는 열세이나 티거에게는 오히려 약간 우세한걸 볼 수 있다. APDS를 사용할 경우에는 비슷하게 고관통 특수탄환인 APCR을 사용하는 두 주포보다 관통력이 훨씬 높아진다. 저 두 전차의 전차포의 관통력이 2차대전에서 최상급이라는것을 고려하면 17 파운더의 관통력 또한 최상급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17파운더의 관통력이 아니라 상대해야할 적들은 티거나 판터의 주포가 상대해야 할 적들보다 훨씬 강력한 장갑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1944년 독일군 병기국 6과의 보고서에 의하면 17파운더의 APCBC탄은 5호 전차 판터의 차체 전면 상부 장갑을 상대로 400야드(365.8m)에서나 효과를 볼수 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17파운더의 위력이 부족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미국의 76mm 전차포로는 해당 부위를 영거리에서도 뚫지 못했다.[4] 다만 그렇다고 판터가 17파운더의 APCBC에 대해 무적은 아니었고, 전면이라고 해도 차체 하부나 포탑은 훨씬 방어력이 약했기 때문에 근거리에서는 76mm로도 관통이 가능했으며 17파운더의 APCBC로는 최대 2km에서도 관통 가능하였다.
게다가 17파운더에는 APCBC보다 더 빠른 포구초속으로 강력한 관통력을 내는 17파운더용 APDS가 있기는 했다. 이는 3km 거리에서 티거의 전면을, 1.5km 거리에서도 판터의 전면을 뚫을 수 있었다. 그러니 만약 APCBC로 상대하기 힘든 적을 마주치면 APDS를 쏴버리면 되지 않겠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안타깝게도 APDS의 명중률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사격장에서 최상의 조건으로 세팅된 시험 사격에서 APDS의 명중률은 800야드에서 겨우 20% 수준에 불과했고 노획한 판터 전차를 상대로 한 실험에서는 200~600야드에서 숙련병들이 수십 발을 사격했지만 겨우 절반 정도만이 명중했다. 이는 티거나 판터는 물론이고 IS-2[5] 전후 미군 테스트에서는 미군의 76mm APC가 0.11mil(1km에서 12cm)의 정확도였고 17파운더의 APCBC는 0.19mil(1km에서 20cm)이 나왔다. 그러나 17파운더의 APDS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명중율이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해, 1천 야드 거리의 표적에 18발을 쐈는데 한 발도 안 맞자 그냥 테스트를 중단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APCBC탄은 장거리 사격시 어떻게던 써먹을 명중률은 나오며 관통력도 동급 전차포 중에서는 최상급이었으므로 대부분은 APCBC를 지급하였으며 APDS는 6%만 지급돼서 근거리에서 적 전차를 확실하게 처리하는 용도로 사용하게 된다.
APDS에서 명중율 문제가 발생한 것은 그 구조와 관련이 있었는데, 탄의 특성상 포구보다 작은 관통자를 송탄통이 감싸고 있다가 포구를 벗어난 후 분리되며 송탄통은 버려지고 관통자만 날아가게 된다. 이는 상당한 정밀도를 요구하는 부분이었기에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동시기 APDS탄은 17파운더가 아니라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17파운더의 APDS는 전후 1946년에 캐나다군이 개량해서 명중율을 올렸고, 1953년에는 영국군에서도 설계가 개량되어 해결되기는 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으로는 기존의 17파운더에 비해 전차 탑재용으로 포신을 짧게 자르고 장약을 줄여 탄속을 좀 더 느리게 만든 코멧의 77mm 포는 APDS의 명중율이 훨씬 더 좋았다는 점으로, 너무 빠른 탄속에서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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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엄청난 장약을 넣는다는 방식으로 인해 한번 발포하면 장약을 많이 때려박은 만큼 크고 아름다운 포구 화염이 발생하여 위장과 은엄폐 정도에 상관 없이 위치가 100% 폭로되고 탄착을 관측하기도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영국군이 테스트용으로 제공한 17파운더가 천조국의 높으신 분들이 참관한 시험에서 이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미군이 자국의 3인치를 선택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 '''포미부에서조차 위험할 정도의 섬광이 비쳤다.'''[6]라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기존의 2파운더가 진짜 쇳덩어리 철갑탄만 있고, 6파운더는 철갑탄은 여전히 쇳덩어리 그 자체인데다가 긴급개발의 문제점으로 인해 구경에 비해 위력은 수류탄 수준의 고폭탄밖에 없어서 전차를 제외한 나머지 목표에 대해 사실상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없어서 보병 지원용 포격이 안되며, 소수의 적 보병이나 적의 경장갑차에게 쉽게 당했던 전훈에 대한 반성으로 76.2mm 급에 맞는 고폭탄도 처음부터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해당 고폭탄도 초기형은 강력한 장약과 장약 폭발시의 충격을 견디기 위한 튼튼한 탄두 덕분에 안에 들어가는 작약량이 떨어져서 성능이 떨어지므로 신형 고폭탄을 추가로 개발해야 했다.[7] 이러한 문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계속됐으며, 한국전쟁캐나다에서 보내준 M10 아킬레스의 17파운더로는 중공군을 상대하기 부적절해서 미군으로부터 셔먼을 수령받았다.[8]

17파운더는 성능은 좋았지만 중량이 3,048㎏(3톤[9])로 꽤나 무거웠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중~후기 독일군의 주력 대전차포였던 7.5㎝ PaK 40(1,425㎏)보다 2배나 무겁고, 독일군 최강의 대전차포[10]였던 8.8㎝ PaK 43(3,650㎏)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11] 따라서 브렌건 캐리어같은 경량의 견인차량으로는 견인이 불가능했고, 모리스 C8 견인차나 M3 하프트랙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6파운더처럼 보병대대 예하 대전차소대까지 지급하지는 못하고 대전차포연대에나 지급되었다. 결국 이를 자주화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는데, 영국제 차량에서 성공적으로 설치된 것은 전쟁이 끝나고서야 배치된 센추리온에나 가서였다.[12] 대신 천조국M4 셔먼에 올려 셔먼 파이어플라이로 활약하기는 했다.
한편 17파운더는 일본군이 있는 태평양 전선에는 사실상 사용하지 않았다. 97식 전차와 같은 일본군 전차 상대로는 기존의 2파운더나 6파운더로도 충분히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17파운더를 탑재한 셔먼 파이어플라이나 아킬레스 역시 같은 이유로 태평양 전선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5. 평가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경우, 새로 부대에 M10 울버린이 배치되고, 해당 대전차 자주포가 가진 3인치 대포가 강력하다는 소개를 받자,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반딧불이 내놔 새끼들아!"'''

APDS의 명중율이 시궁창인 걸 포함해 여러 단점이 많았지만 APCBC는 쓸만했고 어쨌건 영국군은 '''적 전차의 장갑을 꿰뚫을 수 있는 묵직한 한 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17파운더는 그 임무목표에 절륜한 화력에서 나오는 훌륭한 실적과 셔먼 파이어플라이라는 걸출한 결전병기로 보답했다.
한편 미국 또한 3인치 포 그 자체로는 부족함을 느껴서 위에 문제된 M10 울버린90mm 대전차포를 무장시키고 포탑을 새로 바꿨다. 이것이 2차 대전 최강의 대전차 자주포인 M36 잭슨이다.

6. 대전 이후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포였지만, 17파운더는 압도적 생산력과 화력을 바탕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영연방[13]의 주력 대전차포 혹은 전차포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종전 이후 머지 않아 일어난 6.25 전쟁 시점에서 17파운더는 영국군의 주력에서 밀려나 퇴역한 상황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미 2차 세계대전 중반부부터 시작된 Universal Tank 프로젝트가 큰 성공을 거뒀고, 17파운더로는 소련군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한 한국전쟁 중 캐나다 C중대가 M10 아킬레스를 끌고 왔으나 중공군 때문에 미군으로부터 셔먼을 수령 받았다. 관통력은 좋았어도 그 반대급부로 연사력이 느려 대보병 능력은 미국 3인치보다 떨어졌다. 포 뿐 아니라 탑재 차량의 성능 역시 오픈 탑 물장갑에 기관총도 없는 아킬레스보단 셔먼 쪽이 대보병전에 훨씬 적합하기도 했고.....
당시 운영되던 순항전차/보병전차의 이원 체제의 문제점과 파이어플라이와 17파운더 포의 태생적 한계를 느끼던 영국군은 순항전차와 보병전차를 통합한 새로운 플랫폼 체계와, 더욱더 강력하지만 뛰어난 안정성을 지닌 주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탄생한 것이 20파운더(83.4mm) 전차포이다.
그리고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보병전차의 뛰어난 장갑과 순항전차의 준수한 기동성, 셔먼 시리즈의 뛰어난 확장성을 두루 갖춘 새로운 전차 플랫폼이 완성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MBT라고 불리는 센추리온 전차이다. 센추리온 전차는 최초에는 17파운더를 장착했으나, 이후 개량을 통해 Mk.3 버전부터는 강력하고 안정적인 20파운더를 탑재하게 됐다. 센추리온 전차에 장착된 20파운더는 6.25 전쟁 당시 관통력과 명중률에서 M26 퍼싱이나 M46 패튼의 90mm 주포보다 탁월함을 입증했다.
20파운더는 17파운더보다 구경을 더 키움으로써 화력을 증가시켰고, 주포 신뢰성이나 사용 안정성 면에서도 17파운더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났다. 더불어 6파운더에서 처음 상용화되었으며, 화력으로는 호평을 들었으나, 이를 상회하는 수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던 APDS를 크게 향상시켜 상당한 수준의 개선을 이뤄냈다. 즉, APDS라는 탄종을 개선시킨 것만으로도 이미 17파운더에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17파운더를 오래 사용할 수도 있었을[14] 영국 내 본토방위 부대나 경제적으로 곤란한 국가들에 20파운더 주포 장착 채리어티어 전차가 보급되는 바람에 17파운더의 가치는 1950년대 시점에선 완전히 소멸된다. 다만 한국전쟁때 오스트레일리아군이 17파운더를 사용하기는 했다. 물론 이쪽도 20파운더로 대체되지만.

7. 관련 문서


  • 셔먼 파이어플라이
  • M10 아킬레스
  • 아처
  • TOG
  • 챌린저, 어벤저
  • 센추리온[15]
  • 센티넬[16]

[1] 이 포구초속은 정말 대단한 수치이다. 단순히 동시기 대전차포와 비교해보면 PaK 40같은 경우 피모철갑탄은 790m/s, 경심철갑탄은 990m/s다. 라체-밤으로 유명한 ZiS-3는 철갑탄의 경우 700m/s이다. 다만 판터의 주포인 7,5cm KwK 42하고 비교하면 피모철갑탄의 포구속력이 100m/s 정도 느린데, 이 둘의 구경장이 15씩이나 차이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납득이 갈 정도다. 물론 분리철갑탄은 당대 포구속력으로 유명한 티거 2의 주포인 8,8 cm KwK 43 경심철갑탄의 1,130m/s보다 빠르다! 참고로 고폭탄도 유독 빠른 점도 포인트이다.[2] 해군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동시에 상대해야했고 공군도 상황은 비슷했다.[3] 아처는 화포가 뒤를 향하도록 탑재해야 해서 운용이 거의 비효율적이었고 챌린저는 얇은 차체 장갑에다 지나치게 큰 포탑으로 인해 불균형이 심했다. 블랙 프린스는 안 그래도 느린 처칠에 17파운더까지 올려놓고 보니 밸런스는 맞았지만 기동성이 형편없었고, TOG 시리즈는 초중전차의 전형적인 약점이 잔뜩 있었다. 그나마 괜찮은 평가를 들었던 크롬웰 플랫폼을 대형화시킨 코멧 전차도 원본 17파운더 장착에는 실패해, 17파운더를 경량화시킨 77mm 주포를 장착하였고(이 77mm도 원래는 크롬웰에다가 올리려고 개발했는데(원래는 미제 75mm의 탄자를 QF 3-inch 20 cwt(1차세계대전당시부터 쓰던 영국산 대공포. 45구경장)의 약협에다 끼운 75mm HV로 개발하였는데(철갑탄은 확실히 고속이 되고 고폭탄은 안정성 때문에 미제 75밀리 포의 탄속으로 억제한 물건) 이것도 크롬웰의 포탑에는 제대로 못들어갈 덩치라서 크롬웰에 못올리고 일단 크롬웰에는 미제 75mm포탄을 쓰는 QF 75mm를 장착하고 계속 연구해서 75mm의 탄두대신 17파운더의 탄두를 쓰는 포로 완성하고 크롬웰의 덩치를 더 키운게 코멧전차가 되었다.) , 그나마도 대전 말기에 소량 투입이 되었다.[4] 판터의 전면 장갑 두께는 티거보다 얇은 80mm지만 T-34처럼 경사 장갑을 채용한 덕분에 실질적인 방어력은 티거보다 우수했다. 경사장갑 문서 참조.[5] 단, IS-2의 주포 명중률 자체는 티거의 명중률과 동급이다...라는 주장은 러시아 밀덕계에서 양측 표적지의 모양이 원형과 사각형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반쯤 왜곡한 것이다. 해당 사실을 감안하고 계산하면 122mm 포의 탄착군 지름이 50% 가량 넓었다.[6] 이는 초기형의 문제로 약실 폐쇄가 확실하게 되지 않아서였고 금방 고쳐졌다.[7] 단, 의외로 구형 고폭탄의 작약량도 미제 76mm보다 약간 많은 수준이며, 신형 고폭탄의 작약량은 이보다도 좀 더 많지만 셔먼이나 크롬웰, 처칠이 쓰던 75mm 주포보다는 적다.[8] 17파운더의 작약량이 미제 76mm보다 약간 더 많다곤 해도 어차피 대전차전을 거의 수행하지 않고 대보병전 위주로 흘러가던 당시 상황에선 17파운더의 관통력은 불필요하고 포구 화염, 속사의 어려움 같은 문제가 부각되었다. 또한 물장갑 오픈탑에 적 보병을 제압할 기관총 한정 없는 M10보다는 공축 기관총, 차장 기관총, 차체 기관총을 활용할 수 있는 셔먼이 훨씬 대보병전에 적합하기도 했다.[9] 영국 톤(2,240파운드=1,016킬로그램) 기준이다.[10] 극소수가 생산된 12.8㎝ PaK 44는 제외[11] 관통력 면에서는 17파운더가 PaK 40의 1.5배, PaK 43의 0.75배 정도였다.[12] 물론 크롬웰에 성공적으로 얹은 코멧이 있지만 이건 위력을 약화시킨 물건이니만큼 논외로 한다.[13] 당시 호주군, 캐나다군, 뉴질랜드군, 남아프리카군 등 영연방 각국의 군대도 17파운더를 이용했다.[14] 원래 노후 군무기는 퇴역 직후에는 치장물자로 전환해 차고에서 예비군용으로 묵혀두는 경우도 많고, 혹은 해외, 특히 자신들과 밀접한 관계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은, 국가들로 수출하는 경우도 많다. 영국 같은 경우는 굳이 비싸고 좋은 장비가 필요 없는 본토 방위 부대들에 돌리거나 영연방이나 유럽 국가들에 떨이로 넘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15] Mk.1과 Mk.2는 17파운더를 탑재했다.[16] AC4에 17파운더가 탑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