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대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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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비의 상징인 왕비 적의용 '금수오조원용보흉배'.
왕과 같이 오조룡이다.
1. 개요
2. 역대 왕비(추존 포함[1])
2.1. 기타(존령 · 추폐)
3. 이야깃거리
4.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의 왕비를 정리한 문서.
당연하지만 에밀리 브라운 같은 페이크 왕비는 기재하지 않는다. 후궁(순헌황귀비라든가)은 조선/역대 후궁 문서 참고.

2. 역대 왕비(추존 포함[2])


군주
시호·이름
출생
사망
아버지(본관)
어머니(생모)
능호
비고
목조
효공왕후 이씨
孝恭王后 李氏
?
?
이공숙(평창)
돌산군부인 정씨
안릉(安陵)
익조의 모후, 개국 후 추존되었다가 태종대 추숭
익조
정숙왕후 최씨
貞淑王后 崔氏
?
?
최기열(등주)
?
숙릉(淑陵)
도조의 모후,
개국 후 추존되었다가 태종대 추숭
도조
경순왕후 박씨
敬順王后 朴氏
?
?
안변부원군 박광(문주)
?
순릉(純陵)
환조의 모후, 개국 후 추존되었다가 태종대 추숭
환조
의혜왕후 최씨
懿惠王后 崔氏
?
?
영흥부원군 최한기(영흥)
조선국대부인 이씨
화릉(和陵)
태조의 모후,
개국 후 추존되었다가 태종대 추숭
태조
신의고황후 한씨
神懿高皇后 韓氏
1337.9
1391.9.23
안천부원군 한경(청주)
삼한국대부인 신씨
제릉(齊陵)
조선 개국 전 사망. 정종·태종의 모후
신덕고황후 강씨
神德高皇后 康氏
1356.6.14
1396.8.13
상산부원군 강윤성(곡산)
진산부부인 강씨
정릉(貞陵)
조선 왕조 최초의 왕비.
사후 태종에 의해 예우가 후궁격으로 격하, 현종 때 복권.
정종
정안왕후 김씨
定安王后 金氏
1355.1.9
1412.6.25
월성부원군 김천서(경주)
삼한국대부인 이씨
후릉(厚陵)
조선 왕조 최초의 왕대비
태종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
1365.7.11
1420.7.10
여흥부원군 민제(여흥)
삼한국대부인 송씨
헌릉(獻陵)
양녕대군·효령대군·세종대왕·성녕대군의 모후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비(8남 4녀)
세종
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 沈氏
1395.9.28
1446.3.24
청천부원군 심온(청송)
삼한국대부인 안씨
영릉(英陵)
문종·세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의 모후.
2번째로 많은 자녀를 둔 왕비(8남 2녀)
문종
현덕왕후 권씨
顯德王后 權氏
1418.3.12
1441.7.24
화산부원군 권전(안동)
해주부부인 최씨
현릉(顯陵)
단종의 모후.
세자빈 시절 죽어 문종 즉위 후 추존. 세조에 의해 폐위되었다 중종 때 복위.
단종
정순왕후 송씨
定順王后 宋氏
1440
1521.6.4
여량부원군 송헌수(여산)
여흥부부인 민씨
사릉(思陵)
사상 초유의 왕대비 폐출.
폐비 이후 가장 오래 생존.
숙종 때 복위.
세조
정희왕후 윤씨
貞熹王后 尹氏
1418.11.11
1483.3.30
파평부원군 윤번(파평)
흥녕부부인 이씨
광릉(光陵)
조선 왕조 최초의 수렴청정.
윤여필의 대고모, 윤지임의 증대고모
덕종
소혜왕후 한씨
昭惠王后 韓氏
1437.9.8
1504.4.27
서원부원군 한확(청주)
남양부부인 홍씨
경릉(敬陵)
성종의 모후,
성종 즉위 후 왕대비로 격상, 이후 추존
예종
장순왕후 한씨
章順王后 韓氏
1445.1.16
1461.12.5
상당부원군 한명회(청주)
황려부부인 민씨[3]
공릉(恭陵)
인성대군의 모후
세자빈 시절 사망, 예종 즉위 후 추존
안순왕후 한씨
安順王后 韓氏
1447.3.12
1498.12.23
청천부원군 한백륜[4](청주)
서하부부인 임씨
창릉(昌陵)
제안대군의 모후
성종
공혜왕후 한씨
恭惠王后 韓氏
1456.10.11
1474.4.15
상당부원군 한명회(청주)
황려부부인 민씨
순릉(順陵)
장순왕후의 여동생
폐비 윤씨
廢妃 尹氏
1455
1482.8.16
윤기견(함안)
신씨
회묘(懷墓)
연산군의 모후, 폐비 후 사사됨
정현왕후 윤씨
貞顯王后 尹氏
1462.6.25
1530.8.22
영원부원군 윤호(파평)
연안부부인 전씨
선릉(宣陵)
중종의 모후
연산군
거창군부인 신씨
居昌郡夫人 愼氏
1476.11.29
1536.4.8
신승선(거창)
중모현주 이씨[5]
연산군묘
(燕山君墓)
중종반정으로 폐위.
중종
단경왕후 신씨
端敬王后 愼氏
1487
1557.12.7
익창부원군 신수근(거창)
청원부부인 한씨
온릉(溫陵)
최단 재위 왕비(1주일 후 폐비), 거창군부인의 질녀.
영조 때 복위.
장경왕후 윤씨
章敬王后 尹氏
1491.7.6
1515.3.2
파원부원군 윤여필[6](파평)
순천부부인 박씨[7]
희릉(禧陵)
인종의 모후
문정왕후 윤씨
文定王后 尹氏
1501.10.22
1565.4.6
파산부원군 윤지임[8](파평)
전성부부인 이씨
태릉(泰陵)
명종의 모후, 명종 초 수렴청정
인종
인성왕후 박씨
仁聖王后 朴氏
1514.10.1
1577.11.29
금성부원군 박용(반남)
문소부부인 김씨
효릉(孝陵)
선조 대까지 생존했으나 대왕대비가 되지 못함.
명종
인순왕후 심씨
仁順王后 沈氏
1532.5.25
1575.1.2
청릉부원군 심강[9](청송)
완산부부인 이씨
강릉(康陵)
순회세자의 모후
선조 초기 수렴청정(7개월)
선조
의인왕후 박씨
懿仁王后 朴氏
1555.4.15
1600.6.27
반성부원군 박응순(반남)
완산부부인 이씨
목릉(穆陵)

인목왕후 김씨
仁穆王后 金氏
1584.11.14
1632.6.8
연흥부원군 김제남[10](연안)
광산부부인 노씨
영창대군의 모후
광해군
문성군부인 유씨
文城郡夫人 柳氏
1575
1623.10.8
유자신(문화)
정씨
광해군묘
(光海君墓)
인조반정으로 폐위
원종
인헌왕후 구씨
仁獻王后 具氏
1578.4.17
1626.1.14
능안부원군 구사맹(능성)
평산부부인 신씨[11]
장릉(章陵)
인조의 모후, 남편의 추존으로 격상
인조
인렬왕후 한씨
仁烈王后 韓氏
1594.7.1
1635.12.9
서평부원군 한준겸(청주)
회산부부인 황씨
장릉(長陵)
소현세자·효종의 모후
장렬왕후 조씨
莊烈王后 趙氏
1624.11.7
1688.8.26
한원부원군 조창원(양주)
완산부부인 최씨
휘릉(徽陵)
예송논쟁의 중심 인물
효종
인선왕후 장씨
仁宣王后 張氏
1618.12.25
1674.2.23
신풍부원군 장유(덕수)
영가부부인 김씨[12]
영릉(寧陵)
유일하게 외국 생활을 했던 왕비(청나라 볼모)
현종
명성왕후 김씨
明聖王后 金氏
1642.5.17
1683.12.5
청풍부원군 김우명(청풍)[13]
덕은부부인 송씨
숭릉(崇陵)
숙종의 모후
숙종
인경왕후 김씨
仁敬王后 金氏
1661.9.3
1680.10.26
광성부원군 김만기(광산)[14]
서원부부인 한씨
익릉(翼陵)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1667.4.23
1701.8.14
여양부원군 민유중(여흥)
은성부부인 송씨[15]
명릉(明陵)
한때 폐위 후 생전에 복위
옥산부대빈 장씨
玉山府大嬪 張氏
1659.9.19
1701.10.10
장형(인동)
윤씨
대빈묘
(大嬪墓)
경종의 모후, 한때 왕비였다가 다시 강등.
일반 궁녀부터 시작해서 왕비가 됨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金氏
1687.9.29
1757.3.26
경은부원군 김주신(경주)
가림부부인 조씨
명릉(明陵)

경종
단의왕후 심씨
端懿王后 沈氏
1686.5.21
1718.2.7
청은부원군 심호[16](청송)
영원부부인 박씨
혜릉(惠陵)
세자빈 시절 사망, 경종 즉위 후 추존
선의왕후 어씨
宣懿王后 魚氏
1705.10.29
1730.6.29
함원부원군 어유구(함종)
완릉부부인 이씨
의릉(懿陵)

영조
정성왕후 서씨
貞聖王后 徐氏
1692.12.7
1757.2.15
달성부원군 서종제(달성)
잠성부부인 이씨
홍릉(弘陵)
최장 재위 왕비(33년)
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 金氏
1745.11.10
1805.1.12
오흥부원군 김한구(경주)
원풍부부인 원씨
원릉(元陵)
순조 초기 수렴청정
진종
효순소황후 조씨
孝純昭皇后 趙氏
1715.12.14
1751.11.14
풍릉부원군 조문명(풍양)
완흥부부인 이씨
영릉(永陵)
남편의 추존으로 격상
장조
헌경의황후 홍씨
獻敬懿皇后 洪氏
1735.6.18
1815.12.15
영풍부원군 홍봉한[17](풍산)
한산부부인 이씨
융릉(隆陵)
정조의 모후, 남편의 추존으로 격상
정조
효의선황후 김씨
孝懿宣皇后 金氏
1753.12.13
1821.3.9
청원부원군 김시묵[18](청풍)
당성부부인 홍씨
건릉(健陵)

순조
순원숙황후 김씨
純元肅皇后 金氏
1789.5.15
1857.8.4
영안부원군 김조순(안동)
청양부부인 심씨
인릉(仁陵)
문조의 모후, 헌종, 철종수렴청정
문조
신정익황후 조씨
神貞翼皇后 趙氏
1808.12.6
1890.4.17
풍은부원군 조만영[19](풍양)
덕안부부인 송씨
수릉(綏陵)
헌종의 모후
고종수렴청정, 왕비 중 최장수(83세),
조선 왕조 마지막 대왕대비
헌종
효현성황후 김씨
孝顯成皇后 金氏
1828.3.14
1843.8.25
영흥부원군 김조근[20](안동)
한성부부인 이씨
경릉(景陵)
왕비 중 최단명(16세)
효정성황후 홍씨
孝定成皇后 洪氏
1831.1.22
1903.11.15
익풍부원군 홍재룡(남양)
연창부부인 안씨
조선 왕조 마지막 왕대비[21]
대한제국의 유일한 황태후
철종
철인장황후 김씨
哲仁章皇后 金氏
1837.3.23
1878.5.12
영은부원군 김문근[22](안동)
흥양부부인 민씨
예릉(睿陵)
조선 왕조 마지막 '대비'[23]
고종
명성태황후 민씨
明成太皇后 閔氏
1851.9.25
1895.8.20
여성부원군 민치록[24](여흥)
한창부부인 이씨
홍릉(洪陵)
을미사변 때 일본에 의해 시해
순종
순명효황후 민씨
純明孝皇后 閔氏
1872.10.20
1904.9.28
여은부원군 민태호[25](여흥)
진양부부인 송씨
유릉(裕陵)
대한제국의 최초의 황태자비
태자비 시절 사망, 순종 즉위 후 추존
순정효황후 윤씨[26]
純貞孝皇后 尹氏
1894.8.20
1966.2.3
해풍부원군 윤택영(해평)
경흥부부인 유씨
조선 왕조 마지막 왕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의민태자(이왕 은)[27]
자행비 이씨(이왕비 이씨)[28]
懿愍太子妃 李氏
1901.11.4
1989.4.30
일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왕
이쓰코(伊都子) 비[29]
영원(英園)
일본 황족 출신

2.1. 기타(존령 · 추폐)


군주
추증 작위
시호·이름
출생
사망
아버지(본관)
어머니(생모)
능호
비고
시조고
비(妣)[30]
시조비 김씨
始祖妣 金氏
?
?
김은의(강릉)
?
조경묘
시조고 이한의 부인. 영조 추증
선조고
(先祖考)
비(妣)
선조비 이씨
先祖妣 李氏
?
?
이강제(삼척)
?
영경묘
선조고 이양무의 부인. 고종 추증
선조
(宣祖)
왕비
(王妃)
공성왕후 김씨
恭聖王后 金氏
1553.11.16
1577.6.13
김희철(김해)
정경부인 권씨
성릉
(成陵)
광해군의 모후. 광해군 추존
후궁
(後宮)
공빈 김씨
恭嬪 金氏
성묘
(成墓)
인조 집권 후 삭탈

3. 이야깃거리


  • 조선의 역대 왕비의 특징으로, 성씨 중 이씨가 없다.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건국된 나라로 왕가는 물론 사대부, 일반 중인층에서도 동성동본 간의 혼례를 터부시했기 때문. 왕조 초기에 정통성 강화 목적으로 근친혼이 장려되었던 고려 왕실과 정반대인 셈. 이에 더해 세종 시절, "본관이 다르더라도 성씨가 같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논조의 국시를 내리면서 당시 세자(문종)의 혼례부터는 오얏 이씨 성을 쓰는 규수는 아예 심사 대상에서 빠지게 된 것. 그리고 이 즈음 조선 왕실의 가계도인 선원계보, 종친회인 종정시 등이 체계화되면서 이 불문율은 조선(대한제국)이 문을 닫을 때까지 지켜졌다. 따라서, 조선의 왕비 중 이씨는 추존된 왕인 목조의 효공왕후 이씨와, 본래 일본인이나 남편의 성씨를 따른 자행비[31], 둘 뿐이다.
  • 조선 말기로 오면서 순조, 헌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왕실에 여성 웃어른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철종 대에는 선선선대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선선대 왕비(추존 문조비 신정왕후), 선대 왕비(헌종비 효정왕후)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대왕대비 위 혹은 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단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왕대비 아래에 '대비'라는 단계를 새로 만들었고, 선대 왕비들의 서열이 '대왕대비' - '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왕대비' - '왕대비' - '대비'의 3단계로 재편되었다. 그래서 효정왕후철인왕후는 이전 왕비들이 왕대비에서부터 존봉된 것과는 다르게 대비에서부터 존봉되었다.
  • 추존된 형태를 제외하고 조선 건국 후 최초의 왕비는 신덕왕후 강씨, 최후의 왕비는 순정효황후 윤씨다. 또한 순정효황후 윤씨는 생존한 상태에서 '황후'로 즉위한 유일한 인물이다.
  • 왕세자빈(왕세손빈) - 왕비 - 왕대비 코스를 모두 밟은 왕비는 정종비 정안왕후 김씨와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 인종비 인성왕후 박씨,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 정조비 효의왕후 김씨, 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있다.[32] 순원왕후의 경우 사실상 형식적인 간택을 통해서 세자빈이 될 예정이었다. 당시 정조는 간택 자체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를 이미 세자빈으로 결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혼인을 하기 직전 정조가 사망하고 노론 벽파의 견제로 인해 혼인이 미뤄져서 순조가 즉위한 뒤에 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주도로 '왕비'로 입궁했다.
  • 정성왕후는 왕세제빈, 효의왕후는 왕세손빈 자리를 거쳐 본 유이한 왕비들이다.
  • 혼인 당시 남편과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왕비는 정순왕후 김씨. 남편인 영조와 51세 차이였다.
  • 자식을 가장 많이 낳은 왕비는 원경왕후 민씨로 12명(8남 4녀)을 낳았다. 이 중 장남, 차남, 3남은 군부인 시절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막내아들은 7남인 성녕대군이 태어나고 7년 후에 낳은 아들로 일찍 죽었다. 그 다음은 원경왕후의 며느리이기도 한 소헌왕후 심씨로 10명(8남 2녀).
  • 추존 왕후까지 합친 51명의 조선 왕비들 중 의외로 아들을 3명 이상 낳은 왕비들이 적다. 목조비 효공왕후(6남), 익조비 정숙왕후(8남), 도조비 경순왕후(5남), 태조비 신의왕후(6남)[33], 태종비 원경왕후(8남)[34], 세종비 소헌왕후(8남), 성종비 폐비 윤씨(3남)[35], 연산군비 폐비 신씨(7남)[36], 광해군비 폐비 유씨(3남)[37], 원종비 인헌왕후(3남), 인조비 인열왕후(6남)[38], 효종비 인선왕후(3남)[39], 고종비 명성황후(4남)[40]로 총 13명이며 이들 중에서도 아기 때나 혼인하기도 전에 죽어 군호를 받지 못한 왕자들을 제외하면 8명 밖에 없다.
  • 수렴청정 경험이 있는 왕비는 세조비 정희왕후(성종), 중종비 문정왕후(명종), 명종비 인순왕후(선조), 영조의 계비정순왕후(순조), 순조비순원왕후(헌종, 철종), 익종비이자 헌종의 모후신정왕후 조씨(고종)가 있다.
  • 조선을 떠나서 해외에 나간 경험이 있는 왕비는 공식적으론 대군부인 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적이 있는 효종비 인선왕후가 유일하다. 동북면에 거주했던 추존비 효공왕후 ~ 신의왕후는 동북면이 당시에는 고려의 영토가 아니어서 약간 애매한 편. 그 외엔 본래 일본인 출신이고 오랫동안 일본에서 거주했던 자행비가 있다.
  •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6명을 배출한 청주 한씨[41]와 5명을 배출한 파평 윤씨[42][43]가 있고 그 다음으로는 4명을 배출한 여흥 민씨[44]가 있다.
  • 중전이 된 뒤 폐출되었다가 생존한 상태에서 복위한 왕비는,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가 유일하다. 그 외에 폐출된 왕비 중 복권된 케이스는 모두 죽은 뒤에 추존된 형태.
  • 중전이나 세자빈으로 간택된게 아니라 후궁이나 궁녀 신분이었다가 격상된 유형으로는 세자의 간택 후궁에서 세자빈으로 격상된 후에 추존된 문종비 현덕왕후, 세자의 간택 후궁에서 예종 즉위 후 격상된 안순왕후, 성종의 간택 후궁이었다가 격상된 폐비 윤씨정현왕후, 중종의 간택 후궁에서 격상된 장경왕후, 그리고 장희빈이 있다. 이중 장희빈은 유일하게 간택 후궁도 아니라 궁녀 - 후궁 - 왕비 단계를 거쳤다. 장희빈 이후 숙종이 후궁의 중전 격상을 원천 금지하면서 후궁 출신 왕비는 없다.
  • 서로 3촌 이내의 왕비들로는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언니)와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한씨(동생),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고모)와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 신씨(조카)가 있다.

4. 관련 문서


[1] 생전에 왕비였다가 다시 폐비되고 죽은 후 추존되었다 삭탈된 경우도 추가하였으나, 생전에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다가 왕비로 추존된 사례는 추가하지 않았다.[2] 생전에 왕비였다가 다시 폐비되고 죽은 후 추존되었다 삭탈된 경우도 추가하였으나, 생전에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다가 왕비로 추존된 사례는 추가하지 않았다.[3] 정순왕후 송씨의 생모인 여흥부부인과는 친사촌 관계다.[4] 소혜왕후의 8촌 오빠이다[5] 세종 4남 임영대군의 딸이다.[6] 세조의 장인인 윤번의 증손이다.[7] 박원종의 누이로, 월산대군의 처제이기도 하다.[8] 세조의 장인인 윤번의 현손. 중종의 장인인 윤여필의 재종질(7촌 조카)이다.[9] 5대조가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다[10] 증조부가 김전이고, 종조부가 김안로다.[11] 신립의 여동생이다.[12] 김상용의 딸[13] 대동법 실시에 결정적 역할을 한 명재상 김육의 차남.[14]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형이다.[15] 송준길의 딸이다.[16] 6대조가 명종의 장인 심강이다.[17] 고조부 홍주원은 선조와 인목왕후의 사위다.[18] 고조부가 현종의 장인 김우명이다.[19] 조선에 처음으로 고구마를 소개한 조엄의 손자이다.[20] 김조순의 재종질이다.[21] 따지고 보면 헌종, 철종, 고종 3명의 왕을 모셨으므로 대왕대비에 해당하나, 후술하겠지만 대비 작호가 왕대비 - 대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비 - 왕대비 - 대왕대비의 3단계로 바뀌어 왕대비로 계속 유지됨.[22] 김조순의 재종질이며, 김조근의 8촌 동생이다.[23] 헌종 때까지 '대비'라는 말은 '왕대비'의 준말로 쓰였다. 대비의 정식 명칭이 왕대비였던 것이다. 그런데 철종 즉위 후 왕실 웃어른이 3명(순원왕후 - 신정왕후 조씨 - 효정왕후)이 되면서 대왕대비 위나 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왕대비' 아래에 '대비' 자리를 만들었고, 효정왕후는 '대비'로 존봉되었다. 조선 왕조 최초의 '대비'인 것이다. 또 고종 즉위 후에도 3명의 선대 왕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철인왕후도 효정왕후처럼 '왕대비'가 아닌 '대비'로 존봉되었다. 철인왕후 다음으로는 '대비'로 존봉된 왕비가 없었기에 그녀는 마지막 '대비'가 되었다. 여담으로 성종 때 정희왕후 - 소혜왕후 - 안순왕후의 3대비가 생존해 있었으나, 소혜왕후 - 안순왕후의 관계는 동서지간으로 신정왕후 - 효정왕후처럼 고부지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경우 같은 왕대비지만 서열을 두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24] 숙종의 장인 민유중의 5대손[25] 명성황후와 12촌간이다. 숙종의 장인 민유중의 6대손[26] 순정효황후와 영친왕 부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사망했기에 정식 시호가 없다. 대신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를 쓴다.[27]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의 지위는 황태자였고, 일제강점기 때의 마지막 지위는 왕공족의 수장인 '이왕'이었다.[28] 일본은 부부동성이기 때문에 혼인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이씨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 왕족은 일본 신화상 인간이 아닌 신의 자손이기 때문에 성씨가 없으므로, 한국에 시집온 이상 부부별성을 할 수가 없다.[29] 일본 황족들은 성씨가 없고, 궁호가 성씨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궁호는 궁가의 당주에게만 붙이는 게 원칙이다.[30] 죽은 어머니 비. 왕비(王妃)가 아닌 여자 조상을 높여 부르는 말임.[31]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결혼했기에 좀 복잡하다. 보통은 이름인 이방자라고 불리며, 굳이 조선(대한제국)에 맞추자면 세자빈(황태자비).[32] 다만 실제 사례와는 별개로 '이미지'면에서는 명성왕후만이 세 코스를 모두 밟은 것을 인식할 때가 있다. 정안왕후는 시동생인 태종이, 인성왕후는 시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실권을 장악해서 대비로서 제대로 된 영향력을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효의왕후 역시 시할머니 정순왕후가 실질적으로 내명부 수장의 역할을 하였다. 인선왕후는 형님인 민회빈 강씨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묻히는 감이 있다. 반면 명성왕후는 세자빈으로 시작해서 대비로 죽을 때까지 내내 자기 자리에 맞는 목소리를 낼 실권이 있었다. 그리고 원경왕후는 왕비 - 왕대비 코스만 밟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1400년 2월, 정안군이 정종의 세자가 되면서 그의 부인인 민씨도 세자빈이 되어 '정빈'이라는 별호를 받았다.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원경왕후도 왕세자빈 - 왕비 - 왕대비 코스를 모두 밟은 것.[33] 막내아들 덕안대군은 혼인 전에 요절한 것으로 추정[34] 4명의 아들은 요절[35] 2명의 아들은 요절[36] 전부 요절, 그 중 폐세자 이황은 10살 때 피살당해 시호가 따로 없었고 폐창녕대군은 연산군 시절 어린 나이에 군호를 받았으나 5살 때 피살당함.[37] 2명의 아들은 요절[38] 3명의 아들은 요절, 그 중 용성대군은 5살 때 죽었지만 군호를 받았다.[39] 2명의 아들은 요절[40] 3명의 아들은 요절[41] 태조비신의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비 장순왕후안순왕후, 성종비 공혜왕후, 인조비 인열왕후 [42] 세조비 정희왕후, 성종비 폐비 윤씨정현왕후, 중종비 장경왕후문정왕후 [43] 함안 윤씨가 파평 윤씨의 함안파로 합본되었기 때문에 성종비 폐비 윤씨도 파평 윤씨에 속한다.[44] 태종비 원경왕후, 숙종비 인현왕후, 고종비 명성황후, 순종비 순명효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