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S-51-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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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패치.[1] 우주에서 관측하기로 했던 핼리 혜성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1. 개요
2. 탑승 승무원
3. 임무 계획
4. 사고
4.1. 사건전개
5. 원인 규명
6. 그 외의 이야기


1. 개요


1986년 1월 28일 개시된, 미국 우주왕복선 개발 이래 25번째 임무.
하지만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발사된 챌린저는 발사 후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우측 부스터 로켓 고장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이는 지금까지도 NASA 창설 이래 전대미문의 대참사로 거론되며[2], NASA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과 우주 정거장 개발 계획, 그리고 미군SDI까지 뒤흔들었다.

2. 탑승 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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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왼쪽부터
  • 엘리슨 쇼우지 오니즈카 - 미션 스페셜리스트. 미합중국 공군 중령이자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우주비행사. 첫 미션은 국방부 기밀 미션인 STS-51-C였다.[3]
  • 샤론 크리스타 코리건 매콜리프 - 1948년 9월 2일생.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 우주에서 원격수업을 실시할 예정이었던 교사.
  • 그레고리 브루스 자비스 - 1944년 8월 24일생.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 하워드 휴즈가 설립한 휴즈 항공기 회사(Hughes Aircraft Company)의 우주개발부문(Hughes Space and Communications Group) 직원으로[4], 이번 미션에서 TDRS-2 통신위성[5]의 궤도 전개를 위해 투입되었다.
  • 주디스 애를린 레스닉 - 1949년 4월 5일생. 미션 스페셜리스트. 우크라이나 이민 2세 유대인으로, STS-41-D에서 첫 우주비행을 수행하며 사상 2번째 미국인 여성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 마이클 존 스미스 - 1945년 4월 30일생. 우주왕복선 조종사. 미합중국 해군 중령. STS-61-I 미션 파일럿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 프랜시스 리처드 "딕" 스코비 - 1939년 5월 19일생. 미션 사령관. 미합중국 공군 중령. X-24 리프팅 바디 테스트 파일럿 출신. 당시 아들 리처드 스코비 주니어는 미국공군사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6] 첫 미션은 STS-41-C
  • 로널드 어윈 맥네어 - 1950년 10월 21일생. 미션 스페셜리스트. 레이저물리학을 전공한 물리학자로, STS-41-B에서 첫 미션을 수행했다. 사상 2번째 미국 흑인 우주비행사.

3. 임무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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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중력 훈련기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크리스타 매콜리프.
오른쪽은 백업 교사 바버라 모건이다.
이 미션의 핵심은 NASA의 TDRS 통신망 구축에 쓰일 TDRS-2 위성 전개였지만, 무엇보다 그 이상으로 NASA가 심혈을 기울인 중요한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바로 '''사상 최초로 우주에서 이루어지는 원격 수업'''. NASA는 1985년 우주 교사 프로그램(Teacher in Space Program)을 기획했는데, 민간인 교사가 우주왕복선에 탑승해 우주에서 직접 과학 실험을 하면서 미국 전역의 학교에 원격 수업을 진행한다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 무려 12,000여 명의 교사가 지원했고, 치열한 경쟁 끝에 '크리스타 매콜리프'라는 고등학교 사회교사가 선발되었다.[7]
또한 1986년 초는 핼리 혜성이 지구에 접근하던 때라 '''우주에서 핼리 혜성을 관측'''한다는 사상 초유의 기회이기도 했다. NASA가 이 시기에 무리해서 발사(직전 미션도 천문학 관련 미션이었다.)를 강행한 것도 핼리 혜성이라는 유명한 떡밥을 놓치지 않으려는 목적이 있었고, 우주 원격 수업에서도 핼리 혜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다룰 예정이었다.
한편, 로널드 멕네어는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장 미셸 자르와의 합동 프로젝트를 위해 우주로 색소폰을 챙겨가게 되었다. 맥네어는 자르가 작곡한 <Rendez-Vous Ⅵ>라는 곡의 색소폰 파트를 우주에서 연주하고, 이 곡은 '''우주에서 최초로 녹음된 음악'''으로 기록되며 자르의 앨범 Rendez-Vous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트랙으로 수록될 예정이었다.

4. 사고


STS-51-L은 본래 1월 22일에 발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전 임무인 STS-61-C 컬럼비아의 일정이 너무 늦어지면서 발사일이 당초 계획보다 며칠 늦어졌다.[8] 게다가 24일은 대서양 비상착륙 지점(abort site)의 기상 문제로 또다시 발사가 늦춰졌고, 이후 또 발사 준비 문제와 기상 문제가 겹치며 발사는 1월 28일까지 미뤄졌다. 게다가 발사 당일에도 오전 9시 37분 발사될 예정이었다가 화재 감지 시스템의 이상으로 발사는 또다시 몇 시간 가량 지체되었다.
1986년 1월 28일[9] 미 동부 시각으로 오전 11시 38분, 마침내 챌린저 호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케네디 우주센터의 39-B 발사대를 떠나 날아올랐다.


CNN 보도[10]
LA 지역방송 KNBC 보도[11]

4.1. 사건전개



발사 직후 존슨 우주 센터 현장

'''CAPCOM[12]

: Challenger, go at throttle up. (챌린저, 출력 최대로.)'''

'''딕 스코비 : Roger, go at throttle up. (알았다, 출력 최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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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스턴과 챌린저의 마지막 교신. 영상 25초.[15]

+0.678초: 우측 로켓부스터 제일 밑 이음부에서 검은 연기가 확인됐지만 연기는 곧 멈추었다.[16]
+58.778초: 검은 연기가 나온 부분에서 불꽃이 나오기 시작했다.[17] 이 불꽃은 우측 로켓 부스터를 고정한 부분에서 분출됐다.
+61.724초: 강풍이 기체에 불어 기체가 크게 흔들렸다.[18] 그때문에 기체에 강한 힘이 가해졌다.
+64.660초: 우측 로켓부스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 모양이 변했다. 불꽃때문에 외부 액체수소 탱크에 구멍이 생겨 기화된 수소가 뿜어져 나왔다.
+66.764초: 액체수소 탱크의 압력이 낮아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72.284초: 우측 로켓 부스터를 고정하는 부품이 파괴되고 좌우 로켓 부스터가 기체에서 이탈하였다.
+73.124초: 좌측 로켓 부스터의 내부 압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불꽃이 우측 로켓 부스터를 파괴했고 파괴된 우측 로켓 부스터의 윗부분이 그대로 외부탱크와 충돌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74.130초: 지상에 전해지던 전파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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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챌린저는 발사 73초 후 그대로 폭발하여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이 충격적 사고는 발사를 지켜보던 군중들은 물론, CNN의 TV중계[19]로 전국 수많은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게다가 우주에서 교사가 수업을 한다는 것 때문에 많은 미국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도 이 생중계를 보여주고 있었고, 아이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인 사고로 다가왔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당시 챌린저의 발사를 지켜보기 위해 현장에 있던 군중들 가운데 다름 아닌 크리스타 매콜리프의 부모님이 있었다는 것이다. 의도치 않게 딸이 불귀의 객이 된 사건을 직접 목격했던지라 충격이 무척이나 컸다. 설상가상으로 매콜리프가 교사로 재직하던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모여 발사장면을 TV 생중계로 시청하고 있었다. 우주비행사 마이크 멀레인은 크리스타 매콜리프의 부모님의 표정을 보며 '저게 정상적인 발사에서 일어나는 일인가요...?' 하는 표정이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본인 또한 두 명의 우주비행사 동기들(딕 스코비, 주디스 레스닉)을 이 사고로 잃었다.
이 참사로 대폭 위축된 미국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은 전부 취소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에야 STS-26 디스커버리를 시작으로 왕복선의 발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발사체의 잔해들은 1987년 1월에 폐기한 두 개의 미니트맨 미사일 사일로에 넣어져 장기보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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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에서 떨어져 나오는 궤도선의 승무원 모듈
영상판독에 의하면 승무원들은 폭발 후에도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고고도에서 물로 떨어진 충격에 의해 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5km 높이에서 시속 320km의 속도로 추락했다고 한다. 실제로 챌린저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비상용 호흡장치 '''7개 중 3개[20]가 활성화되어 있는 채 잔해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약 3명 정도는 살아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21][22]

5. 원인 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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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근본적 원인은 '''로켓 부스터 둘레를 둘러싸서 이음매를 메우는 고무 O-Ring의 문제로 우측 부스터 차폐가 유지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O-Ring은 '''고무 재질'''이 반드시 들어가며, 발사 중 빈틈이 발생하면 그쪽을 막으면서 적당하게 변형되어야 한다. 하지만 고무 재질 때문에 화씨 65도('''섭씨 18.5도''')이하에서는 급격히 탄성력을 잃어 본래의 형태로 돌아올 만큼의 충분한 유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발사 당일의 기온은 이상한파로 인해 평년보다[23][24] 16도나 낮은 '''영하 1.1℃'''였으며, 오전에 발생한 화재 감지 시스템 문제로 챌린저는 발사대에 2시간이 넘도록 계속 서있었다. 이로 인해 탄성을 잃어 유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O-Ring은 뜨거운 부스터 내의 가스로부터 생기는 압력을 계속 받았다. 이것이 O-Ring의 파손, 결과적으로는 계속된 이음새 틈으로의 가스 분출로 이어져 사고를 낳고 말았다. 한마디로 '''추워서 딱딱해진 고무에 금이 간 것'''.
사실 발사대에서 점화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폭발할 수도 있었던 일인데, 바로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산화알루미늄(Aluminum oxides) 찌꺼기가 틈새를 막아서 O-Ring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5]. 이 찌꺼기가 '''62초'''만 더 버텼다면 부스터가 떨어져 나가며 챌린저는 무사했겠지만... 발사 후 37초부터 20초가량 이어진 강력한 '''윈드시어'''로 인해[26] 이 찌꺼기가 모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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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분석으로 도출한 공중분해 타임라인
결국 거의 1분 즈음 되는 순간(T+58.788), 우측 부스터 이음매에서 가스 줄기(plume)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스 줄기는 순식간에 화염 줄기로 변해 연료탱크[27] 하단부 수소탱크를 태우며 액체수소를 누출시켰다. 마침내 문제의 73초(T+72.284)에 우측 부스터 하단 지지대가 떨어져 나와 부스터가 회전하면서 연료탱크를 직격해 다량의 액체수소가 누출되었고, 갑자기 질량이 크게 감소하며 벌어진 가속으로 인해 '''수소탱크가 바로 위의 산소탱크를 가격'''했다. 그리고 대량의 두 연료가 한 순간에 연소하며 일어난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마하 1.9로 비행 중이던 챌린저가 폭발한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의 유명한 생방송 시연'''
정부의 사고 진상 조사단에는 말년에 암투병 중이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도 있었고, 그의 전기에 따르면 '''다른 조사단이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일을 하는 사이''' 관련 기술자를 제외하곤 처음으로 진상을 알아냈고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는 보신주의 문화와 관료체계에 쩔어있는 NASA의 문화에 문제가 있음을 비판했다.[28] 그리고 생중계된 청문회 현장에서 직접 O-Ring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실험을 진행했는데, O-Ring과 같은 재질의 작은 고리를 반바퀴 돌려 8자 모양으로 만든 뒤 미리 은색 클램프로 고정시키고 찬 물에 담가놨다가 나사를 풀자, '''고리는 완전한 원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파인만은 이후 TV로 생중계되는 청문회에서 간단한 실험을 진행하며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문제점을 알리려 했다고 밝혔다. 최종 보고서에서도 이를 덮으려는 분위기 속에서 계속 우긴 끝에야 O-Ring과 나사의 뻘짓에 의한 인재를 다룬 그의 보고서를 부록으로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남이야 뭐라 하건!'의 뒤쪽에 파인만이 진상조사단에 제출한 보고서의 일부가 부록으로 실려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한번 읽어보자. 이 사고 조사는 '''매우 철저하고 포괄적인 조사과정과 모든 가능성을 포함해 한 점의 의혹도 남지 않도록 확실히 분석한 뛰어난 조사보고서'''로 유명해서, 사고 조사 보고서의 모범 사례로 널리 일컬어지고 있다.
(O-Ring과 같이 우주비행에 있어 사소한 위험을 담은 책이 6권 분량이라는 의미이다. 방대한 '수용 가능한 위험' 중에서도 겨우 한 줄일 뿐인데, 이런 사소한 게 뭐 문제냐는 식으로 나왔던 것. 이런 작은 실수가 발생할 수 있으니, 위키러들께서는 출처 명기를 정확히 해 주시길 바란다) 부스터 제작사 타이오콜[29]의 기술자들, 게다가 O-Ring의 설계를 직접 담당했던 로저 보졸리(Roger Boisjoly)는 O-Ring의 개수형이 나오기 전까지는 챌린저의 발사를 미룰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보졸리는 정확히 1년 하고도 4일 전 발사되었던 STS-51-C 미션[30]을 통해 추운 날씨에서 발사하는 것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수거된 고체 로켓 부스터에서 탄 자국이 발견되었고, 조사 결과, O-Ring이 다 타들어가 1mm도 남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었던 것이다. 보졸리는 이를 근거로 제시하며 "영상 11도 이하에서는 절대 발사해서는 안 된다."라며, 발사 전날은 물론이고 '''발사 당일 12분 전까지'''도 발사 연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NASA와 2차 계약을 맺기 직전이었던 타이오콜 사와, 챌린저 발사 기념 연설을 하기로 되어있던 레이건 대통령을 의식했던 NASA 모두 이들의 요청을 모두 묵살하고 말았다.[31] 게다가 위의 뉴욕 타임즈 인터뷰에서도 나오듯, 당시의 NASA는 아폴로 계획으로 대표되는 우주 경쟁 당시의 막강한 기관이 아니었다. 태생부터 적자였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의 손해를 국방부나 민간 기업의 페이로드 발사 대행으로 메우고 있었고, 여기에 절호의 PR 기회였던 우주 교사 프로그램까지 겹치며 이로 인해 무슨 일이 있어도 발사를 강행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NASA 관계자 모두를 짓누르고 있었다.
또한 화씨 65도 미만의 추운 날씨에서도 큰 사고가 없었던 다수의 사례와 그 이상의 따뜻한 날씨에서도 작은 사고가 있었던 다수의 사례가[32] 있었던 만큼, 해볼만한 확률 싸움에 불운히 졌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단순한 인재가 아니라 불운, 정상 사고, 시스템적 사고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정상 사고(normal accidents)" 개념 참조.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도 이것이 단지 O-Ring과 날씨 탓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6. 그 외의 이야기



'''발사를 지켜보던 매콜리프의 백업 교사 바버라 모건.'''[33]
최초의 민간인 우주비행사이자 교사였던 크리스타 매콜리프가 전 국민이 바라보는 가운데 처참하게 숨진 이후, NASA의 우주 교사 프로그램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사실 취지는 좋아보이지만 냉정히 보자면 언플일 뿐이었으니... 챌린저 폭발 사고 이후 지적된 NASA의 실속없는 보여주기식 행정을 타파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고, 프로그램은 결국 백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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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고로부터 12년이 지난 1998년, 당시 백업 교사였던 바버라 모건은 무려 '''47세'''의 나이로 정식 우주비행사 선발에 지원해 신체검사와 심리검사를 모두 통과한 끝에 십수년은 젊은 파일럿과 과학자들 사이에서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사고 이후 만 21년 7개월만인 2007년 8월에 STS-118 ISS 도킹 미션을 수행하며, '''모건은 마침내 선배 교사이자 친구였던 매콜리프의 꿈을 대신 이뤄줄 수 있었다'''. 당시 Teacher In Space 프로그램에 자원했었던 교사 수천 명이 모여서 엔데버[34]의 발사를 지켜봤다. 이 미션에서 함께 ISS에 간 동료들 중 최연소이자 모건의 1998년 기수 동기인 트레이시 콜드웰(Tracy Caldwell)은 1986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그리고 사고 32년 만인 2018년에는 매콜리프가 우주에서 진행하려 했던 수업 내용이 고등학교 과학교사 출신의 우주비행사 리키 아놀드(Ricky Arnold)에 의해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진행되었다.[35] 그가 진행한 수업은 Christa's Lost Lessons(크리스타가 하지 못한 수업)라는 제목의 영상으로 유튜브 등지에 업로드되었다.
NASA가 이 참사로 놓친 것은 핼리 혜성 관측 기회만이 아니었다. 그 이듬해 2월 '''초신성 SN 1987A'''의 발견으로 지구상 천문학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건만, NASA의 유인 우주 프로그램은 이 연구에서 아무 기여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NASA의 야심작 허블 우주 망원경이 지구 상에서 빌빌대는 사이,[36] '''소련 우주인들은 막 가동되기 시작한 미르에서 초신성을 관측하였다.''' 애도 분위기와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사이 소련에게 선수를 빼앗기면서 미국인들은 더욱 큰 상실감을 맛보았다.
세계구급 찌라시로 유명한 위클리 월드 뉴스는 이 미션 당시의 대화록을 입수했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대화록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주선 발사 초기의 압력은 3G~5G, 크면 8G를 넘보는 엄청난 수준의 압력이라[37]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상황 같은 건 애당초 불가능에 가깝다. 초인이라면 모를까. 즉, 우주선 내부의 화재로 타죽더라도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죽는다는 소리다. 솔직히, 사망 시 대화 내용 녹음테이프보다 이쪽이 훨씬 끔찍하다.
록그룹 유럽(Europe)의 히트곡 The Final Countdown이 챌린저호 참사 추모곡인줄로 아는 이들이 간혹 있지만,[38] '''사실 무근이다.''' 진짜 챌린저 참사와 관련된 곡으로는 Owl City의 'Galaxies'가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건 아니지만, 로널드 레이건의 참사 직후 담화문을 그대로 따온 앞의 인터루드 제목이 'January 28, 1986'인 걸 보면 챌린저 사태를 염두에 두고 쓴 곡임은 확실하다. New Releas Today와의 인터뷰에서 아울시티는 이 곡이 챌린저호 사령관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졌다고 밝혔다.
이 임무로 세상을 뜬 로널드 맥네어는 앞서 언급했듯 장 미셸 자르와 우주 협연을 계획중이었고, 자르는 맥네어를 기려 <Last Rendez-Vous(Ron's Piece)>라는 곡을 만들고 추모공연으로 휴스턴에서 <Rendez-Vous Houston> 콘서트를 열었다.
이 사건이 벌어진 때 인기를 끌던 미국 드라마 내 이름은 펑키에서도 이 사건을 그린 에피소드가 만들어졌다. 펑키와 아이들이 이 우주선이 쏘아올려지는 것을 학교에서 TV로 보게 되었다가 끔찍한 사고가 되어버린 걸 보고 큰 충격을 받고 헨리 할아버지가 위로해준다는 스토리이다.
BBC에서 만든 2013년작 TV 영화 <The Challenger Disaster>가 이때 터진 사고를 수사하는 위원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윌리엄 허트가 리처드 파인만을 연기했는데, NASA라던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관료들이라든지 군이라든지 하는 여러 기관을 대표하는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얼굴마담 노릇[39]을 시키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수많은 강연을 째고 끌려왔다가 제일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나마 협조적인 공군소장 도널드 쿠티나 장군은 계급이 낮아서 나라에서 리무진을 안 준다고 툴툴대며 파인만을 정부 소유 자가용 제트기에 태워서 직접 몰고 다니기도 한다. TV 영화라는 점, 우주덕들이나 파인만 빠돌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영화라는 핸디캡이 제기되면서도 IMDB 7점 대의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내용을 첨부하자면, 이미 조사위원회 내부의 상당수와 NASA의 현장실무자들은 O-Ring의 문제라는 심증을 갖고 있었으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데, 이 중에 몇 명이 이런 저런 경로로 파인만에게 힌트와 미묘한 암시를 주면서(직접 폭로하면 자기나 동료가 다치니까...) 파인만이 진실에 이르도록 유도한다.[40] 최초의 미국 여성 우주인으로 조사위원회 내에선 NASA의 입장을 대변하는 높으신 분 역할을 하고 있던 샐리 라이드가 실제론 최초의 제보자였으며, 라이드로부터 진실을 전해들은 공군 소장 쿠티나 장군이 겉으로는 공군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높으신 분의 면모를 보이면서 뒤에선 파인만이 진실에 이르도록 은근한 힌트를 계속 던지고, 이 와중에 NASA의 현장 실무자들로 추정되는 익명의 제보가 들어온다. 그리고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언급되듯이, 이 사건 이후로 미 공군은 군사적 목적의 우주 개발을 NASA에 맡기는 것을 더욱 꺼리게 되었고 결국 쿠티나의 주도 하에 델타 Ⅱ 로켓으로 위성을 쏘아올리며 우주 개발 부문에서 NASA와 일정 부분 거리를 두게 된다.
지구 평면설 신봉자들은 이 사건이 조작되었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지구는 반구로 덮여 있고 우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NASA는 그것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가 있다는 거짓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 이야기.
애플흑역사 애플 III에서 광고로 챌린저호에서 애플 III를 사용한다는 광고를 냈으나 결말은 참담했다.
던전 앤 파이터에서는 당시 교신 내용중 일부를 대사로 따온 스킬이 있었으나 10년 정도 사용되었다가 교체되었다.
이후 1992년, 이 사고로 파괴된 챌린저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주왕복선이 엔데버

[1] MCAULIFFE(매콜리프) 옆의 사과는 교사를 상징한다.[2] NASA 창립 이후로 "실제 우주 미션"에서 우주비행사들이 사망한 적은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지상 실험 등에서 사망자가 나온 사고는 아폴로 1호 미션을 비롯해서 몇 번 있었다.[3] 이후 그가 사망한 뒤 챌린저호 사고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의 첫 비행이었던 STS-51-C 미션에서도 51-L 미션에서와 동일한 결함이 발생해 더 일찍 죽을 뻔했다는 사연이 밝혀졌다. [4] 훗날 맥도널 더글라스를 거쳐 보잉에게 인수되었다.[5] Tracking and Data Relay Satellites. NASA가 교신을 위해 발주한 통신 위성 시리즈로, 초기 버전은 퇴역했지만 후기 버전들은 지금도 활동하며 우주 통신에 써먹고 있다.[6] 2015년 기준으로 소장이다.[7] NASA는 이것 말고도 여러 민간인 우주비행사 프로그램을 추진중이었다. 세서미 스트리트빅 버드를 연기했던 캐롤 스피니 역시 탑승 후보로 고려되었지만 코스튬의 공간 차지 문제로 밀려난 바 있다. 만약 성사되었더라면, 유치원에 들어가지도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 말 그대로 엄청난 동심파괴를 불러올 뻔했다.[8] 이런저런 이유로 발사 카운트다운만 쳐도 4전 5기의 도전을 했던 기괴한 미션이었다. STS-61-C의 착륙으로부터 열흘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에 우주왕복선 발사를 또 강행한 것이다.[9] 이로부터 19년 하고도 하루 전인 1967년 1월 27일은 아폴로 1호의 테스트 중 화재로 우주비행사 3명이 숨진 날이었기에 NASA는 이후로 1월 말을 공식 추도 기간으로 정했는데, 2003년 '''2월 1일'''에 컬럼비아가 재돌입 중 공중분해되어 또다시 7명의 우주비행사들을 잃었다.[10] 사고 직후 속보 중계를 위해 비상사태에 돌입한 CNN 뉴스룸[11] CNN 외에 발사를 생중계한 유일한 방송국. 하지만 NBC 차원이 아닌 지역 방송의 자체적 중계여서 CNN처럼 전국적으로 송출되지는 않았다.[12] Capsule Communicator. 우주선에 탑승한 비행사들과 직접 교신하는 담당자. 당시 CAPCOM을 맡았던 리처드 코비(Richard O. Covey)는 바로 다음 임무인 STS-26 Return to Flight 미션에 비행사로 참가했다.[13] 메인 엔진(SSME) 추력이 최고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메인 엔진 추력이 최고에 이르렀다는 것은 메인 엔진이 정상이라는 것인데, 이 말을 한 직후에 갑자기 부스터가 폭발한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우주왕복선 발사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유명한 순간은 이 챌린저 폭발 사고였다. 최후의 우주왕복선 발사였던 STS-135 미션 당시 Atlantis, go at throttle up이라는 말이 들려올 때 어릴 적, 젊을 적 이 사고를 본 이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14] 이게 왜 발사 순간이 아니라 수십 초 지난 시점이냐면, 무지막지하게 가속하면서 기체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음속 돌파 전 SSME의 추력을 일시적으로 72% 수준까지 낮추었다가 음속 돌파 후 다시 최대 추력으로 회복하기 때문이다.[15] 이 교신이 끝난 후 정확히 3.1초 만에 챌린저가 폭발했다.[16] 내부 압력이 높아져 O-링이 눌려 가스 누출이 멈춘 것 으로 추측된다.[17] 고온의 연소가스가 O-링을 태우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18] 가속도계 텔레메트리와 엔진 추력편향의 급격한 반응으로 확인됨. 당시 가속도계 텔레메트리 기록에 의하면 기록 범위를 벗어났을 정도로 강한 측면 가속도가 있었다고 한다.[19] 우주왕복선 발사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다른 메이저 방송사들은 녹화보도만 했는데, CNN은 지속적으로 생중계를 하면서 이 사고를 생중계하게 된 까닭에 CNN은 전문 뉴스 채널의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20] 마이클 스미스, 주디스 레스닉, 엘리슨 오니즈카.[21] 원래 이런 사태에 대비해 머큐리 계획 때부터 유인우주선에는 비상탈출용 로켓이 있었다. 엔진이 위치한 우주선 하단이 폭발시, (주로)상단에 있는 유인부분이 분리된 후 탈출할 수 있게 하는, 비상탈출용으로 만들어진 추진장치. 소유즈 우주선도 이러한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로켓이 달린 건 1회용 우주발사체들이고, 우주왕복선에는 그 특이한 구조 때문에 이런 장비 자체가 없었다. 예산 문제로 처음부터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였기 때문.[22] 대신 우주왕복선의 문에서 튀어나오는 기다란 장대에 몸을 의지하여 낙하산을 매고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탈출 방법이 있었다. 영화 스페이스 카우보이 마지막 부분에 잘 나온다. 물론, 이런 장비로 챌린저 폭발 사고와 같은 사태에 대처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23] 위치가 위치인지라 원래는 1월에도 영상 20도 내외여야 했다. 그런데 1986년 초에는 전세계적으로 한파가 닥쳐서 플로리다 북부까지 미친 것이다.[24] 생방송을 진행하던 KNBC의 아나운서 켄은 폭발 50초 전에 '이 곳 플로리다의 날씨는 춥습니다.'(It's chilly in Florida)라고 발언하며 결국 불운한 사건을 암시했다.[25] 연료에 효율성 등을 위해 알루미늄이 혼합되어 있어 연소되면 찌꺼기가 발생한다.[26] 폭발 직후 연기가 직각으로 꺾였던 것도 이 윈드시어 때문이었다. 발사 30분 전, 발사지점 상공을 지나가던 항공기가 시속 300km급의 윈드시어를 만나 고도를 낮춘 것이 확인되며 원인이 규명되었다.[27] 우주왕복선 외부 탱크는 아래 2/3 가량은 수소탱크, 상단부는 산소탱크로 구분되어 있고, 두 탱크는 별도로 분리되어 있다.[28] 이후 파인만의 제자이자 199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더글러스 오셔로프는 STS-107 참사의 진상조사에 참여했다. 샐리 라이드 역시 챌린저 폭발 사고 이후 17년이 지나 컬럼비아 폭발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패널로 출연했다.[29] 현재는 M&A를 여러번 거치며 오비털의 일부가 되었다.[30] 디스커버리 우주왕복선 미션으로, 켄 매팅리가 사령관을 맡았던 국방부 기밀 미션이었다. STS-51-L의 희생자인 엘리슨 오니즈카가 처음 탑승했던 미션이기도 했다.[31]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참사가 발생한 후에도 '''타이오콜 사는 2차 계약을 성사'''시켰으며, "그럼 뭐 4월까지 기다리란 말이냐."라며 틱틱거렸던 NASA의 책임자 래리 멀로이는 '''승진'''했다.[32] 다만 figure 7에서처럼 수학적 분석이 틀리긴 했다. 사고 횟수는 낮은 온도와 높은 온도에 대해 별 차이가 없으며 우주선 기종의 표본이 제한적이므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긴 어렵다.[33] 1분 35초경부터 사색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34] 참고로 STS-118 미션은 원래 컬럼비아의 STS-107 다음이자 첫 ISS 방문이 될 예정이었다.[35] 우주 궤도의 저중력 상태에서 혼합물의 개별 요소를 분리하는 실험을 비롯해 다양한 내용들을 수업하는 것이 계획되어 있었다.[36] 원래, 1986년 전개되어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비록 훗날 STS-31 미션에서 전개되고 우주공간에서 빌빌대던 것을 생각하면 큰 일은 못했을 거라 볼 수도 있으나, 이 역사적인 우주 망원경의 첫번째 임무가가 우리은하 근방의 초신성 관측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너무도 크다.[37] 고압에 약한 사람이면 질식할 정도의 수준인 롤러코스터도 기껏해봐야 아주 순간적으로 2~4G정도밖에 안 된다. 훈련을 거친 우주 비행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5G 이상으로 넘어가면 호흡 곤란이나 블랙 아웃, 화이트 아웃 등이 오게 되는데, 퍽이나 낮은 수준인 3G 정도의 압력이라면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다.[38] 공교롭게도 챌린저호 참사 1개월 후인 1986년 2월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해당 곡의 녹음은 이미 그보다 앞선 1985년 중에 마무리된 상태였다.[39] 샐리 라이드나 닐 암스트롱 같은 NASA의 레전드 우주 비행사들도 NASA에서 시켜서 들어온 거고, 위원회의 여러 관료들도 행정부의 연줄로 들어온 조사관들이라 상호지간 높으신 분들 놀이나 한다.[40] 실제 많은 대형참사, 사건사고의 진실이 이런 식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현장 실무자들은 대부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등. 황우석 사건에서 보듯이 내부고발이란 게 정말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하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