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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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태 타이거즈에서 주로 활동한 야구 선수. 현 KIA 타이거즈의 코치. 아마야구 국가대표 출신이다.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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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시절. (출처 : 포토로)
1987년에 입단했다. 루키 시즌부터 서정환-차영화 키스톤 콤비를 잇는 후계자 역할로 낙점되어 1군에서 뛰었는데 첫 해부터 주전 유격수를 맡아왔다. 그 후 1990년 윤재호에게 자리를 내준 뒤 2루수로 전향했는데 이종범, 홍현우 혹은 김종국으로 이뤄진 키스톤 콤비가 등장하기 전 윤재호와 콤비를 이루어 내야를 책임지던 선수였다. 하지만, 1991년 시즌 막판 교통사고로 1992년을 뛰지 못한 데 다가 이종범이 입단하고, 홍현우가 성장하자 1992 시즌 후 박노준과 함께 고향 팀인 쌍방울로 이적한다.
쌍방울에서는 3루수로 있었다. 그러나 부상 때문에 외야수로 전향한다. 하지만, 당시 정영기 수비코치의 도움을 받아 다시 3루수로 전향했다.
1996년에는 석수철의 입단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되자 시즌 후 쌍방울에서 방출당했고, 때마침 내야 백업의 필요성을 느낀 해태 타이거즈는 쌍방울에서 자유계약 공시 된 백인호를 다시 데려간다.
그리고 1997년 다시 우승을 하고, 1999년을 끝으로 은퇴한다.
3. 지도자 시절
2001년 김성한 타격코치가 새 감독이 되자,[2] 수비코치가 되어 2007년까지 KIA 타이거즈에서 코치를 한다.
2008년에는 선배인 이순철의 부름을 받고 장채근과 같이 우리 히어로즈로 옮겨 2009년까지 수비코치를 했다.
2010년에 다시 KIA 타이거즈로 돌아왔다. 그 후엔 이건열, 이강철과 함께 가장 욕먹는 역적 3인방 코치로 꼽혔다. 특히 어이없는 주루 지시로 보는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러다가 2012년 6월 13일에 드디어 이건열 타격코치와 사이좋게 2군으로 내려갔다 김종국 코치가 1군 작전코치로 올라왔다.
2012 시즌 후 이강철은 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이건열은 동국대학교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2013 시즌 후 KIA 야수들의 수비를 개판으로 만든 원흉인 김태룡이 2군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1군으로 올라왔다.
2014년 KIA 타이거즈 1군 수비마저 망쳐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2015년엔 김민호가 1군 수비코치로 부임하고, 김태룡이 1군으로 올라오면서 김성규와 같이 기아 타이거즈 2군 수비코치를 하게 되었다.
2016년,2군 수비코치를 담당하게 되었다.
2017년에는 3군 총괄코치로 선임되었다. 시즌 중반부터 이름을 백인수로 개명을 했다. 그래서 역대 등번호 목록에서도 현재 등번호 이전의 등번호는 '''백인호'''로, 현재 등번호는 '''백인수'''로 표기한다.
2018년에도 3군 총괄코치로 일했으나, 정회열 수석코치, 김태룡 수비코치, 신동수, 홍우태 투수코치 등과 같이 해임되었다.
2019년에 장채근이 감독으로 있는 홍익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다. 2020년에는 화순고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2021년 KIA 타이거즈로 다시 복직해 2군 타격코치 자리에 부임했다.
4. 역대 성적
5. 여담
- 여담으로 야구계의 전설로 전해지는 유격수 직선타 홈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친 타구가 상대 유격수가 점프를 해서 잡힐뻔 했는데 글러브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서 그대로 홈런이 되었다고(...). 정철우 기자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로사리오가 훈련때 유격수 직선타 홈런과 비슷한 장면을 선보여서 깜짝 놀랬다고 한다.
- 최동원과 선동열의 마지막 맞대결인 1987년 5월 16일 사직 경기에서 김일환이 9회말 대타로 나와 동점 2루타를 쳤다. 문제는 이 타순이 이미 주전포수인 김무종을 교체시킨 자리에 들어와 있던 장채근의 자리였고, 동점은 만들었지만 공을 받을 포수가 한 명도 없게 된 상황이었다. 이때 김응용 감독이 포수를 맡도록 지시한 선수가 입단 첫 시즌을 치르고 있던 백업 내야수 백인수였고, 그는 10회부터 무승부로 끝나는 15회까지 선동열과 배터리를 이루어 홈플레이트를 지켰다. 백인수를 포수로 기용한 이유는 단지 덩치가 커보여서 포수 같았다고. 백인수 자신의 회상에 따르면 공이 손에서 놓기 전에 보였다가 사라지더니 미트 안에 들어왔다고 하며, 이런 공을 어떻게 받나 고민하였으나 다행히도 선동열의 제구가 너무 좋아 다행히도 15회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주심이었던 김광철 심판은 백인수에게 '네가 실수하면 내가 죽는다'면서 백인수 뒤에 바짝 웅크린 상태로 판정을 봤다고 한다.
6. 관련 문서
[1] 1987년 5월 16일 경기에서 포수 자원이 소진되자 10회부터 15회까지 6이닝 동안 포수를 소화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2] 이 당시 여러 코치가 부임한다. 서정환, 이건열, 백인호, 최해식 등이 모두 이 해에 코치로 부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