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준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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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일제 때 징병 당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군사집단.
1945년 8월 17일 귀환장병대로 출발하여 그해 9월 7일 국군준비대로 이름을 바꾸었다.[1] 주요 간부진으로 총사령 이혁기(李赫基)[2] , 부사령 유치옥(兪致玉), 참모장 최영(崔榮), 경리부 이재복(李載馥), 정보부 장도용(張道用), 훈육부 김한영(金漢永), 감찰부 송태익(宋泰翊), 서무부 김철구(金徹龜), 외교부 연정(延禎), 계몽부 이영호(李永鎬), 위생부 차성기(車星基) 이다.
사실상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 국방경비대보다 빨리 결성된 군사집단인 것이다. 상비군 1만 7천, 예비군 7만의 숫자의 규모였다고 하니 1개 연대 규모로 시작한 조선 국방경비대보다 훨씬 규모에서도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외에도 학병동맹[3] , 해방병단[4][5] , 육해공군출신동지회[6] 등 다양한 크고작은 군사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1978년 경향신문 기사 집계로는 남한에만 96개에 달하는 군사단체가 있었다.
각 단체마다 "새로운 독립국가의 군대"를 표방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창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로서 공화국인 조선[7] 의 군대가 될것이라는 희망을 '''저마다''' 품고 있었다. 그래서 해방된 조국의 군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너나할것 없이 군사단체를 서둘러 만들게 된 것.
그러나 미군정은 이러한 단체들의 움직임을 용인하지 않았다.[8] 1946년 미군정에 의해 기존의 단체들 중 문제가 있는 단체들은 해체당하고,[9] "남조선 국방경비대 설치법"이 마련되어 온건한 군사단체는 존속되거나 국방경비대에 흡수된다. 이후 국방경비대는 대한민국 국군으로 발전한다. 심지어 1946년 초 환국한 광복군도 해체되어 국방경비대에 흡수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군준비대 또한 "치안을 문란케 하였다"는 이유로 1946년 1월 20일자로 군정당국이 사설군사단체 해체령을 발포하면서 해체당했다. 일부 인원은 국방경비대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한편, 1946년 2월, 국군준비대원 4명이 요인 암살을 위해 우미관 부근에서 밀회하다 종로경찰서에 의해 검거되기도 하였다.
흔히들 알려져 있기로는, 국군 창군 초기의 인원들에 의한 증언이나 소설 혹은 드라마에 따라, 국군준비대가 좌익계열 무력단체였기 때문에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신탁통치 반대''' 노선#이었기 때문. 생각보다 다양한 계열의 인물들이 구성원으로 존재[10] 했으며, 좌익계 인물부터 구 일본군에 만주군 출신까지 고루고루 망라되어 있었다고 한다. # 그러니까 따지자면 "반탁 중도파"인 셈.
게다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이 각 지역에 설치한 지역 인민위원회[11] 를 지지했다. 이러니 미군정과 충돌할 수밖에....
어쨌거나 야인시대의 내용들은 이런 김두한의 주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탓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태클을 걸어야할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실제 역사와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작가가 핍진성과 개연성도 고려하지 않은 탓에 전개가 제정신이 아닌 것은 덤.
드라마에선 박헌영의 주도로 창설된 그야말로 악의 조직이며, 언젠가 무장봉기를 일으켜 남한을 적화시키기 위해 세력을 키워나간다. 미군과 경찰에서도 이들을 찝찝하게 여겨 당장 해체하라고 압력을 넣었으나, 반응은 당연히 "귤."[12] 백의사와 경찰은 이런 국군준비대가 당연히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고 김두한에게 의뢰해 국군준비대를 박살내라고 지령을 넣는다.
김두한과 우미관 패거리는 국군준비대를 박살내기 위해 백의사에게서 무기를 수령받아 사격훈련을 하고, 그와 동시에 김무옥과 일부 부하들을 별동대로 보내 신불출을 납치하게 만들었다. 조선청년전위대에서는 대한민주청년동맹 창설식을 지켜보느라 감시가 느슨해져 있었기 때문에 김두한의 의도는 척척 들어맞게 된다. 철저한 준비나 계략도 없이 그저 한나절 사격훈련을 받고, 게다가 싸움 직전에 용기를 불어넣는답시고 술[13] 을 마신 주먹패 수백명을 가지고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있던 무장단체[14] 를 하룻밤 사이에 쓸어버린다는 계획 자체가 말이 안되긴 하지만 야인시대에서 이런 경우가 한 둘이 아니니 넘어가자(...)
대한민청 창설식이 끝나고 김두한은 부하들을 집결지로 각자 모이게 만든 후에 밤에 경찰의 묵인하에 국군준비대를 습격한다. 처음에는 총을 사용하지않고 제압하는걸 최선으로 여겼기에 공산당 간부로 변장하고 국군수비대 병영 안에 침투한다. 작전계획을 세울때 국군수비대의 지휘부가 중앙에 있어 들어가기 쉽지 않을거라 걱정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정작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휘부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정문의 보초가 김두한 일행을 의심하긴 했으나, 뒤에서 보초를 기습해 기절시켜버린지라 아무런 제재없이 지휘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그런데 정작 본부로 들어가는데 까지만 계획을 잡았지 그다음에 뭘 할건지는 전혀 계획에 없었는지 소속을 묻는 당직사령의 말에 별다른 대꾸도 없이 폼만 잡으며 껄렁대기만 하다[15] 정체가 바로 들통난다. 당직사령은 권총을 겨누었다가 문영철에게 얻어맞는데, 당직사령이 김두한이 왔다며 부대원들에게 알리는데도, 김두한 일행은 당직사령을 쫓아가서 제압할 생각도 안하고 그냥 멀뚱히 있었고, 결국 당직사령을 눈앞에서 놓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적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해 완전 포위당한다. 그렇게 본부에 고립되어 국군준비대의 총격을 받지만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청의 대원들 덕분에 국군준비대와 전투에서 승리하고 시설을 전부 폭파시킨다.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전향서를 쓰게하고 쫓아냈다.
그리고 김두한 패거리가 퇴각한 후, 뒤늦게 전위대, 미군, 기자들이 도착하고, 전위대, 미군, 기자들은 참혹한 시체들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워태커 소령은 반드시 김두한을 잡아넣겠다고 결심했고, 최동열은 학살자가 돼버린 김두한을 보면서 통탄을 금치 못했다. 정진영과 전위대원들은 김두한의 테러짓에 이를 갈면서 복수를 다짐한다.
후에 김두한이 미군에게 체포되고 나서 경찰에서 수사에 들어갔으나 오히려 경찰에서는 국군준비대가 선빵을 때렸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버린다.[16] 이 와중에 심문받던 공산당원이 "붉은 군대가 네놈들 다 죽여버릴거다!" 하면서 악을 쓰는데, 그게 실제로 벌어지고 만다.
김두한은 이 사건의 여파로 미군이 그를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일단 잠적을 하게 되지만, 전위대에서는 김두한이 잠적했다고 방심을 하게 되고, 이 틈을 역으로 이용해 '''김두한은 심영에게 최고의 굴욕을 선사한다.'''
그러나 76회에서 전위대 3인자[17] 가 대한민청 본부에서 대한민청 대원들이 자행한 조선청년전위대 대상 살인과 고문행위를 미군에 신고하게 되면서 미군정이 파업현장에서의 살인사건과 대한민청본부에서의 고문과 살인사건을 비롯하여 국군준비대 사건까지 모두 포함시켜 그 일을 저지른 김두한 일당을 기소하고 군사재판에 회부시킨다.
여담으로 국군준비대 해체 사건 직후 애기보살의 집에 숨어 있던 김두한은 애기보살과 함께 절로 산책을 갔고, 그 곳에서 국군준비대 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을 위해 공양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62화). 김두한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과를 언젠가 받게 될 것이라며 자아비판을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김두한과 우미관 패거리들은 심영을 고자로 만들고, 공산당 인사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인 뒤 암매장하고, 중도 좌파, 우파 인사들을 협박,테러하고, 전위대 간부를 때려 죽이는 등, 살인과 테러를 멈추지 않았다.
1. 개요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일제 때 징병 당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군사집단.
2. 역사
1945년 8월 17일 귀환장병대로 출발하여 그해 9월 7일 국군준비대로 이름을 바꾸었다.[1] 주요 간부진으로 총사령 이혁기(李赫基)[2] , 부사령 유치옥(兪致玉), 참모장 최영(崔榮), 경리부 이재복(李載馥), 정보부 장도용(張道用), 훈육부 김한영(金漢永), 감찰부 송태익(宋泰翊), 서무부 김철구(金徹龜), 외교부 연정(延禎), 계몽부 이영호(李永鎬), 위생부 차성기(車星基) 이다.
사실상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 국방경비대보다 빨리 결성된 군사집단인 것이다. 상비군 1만 7천, 예비군 7만의 숫자의 규모였다고 하니 1개 연대 규모로 시작한 조선 국방경비대보다 훨씬 규모에서도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외에도 학병동맹[3] , 해방병단[4][5] , 육해공군출신동지회[6] 등 다양한 크고작은 군사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1978년 경향신문 기사 집계로는 남한에만 96개에 달하는 군사단체가 있었다.
각 단체마다 "새로운 독립국가의 군대"를 표방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창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로서 공화국인 조선[7] 의 군대가 될것이라는 희망을 '''저마다''' 품고 있었다. 그래서 해방된 조국의 군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너나할것 없이 군사단체를 서둘러 만들게 된 것.
그러나 미군정은 이러한 단체들의 움직임을 용인하지 않았다.[8] 1946년 미군정에 의해 기존의 단체들 중 문제가 있는 단체들은 해체당하고,[9] "남조선 국방경비대 설치법"이 마련되어 온건한 군사단체는 존속되거나 국방경비대에 흡수된다. 이후 국방경비대는 대한민국 국군으로 발전한다. 심지어 1946년 초 환국한 광복군도 해체되어 국방경비대에 흡수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군준비대 또한 "치안을 문란케 하였다"는 이유로 1946년 1월 20일자로 군정당국이 사설군사단체 해체령을 발포하면서 해체당했다. 일부 인원은 국방경비대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한편, 1946년 2월, 국군준비대원 4명이 요인 암살을 위해 우미관 부근에서 밀회하다 종로경찰서에 의해 검거되기도 하였다.
흔히들 알려져 있기로는, 국군 창군 초기의 인원들에 의한 증언이나 소설 혹은 드라마에 따라, 국군준비대가 좌익계열 무력단체였기 때문에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신탁통치 반대''' 노선#이었기 때문. 생각보다 다양한 계열의 인물들이 구성원으로 존재[10] 했으며, 좌익계 인물부터 구 일본군에 만주군 출신까지 고루고루 망라되어 있었다고 한다. # 그러니까 따지자면 "반탁 중도파"인 셈.
게다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이 각 지역에 설치한 지역 인민위원회[11] 를 지지했다. 이러니 미군정과 충돌할 수밖에....
3. 등장 매체
3.1. 야인시대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은 훗날 자신이 국군준비대나 그와 유사한 학병 단체를 습격, 이를 해산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두한의 주장들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사실이 아님이 논파되었으며, 드라마 내에서는 이 내용이 좌익에 대한 반공 투쟁이라는 형태로 지극히 미화, 왜곡되었다.국군준비대. 정식이름은 조선국군준비대다. 조선공산당에서 장차 군대의 모체를 만들 의도로 결성한 군사단체 이름이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발기됐고, 그해 12월 서울중앙중학교에서 대표자 회의를 열었다. 정식군대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상당수의 무기와 인원을 가지고 있었던 단체였다.
46년 1월 국방경비대가 창설될 때까지 우익 쪽에서 볼 때 매우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야인시대의 내용들은 이런 김두한의 주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탓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태클을 걸어야할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실제 역사와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작가가 핍진성과 개연성도 고려하지 않은 탓에 전개가 제정신이 아닌 것은 덤.
드라마에선 박헌영의 주도로 창설된 그야말로 악의 조직이며, 언젠가 무장봉기를 일으켜 남한을 적화시키기 위해 세력을 키워나간다. 미군과 경찰에서도 이들을 찝찝하게 여겨 당장 해체하라고 압력을 넣었으나, 반응은 당연히 "귤."[12] 백의사와 경찰은 이런 국군준비대가 당연히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고 김두한에게 의뢰해 국군준비대를 박살내라고 지령을 넣는다.
김두한과 우미관 패거리는 국군준비대를 박살내기 위해 백의사에게서 무기를 수령받아 사격훈련을 하고, 그와 동시에 김무옥과 일부 부하들을 별동대로 보내 신불출을 납치하게 만들었다. 조선청년전위대에서는 대한민주청년동맹 창설식을 지켜보느라 감시가 느슨해져 있었기 때문에 김두한의 의도는 척척 들어맞게 된다. 철저한 준비나 계략도 없이 그저 한나절 사격훈련을 받고, 게다가 싸움 직전에 용기를 불어넣는답시고 술[13] 을 마신 주먹패 수백명을 가지고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있던 무장단체[14] 를 하룻밤 사이에 쓸어버린다는 계획 자체가 말이 안되긴 하지만 야인시대에서 이런 경우가 한 둘이 아니니 넘어가자(...)
대한민청 창설식이 끝나고 김두한은 부하들을 집결지로 각자 모이게 만든 후에 밤에 경찰의 묵인하에 국군준비대를 습격한다. 처음에는 총을 사용하지않고 제압하는걸 최선으로 여겼기에 공산당 간부로 변장하고 국군수비대 병영 안에 침투한다. 작전계획을 세울때 국군수비대의 지휘부가 중앙에 있어 들어가기 쉽지 않을거라 걱정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정작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휘부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정문의 보초가 김두한 일행을 의심하긴 했으나, 뒤에서 보초를 기습해 기절시켜버린지라 아무런 제재없이 지휘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그런데 정작 본부로 들어가는데 까지만 계획을 잡았지 그다음에 뭘 할건지는 전혀 계획에 없었는지 소속을 묻는 당직사령의 말에 별다른 대꾸도 없이 폼만 잡으며 껄렁대기만 하다[15] 정체가 바로 들통난다. 당직사령은 권총을 겨누었다가 문영철에게 얻어맞는데, 당직사령이 김두한이 왔다며 부대원들에게 알리는데도, 김두한 일행은 당직사령을 쫓아가서 제압할 생각도 안하고 그냥 멀뚱히 있었고, 결국 당직사령을 눈앞에서 놓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적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해 완전 포위당한다. 그렇게 본부에 고립되어 국군준비대의 총격을 받지만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청의 대원들 덕분에 국군준비대와 전투에서 승리하고 시설을 전부 폭파시킨다.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전향서를 쓰게하고 쫓아냈다.
그리고 김두한 패거리가 퇴각한 후, 뒤늦게 전위대, 미군, 기자들이 도착하고, 전위대, 미군, 기자들은 참혹한 시체들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워태커 소령은 반드시 김두한을 잡아넣겠다고 결심했고, 최동열은 학살자가 돼버린 김두한을 보면서 통탄을 금치 못했다. 정진영과 전위대원들은 김두한의 테러짓에 이를 갈면서 복수를 다짐한다.
후에 김두한이 미군에게 체포되고 나서 경찰에서 수사에 들어갔으나 오히려 경찰에서는 국군준비대가 선빵을 때렸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버린다.[16] 이 와중에 심문받던 공산당원이 "붉은 군대가 네놈들 다 죽여버릴거다!" 하면서 악을 쓰는데, 그게 실제로 벌어지고 만다.
김두한은 이 사건의 여파로 미군이 그를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일단 잠적을 하게 되지만, 전위대에서는 김두한이 잠적했다고 방심을 하게 되고, 이 틈을 역으로 이용해 '''김두한은 심영에게 최고의 굴욕을 선사한다.'''
그러나 76회에서 전위대 3인자[17] 가 대한민청 본부에서 대한민청 대원들이 자행한 조선청년전위대 대상 살인과 고문행위를 미군에 신고하게 되면서 미군정이 파업현장에서의 살인사건과 대한민청본부에서의 고문과 살인사건을 비롯하여 국군준비대 사건까지 모두 포함시켜 그 일을 저지른 김두한 일당을 기소하고 군사재판에 회부시킨다.
여담으로 국군준비대 해체 사건 직후 애기보살의 집에 숨어 있던 김두한은 애기보살과 함께 절로 산책을 갔고, 그 곳에서 국군준비대 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을 위해 공양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62화). 김두한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과를 언젠가 받게 될 것이라며 자아비판을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김두한과 우미관 패거리들은 심영을 고자로 만들고, 공산당 인사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인 뒤 암매장하고, 중도 좌파, 우파 인사들을 협박,테러하고, 전위대 간부를 때려 죽이는 등, 살인과 테러를 멈추지 않았다.
[1]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17_0070[2] 일제말 경성제대 학생출신으로 학병거부 운동에 주도적 위치에서 학생운동 활동했던 인물. 김계원 전 비서실장의 친구로 그에게 군인의 길을 권유한 사람이다. 월북 후 사망.[3] 일제에 의해 징병갔다 돌아온 학병 출신 중 좌익계열이 모여 만든 조직.[4] 초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손원일제독이 세운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이 되는 단체다. 이미 국내 정세가 미군정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다고 판단한 이 단체는, 무리하게 독자노선을 견지하지 않고 미군정에 승인 신청을 해서 미군정의 승인을 받아 만든 합법단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해군은 창군 초기부터 독자적이고 자주적으로 결성되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움직임의 중심에 손원일 제독이 있었다. [5] 다만 완전히 사설집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해방병단이 창설된 계기가 미 군정의 칼스텐 소령이 경남 진해 지역 도서 및 해안 지방 순찰을 위해 외부의 수요를 필요로 했을 때 모집되어 나선 단체가 해방병단이기 때문이다. 즉, 일종의 아웃소싱으로 시작했던 셈. 물론 이후에 미군정의 승인을 받고, 독자적으로 규모를 키워서 조선해안경비대, 최종적으로는 대한민국 해군이 되게 한 공로는 부정할 수 없는 긍정적인 사실이며, 덕분에 동시기에 미군정의 의해 이식된 국방경비대나 해체, 혹은 자력 확장이 불가능해진 국군준비대 등 다른 무장단체들과 비교해봐도 정통성 등에서 훨씬 좋다.[6] 간부 출신이 많았다. 무력집단으로 발전하지는 않았고, 일종의 정치단체로 활동했던것으로 보여진다. 훗날 이 단체는 많은 인원이 경찰과 대한민국 국군으로 흡수된다.[7]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의 시대이고 이때는 통일된 조국으로 국가가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8] 1945년 9월 초부터 미군정은 포고령을 통해 직접통치를 하겠다고 밝혔고, 당시 국내에서 큰 자치단체였던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이거니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그 어느 단체든 활동 자체를 부정하였다. 김구가 이 조치 때문에 개인 자격으로나마 뒤늦게 귀국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9] 모든 단체가 순수하게 해방 조국의 군대로 자리매김 하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개중에는 조직폭력배에 가까운 강도집단들도 존재했다고 한다(...).[10] 학병동맹 거부자부터 시작해서 구 만주군 등등 여러 출신자들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임정과 인공에게 통일실천 권고건의문 발표하는 성명서를 발표를 했었다.#[11] 중앙 인민위원회(서울)는 확실히 좌익(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주류)이 주도권을 쥐어 당시에도 문제가 많았지만, 지역 인민위원회 경우에는 좌익세력들뿐만 아닌 지역에서 신망이 높은 유지 어르신들도 다수 참가했었으며, 그 중에는 민족주의 계열 성향 인사들까지 고루고루 참여했을정도로 지역인민위원회는 그만큼 당시 민중들로부터 지지가 매우 높았다.# 따라서, 인민위원회 자체를 '좌익 세력들 집단'이라고 규정짓는것은 굉장한 무리수.[12] 이 때 우리가 잘 아는 그 심영이 워태커에게 태클을 걸었다.[13] 참고로 이 술의 종류는 브랜디라고 한다.[14] 창설된지 얼마 안된 단체이긴 했으나 작중 언급에 의하면 인원중에 군 출신들이 많다고 한다. [15] 문영철이 "우린 당에서 나왔다"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당직사령이 김두한을 알아보면서 씨알도 안 먹혔다.[16] 작중 형사양반이 옛날에 일본놈들이 쓰던 방법을 좀 쓰니까 알아서 자기네들이 털어놨다는 사실을 김두한에게 알려준다. 김두한은 흡족해하면서도 고문을 하다니 그건 좀 과격했다고 했다.[17] 이 사람은 전향서를 쓰겠다고 한 대원 중 한명이었지만 실상은 그저 자기가 죽기 싫어서 전향서를 썼을 뿐, 여전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서 끝까지 광신적으로 추종한 대원이었다. 문제는 이 사람이 후술하겠지만 대한민청이 자기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사건들을 미군에게 신고한 후 신고를 받은 미군과 같이 왔다. 이때 신영균, 김영태, 문영철과 마주쳤고 그들 앞에서 자기는 살기 위해 전향했을 뿐 여전히 공산당원이라고 말을 하자 빡돌은 신영균이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그를 쏴죽여버린다. 이것은 신영균이 본부로 들이닥친 미군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미군이 왔다는 사실을 몰랐고 미군 역시 신영균을 막 마주쳐서 신영균이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던 걸 몰랐던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신영균은 미군이 대규모로 들이닥처 자신들과 마주한 직후부터 이 사건이 자신의 선에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투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