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드리프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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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리프터즈
ザ・ドリフターズ
THE DRIFTERS'''

'''출신지'''
일본 [image]
'''멤버'''
이카리야 쵸스케†(베이스)
타카기 부(키보드)
나카모토 코지(기타/보컬)
카토 챠(드럼/보컬)
시무라 켄†(기타)
'''이전 멤버'''
아라이 츄†(오르간)
'''활동 시기'''
1956년 ~
'''사무소'''
이자와 오피스
'''공식 사이트'''
공식 사이트
1. 개요
2. 멤버
2.1. 이카리야 쵸스케(いかりや長介)
2.2. 타카기 부(高木ブー)
2.3. 나카모토 코지(仲本工事)
2.4. 카토 챠(加藤茶)
2.5. 시무라 켄(志村けん)
2.6. 탈퇴한 멤버
2.6.1. 아라이 츄(荒井注)
2.6.2. 스와조노 치카하루(諏訪園親治)
2.7. 전기 밴드 시대의 멤버
3. 역사
4. 코미디 활동
5. 음악 활동
6. 영화 활동
7. 게임화
8. 영상
9. 이야깃거리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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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라 켄 가입 이전. 뒷줄 왼쪽 위부터 아라이 츄, 카토 챠. 앞줄 왼쪽은 타카기 부, 이카리야 쵸스케, 나카모토 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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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라 켄 가입 후. 윗줄 왼쪽부터 시무라 켄, 카토 챠, 아랫줄 왼쪽부터 나카모토 코지, 이카리야 쵸스케, 타카기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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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방영한 도리후 대폭소 오프닝 사진. 원년 멤버의 마지막 무대였다. 이 방송이 리더 이카리야 쵸스케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쵸스케는 방영 후 불과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왼쪽부터 시무라 켄, 나카모토 코지, 이카리야 쵸스케, 카토 챠, 타카기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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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드리프터즈는 영원히. 왼쪽부터 타카키 부, 나카모토 코지, 카토 챠, 시무라 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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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타카기 부, 카토 챠, 나카모토 코지 [1]
'''일본의 몬티 파이선같은 전설적인 코미디 그룹이며'''[2] '''70년대 일본 개그계를 지배했던 개그밴드'''[3]이다. 일본의 코미디 밴드. 영칭 The Drifters, 약칭 도리후(ドリフ).
원래 훨씬 이전인 1956년에 결성되었지만, 3대 리더인 이카리야 쵸스케가 밴드를 재정비한 1964년부터 그 역사를 센다. 그 이전의 시기에 대해선 '전기 밴드 시대'로 구분한다. 전기 밴드 시대엔 코미디랑은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1962년에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가 일으킨 TV 코미디 붐 시대에 코미디 밴드로 방향을 선회, 이것이 대박을 터트려서 일본 코미디계의 1인자가 되었다.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가 60년대 고도성장시대를 대표한다면, 더 드리프터즈는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경제 안정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79~81년의 만담(만자이)붐 전까지 TV 코미디의 주류는 도쿄발 버라이어티 방송이었고 현재 일본 예능계를 지배하고 있는 요시모토 흥업이 TV 진출에 실패하여 도쿄 지사를 폐쇄했고 일본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서 "코미디 부분에서 관서는 관동을 절대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을 정도로 오사카의 영향력은 상당히 약했다.
본업이 코미디 '''밴드''', 즉 가수로 시작했지만 현재에 와선 오와라이 게닌으로 훨씬 유명하다.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은 이 바닥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다. 실제로 각 멤버들의 예명은 하나 하지메가 지어준 것으로 두 밴드는 매우 친했다.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 30년 기념방송의 게스트가 더 드리프터즈였을 정도이다.) 다만 하나 하지메가 처음 예명을 지어줬을 때는 도리후 멤버들이 이름이 너무 단순하고 튀지 않는다고 징징댔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오히려 간단하고 기억하기 쉬운 예명도 성공 요인으로 꼽히니 결론은 해피 엔딩
도리후의 전성기 시절 일본내 인기는 각 멤버들 한명 한명이 이경규, 유재석, 강호동, 김국진, 신동엽 정도의 코미디언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다만, 이 사람들의 전성기인 70년대~80년대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 시대인데다가 당시 사회 전반에 반일 정서도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고 2020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코미디언으로 활동했던 시무라 켄을 제외하면 전원집합이 종영된 1985년 이후 멤버들이 슬슬 코미디언을 그만두고 다른 분야로 전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도리후의 멤버들은 국내에선 코미디언으로 유명하지 않고 탤런트로 유명하다. 춤추는 대수사선와쿠 헤이하치로 역으로 유명한 이카리야 쵸스케라든가. 그렇지만 상당수 개그는 어느정도 나이가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하기도 한데, 19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개편철이 되었거나 아니면 마땅히 쓸만한 아이템이 떠오르지 않으면 PD들이 부산으로 가서 일본 TV프로그램 포맷이나 아이템을 은근슬쩍 베껴서 썼던 악습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리후의 특징 중 하나는 역시 멤버들의 나이차. 탈퇴한 아라이 츄와 준 멤버였던 스와조노 치카하루를 제외한, 흔히 도리후 하면 떠오르는 5명의 편성으로 갖다놓아도 최연장자 이카리야 쵸스케와 최연소자 시무라 켄의 나이차는 무려 19살. 우에키 히토시를 비롯한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의 경우 이카리야 쵸스케에겐 형님들 정도지만 시무라 켄에겐 그야말로 대선배. 애초에 우에키 히토시의 장남인 작곡자 히로 코이치가 시무라 켄보다 나이가 2살 많으니.

2. 멤버



2.1. '''이카리야 쵸스케(いかりや長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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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1.01~2004.03.20
도쿄 부 도쿄 시 스미다 구 출신. 칼칼한 목소리와 적절한 츳코미가 인상적인 인물. 오프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멤버들 중에서 머리 하나 튀어나올 정도로 가장 키가 크지만 의외로 이 특징을 살린 꺽다리 기믹은 별로 맡지 않았다.[4] 그리고 가끔씩 탈의한 모습을 보면 의외로 몸짱이다. 재결성 당시부터 리더였고, '8시라구! 전원집합'에서는 가장 먼저 단독으로 나와 이 주의 설정을 간략히 설명해 주고 방청객들에게 나머지 멤버들을 소개하는 역할. 기본적으로 집안의 가장이나 신사, 각종 집단의 리더 역할을 많이 맡고, 상당히 자주 할머니 분장을 하는데 특유의 칼칼한 목소리를 바꾸지도 않는데 의외로 할머니 연기에 위화감이 없다(...). 대표적인 유행어로는 '도리후 대폭소'에서 유래한 「だめだこりゃ」(글렀네 이거, 안 되겠구만 이거)가 있다. '만약에...가 있다면' 시리즈의 클로징 멘트로 이카리야의 자서전 제목도 이것.
2004년(헤이세이 16년) 3월 20일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72세.

2.2. '''타카기 부(高木ブ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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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03.08~
도쿄 부 도쿄 시 도시마 구 출신. 1964년 아라이 츄와 동시에 도리후에 입단. 예명에서 알 수 있는 뚱뚱한 체구가 인상적인 인물. 본래 음악을 추구하기 위해 도리후에 입단하였으나, 아라이 츄의 탈퇴 이후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하기 힘들어지자 단념하고 오와라이에 전념하였다. 80세 생일파티 사진. 이상하게 타카기 부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유행어가 '''없다.''' [5] 다른 콩트에서는 대사나 비중이 거의 없지만 '도리후 대폭소'에서는 '천둥신령님(雷様)'이라는 전담 콩트를 맡고 있다. 타카기를 대놓고 무시하는 이카리야와 나카모토, 그리고 자신의 존재감을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어필하는 타카기가 이 콩트의 매력포인트.
여타 콩트에서의 주특기는 포커페이스. 얼굴에 겨자소스를 맞아도, 에로한 영상을 보여줘도, 무슨 공격을 당하든 무표정을 유지하는 무서운 연기력을 보여주는데 이를 이용해서 시체 기믹이나 동상 등을 많이 맡는다.

2.3. '''나카모토 코지(仲本工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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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07.05~
도쿄 부 도쿄 시 시부야 구 출신. 별명은 안경. 가쿠슈인 경제학과를 졸업한 수재로써 문무겸비의 엘리트. 원래 도쿄상공회의소에서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가 1965년 도리후에 입단했다. 체조를 했던 경력이 있어 콩트에서 주로 덤블링이나 유연성을 살린 개그를 많이 한다. 콩트에서 주된 기믹은 역시 안경에서 유래된 인텔리, 꾀돌이, 수험생, 장남이다. 대표적인 유행어로는 'コ・マ・オ・ク・リ・モ・デ・キ・マ・ス・ヨ(프, 레, 임, 감, 기, 도, 가 ,능, 해, 요)'[6]가 있다.

2.4. '''카토 챠(加藤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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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03.01~
후쿠시마 현 후쿠시마 시 출신으로 도리후 레귤러 멤버 중 유일하게 비 도쿄 태생이다. 재결성 당시부터 있던 멤버로, 도리후 중 나이는 어린 축이지만 도리후 내에서 이카리야 다음으로 최고참. 촌스러운 후쿠시마 사투리와 도시 서민적인 외모로 큰 인기를 끌었다. 별명은 예명을 약간 변화시킨 '''카토짱'''.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바로 옆이 '''45년 연하''' 아내. 덕분에 젊은 친구들과 자주 모인다. 대표적인 유행어로는 「どうもスンヅレイ[7]しました」(실례 많았습니다)가 있다. 사투리로 웃긴다는 점은 선배인 하나 하지메[8]와 비슷하다.
밴드 내에서는 드럼을 맡고 있지만 도리후 명의로 낸 곡 상당수에서 리드보컬을 맡았으며 특유의 속사포 언변을 이용한 빨리 말하기(早口) 노래가 대표적. '8시라구! 전원집합'에서는 항상 멤버들 간의 텐션이 올랐을 때 난데없이 카토가 분홍색 조명을 비추고 나타나 '조금만이에요(ちょっとだけよ)'하면서 스트립댄스(...)를 추는 파트가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시무라도 독립한 뒤 써먹는다.
대부분의 콩트에서 시무라와 함께 했으며, 때문에 전원집합이 끝난 후에도 시무라와 함께 여러 방송에서 자주 출연하였다. 이렇듯 시무라와 함께 드리프터즈의 멤버들 중에서 코미디언으로써 인기가 높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이 안 맞는 것으로 판단하여 지금은 연예계와 거리를 두고 조용히 살고 있다.

2.5. '''시무라 켄(志村け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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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2.20~2020.03.29
도쿄 도 히가시무라야마시 출신. 1968(昭和43)년 이카리야 쵸스케에게 직접 간청하여 준 멤버가 되었고 1974(昭和49)년 '''아라이 츄'''의 탈퇴와 더불어 도리후의 정식 멤버로 합류하였다. 2020년 까지 오와라이에 남아있던 유일한 멤버이기도 하다. 정식 멤버가 된 후 약 2년 동안은 존재감이 없었지만 이후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카토 챠와 함께 신 스틸러 급의 존재감을 뿜어낸다. 그룹 내 최연소임에도 불구하고 '''도리후 대폭소''' 때부터 노인 분장을 하고 신들린 노인 연기를 보여주었으며, 도리후 시절 만들어낸 유행어(?)는 역시 히가시무라야마 온도. 시무라가 무대에서 이걸 부르려 하면 이카리야가 "매번 변함없이 재미 없으니까 그만 하라"며 제지하고, 시무라가 관객들에게 "그럼 올해는 그만할까요?" 하고 물어서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것이 고정 패턴. 4번가에서 1번가로 갈수록 점점 막장이 되어가는 무대매너(...)가 일품.
참고로 시무라 켄 덕에 지역 홍보 효과가 되었는지 히가시무라야마역의 발차 멜로디가 "히가시무라야마 온도"이다. 또한 히가시무라야마역 앞에는 시무라 켄 나무가 있다.
도리후 레귤러 멤버 중 나이도 가장 어리고 가장 늦게 정식 멤버에 합류했지만 2020년 3월 29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하여 향년 70세로 사망, 이카리야 쵸스케에 이어 두 번째로 고인이 되었다(탈퇴한 '''아라이 츄'''를 포함하면 세 번째). 상세 내용은 시무라 켄 항목 참조.

2.6. 탈퇴한 멤버



2.6.1. '''아라이 츄(荒井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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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昭和3)년 도쿄 부 출신이며 본명은 아라이 야스오(荒井 安雄). 타카기 부와 같이 도리후에 합류했는데, 활동 초기에 리더인 이카리야 쵸스케보다 연상인 것은 좀 그래서였는지 타카기보다도 한 살 어린 1934(昭和9)년 생이라 사칭하고 다녔던 적이 있다. 근데 문제는 6살이나 나이를 속였음에도 대부분의 멤버들이 '''그걸 꽤나 오랜 시간동안 몰랐다는 것.''' 도리후가 밴드 활동을 할 때에는 키보드 담당이었다. 1974(昭和49)년 체력의 한계를 이유로 탈퇴했고 '8시야! 전원집합' 무대에서 시무라와 공식적인 멤버 교체식을 가졌다. 만약 이 사람이 쭉 남고 시무라가 있었으면, 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을 것이다. 이카리야는 좋게 감안하면 삼촌 뻘이지만, 이 사람은 빼도박도 못하고 시무라의 아버지 뻘이기 때문이다.
키는 작지만 꽤 탄탄한 체구와 남자다운 외모로 배우 활동도 해서 도베르만 형사 TV드라마 판에서 모리 경부를 맡거나 쇼치쿠에서 제작한 에도가와 란포의 미녀 시리즈에서 주역 나미코시 경부를 맡기도 했다.(1978~1985, 1992)[9] 이후 2000년 2월 9일에 사망했다.
대표적인 유행어로는 「This is a pen」, 그리고 「なんだ、バカ野郎(뭐야, 바보 자식아)」, 「文句あるか(불만있냐)!」, 「何見てんだよ(뭘 봐)!」 등등이 있다. 활용 사례를 보면 「This is a pen」은 아라이가 영어로 말해야 할 상황에서 맥락 따위는 무시하고 무작정 내뱉고 보는 치트키(...)에 가까우며 「なんだバカ野郎」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시비조로 말하는 것이 포인트.

탈퇴 후 오랜만에 '도리후 대폭소'의 콩트에 재등장한 아라이. 탈퇴 이후 취직이 안 돼서 직업소개소를 찾아왔다가 도리후 멤버들에게 갈굼을 받는다는 줄거리이다. 그래서인지 이 콩트에서 시무라 켄은 출연하지 않는다.

2.6.2. '''스와조노 치카하루(諏訪園親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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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昭和27)년 카고시마현 카고시마시 요시노정 출신. 환상이 되어버린 도리후 제6의 멤버에 가장 가까웠던 남자. 도리후에 삘이 딱 꽂혀서 면접까지 봤지만 떨어졌다. 그래도 간청하여 사정사정해서 결국 카토 챠의 운전수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이카리야 쵸스케에게 발탁되어 준 멤버가 되고 이카리야 쵸스케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1985(昭和60)년에 도리후와 결별. 탈퇴 후 스와 신지(すわ 親治)라는 예명으로 연극쪽에 종사하고 있다. 비록 준멤버였기는 하지만 실제로 니치게키의 도리후 공연에서도 6인조로 활동하는 등 실질적으로 멤버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고, 도리후의 대표 프로그램인 '전원집합'에는 시무라 켄 보다도 먼저 도리후 멤버로써 출연했다. 타카기와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유행어가 '''없다.'''

2.7. 전기 밴드 시대의 멤버


'''사카모토 큐'''. 상세 내용은 항목 참조.

3. 역사


  • 전기 밴드 시대 : 1955년에 초대 리더 키시베 키요시를 중심으로 마운틴 보이즈와 도쿄 웨스턴 보이즈가 합쳐져 결성되었다. 그러나 1960년에 키시베 키요시는 리더의 자리를 2대 리더 사쿠라이 테루오에게 양도하고 탈퇴, 작곡가로 전업하여 대성하였다. 사쿠라이 시대 때부터 순수 음악에서 코메디 밴드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하지만 4년 뒤인 1964년, 도리후에 내분이 일어나 멤버 일부가 동키 카르텟[10]으로 독립해나가고, 3대 리더 이카리야 쵸스케를 중심으로 한 잔류 멤버들이 밴드를 재결성하면서 전기 밴드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참고로 전기 밴드 시절 거쳐갔던 멤버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일본 가요계의 전설 사카모토 큐. 이 인연으로 사카모토 큐는 전원집합 1회의 게스트로 출연했다.
  • 재결성~아라이 츄 탈퇴 : 현재 멤버로 고정되기 전까지 1년간 계속 밴드 멤버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뒤로 그럭저럭 인지도 있는 코메디 밴드로 있다가, 1969년 TBS 테레비에서「8시라구! 전원집합」을 시작하면서 아주 대박을 친다. 평균 시청률 30% 이상, 최고 시청률 50%를 넘긴 적도 있을 정도.[11] 그 뒤로 제1의 전성기가 찾아오지만, 1974년, 아라이 츄가 체력의 한계를 이유로 탈퇴를 선언, 전성기를 구가하던 도리후에 위기가 찾아온다. 그 때, 아라이 츄의 대타로 들어온 사람이 그 시무라 켄이었다.
  • 시무라 켄 가입~시청률 경쟁 : 시무라 켄 가입 이후에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도리후, 전원집합마저 최초로 시청률 1위를 빼앗기고 만다. 이에 리더인 이카리야 쵸스케는 8년간 계속해오던 주연 영화 시리즈를 종료시켜버린다. 그리고 이듬해, 그 결실을 맺어 시무라 켄이 「히가시무라야마 온도」를 히트치면서 그 동안의 부진을 일소하고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다음 해에 후지 TV에서 시작한 「도리후 대폭소」까지 히트를 치며 계속 일이 잘 풀렸지만, 1981년에 나카모토 코지와 시무라 켄의 불법경마 문제가 터졌다. 다행히 서류송검에 그쳤음에도 이는 드리프터즈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주게 되어 전원집합 인기 하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게다가 후지 TV의 '우리들은 익살족'까지 등장해[12] 1년만에 시청률 1위를 탈환하면서 지금도 토요일 8시의 전쟁으로 불리며 회자되고 있는 시청률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평균 시청률은 전성기의 반토막도 안 되는 10% 후반대를 유지. 게다가 도리후 내의 기성 코메디언인 이카리야 쵸스케와 신진 코메디언인 카토 챠와 시무라 켄의 대립까지 격화된다. 여기에 TBS의 높으신 분들도 이미 늙어서 50대에 접어든 이카리야 쵸스케보다는 30대 중반의 시무라와 40대 초반의 카토 챠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어했다. 비유를 하자면 무한도전 내에서 50대가 된 박명수유재석 등 노장파가 아직 젊은 정형돈하하 등 신진파와 대립하고, 여기에 MBC의 높으신 분들도 늙은 유재석과 박명수를 치우고 정형돈과 하하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어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상을 보면 대립하는 멤버들의 표정이 굳어있거나 어색하기 짝이 없다.
  • 전원집합 종영~현재 : 1985년이 되자 시청률 경쟁에서 완전히 뒤쳐져 결국 오랜 역사를 뒤로 하고 전원집합은 종영. 그 이후 이카리야 쵸스케는 연기, 타카키 부는 음악[13], 나카모토 코지는 무대나 행사에 집중하게 되고, 오와라이에는 카토 챠와 시무라 켄만 남게 된다. 도리후 다섯이 다 모여서 하는 정기 방송은 도리후 대폭소를 제외하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것도 쇼와 시대가 끝나며 완전히 없어졌기에 전원집합의 종영을 사실상의 해체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 후 98년에 도리후 대폭소도 비정기적 방송으로 바뀌고 카토 챠는 헤이세이 시대에 들어서며 자신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인정하고 오와라이에서 은퇴. 하지만 시무라 켄은 잠시 슬럼프도 있었으나 개그계 원로로 재기해 활발하게 현역으로 뛰었다.

1980년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연공서열' 콩트. 이카리야가 리더가 되고부터 아라이 탈퇴, 시무라 가입 이후 80년대까지 도리후의 간략한 역사와 각 멤버들의 사건사고(...)를 알 수 있다. 상세한 내용은 위에 적혀있는 대로이다.

4. 코미디 활동


도리후의 코미디 활동은 형식상으로 나누자면 「8시라구! 전원집합」 풍의 생방송 공개 코미디와 「도리후 대폭소」 풍의 녹화 콩트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인 만자이는 하지 않았고, 콩트를 주로 찍었다. 보통은 이카리야 쵸스케가 츳코미를 맡고, 다른 멤버가 보케를 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렇다고 이카리야 쵸스케가 보케를 안 했던 건 아니다. 슬랩스틱은 들어갈 때도 있고 안 들어갈 때도 있다. 도리후 콩트에서 각자가 주로 맡았던 역할들에 대해선 본인 항목 참조.


5. 음악 활동


수많은 히트곡들을 냈으며, 재결성 데뷔곡이었던 「즛코케 쨩」이나 TBS계 인형극 방송 「날아라! 손오공」의 주제가 「고 웨스트」을 제외하면 일본 민요나 유행가들을 도리후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게 음악활동의 특징이다. 도리후가 많이 재미봤던 점이 군가 리메이크. 옛날 군가들을 편곡하고 당시 시대상과 애환을 녹여낸 가사로 바꾼 뒤 레코드로 냈던 게 히트곡 「도리후의 즌도코부시」[14]와 「도리후의 정말로 정말로 고생씨」[15]. 그래서 나중에 원곡이 된 군가들만 불러 따로 CD로 낸 앨범이 있다. 그러나 정작 도리후 노래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잠깐뿐이야! 전원집합」[16].와 「이이유다나」는 각각 홋카이도 민요인 북해분패 리메이크와 군마현 민요 이이유다나의 재해석이다. 역시 음악 활동도 크레이지 캣츠에 비하면 활발하지 못 했다. 30년간 꾸준히 앨범을 내왔던 크레이지 캣츠에 비해 도리후는 70년대 중반에 음악활동이 많이 줄어든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키보드를 담당하는 아라이 츄의 탈퇴가 음악활동에 직격탄이었기 때문.[17]
앨범 순서
출시연월일
앨범제목
비고
1
1968년 6월 10일
즛코케쨩/좋은 탕이다(ズッコケちゃん/いい湯だな)
A면의 「즛코케쨩」은 밴드 재정비 이후 신생 도리후의 데뷔 타이틀로 오리지날 곡이다. 근데 B면의 「좋은 탕이다」가 공전절후의 대히트를 치면서 오히려 이 곡이 서브 취급을 받고 있다.(...) 「좋은 탕이다」는 군마현 민요의 리메이크다. 카토 챠가 특유의 하이톤으로 내뱉는 비바논논~이라는 후렴구가 트레이트 마크. 한국 노래방에 수록되어있는 유일한 도리후의 노래. 한국에는 짱구 극장판 폭발! 온천 부글부글 대작전엔딩곡으로 음만(...) 알려진 곡이다. 이후 "좋은 탕이다" 는 도리후 대폭소의 엔딩곡으로 쓰이게 된다. 참고로 일본 3대 중창단 중 하나인 듀크 에이세스가 바로 전에 일본의 노래 시리즈 군마편으로 이 노래를 냈었지만 '''도리후의 히트로 묻혔다(...)'''.2019년에는 데스 스트랜딩에 이스터 에그로 삽입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2
1969년 5월 1일
미요쨩/놋떼루온도(ミヨちゃん/のってる音頭)
「미요쨩」은 유행가 리메이크, 「놋떼루온도」는 아키타현 민요 아키타온도의 리메이크다.
3
1969년 11월 1일
도리후의 즌도코부시/다이헨우타이코미(ドリフのズンドコ節/大変歌い込み)
「도리후의 즌도코부시」는 해군에 징집돼서 떠나는 청년의 모습을 그린 일제 군가 해군소패의 개사편곡 버전. 원래의 1절을 마지막 6절에 넣고 나머지는 아예 가사를 새로 썼다. 80만장 이상을 팔아먹은 히트곡 중 하나. 「다이헨우타이코미」는 미야기현 민요 사타로부시의 리메이크다.
4
1970년 4월 25일
도리후의 정말로 정말로 고생씨/농담탄갱절(ドリフのほんとにほんとにご苦労さん/冗談炭坑節)
「도리후의 정말로 정말로 고생씨」는 군대의 엿같은 여러가지를 고생[18]을 그린 일제 군가 군대소패의 개사편곡버전. 우리나라에도 군대 관련 노래로 개사되었다. 「도리후의 즌도코부시」와는 다르게 원곡 가사가 안 남아있다. 도리후의 대표 히트곡 중 하나. 「농담탄갱절」은 후쿠오카현 민요 상반탄갱절(常磐炭坑節)의 리메이크다. 농담과 상반(지명)이 비슷한 발음[19]을 이용한 말장난이다.
5
1970년 11월 5일
누군가씨와 누군가씨/도리후의 오코사부시(誰かさんと誰かさん/ドリフのおこさ節)
「누군가씨와 누군가씨」는 스코틀랜드 민요 밀밭에서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나면[20]의 리메이크. 「도리후의 오코사부시」는 아키타현 민요 오코사부시의 리메이크.
6
1971년 5월 5일
도리후의 츤츤부시/도리후온도 홋카이봉우타로부터(ドリフのツンツン節/ドリフ音頭 北海盆歌より)
「도리후의 츤츤부시」는 여러 학교의 전승곡인 츤츤부시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소시민이 겪는 절망적인 상황 묘사가 압권. 「도리후온도 홋카이봉우타로부터」는 홋카이도 민요 홋카이봉우타의 리메이크다. 8시라구! 전원집합의 오프닝으로 쓰인 그 노래와는 다른 버전.
7
1971년 12월 20일
도리후의 츠레로부시/도리후의 연인씨(ドリフのツーレロ節/ドリフのラバさん)
「도리후의 츠레로부시」는 대만 민요를 리메이크한 샹랑부시라는 노래의 리메이크. 도리후의 연인씨는 쇼와 10년대에 유행한 추창의 딸 리메이크. 두 노래의 원곡인 이름 모를 대만 민요와 마셜 제도가 배경인 추장의 딸 모두 남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노래다.
8
1972년 4월 25일
도리후의 새빨간 봉투/도리후의 핑퐁팡(ドリフの真赤な封筒/ドリフのピンポンパン)
「도리후의 새빨간 봉투」는 당대의 유행가가 원곡이다. 「도리후의 핑퐁팡」은 핑퐁팡체조라는 체조 음악이 원곡.
9
1973년 6월 10일
8시라구! 전원집합 대특집 잠깐뿐이야! 전원집합/「일본의 노래」 시리즈 "좋은 탕이다"로부터 도리후의 비바논온도(8時だヨ!全員集合大特集 チョットだけヨ!全員集合/「にほんのうた」シリーズ"いい湯だな"より ドリフのビバノン音頭)
「8시라구! 전원집합 대특집 잠깐뿐이야! 전원집합」은 8시라구! 전원집합의 오프닝 곡이었다. 원곡은 홋카이봉우타. 6번 앨범의 도리후온도와는 다른 노래다. 「「일본의 노래」 시리즈 "좋은 탕이다"로부터 도리후의 비바논온도」는 8시라구! 전원집합과 도리후 대폭소의 엔딩곡으로 쓰였다. 원곡은 군마현 민요 좋은 탕이다. 역시 1번 앨범의 좋은 탕이다와는 다르다. 아라이 츄가 탈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참여한 앨범이다.
10
1976년 3월 20일
도리후의 바이노바이노바이/도리후의 영어학원(ドリフのバイのバイのバイ/ドリフの英語塾)
「도리후의 바이노바이노바이」의 원곡은 도쿄부시. 도쿄 부시의 원곡은 미국의 군가 조지아를 거치는 행진(Marching Through Georgia). 들어보면 알겠지만 독립군가의 원곡인 그거 맞다. 「도리후의 영어학원」은 오리지날 곡이다. 시무라 켄이 참가한 첫 앨범이다.
11
1976년 9월 5일
NHK 모두의 노래로부터 카토챠의 처음의 납니다/시무라 켄의 전원집합 히가시무라야마 온도(NHK みんなのうたより 加藤茶のはじめての僕デス/志村ケンの全員集合 東村山音頭)
「NHK 모두의 노래로부터 카토챠의 처음의 납니다」는 NHK의 모두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에서 아역시절의 미야모토 히로지가 나와 부른 처음의 납니다라는 노래를 카토 챠가 리메이크한 것. 「시무라 켄의 전원집합 히가시무라야마 온도」는 시무라 켄의 고향 히가시무라야마시의 민요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 히가시무라야마 온도가 대히트를 치면서 도리후는 아라이 츄 탈퇴 이후의 부진을 일소하고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게다가 히가시무라야마시는 이 노래 하나로 전국적인 네임드 시가 되었다. 얼마나 고마웠으면 시장이 직접 고맙다고 역전에 시무라 켄의 나무를 심어줬겠는가. 참고로 가사에 나오는 히가시무라야마 욘쵸메, 산쵸메, 잇쵸메는 실제로 없는 지명.
12
1978년 4월 20일
TBS계 TV 「날아라 손오공」으로부터 고 웨스트/도리후의 즌도코부시(TBS系TV「飛べ孫悟空」より ゴー・ウェスト/ドリフのズンドコ節)
「TBS계 TV 「날아라 손오공」으로부터 고 웨스트」는 도리후가 출연하는 날아라 손오공이라는 인형극 프로그램의 테마송이다. 오리지날 곡. 12번 앨범의 즌도코부시는 3번 앨범의 즌도코부시에서 아라이 츄의 파트를 시무라 켄에게 넘긴 버전. 일명 신 도리후의 즌도코부시.
13
1981년 12월 21일
도리후의 하야구치코토바/가라오케 도리후의 "하야구치코토바"(ドリフの早口ことば/カラオケドリフの“早口ことば”)
「도리후의 하야구치코토바」는 8시라구! 전원집합에서 쓰이던 말장난 네타 노래다. Diana Ross & Marvin Gaye의 "Don't Knock My Love"이라는 팝송의 개사곡. 「가라오케 도리후의 "하야구치코토바"」는 가창이 없는 버전.
[21]

6. 영화 활동


1967년부터 8년간 도리후 본인들이 주연인 영화 21편을 찍었다. 상기했다시피 시무라 켄 가입 이후 위기 극복을 위해 이카리야 쵸스케가 접어버렸으므로 시무라 켄이 출연한 영화는 겨우 4편 뿐이다. 다만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 주연 영화보다 평가가 낮다. 물론 흥행 성적은 비등비등했지만.

7. 게임화


드리프터즈 멤버들중 카토 챠와 시무라 켄이 플레이어 캐릭터로 나오는 카토짱 켄짱(カトちゃんケンちゃん)이라는 게임이 PC 엔진용으로 나온적이 있다. 횡스크롤 액션게임이지만 똥싸는 동작이라든지 화장실 유머나 슬랩스틱같은 연출이 특징. 이 둘이 큼지막한 2등신 캐릭터로 나온다. 게임 난이도가 높은 탓도 있고 크게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PC 엔진 유저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강한 인상을 남겨준 탓인지 아는 사람은 아는 정도의 아주 듣보잡은 아닌 B급 게임 정도의 위치인듯. 의외로 북미판도 존재하는데, 북미에서는 아무래도 일본 코미디의 저명성 때문인지 JJ와 제프라는 인물로 대체되었다. 한국에서는 이주일자니 윤쇼 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다.

8. 영상



1966년 6월 30일 비틀즈 일본공연 당시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재키 요시카와 & 블루 코멧츠 무대 후 3분 20초부터 등장한다. 맨 앞에 나오는 양반은 일본의 비틀즈 + 프랭크 시나트라인 카야마 유조.

1970년대. . 밴드 컨셉 꽁트가 많았다.

대표곡(1970~1979) 모음. 카토 챠 리드보컬이 대부분이다.

1970년 일본 TBS 테레비에서 방송한 도리후타즈의 노래 즌도코타령(ズンドコ節)

역대 도리후대폭소(ドリフ大爆笑) 오프닝 모음. 초창기에는 다른곡이 였다가 1978년부터 오프닝 노래가 바뀌고 시간이 지날수록 노래가 점점 비슷해진다.


2003년 12월 방영한 도리후 대폭소 오프닝과 막간 영상들. 원년 멤버의 마지막 무대였다.[22]
1/5, 2/5, 3/5, 4/5, 5/5 순으로 풀 영상이 있다. 로딩이 꽤 오래 걸리니 정지해놓고 있으면 되겠다.

9. 이야깃거리


  • 쇼와라는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예능인들이었던 만큼 패러디도 많이 된다. 아마 오덕 바닥에서 가장 유명한 건 은혼카토 켄과 카리야 일당이며, 괴짜가족의 이타리아 쵸스케, 20세기 소년의 이가라시 쵸스케[23]도 등장. 그리고 용자 요시히코와 마왕의 성 5화에서도 패러디가 등장한다.
  • 처음 밴드 이름은 미국의 음악 그룹 The Drifters의 아들(Son)이라는 의미로 '선즈 오브 드리프터즈'라는 이름이었는데 1958년에 밴드 보컬이 된 이노우에 히로시의 이름을 넣어 '이노우에 히로시와 드리프터즈'로 바뀌었다. 이후 2대 리더로 교체되면서 쭉 밴드명에 리더의 이름을 붙였다가 1965년에 현재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1] 18년 4월에 게시된 영상이다. # [2] 몬티 파이선은 1969년 결성했고 드리프터즈는 그 이전에 결성. 하지만 파이선과 드리프터즈가 인기를 끌게 된 몬티 파이선의 날아다니는 서커스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이 방영된 시기는 비슷하다. 전원집합은 1969년 10월 4일 TBS테레비 계열을 통해 처음 방송되었고 '''그 다음날인''' 10월 5일에 몬티 파이선의 날아다니는 서커스가 영국 BBC를 통해 처음 방송되었다(...) 참고로 날아다니는 서커스는 일본에서도 TV 도쿄 계열에서 1976~1977년에 방송되었다.[3] 현재 일본 예능계를 지배하고 있는 다운타운, 톤네루즈 등이 게닌 3세대를, 80년대 만자이(만담) 붐을 일으켰던 소위 빅3 아카시야 산마, 타모리, 비트 타케시가 게닌 2세대를 대표한다면 게닌 1세대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더 드리프터즈이다.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이주일, 심형래와 같은 80~90년대 전설적인 콩트시대 개그맨들이 2세대 빅3라고 보면 되고, 더 드리프터즈는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한국 코미디 1세대 트로이카와 같은 위치에, 활동 시기 역시 동일한 70년대 도쿄발 콩트 코미디의 전성기를 견인한 코미디 그룹. 다만 연령대로 본다면 더 드리프터즈가 구봉서를 비롯한 한국 1세대 코미디언보다 더 어리다.[4] 공식적인 프로필 상 키는 175.2cm. 당시 기준을 감안하면, 굉장한 장신이다. 지금 기준으로도 평균치를 웃도는 키다. 나이들어 키가 줄어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젊었을때는 더 컷을 듯. 게다가 다른 멤버들은 비교적 단신이고 이카리야 본인은 마른 체형에 다리 비율이 압도적으로 길어서 그 키가 더 돋보였다.[5] 근데 타카기의 웃기는 스타일은 말로 웃기기보단 몸으로 짧고 굵게 웃기는 타입이라 없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6] 1978년 파나소닉에서 내놓은 'Maclord' VCR 광고에서 나온 멘트.[7] 失礼의 후쿠시마 사투리[8] 아키타벤 화자.[9] 왜 중간에 공백기가 있었나면 1985년에 이 시리즈에서 아케치 코고로 역을 맡았던 배우 아마치 시게루가 지주막하출혈로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시리즈가 중단돼서 강판되었기 때문이다,(시리즈는 이듬해 재개했지만 주역배우들은 전부 교체되었다.) 그 뒤 1992년에 복귀했지만 딱 1편만 다시 나오고 그 뒤론 안 나왔다.(그리고 시리즈는 1994년 딱 1편 더 나온뒤 끝났다..) 위의 사진이 바로 이 드라마 출연 당시의 모습이다.[10] 독립 이후 흥행참패로 결국 1970년 해산.[11] 1973년 4월 7일에 기록한 50.5%. 일본 예능 시청률 역대 1위.[12] '3대 게닌' 중 하나로 꼽히는 비트 다케시를 스타덤으로 올린 콩트 프로그램이다.[13] 특히 하와이안 스타일의 음악[14] 해군 속요가 원곡. 후렴구가 즌즌즌즌즌즌도코라서 즌도코부시라는 별명이 있음.[15] 군대소패가 원곡. "싫지는 않으십니까 군대는~"라고 시작하는 노래. 역시 후렴구가 정말로 정말로 고생이네. 한국에서는 사가로 널리 불려진 "소령중령대령은"의 원곡이다.[16] 8시라구 전원집합 오프닝. 엥야고라야또 돗코이쟌쟌 고라야또[17] 밴드 시절을 함께 했던 다른 멤버들과 다르게 시무라 켄은 코메디를 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므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었다.[18] 밥반찬이라는 게 정 떨어진다던가, 수송선에 여자가 없다던가.[19] 농담은 じょうだん, 상반은 じょうばん[20] 일본에서는 고향의 하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21] 상기 표는 레코드 음반만 정리한 것이다. CD 등은 없다.[22] 이 방송이 리더 이카리야 쵸스케의 마지막 활동이다. 쵸스케는 방영 후 불과 3개월 만에 사망했다.[23] 이쪽은 연기인 이카리야 쵸스케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