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의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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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육군 동방대대 소속의 한 병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합중국 육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진으로 수많은 네티즌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이후 국내에서 이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발단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미국의 사학자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에 있었던 유타 해안에서 로버트 브루어 육군 중위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방대대 출신의 포로를 심문했는데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원래 인터뷰에서 브루어 중위가 한국 출신으로 지목한 포로의 숫자는 4명. 이 사실이 어느 네티즌에 의해 상기의 사진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의 행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 영화 마이웨이 홍보나 여러 매체에서는 앰브로스의 책에 저 사진이 있다고 하지만, 앰브로스의 책에는 '''저 사진은 없다'''. 그 책에 있는 어구와 저 사진의 인물을 합성한 텍스트가 돌면서 저 사진을 앰브로스가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의 이름이 양경종이고 1920년 신의주에서 출생했다는 글도 인터넷에 떠돌고 있으나 근거가 불분명하여 확인할 수 없다.
어쩌다가 한국인이 노르망디에서 독일 군복 차림으로 포로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측이 있다.
이 설은 한국인(조선인)이 일본 제국의 징병으로 일본 육군에 끌려감 →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됨 → 독소전쟁에서 병력이 부족한 소련군이 이들을 징집함 → 독일 국방군의 포로가 됨 → 독일 육군도 병력보충을 위해 이들을 군사로 씀 →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게 붙잡힘...이라는 경로로 추정한다. 이때는 1940년대 이전이니 조선인은 징병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육군에 자원 입대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1938년에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마이웨이>의 장동건은 어떻게 일본군에 갔을까?를 참조.
문제는 할힌골 전투나 중일전쟁 때 포로가 되면 안된다고 그렇게 우겨대던 일본이지만, 나름대로 이면에는 포로 교환 교섭을 했었다는 것을 볼때 소련의 포로에서 소련군 징집은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할힌골 전투나 장고봉 사건 이후에 소련과 일본 제국은 불가침 협정을 맺어서 나름 국경조약을 완료한다. 이때 대부분의 포로들이 귀국하게 된다. 그러니 마이웨이처럼 일본군 포로설은 희박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물론 역사가 기록대로 간 것은 아니기때문이다. 할힌골 전투 포로 출신으로 소련 육군 군관이 된 박성훈이라는 사람도 있다. 포로의 소련군 입대가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출처:SBS스페셜). 육군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한 조선인들은 한반도 내 부대에 주둔하라고 했지만, 첫 번째 사망자인 이인석 상등병(당시 나이 25세, 충청북도 옥천군 서면 출신)은 화북전선에 위치한 산서성에서 전사하였다. 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포로들 중에도 조선인에 관한 기록이 조금은 남아있으며 소련으로 전향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상당수의 고려인들도 독소전쟁에 참전하였다. 또한 독일도 소련군 포로들 중 전향자를 대상으로 동방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즉 이 주장도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epK-tF0qqk
이 영상은 사진 속 인물이 양경종이라는 인물이라는 설을 소개하고 있으며, 일제에 의해 징집-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생포-3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생포-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게 생포라는 루트를 소개하고 있다. 양경종 씨 외에도 3명의 동양인이 더 있었으며, 연합군은 그를 독일군복을 입은 일본군으로 생각해 그를 영국의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가 미국의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다만 수용소 출감이 1945년에 바로 이루어진 것 등으로 보아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설은 저 동양인은 원래부터 소련에 거주하던 사람, 즉 고려인으로서 징집되었다는 설이다.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 사진 등을 보면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동양계 병사들도 드문드문 있다. 비슷한 이야기로 홍범도 장군이 후에 소련군으로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했다는 고려인들의 구전 설화(?)를 소재로 한 굽시니스트의 웹툰도 있다. 고려인들은 독소전쟁에는 나름 참전한 경우가 있다. 겐나디 한(1919~1943) 같은 경우는 동아시아계로 드물게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며 나치에 맞서 싸우다가 격추당해 목숨을 잃었다. 사진이나 기록에서도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부모와 같이 이주당한 한국인으로 나왔다. 잊혀졌던 그는 90년대에 MBC 뉴스데스크에서 잠깐 다뤄져 조금 알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소련군에는 동양인이 꽤 많이 섞여 있었고, 고려인뿐만 아니라 생김새가 한국인과 거의 같은 중앙아시아계 소련인[1] 도 무차별 징집했으므로 동양인이라고 해서 조선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1949)"와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2007)"에서도 아시아계 소련 병사가 비중있는 역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소련군의 동양계 병사 - 포로 - 부역자''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독일 국방군에는 1942년경 부터 소련군 전향자 출신 부대가 공식적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아시아계 소련인설"이 가능성도 높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소련군에 아시아인이 상당히 많았다. 당시에는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스탄인, 우즈베키스탄인, 타지키스탄인 등 중앙아시아계 민족들과 카스피해 지역에 사는 몽골족의 후예인 칼미크인들도 상당수 소련군에 (반강제적으로) 입대해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일에 포섭되어 국방군에 참여하게 되고 각 민족별로 편성된 이른바 '동방대대(Ostbatallion)' 에서 복무하게 되며, 러시아계 포로 전향자는 이와 별도로 '자유 러시아 군단'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인 부대로 편성된다. 전후 소련은 스메르시, NKVD를 통해 송환된 포로 전원을 심사하여 처형하거나 굴라크로 보냈다. 만약 사진 속의 병사가 고려인이라면 그는 중앙아시아계 소수민족으로 편성된 투르키스탄 부대나 (언어 문제로 인해) 자유 러시아 군단에 편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1944년 6월의 노르망디에는 러시아계 부대와 조지아계 부대만이 상륙지점에 배치되어 있던 것으로 확인된다.[2] 따라서 그는 러시아 부대 소속일 가능성이 높으나 사진에서는 소매에 붙어 있어야 할 부대마크(아래 사진 참조)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소속을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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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러시아 군단 부대마크.
이들이 누구이며, 또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이들의 최후에 대해 앰브로스 등은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전쟁을 치렀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시 소련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고 주장한다. 소설가 조정래의 소설 <오 하느님>이 이 주장을 따른다.
공산권 붕괴 후 공개된 소련 문서에 따르면 이런 대량처형은 일종의 잘못된 속설이었고 대부분 노동을 위해 굴라크로 이송되었다. 그중 협력사실이 경미한 전직 포로들은 다시 군에 들어가는 것이 허가되었고 대부분 노동부대나 굴라그 경비병으로 차출되었다. 처형된 비율은 의외로 적고 실제 전범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맞는 비율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미국에 남아 여생을 지냈다고 추측한다. 북토피아에서 전자책으로 출간된 장웅진의 <노르망디의 조선인>이라는 소설이 이 주장을 따른다(#).
일단은 이런 사람들이 5~1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페이지를 보면 조선인 출신으로 추정되는 4명의 사진이 있다. 그 밖에도 투르크계 병사들의 사진도 보인다.
사실 연합국은 소련군 전향 포로와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망명한 코사크계, 백계 러시아인들을 소련에 다시 넘긴 사례도 있었다. 특히 동방대대 포로들의 경우에는 동유럽에서 소련군의 보호하에 있던 자국 포로들의 안전확보를 위해 국제조약도 무시한 경향이 있다. 본문 아래의 사례 같은 해피 엔딩이 많기만 바랄 뿐. 사실상 소련군 전향 포로에 대해서 2가지 사례가 모두 공존한다고 보면 된다.
어찌보면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서 기구한 삶을 산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사례로 일본군에서 중국군(팔로군), 북한군을 거쳐 다시 한국군에 복무한 할아버지도 있다(#)
2005년에 SBS 스페셜에서 "노르망디의 코리안"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에 대한 2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21~22회) 1부 - 독일 군복을 입은 조선인 2부 - 국적 없는 포로
2007년에 발표된 조정래의 역사소설 <오 하느님>은 이 한국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 찾아보면 절판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2009년 <사람의 탈>이라는 제목으로 제목이 변경되어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이를 중심 소재로 삼은 영화 마이웨이(강제규 감독 작품)가 2011년 12월 22일에 개봉했다. 장동건, 오다기리 죠, 판빙빙(范氷氷) 등 캐스팅이 매우 화려하다.
장웅진이 쓴 노르망디의 조선인에서는 심문관인 러시아계 정보장교가 러일전쟁 뒤 자기만 미국으로 보내고 러시아에 남았던 아버지가 재취한 뒤 얻은 딸, 그러니까 배다른 누이동생의 남편이 이 인물인 것을 알아차리고 빼돌리는 식으로 전개했다.
중국의 밀리터리넷에서는 이 사람을 중국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일단 노르망디 캉에 있는 2차대전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설명에는 그가 한국인이라 나와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고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기구한 운명에 처한 역사의 희생자임은 분명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사진과 별개로 국립국악원은 독일에서 독일 인류학자가 채록한 아시아인이 부른 노래를 발굴했는데, 에디슨 원통형 축음기로 녹음한 것이라 앨범화 작업에 시간이 걸렸다. 추적 결과 2차 대전 시기가 아닌 1917년에 녹음한 것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제정 러시아 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독일군에게 포로가 된 연해주 거주 한국인의 음원이었음이 밝혀졌다. 참조 바람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육군 동방대대 소속의 한 병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합중국 육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진으로 수많은 네티즌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이후 국내에서 이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발단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미국의 사학자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에 있었던 유타 해안에서 로버트 브루어 육군 중위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방대대 출신의 포로를 심문했는데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원래 인터뷰에서 브루어 중위가 한국 출신으로 지목한 포로의 숫자는 4명. 이 사실이 어느 네티즌에 의해 상기의 사진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의 행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 영화 마이웨이 홍보나 여러 매체에서는 앰브로스의 책에 저 사진이 있다고 하지만, 앰브로스의 책에는 '''저 사진은 없다'''. 그 책에 있는 어구와 저 사진의 인물을 합성한 텍스트가 돌면서 저 사진을 앰브로스가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의 이름이 양경종이고 1920년 신의주에서 출생했다는 글도 인터넷에 떠돌고 있으나 근거가 불분명하여 확인할 수 없다.
어쩌다가 한국인이 노르망디에서 독일 군복 차림으로 포로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측이 있다.
1.1. 소련군에 징집된 일본군 포로설
이 설은 한국인(조선인)이 일본 제국의 징병으로 일본 육군에 끌려감 →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됨 → 독소전쟁에서 병력이 부족한 소련군이 이들을 징집함 → 독일 국방군의 포로가 됨 → 독일 육군도 병력보충을 위해 이들을 군사로 씀 →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게 붙잡힘...이라는 경로로 추정한다. 이때는 1940년대 이전이니 조선인은 징병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육군에 자원 입대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1938년에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마이웨이>의 장동건은 어떻게 일본군에 갔을까?를 참조.
문제는 할힌골 전투나 중일전쟁 때 포로가 되면 안된다고 그렇게 우겨대던 일본이지만, 나름대로 이면에는 포로 교환 교섭을 했었다는 것을 볼때 소련의 포로에서 소련군 징집은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할힌골 전투나 장고봉 사건 이후에 소련과 일본 제국은 불가침 협정을 맺어서 나름 국경조약을 완료한다. 이때 대부분의 포로들이 귀국하게 된다. 그러니 마이웨이처럼 일본군 포로설은 희박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물론 역사가 기록대로 간 것은 아니기때문이다. 할힌골 전투 포로 출신으로 소련 육군 군관이 된 박성훈이라는 사람도 있다. 포로의 소련군 입대가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출처:SBS스페셜). 육군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한 조선인들은 한반도 내 부대에 주둔하라고 했지만, 첫 번째 사망자인 이인석 상등병(당시 나이 25세, 충청북도 옥천군 서면 출신)은 화북전선에 위치한 산서성에서 전사하였다. 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포로들 중에도 조선인에 관한 기록이 조금은 남아있으며 소련으로 전향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상당수의 고려인들도 독소전쟁에 참전하였다. 또한 독일도 소련군 포로들 중 전향자를 대상으로 동방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즉 이 주장도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epK-tF0qqk
이 영상은 사진 속 인물이 양경종이라는 인물이라는 설을 소개하고 있으며, 일제에 의해 징집-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생포-3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생포-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게 생포라는 루트를 소개하고 있다. 양경종 씨 외에도 3명의 동양인이 더 있었으며, 연합군은 그를 독일군복을 입은 일본군으로 생각해 그를 영국의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가 미국의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다만 수용소 출감이 1945년에 바로 이루어진 것 등으로 보아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1.2. 고려인? 혹은 중앙아시아계 소련인?
다른 설은 저 동양인은 원래부터 소련에 거주하던 사람, 즉 고려인으로서 징집되었다는 설이다.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 사진 등을 보면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동양계 병사들도 드문드문 있다. 비슷한 이야기로 홍범도 장군이 후에 소련군으로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했다는 고려인들의 구전 설화(?)를 소재로 한 굽시니스트의 웹툰도 있다. 고려인들은 독소전쟁에는 나름 참전한 경우가 있다. 겐나디 한(1919~1943) 같은 경우는 동아시아계로 드물게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며 나치에 맞서 싸우다가 격추당해 목숨을 잃었다. 사진이나 기록에서도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부모와 같이 이주당한 한국인으로 나왔다. 잊혀졌던 그는 90년대에 MBC 뉴스데스크에서 잠깐 다뤄져 조금 알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소련군에는 동양인이 꽤 많이 섞여 있었고, 고려인뿐만 아니라 생김새가 한국인과 거의 같은 중앙아시아계 소련인[1] 도 무차별 징집했으므로 동양인이라고 해서 조선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1949)"와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2007)"에서도 아시아계 소련 병사가 비중있는 역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소련군의 동양계 병사 - 포로 - 부역자''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독일 국방군에는 1942년경 부터 소련군 전향자 출신 부대가 공식적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아시아계 소련인설"이 가능성도 높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소련군에 아시아인이 상당히 많았다. 당시에는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스탄인, 우즈베키스탄인, 타지키스탄인 등 중앙아시아계 민족들과 카스피해 지역에 사는 몽골족의 후예인 칼미크인들도 상당수 소련군에 (반강제적으로) 입대해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일에 포섭되어 국방군에 참여하게 되고 각 민족별로 편성된 이른바 '동방대대(Ostbatallion)' 에서 복무하게 되며, 러시아계 포로 전향자는 이와 별도로 '자유 러시아 군단'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인 부대로 편성된다. 전후 소련은 스메르시, NKVD를 통해 송환된 포로 전원을 심사하여 처형하거나 굴라크로 보냈다. 만약 사진 속의 병사가 고려인이라면 그는 중앙아시아계 소수민족으로 편성된 투르키스탄 부대나 (언어 문제로 인해) 자유 러시아 군단에 편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1944년 6월의 노르망디에는 러시아계 부대와 조지아계 부대만이 상륙지점에 배치되어 있던 것으로 확인된다.[2] 따라서 그는 러시아 부대 소속일 가능성이 높으나 사진에서는 소매에 붙어 있어야 할 부대마크(아래 사진 참조)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소속을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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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러시아 군단 부대마크.
2. 행로는?
이들이 누구이며, 또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이들의 최후에 대해 앰브로스 등은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전쟁을 치렀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시 소련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고 주장한다. 소설가 조정래의 소설 <오 하느님>이 이 주장을 따른다.
공산권 붕괴 후 공개된 소련 문서에 따르면 이런 대량처형은 일종의 잘못된 속설이었고 대부분 노동을 위해 굴라크로 이송되었다. 그중 협력사실이 경미한 전직 포로들은 다시 군에 들어가는 것이 허가되었고 대부분 노동부대나 굴라그 경비병으로 차출되었다. 처형된 비율은 의외로 적고 실제 전범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맞는 비율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미국에 남아 여생을 지냈다고 추측한다. 북토피아에서 전자책으로 출간된 장웅진의 <노르망디의 조선인>이라는 소설이 이 주장을 따른다(#).
일단은 이런 사람들이 5~1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페이지를 보면 조선인 출신으로 추정되는 4명의 사진이 있다. 그 밖에도 투르크계 병사들의 사진도 보인다.
사실 연합국은 소련군 전향 포로와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망명한 코사크계, 백계 러시아인들을 소련에 다시 넘긴 사례도 있었다. 특히 동방대대 포로들의 경우에는 동유럽에서 소련군의 보호하에 있던 자국 포로들의 안전확보를 위해 국제조약도 무시한 경향이 있다. 본문 아래의 사례 같은 해피 엔딩이 많기만 바랄 뿐. 사실상 소련군 전향 포로에 대해서 2가지 사례가 모두 공존한다고 보면 된다.
어찌보면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서 기구한 삶을 산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사례로 일본군에서 중국군(팔로군), 북한군을 거쳐 다시 한국군에 복무한 할아버지도 있다(#)
3. 미디어
2005년에 SBS 스페셜에서 "노르망디의 코리안"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에 대한 2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21~22회) 1부 - 독일 군복을 입은 조선인 2부 - 국적 없는 포로
2007년에 발표된 조정래의 역사소설 <오 하느님>은 이 한국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 찾아보면 절판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2009년 <사람의 탈>이라는 제목으로 제목이 변경되어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이를 중심 소재로 삼은 영화 마이웨이(강제규 감독 작품)가 2011년 12월 22일에 개봉했다. 장동건, 오다기리 죠, 판빙빙(范氷氷) 등 캐스팅이 매우 화려하다.
장웅진이 쓴 노르망디의 조선인에서는 심문관인 러시아계 정보장교가 러일전쟁 뒤 자기만 미국으로 보내고 러시아에 남았던 아버지가 재취한 뒤 얻은 딸, 그러니까 배다른 누이동생의 남편이 이 인물인 것을 알아차리고 빼돌리는 식으로 전개했다.
중국의 밀리터리넷에서는 이 사람을 중국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4. 결론
일단 노르망디 캉에 있는 2차대전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설명에는 그가 한국인이라 나와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고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기구한 운명에 처한 역사의 희생자임은 분명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사진과 별개로 국립국악원은 독일에서 독일 인류학자가 채록한 아시아인이 부른 노래를 발굴했는데, 에디슨 원통형 축음기로 녹음한 것이라 앨범화 작업에 시간이 걸렸다. 추적 결과 2차 대전 시기가 아닌 1917년에 녹음한 것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제정 러시아 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독일군에게 포로가 된 연해주 거주 한국인의 음원이었음이 밝혀졌다.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