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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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영래(金永來)
'''생년월일'''
1968년[1] 5월 23일 (56세)
'''출신학교'''
광주고 - 중앙대학교
'''포지션'''
파워 포워드
'''신체사이즈'''
192cm
'''실업입단'''
1991년 한국은행 농구단 입단
'''소속팀'''
한국은행 (1991~1996)
나래이동통신/원주 나래 블루버드 (1997~1998)
'''지도자'''
강원사대부고 코치 (1999~2004)
중앙대학교 코치 (2004~2005)
제물포고등학교 코치 (2006~현재)
2013 FIBA U-19 대표팀 감독[2]
1. 소개
2. 선수 시절
2.1. 고교-대학 시절
2.2. 실업-프로 시절
3. 지도자 생활
4. 여담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이자 현 고교농구 지도자.

2. 선수 시절



2.1. 고교-대학 시절


광주고 시절부터 센터 유망주로 손꼽히며, 고3이던 1986년 청소년 대표팀 센터로 부산동아고 조현일(195cm) 등과 함께 선발되기도 했다. 같은해 소속팀을 전국대회 결승에 무려 4차례나 올려놓기도 했지만 우승은 한번(종별선수권)에 그쳤다.
중앙대 진학 후엔 , 장일, 천정열 등 선배들을 보좌하며 허재가 졸업한 중앙대를 여전한 대학강호 중 하나로 이끌었고, 특히 대학 4년간 대학농구연맹전 춘계대회에서 4년 연속 우승하기도 했다.
정봉섭 감독이 스카웃한 두 장신 후배 표필상(200cm, 88학번), 정경호(202cm, 89학번)가 입학하면서 주전 자리를 위협받는가 싶었지만, 국가대표팀에도 뽑힌 센터 표필상과는 달리 최장신 정경호의 성장이 예상보다 더뎌 2학년이 되어서도 주전으로 쓰기엔 많이 부족했고, 덕분에 정봉섭 감독은 김영래를 표필상의 골밑 파트너로 중용하게 되었다. 김영래가 빅맨치고는 슛거리가 길어 정통(몸빵형) 센터였던 표필상과 조합이 괜찮았고, 3학년이던 1989년 2관왕에 이어 졸업반이던 1990년에도 동기인 슈터 김상준과 함께 맹활약, 중앙대를 시즌 3관왕(춘계/추계연맹전, 전국체전)에 올려놓았고 김영래 본인은 추계연맹전 MVP를 수상했다.
졸업을 앞두고 동기 김상준과 함께 안정적인 한국은행으로 진로를 정한 김영래는, 4학년 마지막 대회였던 1990-91 농구대잔치 2차대회 도중 김상준과 함께 '''한국은행 행원 연수'''를 받게 되는(;;;) 어이없는 행정절차 덕분에 참가할 수 없었고, 졸지에 주전 두 명을 잃은 중앙대는 농구대잔치에서 실업팀들에 연패하면서 2차대회에서 예선 탈락하고 만다.

2.2. 실업-프로 시절


졸업 후 한국은행 농구단에 입단한 김영래는 노장위주였던 한국은행의 젊은 피로서 선배 황상하(194cm)와 함께 황혼기 팀의 골밑를 지키며 활약했지만, 주전 멤버들의 노쇠화로 90년대 들어 이미 실업부 최약체로 전락한 한국은행은 라이벌 한국산업은행과 치열한 꼴찌다툼을 벌여야했다.
한국은행 농구단 해체설이 나오던 1995-96 농구대잔치에서 정규리그 3위팀 연세대학교[3]를 잡는 등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도 했으나, 이 대회가 끝나고 결국 한은 농구단은 해체되었다. 팀 해체 당시 대부분의 한국은행 선수들이 일반 은행원으로 남았지만,[4] 아직 27세로 선수로서 한창이던 김영래는 김상준, 이승학(F,187cm)과 함께 산업은행 농구단을 인수해 갓 창단한 나래이동통신으로 이적했고, 나래 소속으로 1996-97 농구대잔치에 출전했다.
농구대잔치 직후 개막한 1997 KBL 원년시즌에서 김영래는 강병수(PF, 191cm), 제이슨 윌리포드(C,194cm) 콤비를 보좌하는 백업 빅맨으로서 평균 10분가량 출장했고, 당시 약체로 평가밭은 원주 나래 블루버드의 골밑을 잘 지켜내며 팀이 정규리그 3위 및 챔피언결정전 결승까지 오르는 "나래 돌풍"에 일조한다. 특히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와 맞붙은 챔피언결정전에서 김영래는 상대팀의 장신 에이스 김영만을 묶기위해 4차전부터 선발출전하지만 결국 팀은 1승 4패로 원년시즌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원년시즌 KBL엔 부산 기아클리프 리드-김유택, 대구 동양전희철, 안양 SBS 정재근 말고는 제대로된 빅맨이 별로 없었고, 덕분에 강병수-김영래-제이슨 윌리포드의 꼬꼬마 빅맨군단으로도 한 시즌을 보낼 수 있었지만, 97-98 시즌 들어 각 팀들이 2m가 넘는 빅맨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전시즌 준우승팀 원주 나래의 골밑은 어느새 KBL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 되어 버렸다. 주전 4번이자 전시즌 수비 5걸이던 강병수마저 경쟁력을 잃고 투명인간화되어버린 상황에서 김영래는 같은 백업신세인 최호(193cm), 정한신(192cm) 등과 출장시간을 더 쪼개며 팀내 존재감이 미미해졌고, 플레이오프 들어서는 최호에게 식스맨 자리마저 밀려나며 시즌 종료 후 은퇴를 택했다.

3. 지도자 생활


은퇴 직후 모기업 나래이동통신에서 통신기기 판매 업무를 잠시 맡았으나 당연히 적성에 맞지 않았고, 1999년 연고지 강원도에 있는 강원사대부고 농구부 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5]
이후 2004년 중앙대 강정수[6] 감독의 부름을 받아 모교 농구부 코치로 부임, 2시즌을 보낸다. 이시절 김영래 코치는 광신상고 출신 00학번으로 입학했다가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역 입대해버린 한 선수를 제대직전에 직접 설득해 다시 농구부에 복귀시켰는데, 그게 바로 KBL 00-01 시즌 MVP 박상오다.
2006년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농구부로 이동하여 현재까지 12년째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제물포고 시절 키워낸 제자들의 면면이 꽤나 화려하다. 특히 제물포고 부임 첫해 당시 고 3이던 오세근을 지도하며 고교 랭킹 1위급 센터로 키워냈고, 이후 중국 출신 귀화선수 김철욱[7](안양 KGC), 김윤태(안양 KGC, 현재 상무), 한희원(안양 KGC), 현 동국대 에이스가드 변준형 등을 길러냈다.
2012년 FIBA Asia U-18 대표팀 감독을 맡아 당시 제 2의 황금세대로 불렸던 천기범-최성모-최준용-강상재-이종현의 베스트 5로 팀을 대회 결승까지 이끌었으나,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연장접전끝에 아쉽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듬해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2013년 FIBA U-19 대회에서도 감독을 맡아 이들 멤버들로 세계무대에서의 돌풍을 노렸으나, 대회 직전 주전센터 이종현이 코뼈 부상으로 낙마하는 바람에 팀 전력 구성에 차질을 빚었고, 대회에선 세계수준과의 현격한 격차를 실감하며 예선 3경기 전패, 이후 순위결정전에서 접전 끝에 2승을 거두며 16팀 중 최종 13위를 차지했다.

4. 여담


  • 중앙대 1학년이던 1987년 대학농구연맹전 추계대회 연세대와의 결승전에서 연대 2학년 강양택을 주먹으로 가격하며 양팀의 집단 난투극을 일으키기도 했다.
  • 2013년 FIBA U-19 대표팀 감독 시절, 이종현이 당시 유재학 감독이 이끌던 국가대표팀과 U-19팀에 중복 선발되자, "이종현은 중요한 선수다"라며 2개 대회를 모두 뛰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해 "선수혹사로 성적만 내보려고 하는 구시대 학생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당시 프라하 FIBA U-19 대회는 6월말~7월중순까지 열렸고, FIBA 농구 월드컵 출전권이 걸린 마닐라 아시아선수권 대회는 8월 1일이 개막전이라 일정이 겹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7월 중순에 대회를 마치고 체코 프라하에서 필리핀 마닐라까지 날아가 대회를 연속 참가하라는 건 2000년 이동국이 겪었던 올대-국대 혹사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이종현이 6월 대학리그 경기 도중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는 바람에 청대 엔트리에서 빠졌고, 덕분에 8월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1] 민증상으로는 1969년생.[2] 강상재, 최준용, 허훈 등 당시 "황금멤버"라 불렸던 청소년팀을 이끌었다.[3] 황성인-김훈-우지원-김택훈-구본근 + 조상현, 조동현 등이 주축으로 정규리그 개막전에서 기아자동차를 잡는등 서장훈이 없음에도 여전히 강호의 면모를 과시했다.[4] 지금도 그렇지만, 90년대 한은의 위상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신의 직장!!) 당시 한국은행의 간판슈터였던 김동철(180cm)과 가드 이진형(176cm) 등은 아직도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5] 여기서 가르친 제자가 우리동네예체능, 버저비터 등 농구예능에 자주 출연했던 선출 연예인 김혁이다.[6] 광주고-중앙대 출신인 고교-대학 직계 선배다.[7] 고교시절까지는 중국 이름인 "우띠롱"을 썼다. 당초 군산고에 입학했다가 제물포고로 전학간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