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리야 쵸스케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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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적(60년대로 추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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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였던 80년대의 모습. 참고로 저 "だめだ、こりゃ…。(글렀네, 이거...)"라는 대사는 '도리후의 대폭소'라는 프로그램의 'もしもシリーズ(만일 시리즈)'의 클로징 멘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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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의 모습. 춤추는 대수사선 THE MOVIE 마지막에 나온 것으로 이후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은 여러모로 회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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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코미디언이자, 배우. 애칭은 쵸상(長さん). 1931년(쇼와6년) 11월 1일 출생. 인기 코미디언이자 더 드리프터즈의 리더로서 활동하다가 1985년 8시라구 전원집합) 종영 후부터는 베테랑 배우로서 활동했다. 실제로 현세대 일본인들에게는 배우의 모습이 더 친숙하다. 더 드리프터즈의 시작이 본래는 밴드였으므로 음악인으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는 일본문화 개방 후 춤추는 대수사선의 와쿠 헤이하치로 역으로 인지도가 있다.
「8시라구! 전원집합」은 쇼와 44년(1969)에 방영되기 시작해서 쇼와 60년 (1985)에 종영될때까지 16년이라는 기간동안 방송하면서 최고 시청률 50%대, 웬만해선 30% 아래로 안 떨어지던 히트 프로그램이며, 해당 프로 타이틀 콜도 그가 외칠 정도로 주도적이었다. 물론 월간으로 방영되던 「도리후의 대폭소」도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도리후의 인기는 각 멤버들이 전성기 시절의 김국진, 유재석 정도의 인기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코미디언으로서의 현역 시절 별명은 '고릴라' 혹은 '입술'. 그래서 데포르메된 일러스트에서는 항상 아랫입술이 강조되고, 동물들을 소재로 콩트를 할 때 원숭이나 고릴라만 나오면 카토나 시무라가 반색하며 이카리야의 가족이나 첩 드립을 치다가 분노에 찬 츳코미 세례를 받는다(...). 도리후 내에서의 위치는 주로 나카모토 코지나 시무라 켄 등 다른 멤버들의 기행에 당하고 츳코미를 거는 위치다. 전원집합 무대 위에서, 특히 학교 콩트에서 선생님 역할을 맡을 때에는 하리센 대신 노란 플라스틱 콘을 쥐고 학생 역할을 맡은 다른 멤버들에게 사정없이 츳코미를 가한다. 때로는 너무 스윙을 휘두르다 보니 플라스틱 콘이 무대 아래로 떨어져서 방송국 관계자들이 주워주는 해프닝도 카메라에 잡힌다(생방송이기 때문). 리더로서 생방송 중 각 코너를 진행하고 전체적인 극의 흐름을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역할도 이카리야의 몫. 그래서 전원집합에서 이카리야는 전반부 콩트에만 주로 참여하고 후반부에는 나머지 멤버들이 게스트들과 함께 콩트를 진행할 동안 양복을 입고 방송 진행에 전념한다. 단 도리후 대폭소의 경우에는 녹화방송이기 때문에 각 콩트에도 자유롭게 참여하는 편.
이카리야 식의 츳코미는 특히 그가 멤버들에게 이루 말 못할 생고생을 겪는 '만약에...가 있다면' 시리즈에서 두드러진다. 일본 위키에 따르면 이 시리즈 중 목욕탕편을 본 이카리야의 손녀가 "왜 저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괴롭히는 거야?" 하고 물었다고(...).[5] 보통은 이카리야가 정상인으로서 츳코미를 거는 입장이지만, 가끔은 연령대가 높다는 점을 이용하여 꼰대 기믹을 맡고 나머지 멤버들의 츳코미를 받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변방의 북소리' 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꼴통 부하들에게 무시당하는 상식인 리더 캐릭터의 원조. 그러나 나머지 4명 멤버들이 벌이는 진상짓이 하도 강렬해서 그렇지 리더 이카리야도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영락없는 바보다.
'만약에...가 있다면' 시리즈 목욕탕편. 확실히 나머지 멤버들이 리더를 진심으로 갈구는 것 같기도 하다(...). 시무라가 후일 방송에서 털어놓은 얘기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현역 시절 이카리야가 늘 개런티의 지분을 너무 많이 가져가서 나머지 멤버들의 빈축을 샀다고.[6]
'만약에 ...가 있다면' 시리즈의 택시 운전사 에피소드 중 하나. 개인택시의 개인(個人)과 고인(故人)의 일본어 발음이 '''고진'''(こじん)으로 같은 것을 이용한 말장난이다(...).(똑똑똑)실례합니다, 기사님, 기사님!
(똑똑똑)실례합니다, 도쿄역 까지 좀!
기사님! 기... 얼레? 기사님?
(땡...)죽었잖아...[7]
아, (개인이 아니라)고인이었구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렀네, 이거...'''
(땡~!)
'8시라구! 전원집합' 학교편. 당대 여성 아이돌뿐만 아니라 고 히로미, 하마다 켄지, 미후네 토시로, 스가와라 분타[8] , 타미야 지로 등 수많은 호화 게스트들이 거쳐가서 보케를 폭발시켰으며 이카리야 사후 추도 영상에도 인용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카리야 쵸스케는 아프리카에 세컨드가 있다!"라는 당대 코미디언들의 드립이 있었을 정도로 아프리카를 자주 다니고 아프리카의 대자연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1983년엔 아프리카 여행 서적도 집필했을 정도.
유행어로는 물론 상술한 대로 '만약에 OO가 있다면' 시리즈의 클로징 멘트인 'だめだ、こりゃ…。'(글렀네, 이거...)가 가장 유명하며, 2001년에 자서전 제목도 이것으로 냈다. 또한 전원집합에서 매주 관객들에게 했던 인사말인 'オイッスー!'(오잇스!) 주고받기도 올드 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사로 유명하다. 이카리야 사후 운구차가 지나갈 때 길가에 몰려든 나이 든 팬들이 울음 섞인 'オイッスー!'를 연호하며 이카리야를 떠나 보내는 정경이 카메라에 담기기도 했다.
아래 영상은 도리후 대폭소에서 나왔던 'だめだ、こりゃ…。'의 연발 모음.
만화 20세기 소년에서는 이름을 패러디한 '이가라시 쵸스케'라는 인물도 등장한다.
괴짜가족에서도 나왔다. 작중 나오는 머리 벗겨진 교장선생님이 바로 이 분의 패러디. 다만 쵸스케 사후에는 나오지 않는다.
2. 생애
1931년 11월 1일 14시 55분 도쿄부 도쿄시 혼조구[9] 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츠키지의 어시장으로 운반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카리야는 자서전 '''글렀네 이거'''에서 아버지에 대해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최고의 인물"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에 될 무렵 시즈오카 현 의 요시시(현 후지시)에 피난을 갔고 요시하라의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이듬해 이곳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이후 쵸스케의 아버지는 86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평생 이 후지시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중퇴 후 시즈오카의 공장에 근무하면서 동료들과 하와이안 밴드를 결성하게되고, 댄스 홀에서 활동하게 된다. 원래는 스틸 기타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후에 베이스로 전향하였다.[10] 여성에게 인기를 얻고 싶에서 이카리야가 음악을 시작한 것이라고 알려졌었으나, 실제로는 아버지로부터 "먹을 것이 없으니 물러 나라"가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1959년에 뮤지션을 목표로 상경하게 되었고 첫 번째 아내와 함께 신주쿠의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미키 커티스도 재적하고 있던 로커 빌리 밴드 "미친 웨스트" 에 참가 후 "컨트리 웨스턴 밴드" 지미 도키타와 산악 플레이 보이즈에 베이시스트로 합류하게 된다. 당시 동료였던 다치카와 요코스카와 요코타의 미군 캠프에 순회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1년 12월 31일 순회 공연의 왕로에서 교통사고를 일으켜 "지미 도키타와 산악 플레이 보이즈의 소속사와 관계가 악화된다. 1962년 , 카토 챠와 같은시기에 오노 야스시, 자이언트 요시다들이 재적하고 있던 「사쿠라이 테루와 더 드리프터즈」에 참가하게 되었고. 나중에 리더를 교체하고 "이카리야 쵸이치와 더 드리프터즈"로 그룹 이름을 개칭. 그러나 그 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오노들은 독립해서 동키 중주를 결성해 버린다.
1964년에 나카모토 코지, 타카기 부, 아라이 츄, 츠나키 후미오가 모여 더 드리프터즈를 재결성한다. 바로 츠나키가 탈퇴했지만,이 때는 멤버의 보충을 하지 않았다.
츠나키 탈퇴 직후 드리프트는 와타나배 프로덕션의 산하에 들어가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의 일원으로서 대대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1966년에는 비틀즈의 오프닝 공연으로 더 드리프터즈를 이끌고 무도관에서 공연하게 된다. 이 때 나카모토 코지의 보컬로 "키다리 샐리 (Long Tall Sally)" 연주를 했다.
TBS의 <8시라구 전원집합)>과 후지 TV 의 <도리후 대폭소(ドリフ大爆笑)>로 크게 인기를 얻게된다.
전원집합이 시작되었을 무렵에, 야마다 야스오에게 연기지도를 받고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카리야 쵸스케가 루팡 3세의 녹화 스튜디오에 인사하러 가거나 야마다가 8시다 전원 집합!의 첫머리 콩트에 출연했다.
전원집합의 협의는 이틀 전인 목요일에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카리야 중심으로 소재가 정해져 있었고, 이카리야가 소재를 생각해 낼 때까지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일이 많았다. 다른 작가가 아이디어를 내도 기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일에 대해 "그들의 재료는 책상에서만 생각하는 것 같기도하고 재미도 드리프트는 할 수 없는 내용 뿐이었다"고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카토도 "작가가 생각한 소재보다 자신들이 직접 생각하는 것이 관객에게 통했다 "고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신입이었던 타카다 후미오는 8시다! 전원 집합의 직원으로서 참가하고 있었지만, 회의시간 때 너무 조용하고 무거운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고 도망 경위를 스포츠 신문의 연재에 내기도 하였다.
시무라 켄도 이카리야 사후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각한 소재를 이카리야에게 보일 때 가장 긴장했다"고 말했다. 이카리야의 저서에는 시무라의 소재 만들기 재능과 이러한 아이디어를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점이 시무라를 더 드리프터즈에 가입을 허가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1985년 8시다 전원 집합!이 종영 후 배우, 탤런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에는 NHK 대하 드라마「독안룡 마사무네」에서 오니와 요시나오 역을 맡은 것으로 배우가 되었다.
1994년부터 시작된 니혼TV에서 화요일에 방영되었던 서스펜스 극장 「취조실」시리즈에서는 사가 현경 본부 수사 일과의 경부보 이치로의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고, 2001년에는 TBS에서 월요일 미스터리 극장 " 고발 변호사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이카리야 쵸스케는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인기 드라마의 주연을 모두 맡았다. 원작에서는 팔십대 노인으로 설정되는 역할이며, 늙은이 노인 같은 일상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법정에서의 박력있는 추궁의 낙차로 시청자들을 매료시킨 이카리야의 연기는 오래된 재즈를 다룬 차분한 연출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나중에 모든 작품이 DVD 화가 되기도 하였다.
1992년~1996년에 후지TV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판 사자에상에서 이소노 나미헤이 역을 맡았고 1997년에는 후지TV에서 방영된 '춤추는 대수사선'에선 와쿠 헤이하치로 역을 맡아 8시다 전원 집합!를 본 적이 없는 젊은 팬들에게도 인기를 받았다. 1999년에는 춤추는 대수사선 THE MOVIE로 제 22회 일본 아카데미 상 최우수 남우 조연상을 수상했다.
2003년 굿 럭!!에서는 신카이 하지메(기무라 타쿠야)의 아버지 신카이 료지 역으로 출연했다.
3. 사망
2003년 5월 30일 림프종으로 인해 입원하게 되었다. 투병 생활을 거쳐 같은 해인 7월 17일에 퇴원한뒤 다음날에는 춤추는 대수사선 THE MOVIE2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의 영화 무대 인사에 참석하기도 했고 같은 해인 8월 6일에 SMAPxSMAP에 출연하면서 텔레비전에 복귀한다. 그러나 장남 이카리야 고이치에 따르면, 퇴원 직후에 담당 의사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 23일 방송된 "40년이야! 도리후 대폭소 스페셜"에 출연을 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게된다.
그러나 2004년 3월 15일, 암이 걷잡을수 없을 수준으로 전이가 되었고 도쿄도 미나토 구의 한 병원에 재입원하여 치료에 집중하였으나 3월 20일 15시 30분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카리야의 유해는 키리가야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카츠시카구에 위치한 렌쇼지에 납골되었다.
이카리야의 사망으로 인해 인기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의 후속작은 더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대신 와쿠의 조카가 등장한 극장판 3번째 작품이 나왔다.
4. 배역목록
[1] 현재는 스미다구. [2] 더 드리프터즈 멤버 중 가장 크다. [3] 와타나베 엔터테인먼트 계열로 이시다 아유미도 같은 소속.[4] 이카리야 사후 추모방송에서는 "8시라구!"라는 고인의 생전 멘트와 "전원집합!" 이라는 방청객들의 화답을 마지막에 삽입하여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아낸다.[5] 마찬가지로 일본 위키에 따르면 이카리야 본인은 이때 '''살기를 느꼈다'''고 진술.[6] 이 콩트는 후일 도리후 대폭소 시청자들의 리퀘스트로 훨씬 파워업 해서 다시 촬영하기도 했다. 참고로 뒤에서 북으로 장단을 치고 있는 사람은 준 멤버인 스와조노 치카하루.[7] 운전석에 앉아있는 시체 역할은 타카기 부.[8] 사카즈키의 모델이 된 야쿠자 역 전문 배우인데, 콩트에 초대되어서는 '''마흔 다섯의 나이에 아동복을 입고 멤버들과 어울려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등''' 가차없이 망가진다. [9] 현 도쿄도 스미다 구 [10] 당시의 밴드 동료에는 전 프로야구 선수 타무라 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