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규(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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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출생
1925년 9월 12일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묘동
(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1]
사망
2014년 5월 3일 (88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본관
순천 박씨[2]

송산(松山)
재임기간
제13대 후반기 국회의장
1990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제14대 전반기 국회의장
1993년 4월 27일 ~ 1994년 6월 28일
제15대 후반기 국회의장
1998년 8월 3일 ~ 2000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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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배우자
조동원
자녀
아들 박종보
딸 박종현, 박종란, 박종순
학력
경북중학교 (졸업 / 25회)
마쓰야마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정치학 / 학사)
브라운 대학교 (국제정치학 / 석사)
소속 정당
[21]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5, 6, 7, 8, 9, 10, 13, 14, 15
약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교수
부산일보 사장 겸 발행인
민주공화당 정책위의장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국회 외무분과위원장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의원
민주자유당 상임고문
제1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제14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제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1. 개요
2. 생애
3. 선거이력
4.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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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정계에서 유일하게 지역구에서만 9번 당선된 국회의원이자 유일의 3선 국회의장을 지낸 대한민국정치인.
사육신 박팽년의 직계후손으로,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회장의 처조카이고 백남억의 손아래 처남이기도 하다.

2. 생애


1925년 9월 12일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묘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서 출생하였다[3].
경북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마쓰야마고등학교를 거쳐 구마모토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편입하였다가, 법문학부 정치학과로 전과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 후 서울대학교 강사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조재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조병옥의 비서관이 되면서 민주당에 발을 들였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성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4.19 혁명 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으며, 같은 해 말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 군부가 창당한 민주공화당에 합류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신민당 정운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으나, 같은 해 10.2 항명 파동으로 김성곤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치러진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 선거구 재보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경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박주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9년까지 민주공화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종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북고 후배인 노태우의 요청으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목요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88년 12월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으로 임명되어 1년 동안 재임하였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1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4대 국회가 개원하자 13대 후반기에 이어 다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후 공직자 재산 공개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고 국회의장 직과 의원 직을 모두 사퇴하였다.[4]
1995년 김종필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합류하여 당 최고고문이 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 후보로 대구광역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유성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DJP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다.[5][6]
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자민련의 국회의장 단일후보로 지명되었고, 경선에서 무려 3차 투표까지 간 끝에 의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장 3선의 고지에 올랐다. 한편 한나라당에서는 오세응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고 조순 총재 이하 지도부 전원이 국회의장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후유증을 겪었다.
15대 국회 임기 종료와 동시에 정계를 은퇴했으며, 2014년 5월 3일 세상을 떠났다. 또한 공직자 자격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김영삼, 김종필과 함께 2019년 현재 단 3명뿐인 최다선 의원 타이기록(9선)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3명 중 유일하게 지역구로만 9선을 한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다.[7]

3.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6선거구[8]
무소속
6,720 (12.69%)
낙선 (3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10선거구[9]
민주당
8,805 (27.24%)
낙선 (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20,835 (71.64%)
당선 (1위)
초선[10]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6선거구[11]
민주공화당
22,302 (32.20%)
재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37,604 (41.11%)
3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7선거구[12]
33,026 (35.32%)
낙선 (2위)

1971
1971년 재보궐선거[13]
경북 10선거구[14]
44,738 (45.55%)
당선 (1위)
4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7선거구[15]
34,559 (25.24%)
5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8선거구[16]
57,526 (36.18%)
6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동구
민주정의당
85,854 (54.92%)
7선[17] 하반기 국회의장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동 을
민주자유당
35,083 (50.07%)
8선 상반기 국회의장[18]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중구
자유민주연합
17,631 (33.26%)
9선 하반기 국회의장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54 - 1955
정계 입문

1955
입당

1955 - 1960
합당[19]

196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60 - 1961
창당

1961 - 1963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정당 해산

1963 - 1980
창당

1980 - 1987
정당 해산

1987 - 1990
입당

1990 - 1995
합당[20]

1995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95 - 2000
창당
정계 은퇴

2000 - 2014
탈당
[1]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용규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사육신 박팽년 직계후손.[3] 일명 '묘골마을' 이라하는 순천 박씨 집성촌. 현재 묘골에 있는 박팽년사육신을 모신 육신사 앞에 그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4]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 갈등을 빚었는데 박준규는 수십년간 친구로 지내온 김영삼이 원래부터 큰부잣집에서 태어나 재산이 많았던 자신의 사정을 잘 알면서 정치적 의도로 가지고 몰아붙인다여겼고 몇년뒤 정권 중반에 접어들면서 지지율이 하락하며 아쉬워진 김영삼이 청와대 회동을 제의하며 손을 내밀었을때도 거절하였으며 나중에는 역시나 김영삼정권에서 험한 꼴을 당했던 박태준과 함께 김대중을 지지하기에 이른다.[5] 이는 박준규가 1공화국과 2공화국 시절 김대중과 함께 민주당에 몸을 담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 기인한다.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박준규는 여당으로, 김대중은 야당으로 진로를 달리 했지만 인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박준규의 활약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상승하는 데(8.7%에서 13.1%로 상승) 기여했다.[6] 후일 김영삼 정권 출범 직후 상술한 재산공개파동으로 청와대로부터 국회의장직 사퇴에 몰릴때 정작 김대중은 한나라의 국회의장을 저런식으로 대우하는건 옳지 못하다고 여겨 평민당의원들에게 박준규를 과하게 비난하지 말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대해 박준규가 매우 고마워했다고 한다.[7] YS는 14대 전국구를, JP는 8대 전국구, 9대 유정회, 16대 전국구 의원을 지냈다.[8] 달성[9] 달성[10] 1960년 탈당
신민당 창당
1961.5.16 자격정지(5.16 군사정변)
[11] 성동 을[12] 성동 을[13] 전임자 김성곤 10.2 항명 파동으로 의원직 사퇴[14] 달성, 고령군[15] 달성, 경산, 고령[16] 달성, 경산, 고령[17] 1991년 3당합당[18] 1993.6.30 사퇴,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파동[19] 민주당에 흡수 합당[20]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