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왜란
1. 개요
- 아래의 예상들은 경인왜란 연재 초기 작성되었으며, 예상과 빗나가게 된 부분도 포함돼 있다.
2. 왜란 전 상황
2.1. 조선
- 주인공은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정신옹주를 시집보내 사위로 삼는다. 둘째 옹주도 이순신의 아들 이면에게 시집보낸다.
- 임해군이 일본에 도착하자 하성군은 아들과 제대로 인사도 안 나누고 심지어 원균도 일본에 놔두고 급하게 귀국해서 일본이 진짜 침략 의도를 갖고 있음을 비변사 회의실에서 주인공과 조정신료들에게 알리며 대비를 촉구한다.
- 전쟁이 다가오는 것이 확정되자 주인공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명에 알리고, 대마도의 방어시설을 강화하고,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에게 나대용이 만든 거북선을 보낸다.
- 임해군은 노부나가의 회유에 넘어가 괴뢰 조선왕이 되기로 한다. 임해군은 노부나가의 '50만 대군', 가뭄과 역질 등으로 여론을 들쑤시면 충분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여담으로 실제역사에 투입한 일본군의 전체규모는 약 20만.
- 기세가 수그러든 역질에 대한 보고를 받던 주인공은, 종두 접종으로 우리 측 감염률을 0%로 만들고 어떻게든 일본군 내에 천연두를 유행시키는 세균전을 고안하고, 이항복과 의논하고자 한다. 하지만 너무 비도덕적인 데다가, 아직 우리 백성 중에도 종두를 안 맞은 사람이 많으니 우리 측에 피해가 생길 수 있다고 반대하여 세균전은 포기.
2.1.1. 왜란 대비에 대한 예상
- 실제 역사에서 정보 부족으로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점과 달리, 소설의 조선조정은 의견이 일치되었다는 점에서 대응할 시간이 훨씬 많다.
거기다 실제 역사에서는 선발대가 5만 정도였는데 이것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침략 규모 예측에 실패'했지만, 바뀐 역사에선 일본의 침략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가 거의 정확한 편이다.
여기에 이순신이 차례로 수군을 정리할 것이고, 귀화한 항왜들을 이용한 일본 남부 교란 작전도 얼마든지 전개할 수 있어서,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하게 한 상황에 역공까지 할 수 있는 점에서 조선에 꽤 유리하다...고 예상되었었다.
여기에 이순신이 차례로 수군을 정리할 것이고, 귀화한 항왜들을 이용한 일본 남부 교란 작전도 얼마든지 전개할 수 있어서,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하게 한 상황에 역공까지 할 수 있는 점에서 조선에 꽤 유리하다...고 예상되었었다.
2.1.2. 작중 세균전에 대한 의견
- 실제로 하고자 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하는 건 쉽다. 역질이 돌아서 이쪽은 병원균도 확보되었고, 전란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조선과 일본 간에 교역도 계속 되는 중이다. 거기다 남만선까지 들락날락하니 입단속만 잘 하면 주인공이 고의적으로 뿌렸다는 사실도 묻어버릴 수 있다.
- 만약 세균전이 시행되면 뜻하지 않은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일본은 종두가 없으니 피해도 크겠지만, 주인공이 매번 짜증나게 들었던 "군왕이 덕이 없으니 하늘에서 징벌을..." 운운하는 소리가 일본에서 나돌 수 있는 것. 이항복이 금위사를 시켜 퍼트릴 수도 있지만, 내심 오다에 반감을 가진 세력들이 유언비어를 퍼트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많다.
물론 오다 성격에 "내 탓이오~"라고 하진 않을 거고 유언비어 도는 동네를 족칠 게 틀림없는 데, 이러면 어떤 식이든 분란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더구나 일본은 고대에 천연두로 인구의 절반 가까이 죽었던 사례가 있다.
- 세균전에 대해서는 댓글에서도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쳐들어 온 일본이나 여진 등에 대한 정당한 반격이라는 찬성 측과, 민간인(심지어 조선인 포함)이 휘말릴 수도 있는 잔혹한 짓이며 아내인 상희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는 반대 측이 대립했다.
2.2. 일본
- 오다 휘하의 다이묘들이 지시에 따라 전선을 건조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가운데 가토와 고니시는 원래 역사에서처럼 치고받고 싸운다(...) 가토가 강원도 상륙을 주장, 고니시가 그쪽에 상륙해봐야 산맥을 넘어야 해서 반대.
그런데 사실 강원도 원산 근처엔 추가령 구조곡이라는 한양 직통루트가 있어서 조선과 빙산 입장에선 가장 위협적인 공격일 수도 있다.
단, '구조곡'이란 건 쉽게 말해 '골짜기'이며, 어쨌든 '산지지형'이다. 아무리 익숙해도 쉽게 진군할 수 있는 지형은 아니다. 게다가 조선시대에 '호환'은... 호환(재해)#s-3, 해수구제사업#S-2.1.1 문서 참고.
단, '구조곡'이란 건 쉽게 말해 '골짜기'이며, 어쨌든 '산지지형'이다. 아무리 익숙해도 쉽게 진군할 수 있는 지형은 아니다. 게다가 조선시대에 '호환'은... 호환(재해)#s-3, 해수구제사업#S-2.1.1 문서 참고.
- 한편, 가톨릭 주교 루이스 프로이스의 주선으로 오다에게 6척의 갈레온을 판매하고 각종 서양 화포를 판매하기로 한다. 여기선 치트공이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는 자리에 미리 앉았고, 실제 역사보다 강력한 거북선[1] 을 보유했기 때문에 실제 역사대로 왜선들만 오면 아예 상륙도 못하고 전부 수장 확정이다. 과거의 원정으로부터 발생한 붉은 여왕효과인 듯.
이는 전후의 가톨릭 입장에선 최악의 사태가 될 수도 있는데, 가톨릭 주교가 전쟁에 자발적으로 적극 협력했다는 것이 조선에 알려지면, 기껏 자리를 잡을까 하던 천주교는 매국노 종교로 낙인찍히고, 대대적 탄압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주인공은 가톨릭 덕분에 인도에서 수입하는 화약 재료들인 염초, 철 그리고 각궁용 물소뿔도 잔뜩 수입해 온 것이니 계속 보호하기로 하지만, 여차하면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더 일찍 시작될 수 있다. 정조처럼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넘길 수도 있지만, 정조 사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
주인공은 가톨릭 덕분에 인도에서 수입하는 화약 재료들인 염초, 철 그리고 각궁용 물소뿔도 잔뜩 수입해 온 것이니 계속 보호하기로 하지만, 여차하면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더 일찍 시작될 수 있다. 정조처럼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넘길 수도 있지만, 정조 사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
- 한편, 노부나가는 인천에 갈레온 부대를 투입하기로 하는데... 그냥 강 입구만 막아도 된다고 본다.
인천은 뻘밭이 많아 인천에 와봤자 썰물로 인해 노획, 내지는 자침감이고, 보병은 갯벌에서 사거리 밖에서 퍼붓는 강선조총에 오마하 해변의 미군 꼴이 날 것이라는 것이 댓글들의 중론.
- 본 역사보다 군사력이 훨씬 강하다. 본 역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 사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싸우거나 불복종한 사무라이들이 모두 오다 노부나가를 중심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전투가 줄어들어 보다 많은 군사와 배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도쿠가와 이에야스부터 오다 노부나가에게 배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등 본 역사보다 더 협조적으로 나와서 일본군 전력은 훨씬 커지게 되었다. 이 부분은 작가의 일본 버프라고 볼 수 있다.
3. 경인왜란
3.1. 왜군의 기습 선제공격
- 1590년 경인년 4월 12일. 드디어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왜군 제 1진이 조선 침공을 개시하는데, 첫 상륙 위치가 주인공과 조선 측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전라도 고흥 발포진이었다!
3.2. 왜군의 연승과 하남벌의 패전
- 초반부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일본군은 승승장구한다. 일단 조선의 주력군은 전부 북방에 몰빵된 상태라 실전경험과 무장이 미비한 남방군으로는 일본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 조선이 대비를 열심히 했지만 가장 공들였던 부분은 아무래도 수군과 몇몇 주요 성채 보수였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가장 공들인 대구성 방어부분과 수군의 조직개편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했지만 나머지는 시간이 부족했다.
- 강원도와 연해주 지역은 지역특성으로 인해 주인공이나 다른 사람도 거의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결국 전쟁의 승패는 전라도로 쳐들어온 10만군과 경상도로 쳐들어오는 오다군의 본대로만 결정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수군은 연이은 승리와 함께 적선을 상당히 쳐부수며 활약했지만 아무래도 육군의 전투에선 시종일관 밀리는 추세였다.
- 결국 전라도 지역은 전주성까지 밀렸고 경상도 지역은 동래부 함락과 동시에 조선의 주력군중 하나인 오위군이 괴멸에 가까운 패전을 하며 조선군은 그야말로 아찔한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 패전으로 인해 주인공은 조선군의 최정예군인 북방군을 남하시킨다.
3.3. 조선의 반격
- 북방군의 남하와 주인공의 친정이 실시되며 본격적인 반격의 불이 오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주인공이 공들여 설계했던 대구성과 전주성에서 각각 사나다 마사유키와 이일이 우주방어를 펼치며 적의 대군을 묶어놓고, 뒤이어 권율이 북방군을 이끌고 내려와 단밀현 전투에서 기념할만한 승리를 이룬다.
- 수군은 이순신의 지휘 하에 적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입혀 보급에 엄청난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이에 초조해진 왜군이 별동대를 만들어 보냈고 이를 주인공이 친정한 논산에서 엄청난 대첩을 거두며 마침내 결정적인 승기를 잡게 된다.
- 결국 왜군은 후퇴를 결심하며 마지막 일발역전을 노리지만 결국 그마저 주인공에게 간파당해 히데요시 휘하 군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대가 도감군과 경상병영군, 북방군에 의해 격파당하고 결국 총대장 오다 노부나가는 자폭하고 조선은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3.4. 경인왜란 개전 후 사건 연표
월일은 조선에서 사용하는 태음력 기준이다.
- 4월
- 12일 - 1군 고니시 발포진 상륙, 흥양현 점령.
- 13일 - 2군 가토, 후쿠시마 흥양 상륙. 적침 소식 봉수대로 도성에 전달.
- 14일 - 이순신, 적침 소식 접수.
- 15일 - 2군 전라도 본도 진입. 적침 보고 장계 도성에 도착.
- 16일 - 도성 잔류 도감군 전라도로 이동 명령. 경상우수군 파견대 전라좌수영 도착.
- 17일 - 가토 순천부 공략 개시.
- 18일 - 도감군 선발대 전주로 출발. 강진병영 함락.
- 19일 - 전라우수군 적 정찰대 조우. 다테군 연해주 중부 표착.
- 20일 - 이항복, 도성에 복귀. 전라좌수군 적 함대 및 해안포대와 교전. 가토군 순천부 공략 포기. 후쿠시마군 영암성 함락. 노부나가, 원전의 수급 접수.
- 21일 - 천주교도들 요새 건설 자원. 전라수군 적 함대를 협격, 히데요시군 흥양 도착.
- 22일 - 오위군 도성 출발, 목적지는 충주. 부역자가 되었던 하성군의 서기가 전라좌수영에 귀순. 경상우병사가 여수 방어를 위해 원군을 보냄. 일본군과 수전 벌임.
- 23일 - 도감군 전주 도착. 다테군, 조선 에조치 교역선단 조우.
- 24일 - 도성에서 임해군이 왜적과 결탁해서 역모를 벌였다는 장계 접수.
- 25일 - 가토군, 남원성 공격 개시. 연해주 관찰사 정효신 개전 소식 접수.
- 26일 - 오위군 충주 도착. 회령포 함락, 왜군 4번대 고바야카와군 흥양 도착.
- 28일 - 충청수영, 이틀 전 수상한 남만선들이 지나갔다고 보고. 왜 수군 흥양에서 철수. 오위군 충주에서 상주로 이동. 도감군 송하강 도하, 속말주 남하 .
- 29일 - 남만선 벽란도 입항. 일본군 5번대 대마도 진공 개시.
- 5월
- 1일 - 가토군 남원성 공략 포기 후 대치. 일본군 5번대 대마도 해안 점령.
- 2일 - 오위군 상주 도착 .
- 3일 - 경기수영, 남만선들과 교동도 해전. 일본군 남원 봉쇄 후 전주로 진격 개시.
- 4일 - 노부나가 본대 6/7/8번대 나고야 출정.
- 6일 - 전주성 공방전 개시. 일본군 6번대 부산진 함락. 7번대 경상우수군과 거제도 해전.
- 7일 - 유성룡 아침에 도성 출발. 전주성에서 가토와 정무수 결투. 일본군 6번대 동래성 전투 개시. 일본군 7번대 다대포 함락. 도순찰사 권율 휘하 북방군 및 유극량 휘하 도감군 철수 진행 중, 월말 도착 예정.
- 8일 - 일본군, 동래성 외곽에 토산 구축 개시
- 9일 - 유성룡 저녁에 대구 도착, 오위군과 합류. 경상우수군 다대포 공격 및 서평포 구출, 절영도 해전 실시. 일본군 9번대 5만 병력 부산 도착.
- 10일 - 경상좌병영군 동래성 구원차 울산 출발.
- 11일 - 동래성 함락, 경상좌병영군 패퇴. 우에스기군 강릉 도착. 다테군 나홋카 도착. 고바야카와군 전라도 초토화 개시. 경상우수군 낙동강 하구에서 왜선 17척격파
- 12일 - 오위군 대구 출발-청도 도착, 양산 함락, 강릉성 항복, 10군 5만 부산 도착, 경상우수군 낙동강 하구에서 왜선 8척 격파, 요시아키군 야간에 낙동강 도강 성공
- 13일 - 오위군 밀양도착, 삼랑진 함락, 경상우수영 전선50척 출격하여 왜선 64척 격파, 포대 3개 파괴, 10군 도착상황 목격, 해삼위 순찰선 정박 중인 다테군 발견
- 14일 - 오위군 호소카와군 격파, 요시아키군 와키자카 구출, 경상우수영 낙동강 하구 봉쇄 및 본도 진포 거제도로 피난
- 15일 - 천주교도 1천명 자원입대. 하남벌 전투, 신립전사. 요시아키군 마산포 점령, 경상우수영 상동
- 16일 - 다테 마사무네, 해삼위에 사절 파견, 경상우수영 상동 및 등선군 흥양 파견
- 17일 - 경상우수영 상동
- 18일 - 유성룡이 올린 하남벌 전투 장계 도성 도착, 왜 7군 함안 진입+광암항점거, 경상우수영 상동. 11군5천 도착(잔여 4.5만)
- 20일 - 팔레데스가 위령미사 승인을 청함, 임꺽정과 등선군이 야간에 흥양 탈환, 왜7군 의령 출현 5군 1.2만 수송 개시(오위군 포로 대마도 수송 개시)
- 21일 - 북방군 귀경, 군인 위령미사, 하시바군 전주 철수 개시, 곽재우 의령에서 첫 왜군 공격
- 22일 - 백성 위령미사, 원각사 추도 법회, 곽재우 의령에서 첫 왜선 공격. 경기수영 대전선/거북선 경상도로 출격 명령, 일본군, 대구성 도착.
- 23일 - 이순신 70척으로 부산포 출격. 왜선 83척, 포대 4개소 격파
- 24일 - 도감군 귀경, 전략회의. 11군 5천 도착(잔여4만)-사타케군 포함.
- 25일 - 정문부 관찰사의 명으로 다테진 방문. 오다, 대구성 1차 공성.
- 26일 - 전라좌수영 한산도 합류
- 27일 - 친정군 도성 출발. 하시바군 남원 도착. 이순신 80척으로 부산포 출격, 왜선 72척/포대 5개소 격파. 11군 5천 도착(잔여3.5만)
- 28일 - 일본군 고성군 외곽 도착
- 29일 - 이순신, 대마도 공격명령 접수
- 30일 - 친정군 이천 도착. 사타케군 울산 도착. 전라우수영 한산도 합류.
- 6월
- 1일 - 유성룡, 조경과 출격 논의. 서산대사,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회견.
- 2일 - 친정군 장호원 도착, 신립의 영구를 맞이함. 후쿠시마군 남원에서 하시바군에 합류. 11군 5천 도착(잔여3만)
- 3일 - 친정군, 신립에 대한 영결식 거행. 일본군 5군 대구 도착. 경기수영 대전선/거북선 한산도 합류. 4수영 통합 환영연 거행.
- 4일 - 고니시 낙안 방문. 신천 둑 개방, 대구성 공격하는 일본군 참호 침수.
- 5일 - 11군 5천 도착(잔여 2.5만)
- 6일 - 견서사, 마닐라 도착. 하시바군, 가토를 후위로 두고 남원 이탈. 고경명 전사. 권율, 상주 도착.
- 7일 - 노부나가, 예하 전 병력에 조선에 대한 전면적인 약탈 및 파괴를 명령. 안위, 부산진 정찰 후 귀환.
- 8일 -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휴전 요청, 주인공에게 도착.
- 9일 - 칙사 이지충, 이산해와 함께 벽란도에 도착. 연합함대, 처음으로 한산도에서 합동으로 출격하여 왜선 127척을 파괴. 11군5천 도착(잔여2만)
- 10일 - 견서사 일동, 추후 행동방침을 결정. 칙사 이지충 한양 도착.
- 13일 - 친정군 충주 도착
- 19일 - 권율의 단밀현 전투, 김시민군의 진주성 전투
- 22일 - 이순신의 대마도 상륙 작전 개시
- 28일 - 칙사 이지충 한양 출발.
- 29일 - 친정군, 도감군 6천명을 전라도 탈환군으로 파견
- 7월
- 5일 - 견서사 벽란도 도착
- 24일 - 전라도 탈환 완료
- 8월
- 4일 - 한산도 해전
- 15일 - 논산 전투
- 19일 - 논산 전투에서 도주한 일본 패잔병, 대구의 일본 본진에 합류
- 20일 - 국경인, 임해군을 동반하여 일본 진영에서 도주
- 21일 - 친정군, 경상도로 진격
- 27일 - 일본군, 대구성 공성을 포기하고 철수.
- 9월
- 12일 - 하시바군 오다를 버리고 도주, 오다가 주둔한 동래성 함락, 오다 노부나가 사망.
- 14일 - 일본에서 퇴각 함대 도착, 하시바군 퇴각, 후위 부대인 타치바나 무네시게 투항. 경인왜란 종료.
3.5. 주요 전투
- 남원성 전투
- 거제도 해전
- 전주성 전투 [2]
- 진주성 전투 [3]
- 부산진 해전
- 동래성 전투
- 밀양강 전투 [4]
- 대구성 전투 [5]
- 단밀현 전투 [6]
- 대마도 상륙작전
- 한산도 해전 [7]
- 논산 전투 [8]
- 제2차 동래성 전투
4. 결과
- 개전 151일만의 조선의 승리. 물론 실제 역사도 조선의 승리이긴 하다. 7년간의 전쟁으로 후유증이 심각했을 뿐.
- 전후 집계로, 조선이 잡은 일본군 포로는 육군과 수군을 합쳐 총 7만 5천에 달한다. 비전투원이 4만, 아시가루 이상이 3만, 사무라이 이상이 5천 가량이다.
-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2천척이 넘는 일본 함선을 침몰하거나 나포했으며, 전투로 수몰시키거나 포로로 잡은 일본군이 14만 5천에 달한다.
- 실제 역사에서는 일본군이 단 20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기간은 그 일곱 배가 넘게 지났는데 점령은 절반도 못했다가 물러났다. 거기에 일본군은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지휘관급만 하더라도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해 대다수의 주요 무장들과 다이묘들이 줄줄이 전사했다. 병력의 피해도 엄청나며[9] 특히 수군의 경우에는 사실상 와해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정도다.
- 일본은 조선으로 건너가서 귀환하지 못한 인원-전사자, 탈주병, 포로, 비전투인원, 수몰된 인원, 병사자 등등-을 총합하면 50만에 가까웠다.
- 또한, 이번 전쟁으로 인한 조선의 피해는 실제 역사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데 일단 한양이 함락당하지 않아서 경복궁이 보존되었으며, 경주도 함락당하지 않아 불국사도 불타지 않는 등 문화재는 대부분 멀쩡하다. 또한, 주인공이 피난을 떠나지 않아서 선조 때에 비해 왕권도 매우 강하다. [10]
- 이 전쟁이 임진왜란보다는 피해가 확실히 적지만, 그래도 조선의 최대 곡창 지대인 삼남 지방이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면서 조선은 식량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식량을 수입하기 위해 안남과 섬라와 교역을 시작하게 된다.
5. 전라도 루트에 대한 개연성 논쟁
- 댓글이나 작가가 갤주인 디씨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는 왜군의 기습공격 대목이 가장 개연성 없다고 비난받고 있다.
이러한 비난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일단 이미 대마도를 조기경보 기지화하기까지 했는데 소수의 왜구도 아니고 대병력이 해상 이동하는 것을 이순신이 놓쳤을 리가 없다는 의견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육군 예비역 중심인 한국 남성 독자들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작중 시점은 1590년, 16세기다. 이 당시 해상초계는 완전히 육안에만 의지해야 했고, 상희가 렌즈 기술과 천리경을 개발하긴 했지만 아직 초기단계다. 인류역사상 인력 견시의 수준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2차 대전 일본 해군도 야간에 식별은 8km 정도가 한계였고, 현재 해군의 참수리 견시가 함교 쌍안경으로 식별 가능한 거리를 대강 5천 야드 정도로 잡는 것을 생각하면 판옥선 맨눈 탐망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도 남을 것이다. 대마도를 조기경보 기지로 만들었다 쳐도 그건 어디까지나 동래 방면 침공에나 유용하지, 고토를 거쳐 전라도 방면으로 돌아들어가는데 대마도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결국 전라좌수군이 현지 초계로 침공군을 잡아내는 수밖에 없는데, 레이더나 근대식 통신시설이 있는 2차 대전 당시에도 해무나 야음을 틈타 지근거리의 적을 지나치거나 역으로 미리 피하지 못하고 맞닥뜨리는 해프닝이 한두 건이 아니다.
아무리 이순신이 통제사래도 경상우수사를 겸직하기 때문에 거제에 있고, 미래지식을 가진 주인공조차 경상도 쪽만 눈이 벌개져라 주시하는 상황에서, 타 장수들이 이순신급이라고 쳐도 해무 짙게 깔리는 새벽때의 전라좌도 해안으로 선공은 놓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천안함 피격사건과 관련하여 한미연합해군이 태안반도에서 훈련 중 이었다는데 어떻게 북한군을 발견 못할 수가 있죠?라는 음모론과 비슷한 수준의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애초에 탐지가 불가능한 것을 왜 탐지 못하냐고 악을 쓰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또한 고토 열도 해적들 주요 침략루트가 전라좌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발포가 쉬이 함락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애초에 을묘왜변의 주전장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의 주 무대도 전라도 지역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육군 예비역 중심인 한국 남성 독자들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작중 시점은 1590년, 16세기다. 이 당시 해상초계는 완전히 육안에만 의지해야 했고, 상희가 렌즈 기술과 천리경을 개발하긴 했지만 아직 초기단계다. 인류역사상 인력 견시의 수준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2차 대전 일본 해군도 야간에 식별은 8km 정도가 한계였고, 현재 해군의 참수리 견시가 함교 쌍안경으로 식별 가능한 거리를 대강 5천 야드 정도로 잡는 것을 생각하면 판옥선 맨눈 탐망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도 남을 것이다. 대마도를 조기경보 기지로 만들었다 쳐도 그건 어디까지나 동래 방면 침공에나 유용하지, 고토를 거쳐 전라도 방면으로 돌아들어가는데 대마도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결국 전라좌수군이 현지 초계로 침공군을 잡아내는 수밖에 없는데, 레이더나 근대식 통신시설이 있는 2차 대전 당시에도 해무나 야음을 틈타 지근거리의 적을 지나치거나 역으로 미리 피하지 못하고 맞닥뜨리는 해프닝이 한두 건이 아니다.
아무리 이순신이 통제사래도 경상우수사를 겸직하기 때문에 거제에 있고, 미래지식을 가진 주인공조차 경상도 쪽만 눈이 벌개져라 주시하는 상황에서, 타 장수들이 이순신급이라고 쳐도 해무 짙게 깔리는 새벽때의 전라좌도 해안으로 선공은 놓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천안함 피격사건과 관련하여 한미연합해군이 태안반도에서 훈련 중 이었다는데 어떻게 북한군을 발견 못할 수가 있죠?라는 음모론과 비슷한 수준의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애초에 탐지가 불가능한 것을 왜 탐지 못하냐고 악을 쓰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또한 고토 열도 해적들 주요 침략루트가 전라좌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발포가 쉬이 함락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애초에 을묘왜변의 주전장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의 주 무대도 전라도 지역이었다.
- 그리고 길안내를 맡은 고토 해적들은 과거 무종, 명종이 파병한 여진족의 규슈 약탈 당시 고토 열도로 피난한 일본인의 후손들이었다. 과거의 약탈이 나비효과로 돌아온 셈.
- 애당초 주인공과 비변사 신료들이 '왜군의 목적은 단순히 조선을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정복을 위해 공격해 오는 것이다' 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상도로 주공이 올 것임을 확신한 것이다. 정복을 위한 대규모의 병력을 상륙시켜서 병참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곳은 경상도 뿐이기 때문. 전라도에 일본군이 상륙하자 주인공은 자기가 예측을 잘못한건가 하고 심하게 멘붕하지만, 정작 이항복과 이순신은 전라도에 상륙한 군은 페이크라는 확신을 계속 지켰다. 이항복은 멘붕한 주인공에게 주공이 경상도로 올테니 자책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이순신은 경상도로 주공이 다시 올 것이니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경상수영의 전선들을 전라도 지원으로 보내지 않고 유지했다. 실제로 이 공격루트는 그냥 눈을 돌리기 위한 오다의 하나의 페이크 공격이었고, 조선에서는 제대로 대비를 못했음에도 손쉽게 병참을 끊어서 이 진공로에 들어온 히데요시군은 부족한 병참으로 인해 큰 곤욕을 치루었다.
- "작 중의 조선인들은 왜 아무도 그걸 예측하지 못했냐"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전에 유성룡이 비변사에서 '황해 해안선을 따라 적이 북진하고 조운로를 봉쇄할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히데요시 군의 주목적은 조창을 털어 조세가 한양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것이었으며, 전주성을 개축한 것도 유성룡이 제시한 가능성을 염두해서 기본적인 조치는 해두자는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주인공이 미래 지식과 이순신을 믿고 '일본이 그런 작전을 짜도 이순신이 해로를 차단하면 금방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며 경상도에 더 몰빵했을 뿐. 현실에서는 이순신이 전라수영에 있어서 실제로 전라도 측 보급을 끊어버렸지만, 주인공은 자기가 이순신을 경상수영에 배치해놨다는걸 새까맣게 까먹은듯(...). 다행히도(?) 이순신이 없는 전라수영의 전력만으로도 전라도 측 일본군의 보급을 끊는데 성공했다. 전라도 측 수영과 병영에는 '차후에 경상도로 왜군이 쳐 들어올 것이니 경상도 도와줄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식으로 귀뜸이 내려가 있었다. 팬덤에서는 이 부분이 좀 많이 과장되어서 '원래 하던 방비도 풀고 있어도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오해가 좀 커져있는 부분.
- 게다가 자세히 보면 일본군 함대가 규슈 서부 혹은 남부에 집결 중이었다는 암시도 여럿 있다. 일기도와 대마도 및 일본으로 간 조선 상인들은 규슈 북부에서는 일본군의 특이 동향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하며, 오다는 '자신은 류큐를 거쳐 강남에 상륙하고 조선왕은 한편으로 끌어들여 요동을 치게 하는' 작전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조선이 대놓고 거부하자 그제야 조선을 정벌하는 것으로 계획을 선회하며, 오다가 조선 침공을 시작하는 와중에도 조선측은 규슈 북부에서 특이 동향을 발견하지 못한다. 류큐를 통해 강남으로 진군하는 것이 본 목적이었던지라 규슈 서부에 일본군이 집결해있었던 것이며, 그대로 규슈 서부에서 출항하고 크게 우회해서 전라도로 상륙했기 때문에 조선군이 발견하지 못한 것.
6. 여담
[1] 크기도 커지고, 철판을 두르고(프로토타입 당시에는 옻칠을 했지만, 비용문제에 따라 철판으로 대체), 무기도 보강되었다.[2]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초반의 승세를 잃게 되고, 충청도를 통한 한양 점령은 물건너가게 된다.[3] 실제 역사와 달리 그리 전세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4] 이 전투로 오위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신립도 전사하여 주인공이 북방군을 남하시킨다. 연재본에서는 하남벌 전투이지만 단행본에서는 밀양강 전투이다. 작가가 직접 단행본이 정사라고 하였으므로 밀양강전투로 고친다.[5] 이 전투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의 본대가 경상도 이남에만 머무르게 되었다.[6] 수성전이 아닌 제대로 된 유지전투의 첫 승리.[7]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전투1. 이 전투로 적함 850척을 불태우고 나포했다. 이 전투에 일본수군은 세토내해의 함선까지 총동원했으나 궤멸하여 조선이 반격원정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8]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전투2. 이 전투로 일본군은 사실상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9] 히데요시 휘하의 별동대와 다른 몇몇 소부대, 강릉에 주둔했던 부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병사들이 전사, 포로가 되었다.[10] 또한, 한양이 점령당하지 않았으니 성종의 왕릉도 도굴당하지 않고 무사할것이며,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지 않아 현실의 일본 도자기의 토대가 되었던 조선 도자기 제작 기술이 유출되지 않았다.(이러면 일본의 도자기사업은 현실에 비에 훨씬 뒤쳐지겠지만, 조선은 일본 대신 유럽에 도자기를 독점적으로 팔아먹어 이득을 챙길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