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대 왕비
1. 개요
조선의 왕비를 정리한 문서.
당연하지만 에밀리 브라운 같은 페이크 왕비는 기재하지 않는다. 후궁(순헌황귀비라든가)은 조선/역대 후궁 문서 참고.
2. 역대 왕비(추존 포함[2] )
2.1. 기타(존령 · 추폐)
3. 이야깃거리
- 조선의 역대 왕비의 특징으로, 성씨 중 이씨가 없다.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건국된 나라로 왕가는 물론 사대부, 일반 중인층에서도 동성동본 간의 혼례를 터부시했기 때문. 왕조 초기에 정통성 강화 목적으로 근친혼이 장려되었던 고려 왕실과 정반대인 셈. 이에 더해 세종 시절, "본관이 다르더라도 성씨가 같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논조의 국시를 내리면서 당시 세자(문종)의 혼례부터는 오얏 이씨 성을 쓰는 규수는 아예 심사 대상에서 빠지게 된 것. 그리고 이 즈음 조선 왕실의 가계도인 선원계보, 종친회인 종정시 등이 체계화되면서 이 불문율은 조선(대한제국)이 문을 닫을 때까지 지켜졌다. 따라서, 조선의 왕비 중 이씨는 추존된 왕인 목조의 효공왕후 이씨와, 본래 일본인이나 남편의 성씨를 따른 자행비[31] , 둘 뿐이다.
- 조선 말기로 오면서 순조, 헌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왕실에 여성 웃어른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철종 대에는 선선선대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선선대 왕비(추존 문조비 신정왕후), 선대 왕비(헌종비 효정왕후)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대왕대비 위 혹은 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단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왕대비 아래에 '대비'라는 단계를 새로 만들었고, 선대 왕비들의 서열이 '대왕대비' - '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왕대비' - '왕대비' - '대비'의 3단계로 재편되었다. 그래서 효정왕후와 철인왕후는 이전 왕비들이 왕대비에서부터 존봉된 것과는 다르게 대비에서부터 존봉되었다.
- 추존된 형태를 제외하고 조선 건국 후 최초의 왕비는 신덕왕후 강씨, 최후의 왕비는 순정효황후 윤씨다. 또한 순정효황후 윤씨는 생존한 상태에서 '황후'로 즉위한 유일한 인물이다.
- 왕세자빈(왕세손빈) - 왕비 - 왕대비 코스를 모두 밟은 왕비는 정종비 정안왕후 김씨와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 인종비 인성왕후 박씨,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 정조비 효의왕후 김씨, 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있다.[32] 순원왕후의 경우 사실상 형식적인 간택을 통해서 세자빈이 될 예정이었다. 당시 정조는 간택 자체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를 이미 세자빈으로 결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혼인을 하기 직전 정조가 사망하고 노론 벽파의 견제로 인해 혼인이 미뤄져서 순조가 즉위한 뒤에 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주도로 '왕비'로 입궁했다.
- 정성왕후는 왕세제빈, 효의왕후는 왕세손빈 자리를 거쳐 본 유이한 왕비들이다.
- 혼인 당시 남편과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왕비는 정순왕후 김씨. 남편인 영조와 51세 차이였다.
- 자식을 가장 많이 낳은 왕비는 원경왕후 민씨로 12명(8남 4녀)을 낳았다. 이 중 장남, 차남, 3남은 군부인 시절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막내아들은 7남인 성녕대군이 태어나고 7년 후에 낳은 아들로 일찍 죽었다. 그 다음은 원경왕후의 며느리이기도 한 소헌왕후 심씨로 10명(8남 2녀).
- 추존 왕후까지 합친 51명의 조선 왕비들 중 의외로 아들을 3명 이상 낳은 왕비들이 적다. 목조비 효공왕후(6남), 익조비 정숙왕후(8남), 도조비 경순왕후(5남), 태조비 신의왕후(6남)[33] , 태종비 원경왕후(8남)[34] , 세종비 소헌왕후(8남), 성종비 폐비 윤씨(3남)[35] , 연산군비 폐비 신씨(7남)[36] , 광해군비 폐비 유씨(3남)[37] , 원종비 인헌왕후(3남), 인조비 인열왕후(6남)[38] , 효종비 인선왕후(3남)[39] , 고종비 명성황후(4남)[40] 로 총 13명이며 이들 중에서도 아기 때나 혼인하기도 전에 죽어 군호를 받지 못한 왕자들을 제외하면 8명 밖에 없다.
- 수렴청정 경험이 있는 왕비는 세조비 정희왕후(성종), 중종비 문정왕후(명종), 명종비 인순왕후(선조), 영조의 계비정순왕후(순조), 순조비순원왕후(헌종, 철종), 익종비이자 헌종의 모후신정왕후 조씨(고종)가 있다.
- 조선을 떠나서 해외에 나간 경험이 있는 왕비는 공식적으론 대군부인 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적이 있는 효종비 인선왕후가 유일하다. 동북면에 거주했던 추존비 효공왕후 ~ 신의왕후는 동북면이 당시에는 고려의 영토가 아니어서 약간 애매한 편. 그 외엔 본래 일본인 출신이고 오랫동안 일본에서 거주했던 자행비가 있다.
-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6명을 배출한 청주 한씨[41] 와 5명을 배출한 파평 윤씨[42][43] 가 있고 그 다음으로는 4명을 배출한 여흥 민씨[44] 가 있다.
- 중전이 된 뒤 폐출되었다가 생존한 상태에서 복위한 왕비는,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가 유일하다. 그 외에 폐출된 왕비 중 복권된 케이스는 모두 죽은 뒤에 추존된 형태.
- 중전이나 세자빈으로 간택된게 아니라 후궁이나 궁녀 신분이었다가 격상된 유형으로는 세자의 간택 후궁에서 세자빈으로 격상된 후에 추존된 문종비 현덕왕후, 세자의 간택 후궁에서 예종 즉위 후 격상된 안순왕후, 성종의 간택 후궁이었다가 격상된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중종의 간택 후궁에서 격상된 장경왕후, 그리고 장희빈이 있다. 이중 장희빈은 유일하게 간택 후궁도 아니라 궁녀 - 후궁 - 왕비 단계를 거쳤다. 장희빈 이후 숙종이 후궁의 중전 격상을 원천 금지하면서 후궁 출신 왕비는 없다.
- 서로 3촌 이내의 왕비들로는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언니)와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한씨(동생),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고모)와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 신씨(조카)가 있다.
4. 관련 문서
[1] 생전에 왕비였다가 다시 폐비되고 죽은 후 추존되었다 삭탈된 경우도 추가하였으나, 생전에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다가 왕비로 추존된 사례는 추가하지 않았다.[2] 생전에 왕비였다가 다시 폐비되고 죽은 후 추존되었다 삭탈된 경우도 추가하였으나, 생전에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다가 왕비로 추존된 사례는 추가하지 않았다.[3] 정순왕후 송씨의 생모인 여흥부부인과는 친사촌 관계다.[4] 소혜왕후의 8촌 오빠이다[5] 세종 4남 임영대군의 딸이다.[6] 세조의 장인인 윤번의 증손이다.[7] 박원종의 누이로, 월산대군의 처제이기도 하다.[8] 세조의 장인인 윤번의 현손. 중종의 장인인 윤여필의 재종질(7촌 조카)이다.[9] 5대조가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다[10] 증조부가 김전이고, 종조부가 김안로다.[11] 신립의 여동생이다.[12] 김상용의 딸[13] 대동법 실시에 결정적 역할을 한 명재상 김육의 차남.[14]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형이다.[15] 송준길의 딸이다.[16] 6대조가 명종의 장인 심강이다.[17] 고조부 홍주원은 선조와 인목왕후의 사위다.[18] 고조부가 현종의 장인 김우명이다.[19] 조선에 처음으로 고구마를 소개한 조엄의 손자이다.[20] 김조순의 재종질이다.[21] 따지고 보면 헌종, 철종, 고종 3명의 왕을 모셨으므로 대왕대비에 해당하나, 후술하겠지만 대비 작호가 왕대비 - 대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비 - 왕대비 - 대왕대비의 3단계로 바뀌어 왕대비로 계속 유지됨.[22] 김조순의 재종질이며, 김조근의 8촌 동생이다.[23] 헌종 때까지 '대비'라는 말은 '왕대비'의 준말로 쓰였다. 대비의 정식 명칭이 왕대비였던 것이다. 그런데 철종 즉위 후 왕실 웃어른이 3명(순원왕후 - 신정왕후 조씨 - 효정왕후)이 되면서 대왕대비 위나 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왕대비' 아래에 '대비' 자리를 만들었고, 효정왕후는 '대비'로 존봉되었다. 조선 왕조 최초의 '대비'인 것이다. 또 고종 즉위 후에도 3명의 선대 왕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철인왕후도 효정왕후처럼 '왕대비'가 아닌 '대비'로 존봉되었다. 철인왕후 다음으로는 '대비'로 존봉된 왕비가 없었기에 그녀는 마지막 '대비'가 되었다. 여담으로 성종 때 정희왕후 - 소혜왕후 - 안순왕후의 3대비가 생존해 있었으나, 소혜왕후 - 안순왕후의 관계는 동서지간으로 신정왕후 - 효정왕후처럼 고부지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경우 같은 왕대비지만 서열을 두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24] 숙종의 장인 민유중의 5대손[25] 명성황후와 12촌간이다. 숙종의 장인 민유중의 6대손[26] 순정효황후와 영친왕 부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사망했기에 정식 시호가 없다. 대신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를 쓴다.[27]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의 지위는 황태자였고, 일제강점기 때의 마지막 지위는 왕공족의 수장인 '이왕'이었다.[28] 일본은 부부동성이기 때문에 혼인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이씨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 왕족은 일본 신화상 인간이 아닌 신의 자손이기 때문에 성씨가 없으므로, 한국에 시집온 이상 부부별성을 할 수가 없다.[29] 일본 황족들은 성씨가 없고, 궁호가 성씨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궁호는 궁가의 당주에게만 붙이는 게 원칙이다.[30] 죽은 어머니 비. 왕비(王妃)가 아닌 여자 조상을 높여 부르는 말임.[31]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결혼했기에 좀 복잡하다. 보통은 이름인 이방자라고 불리며, 굳이 조선(대한제국)에 맞추자면 세자빈(황태자비).[32] 다만 실제 사례와는 별개로 '이미지'면에서는 명성왕후만이 세 코스를 모두 밟은 것을 인식할 때가 있다. 정안왕후는 시동생인 태종이, 인성왕후는 시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실권을 장악해서 대비로서 제대로 된 영향력을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효의왕후 역시 시할머니 정순왕후가 실질적으로 내명부 수장의 역할을 하였다. 인선왕후는 형님인 민회빈 강씨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묻히는 감이 있다. 반면 명성왕후는 세자빈으로 시작해서 대비로 죽을 때까지 내내 자기 자리에 맞는 목소리를 낼 실권이 있었다. 그리고 원경왕후는 왕비 - 왕대비 코스만 밟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1400년 2월, 정안군이 정종의 세자가 되면서 그의 부인인 민씨도 세자빈이 되어 '정빈'이라는 별호를 받았다.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원경왕후도 왕세자빈 - 왕비 - 왕대비 코스를 모두 밟은 것.[33] 막내아들 덕안대군은 혼인 전에 요절한 것으로 추정[34] 4명의 아들은 요절[35] 2명의 아들은 요절[36] 전부 요절, 그 중 폐세자 이황은 10살 때 피살당해 시호가 따로 없었고 폐창녕대군은 연산군 시절 어린 나이에 군호를 받았으나 5살 때 피살당함.[37] 2명의 아들은 요절[38] 3명의 아들은 요절, 그 중 용성대군은 5살 때 죽었지만 군호를 받았다.[39] 2명의 아들은 요절[40] 3명의 아들은 요절[41] 태조비신의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비 장순왕후와 안순왕후, 성종비 공혜왕후, 인조비 인열왕후 [42] 세조비 정희왕후, 성종비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중종비 장경왕후와 문정왕후 [43] 함안 윤씨가 파평 윤씨의 함안파로 합본되었기 때문에 성종비 폐비 윤씨도 파평 윤씨에 속한다.[44] 태종비 원경왕후, 숙종비 인현왕후, 고종비 명성황후, 순종비 순명효황후