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時だョ!全員集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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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획 의도
3. 전성기
4. 시청률 하락, 그리고 종영
5. 여담


1. 개요


'''8時だョ!(全員~ 集合~!!)'''

'''8시라구!(전원~ 집합~!!)'''

'''いってみよ~!!'''

'''가보자~!!'''

- 이카리야 쵸스케가 외치던 오프닝 멘트


전원집합의 오프닝 장면[1]
일본의 전설적인 오와라이 그룹 더 드리프터즈가 주도하던 TBS레전드급 공개 예능 프로그램.
1969년 10월 4일 첫 방송을 개시하여 매주 토요일 저녁 8시에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며 1985년 9월 28일 까지 약 15년 6개월 간 총 803회가 방영되었다.[2] 약칭은 전원집합.
대한민국으로 치면 무한도전과 동급의 전설적인 방송이었으며, 생방송으로 송출된 점은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와도 비교된다.

2. 기획 의도


당시 토요일 저녁 8시 시간대에 드라마를 방영하던 TBS는 경쟁사인 후지 테레비의 '''꽁트 55호의 세계는 웃는다(コント55号の世界は笑う)'''에 밀려 시청률이 바닥을 긁고 있었고, 대책으로 꽁트 55호에 대항할 새로운 오와라이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검토를 거듭한 끝에 오와라이 밴드로 이름을 날리던 더 드리프터즈(이하 도리후)를 끌어들여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공개 방송을 만들게 되었다.
타이틀인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은 광고 스폰서인 라이온유지(현 라이온 주식회사)의 광고부장이 '''"토요일 저녁 8시가 되면 모두가 TV 앞에 집합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면 한다"'''라고 제시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붙였다고 한다.
'''그렇게 전설은 시작되었다.'''

3. 전성기


초기에는 도리후꽁트 외에 노래 공연, 게스트를 초대하는 토크 코너와 대형 미끄럼틀을 이용한 퀴즈 코너 등을 주된 내용으로 방영하여 시청률은 10% 초중반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고 관객들도 상당히 좋은 반응을 보였지만, 경쟁자인 콩트 55호가 여전히 막강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어 그 아성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았다. 프로듀서 '''이즈쿠리 요시미'''(居作 昌果)는 고민 끝에 ''''결국 시청자는 습관적으로 프로그램을 선택하게 된다. 먼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오는 것이 급선무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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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즈쿠리 PD는 여러가지 시행 착오를 거치며 도리후의 꽁트와 슬랩스틱 코미디 위주로 틀을 뜯어 고쳤고, 대담하게도 '''1시간 가까운 공개방송을 전부 생방송으로 편성하는 파격을 행사했으며'''[3] 당시 TBS의 인기 드라마에 출연 중이던 탤런트들을 게스트로 초빙하여 꽁트에 참여시키는 등의 볼 거리를 제공하며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4~15%로 시작한 시청률은 1970년대 들어 쑥쑥 올라가면서 1973년 4월 7일 방영분은 '''50.5%''' 라는 '''일본 역대 예능 프로그램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고 한창 시절엔 평균 40~50%, 못 해도 30%는 기본으로 찍으면서 전원집합은 이른바 '''괴물 프로그램'''이라 불릴 정도로 토요일 밤 8시라는 황금 시간대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4]
덧붙이자면 당초 TBS가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꽁트 55호의 세계는 웃는다''' 는 급 부상한 전원집합에 밀리며 방송시작 1년 9개월 만인 1970년 4월 '''꽁트 55호의 할거야 봐달라구!(コント55号のやるぞみてくれ!)'''로 간판을 바꿔 달았지만, 이전의 인기를 되찾지 못하며 불과 2개월 만에 아예 문을 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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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도리후의 레귤러 멤버인 '''아라이 츄'''가 개인 사정으로 하차하면서 위기가 찾아왔지만,[5] 후임으로 들어온 시무라 켄이 적응기간을 거쳐 '''히가시무라야마 타령(東村山音頭)'''을 히트시키며 프로그램은 다시 안정을 찾았고 1970년대 내내 TBS를 넘어 일본을 대표하는 간판 예능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었다. 당대의 유명한 여성 아이돌 스타들은 물론 미후네 토시로, 스가와라 분타, 타미야 지로, 고 히로미 등의 거물급 게스트들도 전원집합에 출연하여 꽁트에서 사정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전원집합의 생방송은 일본 각 지역의 극장이나 시민회관, 체육관 등에서 매주 전국을 순회하는 형식으로 전파를 탔지만, 시청률이 하락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간토 지역으로 한정되었고 방송 말엽에는 TBS 스튜디오를 사용하게 되었다.

4. 시청률 하락, 그리고 종영


1981년 멤버인 나카모토 코지시무라 켄과 함께 불법 경마 도박사건에 연루되어 약식 기소당한 후 벌금형에 처해지며[6] 도리후와 전원집합 이미지에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 터졌고,[7] 그 해 10월 10일에 절치부심하던 후지 테레비비트 다케시, 아카시야 산마, 시마다 신스케를 앞세워 새로 방영 개시한 예능 프로그램 '''우리들은 익살족(オレたちひょうきん族)'''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면서 전원집합의 시청률은 하락 테크를 타기 시작했고,[8] 도리후 내 멤버간의 갈등마저 표면으로 떠올랐다.[9]
1982년 9월, 전원집합의 창시자인 이즈쿠리 요시미 PD가 인사 이동으로 제작국 차장 겸 연출 3부 부장에 취임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며 후임 프로듀서인 '''다카하시 토시아키'''가 분위기를 쇄신하려 했지만 이미 매너리즘에 빠진 프로그램을 되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83년 8월 13일 방영분은 9.2%로 방송개시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리수 시청률이라는 굴욕을 당했고[10] 이후로도 줄곧 10% 대에 그치면서[11] 전원집합은 갈수록 점점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1985년에 접어들며 전원집합은 시청률 경쟁에서 완전히 나가 떨어졌고, 결국 TBS는 7월 19일 '''"생방송을 공개 형식으로 계속 하는것도 한계가 있고, 넌센스 개그도 소재가 바닥을 드러냈다"''' 라는 이유로 전원집합을 종영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전원집합은 그 해 9월 28일, 고별 방송을 마지막으로 '''총 15년 6개월, 803회'''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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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집합 마지막 방송에 출연한 도리후. 맨 우측에 전 멤버인 '''아라이 츄'''도 있다.
이후 도리후도 완전 해체는 아니지만 거의 와해 상태가 되어 오와라이 계에는 시무라 켄카토 챠만 남아 활동하고, 이카리야 쵸스케는 연기, 타카기 부는 음악, 나카모토 코지는 주로 무대 행사 쪽으로 각자 집중하게 되었다.

5. 여담


  • 1971년 3월, 도리후의 소속사이던 와타나베 프로덕션이 "도리후는 다음 달부터 6개월간 니혼 TV일요일이라구! 드리프터즈!!(日曜日だョ!ドリフターズ!!)에 출연할 예정이니 전원집합 방영을 반년간 중지시켜 달라. 대안으로 전원집합의 시간대를 메꿀 방송에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12]를 출연 시키겠다" 라고 TBS에 요구했다. 와타나베 프로덕션은 소속된 간판 그룹 둘을 전부 주말 황금 시간대의 프로에 출연시켜 이득을 좀 보겠다는 속셈이었는데, 물론 이에 격분한 TBS 측에서는 와타나베 프로덕션 소속 연예인들을 전부 퇴출시키자 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전원집합의 PD 이즈쿠리 요시미는 방송국 상부에 "그렇게 해 줍시다. 아무리 니혼 TV가 도리후로 새 프로그램을 만들더라도 전원집합 만큼은 안 될 겁니다. 도리후 만으로 높은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겨우 반 년인데 그 정도는 넘길 수 있습니다" 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결국 TBS는 와타나베 프로덕션의 요청을 전적으로 수용하였다.
3월 27일 방송분을 끝으로 도리후가 니혼 TV로 일시 이적한 뒤, TBS는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8시라구! 출발진행(8時だョ!出発進行)을 그 해 4월 3일 부터 9월 25일 까지 방영하며 전원집합의 공백을 채웠다. 시청률은 최고 38%, 평균 15%로 제법 나쁘지는 않았으며 도리후가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한편 도리후의 새 프로그램 일요일이라구! 드리프터즈!! 는 같은 해 4월 25일 부터 10월 17일 까지 방송된 후 예정대로 종영되었고, 전원집합은 10월 2일 부터 재개되었다.
  • 1984년 6월 16일 사이타마현 이루마 시민회관에서 전원집합의 공개방송이 열렸는데 이카리야 쵸스케가 "8시라구!" "전원집합"이라고 외치며 방송을 시작하자 말자 갑자기 시민회관에 정전이 발생하는 방송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정전 1분 30초 뒤에 다시 전기가 들어와서 다시 "8시라구!" "전원집합"을 외쳤는데 다시 정전이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고 나가고를 몇 번 반복한 끝에 전원이 완전히 나가는 바람에 스태프들이 가져온 손전등을 비추는 임시 조명으로 때우는 도중에도 이카리야는 프로 정신을 발휘해 어둠 속에서도 관객들에게 농담도 하고 게스트를 소개하는 등 방청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결국 정전 7분여 만에 스태프들이 비상 발전기로 조명을 돌려 오프닝을 마무리한 사건이 있었다.
  • MBC의 대표적인 코미디 프로그램이던 웃으면 복이와요 1기와 1969~1985년으로 방영 시기가 일치한다.[13]

[1] 오프닝 멘트 후에 부르는 노래는 '''조금만이야! 전원집합!!(チョットだけョ!全員集合!!)'''. 원곡은 홋카이도 민요인 '''홋카이본우타(北海盆唄)''' 이다. 이 노래는 1971년 10월 2일 방송부터 오프닝 곡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도리후의 신곡을 오프닝 때 불렀다.[2] 햇수로만 따져보면 거의 16년 이지만 6개월이 빠진 이유는, 도리후가 어른의 사정으로 타 방송사에 이적하여 1971년 4월 3일 부터 9월 25일 까지 다른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상세한 내용은 하단의 여담 참조.[3] 모든 방영분이 생방송은 아니었다. 방영 초기에는 녹화로 방송되었으며, 종종 도리후 멤버들의 스케줄 사정 상 생방송이 어려울 경우에는 사전에 녹화하는 경우도 있었다.[4] 전원집합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 TBS는 토요일 저녁 프로야구 중계를 거의 편성하지 않았다고 한다...[5] 당시 후지 테레비의 '''킨쨩의 쾅 하고 가보자!(欽ちゃんのドンとやってみよう!)'''에 잠시 시청률 1위를 빼앗기기도 했다.[6] 시무라는 베팅 금액이 적었던 관계로 기소유예 되었다.[7] 이 당시 신문에 보도된 사건 기사의 제목이 가관이다. '''불법 경마라구! 전원집합!!'''(...)[8] 이 시기의 시청률 경쟁은 '''토요일 8시의 전쟁'''이라고 불리었다.[9] 당시 50대인 이카리야 쵸스케와 30~40대의 시무라 켄, 카토 챠 사이의 대립과 내홍이 격화되었다. 게다가 TBS의 높으신 분들은 나이 든 이카리야보다 그나마 젊고 팔팔한 시무라와 카토를 더 선호하면서 갈등을 더욱 부채질했다.[10] 하필 그 날은 오봉 연휴가 한창일 때라,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바깥 나들이를 간 영향도 크기는 했다.[11] 그렇다 해도 전원집합의 모든 방영분 평균 시청률은 '''27.3%''' 이다. 1980년대에 왕창 까먹기는 했어도 전성 시절에 벌어들인 시청률이 워낙 넘사벽이었는지라...[12] 도리후와 같은 와타나베 프로덕션 소속이었다.[13] 다만 전원집합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웃으면 복이와요 1기는 사회적으로 큰 잡음을 일으키지 않았고 시청률도 제법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사의 야구단인 MBC 청룡(현 LG 트윈스)을 운영하며 프로야구 중계 시간을 늘리는 과정에서 종영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